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탈출을 꿈꾸는 노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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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기쁨, 슬픔, 두려움, 분노, 사랑, 즐거움, 증오 등...
이러한 감정들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비 갠 뒤 하늘의 구름 사이로 비치는 빛을 보고 감동을 느낀 적이 있는가?
연인과 서로 끌어안고 체온을 나누며 이 세상 전부를 덮을 만큼의 행복을 느낀 적이 있는가?
그런 사람들은 필자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하지만 동시에 감정은 우리의 삶을 그르치게도 만든다.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뻔한 파멸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의 사례는 역사책을 펴기만 하면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가슴으로는 이해할지언정,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그들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감정 때문에.
냉정. 냉정은 우리를 그러한 감정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덕목이다.
위대한 이들은 항상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냉정의 보좌를 받아 최선의 선택을 한다.부모의 원수와 협력하여 거악을 단절한 영웅의 이야기, 수백 년을 서로 반목하던 두 나라가 힘을 합쳐 번성하게 된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냉정을 선망한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 바로 냉정이다.하지만 냉정은 지나치면 냉혹이 된다. 냉정이 냉혹이 되면, 그 모든 장점은 무위로 돌아간다.
극도로 이성적인 판단은 극도로 감정적인 판단과 통한다.
어째서 그런가? 우리 인간은 이성과 감정의 통제를 동시에 받기 때문이다.
그러니 냉정한 판단을 내리길 좋아하는 이들이여. 머리만으로 생각하길 좋아하는 이들이여. 주의할지어다.
그대들이 머리를 차갑게 하는 만큼이나 가슴을 따듯이 할지어다.
그렇지 않으면 냉정했던 그대들은 냉혹이라는 감정에 휘둘리는 자가 되리라.
냉정의 칼날로 우리 인간을 도려내고 또 도려내면 최후에 남는 것은 무엇이 있겠는가... 제임스 엘린 저, [아네르의 덕목에 관하여] 中
사정은 가지각색이었다.
누군가는 수업 시간에 졸다가, 누군가는 집에서 낮잠을 자다가, 누군가는 비행기 안에서 자다가.
그중 첫 번째 공통점. 다들 마지막으로 하던 행동은 수면이었다.
두 번째 공통점. 일어나 보니 다른 세계에 있었다.
지구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건물들은 목조, 혹은 석재 건물이었으며 전등 대신 등불로 주위를 밝혔다.
광산의 관리인들은 천으로 만든 튼튼한 옷 위에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중세를 다루는 영화 속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끌려온 사람들 이야기를 하자면, 개중에는 한국인도 있었고, 일본인도 있었고, 중국인도 있었고... 국적 또한 다들 달랐다.
확실한 건, 그들은 지금 다른 세상에서 원하지도 않는 광부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원해서 하는 일도 하다가 보면 짜증이 나기 마련인데, 자다가 깨어나니 광산 노동을 시작하게 된 이들은 얼마나 불만이 많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그 불만이 어떤 폭력적인 행동의 단초가 되기도 전에 굴복을 강요당했다.
아주 쉽고 빠른 방법으로. 옆에서 개기던 사람이 죽도록 얻어맞으면 있던 불만이 없는 불만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자다가 일어나 보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다른 세상에 와있었고, 손에는 곡괭이가 쥐어진다.
불만을 표하면 곳곳에 배치된 떡대들에게 얻어맞는다.
노동자들은 상황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수용을 강요당하는 판이었다.
그렇게 굴종은 학습된다.
이곳에 끌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는 사업가였고, 누군가는 학생이었고, 누군가는 방구석에서 부랄을 긁는 백수였겠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광산의 노예일 뿐이었다.
지금 끌려온 이에겐 먼저 끌려온 이들이 이런 상황을 설명하지만, 듣자마자 '아 그렇군요. 이제부터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하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결국엔 다들 문제없이 노예화가 되었다. 문제는 오직 노예가 되기까지의 시간뿐이었다.
"좆같네, 씨발."
