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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떠돌이들-1화 (프롤로그) (1/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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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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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반복된다. 델피 대학의 교수 알렉산더 카의 말이다.

"그대들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하여, 우리가 그대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지어다.

강자의 역할은 약자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것이고, 약자의 역할은 그 반대되는 것일지니,

지금 이 순간에 우리의 자비를 받아들여 아국의 무력을 이미 예정된 일을 위해 과시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그와 같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도 더 전에 있었던 일이다. 일명 '아이카나 회담'이라고 불리는 이 자리에서 고대에 융성했던 키트라 제국은

중립국이던 아이카나에 제국군을 진공 시켜 회담 자리에서 자신들의 속국이 될 것을 강요하며 위와 같은 발언을 한 것이 기록에 남아있다.

제국에 비해 그 세력이 미력하기 짝이 없었던 아이카나의 국민들은 제국군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용감히 싸웠으나,

위 키트라인의 말대로 그들의 패배는 필연적인 것이었고, 아이카나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노예로 팔려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최소한의 명분조차 도외시하고 자그마한 도시국가인 아이카나를 침략한 제국은 세상의 강한 반발에 맞부딪히게 되었다.

특히 제국과 대립하던 일곱 왕국이 키트라 제국을 강하게 비판하며 연합을 결성했던 것이다.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었는데, 일곱 왕국은 공통의 적이었던 제국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서로 반목에 반목을 거듭하던 차에 이러한 연합이 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제국의 황제였던 키트라 16세는 일곱 왕국의 연합에 코웃음을 치며 정복 전쟁을 개시하였으나, 사서는 이 전쟁의 결과를 제국의 비참한 패배라 기록하고 있다.

이를 어떤 사가는 각기 위대한 군주였던 일곱 왕국의 군주들의 능력 때문이라 하고,

또 어떤 사가는 명분 없는 정복전으로 인해 제국이 민심을 잃어 분열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어찌 키트라 제국과도 같은 대국가가 멸망한 이유가 저 두 가지 이유들 중 오직 하나 때문이랴. 그러나 대다수는 일곱 군주의 위업만을 칭송했고,

그들이 심판자라는 뜻인 '아네르'로 불린다는 사실은 이제 와선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된다.

키트라 제국이 멸망하고 그 땅을 분할한 일곱 왕국은 위대한 아네르들이 하늘의 별이 되자 그 의기는 어디로 사라졌냐는 듯 다시 쟁패를 벌였고,

분열의 시대가 찾아오게 되었다. 공통의 적이 없으면 힘을 합치지 못하는 것은 이 세상의 법칙이련가.

여기서 다시 역사는 반복된다.

신? 아네르들이 다시금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들의 행적은 독자 여러분들도 익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바,

이 책에서는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와 사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부분에 집중할 것이다.

고대 아네르들은 각자가 한 왕국의 수장이었고 평등한 연합을 주창하였으니 그중에서 첫째 가는 이가 누구인지 말해보라 하면 말하는 이마다 각자 다른 대답을 내겠으나,

우리 세대 아네르의 수장을 꼽는다면 백이면 백 서창공을 말하리라.

영웅 무리의 수장에게 우리는 자비나 용기와 같은 덕목을 기대하고는 한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자비와 용기를 갖춘 영웅이었을까?

그는 진정으로 우리가 바라마지않던 그런 영웅이었는가? 이에 대해 자세한 것은 본문에서 말하겠지만...

­루이스 토크빌 저, [아네르도 사람이야 사람] 머리말 中­

"이야, 진짜 완전 개새끼들이네. 아니 이쪽에서 개수작 안 부렸으면 저쪽에서도 우리한테 지랄 떨면 안 된다는 건 기본적인 거 아냐?"

"사실 멜로스는 스파르타와 완전히 끈끈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명목상 동맹국이긴 했으니까요.

해양 세력인 델로스 동맹의 수장인 아테네로선 자기세력에 들어오지 않은 멜로스가 눈엣가시였을 테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저씨는 아테네가 민주주의 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거 완전히 호로자식들의 소굴이었네."

노가다 김씨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아테네를 욕했다. 왜 이러한 호칭으로 불리는가 하니,

나이 사십 먹은 노총각으로 지내는 동안 생계유지 수단이라곤 막노동뿐인 그의 전적 때문이었다.

물론 그를 노가다 김씨라고 호칭하는 건 그와 비슷하거나 더 나이를 먹은 사람들 한정이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김 아저씨라고 부르는 게 보통이었다.

"민주주의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 그 자체를 의미하진 않으니까요. 현대 국가의 민주주의와 고대 아테네식 민주주의가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아테네는 민주적 방식으로 멜로스 침략을 선택한 거죠. 이걸 멜로스의 대화라고 불러요."

