〈 143화 〉 강림제.(10)
* * *
알렉세이의 얼굴이 경악에 휩싸였다.
항상 건치를 드러내며 사람 좋은 미소만 보여주던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 것을 보는 건 꽤나 신기한 기분이었다.
이게 그 ‘내가 상대의 감정을 조종할 수 있다!’ 고 할 때의 감정인 걸까?
그런 생각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뭐하고 있어? 빨리 루나 데리고 나가라니까?”
넌지시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을 벌일지 알려줬는데도 어버버하며 가만히 있는 알렉세이.
덩치도 큰 게 피칠갑이 되어있는 모습으로 저러니까 보기 흉하다.
“그... 아무리 그래도 천신께서 바라보고 계신데...”
우물쭈물하며 알렉세이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흘낏거리며 어딘가를 바라보길래 그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아까까지는 뒤집어져 있던 천신의 동상이 지금은 똑바로 서 있었으며, 동상의 눈은 정확히 우리가 있는 장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그니타에게 저 동상에 대해서는 안 물어봤네.
그녀라면 분명 알고 있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만 실레스틴이 겪었던 고통이 고스란히 떠오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그 조금을 참았더라면 스승에 대한 행방을 알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감정 조절엔 자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 멀은 것 같다.
뭐, 이미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니 신경 쓰지 말도록 하고, 알렉세이가 저렇게 내키지 않아하는 얼굴인 것도 이해가 간다.
그는 독실한 천신교의 신자. 동상이기는 해도 천신이 보는 곳에서 천신을 향한 기도를 올리는 곳인 예배당을 부숴 신전 지하로 가는 길을 개통하겠다는 내 계획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거겠지.
하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나는 알렉세이나 다른 여타 성국 사람들과는 다르게 천신교 신자가 아니니까.
그러니 예배당을 부수는 것에 있어 하나도 거리낄 게 없다.
애초에 내가 그런 것을 신경쓰고 있었다면 성녀를 만나기 전에 예배당을 어지럽히는 짓도 하지 않았겠지.
그리고 괜히 돌아서 갔다가 늦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괜히 돌아서 갔다가 늦으면 책임질래?”
“그, 그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현성님의 속도라면 늦기 전에 도착할 수 있지 않으신가 해서...”
알렉세이의 말대로, 최고 속도의 나라면 신전의 지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 혼자일 때의 이야기였다.
“나 혼자였다면 네 말대로 해도 됐겠지.”
“예?”
알렉세이가 이해하지 못 했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하지만 나는 구태여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답을 대신해 줄 녀석들이 곧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나.
둘.
셋.
쾅!!
내가 예상한 시간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굉음과 함께 무언가가 예배당의 천장을 뚫었다.
“으악?!”
갑작스런 굉음에 알렉세이의 비명은 덤이었다.
“미안. 모처럼 성역에서 쉬고 있는데 불러서.”
천장 붕괴의 여파로 인해 일어난 먼지 구름 속에서 먼지 구름 너머에 있을 그녀들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역에서 힘을 회복하던 중에 언니들께서 싸우고 계시다는 게 느껴져서 마스터께 보고를 드리고 도우러 가려던 참이었으니까요. 일단 마스터의 존안을 뵙는데 방해되니 이 먼지들부터 치워야겠군요.”
펄럭이는 날갯짓소리가 먼지 구름 너머에서 들려옴과 동시에 시원한 바람이 나를 덮쳤다.
후웅!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자욱하게 일어났던 먼지 구름들이 저 멀리 흩어진다.
먼지 구름이 완전히 사라지자, 내 눈에 방금 전 천장을 뚫고 날아온 그녀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스포트라이트 마냥 각자의 자리에서 태양빛을 받아 반짝이는 황금빛의 물결과 하얗게 빛나고 있는 경갑옷.
생머리, 트윈 테일, 포니테일 등 각양각색의 머리 스타일을 한 일곱 명의 발키리 자매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발키리 일동. 마스터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 * *
“네. 확실히 이 밑에서 느껴집니다.”
거사를 치르기 전에 혹시나 알렉세이의 근육 레이더가 잘 못 됐을까 엘렌에게 확인시켜보니, 맞다고 대답하며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근육 레이더는 정확합니다!”
자신의 레이더가 의심받은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렉세이가 항의했다.
“넌 빨리 루나 데리고 가라니까?”
아까부터 가라고 했는데 왜 안 가고 저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가씨를 데리고 어디로 가면 되는지 말씀을 안 해주셨는데요?”
아, 그렇구나.
루나를 데리고 나가라는 말만 했지 루나를 데리고 어디로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것도 다 이그니타가 내 정신을 흔들어놨기 때문이다.