얼마 전까지 대학생이었던 서창공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처음에는 일종의 불만분자였지만, 자기 옆에 있던 군복 차림의 사람이 죽도록 얻어맞는 것을 보고선 곧 반항할 마음을 접었더랬다.
도대체 이놈들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자신들을 이 세상으로 부른 것이 이놈들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왜 생면부지인 자신들을 이렇게 심하게 부려먹는지도 모른다.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겐 대답 대신 몽둥이가 날아왔다.
창공이 생각하기엔 그렇다고 그들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감시자들은 욕을 들으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응징의 철퇴를 가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국적이 다른 지구인들끼리도 자연스럽게 말이 통하는 걸로 봐선 언어적 능력에 어떠한 조작이 가해진 것 같았다.
마치 마법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 마법에 낭만과 신비는 전혀 없었다.
매일 죽도록 일하는 노예 신세인데 낭만은 무슨 낭만이란 말인가.
"아우... 허리 아파."
열심히 곡괭이를 내리치던 창공은 허리에 손을 짚고 몸을 쭉 폈다.
그들을 감시하는 떡대들은 농땡이를 피울라치면 바로 몽둥이를 들고 달려왔지만, 잠깐 허리를 펴는 정도로는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감사해야 하나? 창공은 실없는 생각을 하고선 피식거렸다.
"창공아. 저 새끼들 너 째려본다."
"에휴."
창공의 옆에서 일하던 군복 차림의 사내가 넌지시 눈치를 주자, 창공은 한숨을 쉬고선 다시 곡괭이질을 시작했다.
어택. 그것이 군복 사내의 이름이었다.
듣기로 대한민국 해군 중사로 막 진급한 택은 사무실에서 졸다 깨어나 보니 이곳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용감하게 항의한 대가로 미친 듯이 얻어맞았었다.
주변 사람들은 병신이 되던가 얼마 못가 죽을 거라고 수군거렸고 창공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택에겐 아무 일도 없었다.
키가 180이 넘고 몸집도 곰처럼 당당한 사람이라 그런진 몰라도 회복이 매우 빨랐다.
"택이 형. 오늘도 뭔 소득 없었죠?"
"없었어."
"다 쫄보 새끼들이라니까. 죽을 때까지 이러고 싶은가 보지?"
창공은 나지막이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나 택이나 당하고는 못 사는 사람들이었다.
해서 어떻게든 세력을 규합해서 이 상황을 타개해보자 노력하는 중이었는데, 슬쩍 떠봐도 다들 손사래를 치는 것이 이미 철저하게 무기력이 학습된 것 같았다.
"너무 그러지 마. 이런 상황에서 반항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 없으니까. 차라리 우릴 찌르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냐."
"하. 그거야 대놓고 저 새끼들 조지자고 안 했으니까... 뭐, 저 십장 새끼들한테 말하지 않은 건 그 와중에 가상하긴 하네요."
"그렇지."
이 노천광산엔 십장도 있었다. 그들은 전부 지구인들이었는데, 창공이 보기에 그들은 이세계놈들에게 굽신대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그것 때문에 십장으로 뽑혔던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작은 권력을 등에 업고 마치 명예 이세계인이 된 것처럼 아주 태도가 가관이었다.
창공이 보기엔 어차피 그들도 지구에서 끌려온 이상 노예였다. 완장을 찬 노예.
하지만 이 완장 찬 노예들은 일반 노예들에 비해 권한이 있는 편이었다.
일반 노동에서 해방되어 작업을 감시하거나, 보급품을 배분하거나 하는 식으로.
"그래도 우리 십장은 다른 십장들에 비해서 위세도 안 부리는 편이라더라. 뭐, 착하게 생겼잖아. 실제로."
택의 말에 창공이 코웃음치며 대답했다. 소리를 낮춰서.
"고다 저놈이요? 그래봤자 우리 노예로 부려먹는 놈들한테 붙어먹은 놈들 중 하나지...
근데 왜 말을 그렇게 해요? 택이 형도 스톡홀름 신드롬에라도 걸린 건가?"