청년은 노가다 김씨처럼 소매로 얼굴의 땀을 닦으며 계속 입을 열었다.

땡볕 아래 두 남자는 커다란 곡괭이를 바닥에 세워놓고 거기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었다.

"이 멜로스의 대화는 국제 외교의 현실주의적 관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인데..."

"학생. 아저씨는 무식해서 현실주의적 관점이 무슨 말인지 잘 몰라."

노가다 김씨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청년도 피식, 웃었다. 딱히 상대방을 비웃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는 다른 누군가를 비웃을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노가다 김씨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국가 간 관계는 힘센 나라가 장땡이라, 이거죠.

법이고 뭐고 강대국의 말이 곧 약소국에게는 법이라는..."

"아... 그래그래. 아저씨도 딱 이해가 되네. 하긴 맞기 싫으면 주둥아리 간수 잘 해야지.

시키는 거 잘 따르고. 에휴... 씨발."

"..."

"학생만 보면 아저씨가 참 안타까워. 아저씨야 어차피 배운 것도 없고, 버는 족족 술값으로 써버리거든.

흔히 말하는 엠창 인생이지. 그런데 학생은 아저씨 같은 사람보다 훨씬 더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일 텐데..."

"글쎄요. 그거야 가 봐야 알죠. 아직 대학 졸업도 못 했는데."

"아저씨가 아무리 무식하지만 그건 좀 아닌데. 학생도 내 별명이 뭔지 알지?

노가다 김씨야, 노가다 김씨. 나이 사십 먹고 고작 얻은 별명이라곤 이거야.

학생은 아니잖아. 어렸을 때부터 신동 소리 들으면서 학교 다녔을 텐데..."

"딱히요."

"에이... 서울대 아니야, 서울대. 응? 정치외교학과랬나?"

"학부요."

"뭐 어쨌든. 정치든 외교든 둘 다 높으신 분들이 하는 거 아니야? 나 같은 무지렁이야 서울대는 들어가지도 못했지만, 학생은 다르잖아."

"서울대라고 뭐 다른가요. 다른 학교랑 별다를 바 없어요. 강의 째고, 교수 뒷담까고,

시험 기간에 술이나 마시러 다니고, 전공 공부가 아니라 맛집 리스트 공부하고..."

"그래도 학생은 성실했을 것 같은데."

"그랬는진 모르겠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지. 책이 아니라 곡괭이 잡고 있는 시점에서 학교 어딜 나왔든 똑같죠."

"아휴..."

청년은 말하면서 인상을 구겼고, 노가다 김씨는 한숨만 내쉬었다.

청년이 얼핏 들은 이야기로, 평소 '좆같다'라는 말은 많이 쓰지만 그 말의 진짜 의미는 군대에 가서야 알게 된다고 하던데...

그는 미필이었지만 그 어느 군필도 '좆같다'라는 뜻이 어떤 뜻인지 그보다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서 어느 이들은 이 둘처럼 땅에 세운 곡괭이를 지지대 삼아 몸을 기대었고, 또 어느 이들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자세는 각기 달랐지만 전부 썩어가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은 동일했다.

차라리 담배라도 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청년은 입이 바싹 말라 미칠 지경이었다.

더워서 그런 것도 있지만, 금단 증상 때문에도 그랬다.

하루에 한 갑은 기본으로 피워대던 그가 이곳에 끌려오고 두 달 동안 핀 담배라고는 스무 까치를 겨우 넘기는 정도였다.

좆같았다. 군대? 차라리 청년 입장에서 군대는 호캉스나 다름없었다.

군대는 2년만 있으면 나갈 수라도 있지, 지금 이곳은 2년이 아니라 20년이 지난다 하더라도...

[깡 깡 깡 깡 깡!]

숟가락으로 프라이팬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 그래도 썩어가던 사람들의 표정이 한 층 더 썩어들어갔다.

노가다 김씨도 침을 탁, 뱉으며 욕설을 했다.

"니미럴 놈들... 휴식시간이랍시고 한 10분 줬나? 개새끼들... 곡괭이로 대가리를 확 찍어벌라."

"같이 하실래요? 일단 십장 그 십장 새끼들 먼저."

"말이 그렇다는 거지, 씨발."

"어이!"

그들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씨와 청년은 짜증 나는 얼굴로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봤다.

목소리를 낸 남자는 밀짚모자를 쓰고 한 손으로는 허리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김 상! 헛소리 말고 일이나 해! 서 상도 마찬가지! 시간이 됐으면 일을 해야지!"

"아유, 저걸 확 그냥..."

노가다 김씨가 주먹을 쥐었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김씨는 순순히 곡괭이를 들었으며, 그건 청년이라고 다르진 않았다.

서창공.

현 나이 20세.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2학년.

현재 이세계에 끌려와 노천 탄광의 노예로 일하는 중.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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