하여간 도움이 하나 빼곤 안 되는 녀석이다.
“일단 말하기 전에... 엘렌.”
저대로 갔다간 괴상망측한 알렉세이의 모습에 다른 애들이 기절하거나 적으로 간주할 게 분명했기에, 엘렌에게 알렉세이를 치료해주라는 신호를 보냈다.
“네, 마스터.”
엘렌이 알렉세이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팔에 오른손을 가져다대며 ‘힐링’을 영창했다.
하얀 빛이 엘렌의 손에서 번쩍였고, 그 번쩍임이 지속됨에 따라 알렉세이의 몸에 나 있던 상처가 말끔히 사라졌고, 피칠갑이던 그의 몸도 목욕이라도 한 듯 깨끗해졌다.
이제야 좀 볼 만 하네. 아까는... 어우.
괴상망측이라는 단어가 부끄러울 정도의 모습이었던 그의 피투성이 근육들을 생각하자 몸이 부르르 떨린다.
“아... 감사합니다.”
“뭘요.”
싱긋. 미소를 지은 엘렌이 다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걔 데리고 천신의 눈으로 가 있어. 아, 들어가자마자 공격받기 싫으면 들어가기 전에 노크는 꼭 하고.”
아무리 피투성이에서 깨끗한 몸으로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근본이 흉측한 근육질이니만큼 한창 자라나는 10대 소녀들에겐 크나큰 충격을 안길 수가 있었기에, 천신의 눈에 들어가기 전에 노크를 꼭 하라며 당부해주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루나 아가씨를 모셔다 드리고 저도 곧 도우러 올 테니...”
“아니. 넌 그대로 거기에 있어.”
“예?”
루나를 업고 뛰어 나가려던 알렉세이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었다. 이제는 깨끗해진 그의 얼굴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듯한 의문이 담긴 눈이 나를 향한다.
“네가 도움이 안 돼서 그러는 건 아니고, 나와 발키리들이 전부 지하로 가기 때문에 애들을 지켜줄 사람이 없어서 그래. 내가 이 상태에서는 소환 마법을 사용하지 못 하거든. 애들한테 무리가 갈 까봐.”
“그 말씀은... 저보고 다른 분들을 지키라는..? 그보다 무리가 간다는 뜻은...”
“대답할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가.”
지금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시간에도 지하에서는 마신의 심장을 두고 싸움이 한창일 것이다.
엘렌이 말했던 그녀의 언니들, 그러니까 다른 발키리 자매들이 싸우고 있다는 뜻은 필시 교황, 그 영감도 이 밑에서 싸우고 있다는 뜻.
4년 전 앨리아를 두고 싸운 대결에서 치명상을 입어 제대로 된 힘을 내지 못 하는 영감이라 아주 조금이지만 걱정이 되었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지하로 내려가 그들을 도와야 했다.
“아, 알겠습니다!”
쿵쿵쿵쿵!
언제나처럼 땅이 울리는 발소리를 내며, 알렉세이가 예배당에서 떠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듣고 나서, 나는 엘렌에게 물었다.
“엘렌. 혹시 밑에서 네 언니들이 싸우고 있는 상대가 누군지도 알겠어?”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듯이,
“잠시만 확인해보겠습니다. 얘들아!”
그렇게 말한 엘렌이 우리의 뒤에 있던 다른 발키리 자매들을 불렀다.
네, 언니! 라고 활기차게 대답한 나머지 자매들이 엘렌의 주위를 빙 둘러 쌓았고, 그 중심에서 엘렌이 한 쪽 무릎을 굽히며 예배당의 바닥에 오른손을 가져다댔다.
이어, 그녀의 손에서 황금색의 빛이 번쩍인다.
마치 무언가를 느끼려는 듯 눈을 감고 있는 걸 보니 탐색 마법의 일종인 것으로 보인다.
잠시 후, 한숨을 내쉰 엘렌이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싸움이 꽤 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제대로 된 파악이 어렵습니다. 다만, 땅, 물, 불, 얼음, 번개, 어둠 등 갖가지 마법들의 기운은 느껴집니다. 하지만...”
“왜, 무슨 문제 있어?”
“그게, 마나의 흐름을 따라 가봤는데, 마법이 사출되고 있는 곳에는 생명반응이 느껴지지 않아가지고...”
생명 반응이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 각양각색의 마법들이 쏘아지고 있다고?
“언데드에 마법 계열인가?”
“아무래도 그런 거 같습니다.”
언데드에 마법 계열에 교황과 발키리들을 전부 상대할 수 있는 녀석이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한 명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생각하고 있는 녀석이 맞다면,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았다.
“언데드가 성국의 신성 결계를 버틸 수 있다고요?”
가능하냐는 듯 발키리 자매 중 둘째이자 총 여덟째인 엘리나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땅 속 깊은 곳이라 그런 게 아닐까? 아니면, 성국의 밖에서 온 게 아니라 성국 내에서 소환됐을 수도 있고.”
더 이야기가 진행됐다가는 진짜로 늦을 수도 있었기에.
“아마 마신의 심장을 노린다던 페레우스가 모종의 방법으로 상대를 소환한 거겠지. 그보다, 슬슬 가자.”
적당히 끊었다.
내 말에 발키리 자매들이 네! 라고 대답했고, 일제히 날개를 펄럭이며 공중으로 날아올라 각자의 자리를 잡았다.
시작하기 전에, 저 멀리 있는 천신의 동상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왠진 모르겠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마스터! 결계 다 펼쳤어요!”
“그래, 고맙다.”
혹시나 예배당을 부숨으로서 그 진동이 축제의 장소까지 전해지면 안 됐기에, 자매들에게 부탁을 해 결계를 펼쳐달라고 했던 것이다.
“후...”
그 이후 다시 각자의 자리를 잡는 발키리들을 보며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스승의 금지 마법 제 6번.”
성녀의 잔소리 코스가 예약된 마법을 영창하며, 그대로 예배당의 바닥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 * *
한편, 신전의 지하에서는.
“아쉽군, 아쉬워. 전력일 때의 자네와 붙어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고대 리치, 칼바리아가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가쁜 숨을 내쉬며 심장 부근을 움켜쥐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노인을 바라보며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의 근처에는 여기저기 널브러진 발키리 자매들이 있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몸을 까딱할 힘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의 하얀 날개는 여기 저기 그을리거나 얼려져 원래의 하얀 빛을 잃은 상태였고, 빛의 창들은 반쪽으로 나뉘어져 여기 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파괴된 기둥들의 잔해나 벽면에 긁혀있는 성흔들,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불꽃이나 구석에 박혀 있는 얼음 덩어리 등이 방금까지 있었던 싸움의 여파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한 편으론 고맙기도 하군. 자네가 약해진 덕에 지금의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된 거니까. 자네를 이렇게 만들어준 자들에겐 감사해야겠어.”
그럼, 슬슬 마무리를 지어볼까.
그렇게 말한 칼바리아가 교황을 향해 뼈로 이루어진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앞에 작은 검은 구체가 생성되더니 회전하면서 점차 그 크기를 키우기 시작했다.
저것을 맞는다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소멸해 버릴 것이다.
“교, 교황 성하...”
브륀힐데가 남은 힘을 쥐어짜내 힘겹게 손을 뻗어봤지만 그에게는 닿지 않았다.
“잘 가게나.”
그렇게 칼바리아가 구체를 손에서 놓아 보내려던 찰나.
툭.
그의 손등에 떨어진 무언가가 그의 영창을 멈추게 했다. 그로 인해 구체가 팟. 하고 검은 빛과 함께 소멸되었다.
“음?”
뭔가 싶어 손등을 보자, 작은 흙덩이였다.
어째서 흙덩이가 자신의 손에 떨어진 걸까. 의문을 갖는 칼바리아.
‘방금 전의 싸움으로 천장에 금이 갔나?’
라고 생각했지만, 마신의 심장을 봉인하는 장소를 지하에 만들어 놓고서 천장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툭. 투둑. 투두두둑.
계속해서 흙덩이들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쿠르르르.
천장이. 아니. 땅이 울리고 있었다.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느끼는 칼바리아.
‘뭔가... 온다..?’
그의 눈에서 타오르고 있는 무지갯빛 불꽃이 천장을 향하며 이리저리 일렁였다.
그리고 이내.
콰과과광!!
천장이 완전히 무너지며 흙더미와 예배당의 잔해더미가 쏟아져 내렸다.
“큭..!”
가만히 있다간 깔릴 게 분명했기에, 칼바리아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보호막을 펼쳤다.
흙더미와 잔해더미가 내려앉은 여파로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 속을 응시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칼바리아.
그리고 이내, 흙먼지 속에서 번쩍이는 자색의 빛이 눈에 들어왔다.
‘온다..!’
슈아악!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를 뚫고 나온 것은 한 흑발의 청년이었다.
“네, 네놈은..!”
상대를 확인한 칼바리아의 무지갯빛 불꽃이 더욱 크게 타올랐고.
그런 그를 보며.
“오랜만이다, 사골!”
어느새 칼바리아의 지근거리에 도착한 흑발의 청년, 현성은 반가움을 담아 주먹을 내질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