"아냐... 그래도 너무 저 십장들 고깝게 보지는 마. 나름 살아남으려고 저러는 거니까. 혹시 알아? 의외로 협력할지."
"형.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말 안 해. 그건 미친 짓이지... 오, 나왔다."
택이 곡괭이질로 작은 바위를 쪼개자 그 안에서 둥그렇고 푸르죽죽한 돌이 나왔다.
곡괭이질을 하면서 충격을 받았을 법한데도 매끈하고 흠집 하나 없는걸 보면 곡괭이보다 훨씬 단단한 것 같았다.
창공과 택에겐 아무래도 좋은 얘기였지만.
어쨌든 택은 그 돌을 집어 들어 뒤쪽으로 던졌다. 그러자 뒤에서 대기하던 여자ㅡ물론 지구인이었다ㅡ하나가 돌을 집어 들고는 탄차에 실었다.
이 광산에서 작업 배분이 이랬다. 남자는 곡괭이질, 여자는 돌의 수집과 바위 파편의 정리.
다시 곡괭이질을 시작한 택은 창공에게 말을 걸었다.
"어쨌든 너무 상심하진 말고. 어차피 잘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잖아.
또 모든 사람들이 동조할 거라고도 생각 안 했고."
"그래도 우리 조에서는 좀 나와줘야 하는데. 우리가 찔러보는 사람 많으면 많을수록 꼬리 밟힐 위험도 올라가요."
"나도 알지."
"여차하면 그냥 우리끼리만 도망가야 할지도 몰라요."
창공의 말에 택은 허리를 펴는 척하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일부러 둘은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 덕분인지 지금 창공의 말을 들은 이는 없는 것 같았다.
물론 그의 목소리는 충분히 낮았다.
"계획은 있어?"
택은 나지막이 말했다. 창공은 망설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밤에 화장실 몰래 가는 척하면서 슬쩍 숙소 밖으로 나가서 봤는데...
정찰 도는 새끼들 있잖아요. 그 외곽 쪽에."
"어."
"우연찮게 그때가 교대 시간이었는지, 횃불들이 서로 엇갈리더라고요. 그런데 담장 아래 지키는 놈들이랑 초소 위로 올라가서 감시하는 놈들이랑 교대의 시간차가 있는 것 같아요."
창공도 허리를 펴고선 상체를 이리저리 돌리며 슬쩍 주변을 돌아봤다.
엿듣는 자가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다시 곡괭이를 양손으로 쥐었다.
"그때 어떻게든 기회를 봐야죠."
"교대 시간이라... 그때가 취약한 시간이긴 하지, 실제로. 그래서 그때가 몇 시쯤이었는데?"
"19시 28분."
"19시 28분... 몇 시간 간격으로 교대하는지 그것도 알았으면 좋겠는데... 좋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그쪽 정보를 모으는 것도 괜찮겠어."
창공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역장에 시계 따위는 없었다.
그들은 자라면 자고, 일어나라면 일어나고, 일하라면 일하는 존재들이었으니 시간을 알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창공에겐 시계가 있었다.
학교에서 잠들었다 이세계로 납치된 그는 당시에 전자시계를 차고 있었고, 태양광 전지였기에 배터리 걱정도 없었다.
다만 시계에 표시되는 시간과 실제 시간은 많이 다른 것 같았다.
당장 창공이 밤중의 경비 교대를 목격한 시간이 시계 상으로 19시 28분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나마 시간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고, 또 유용하게 써먹을 수도 있었다.
"진짜, 더럽네요."
"응? 뭐가."
창공이 짜증 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구에서의 삶이 꿈같다는 게요. 몇 달 동안 이러고 있으니까 원래부터 여기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는데...
그러면 차라리 이렇게까지 기분이 더럽지는 않을 텐데. 원래 그랬으니까요.
그럴 때마다 이 시계가 난 원래 여기서 이러고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니까. 진짜 더럽죠."
택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럽지만 포기할 수 없게 해주잖아. 여길 탈출하는 거든, 아님 우리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거든..."
그는 돌아간다는 부분에서 말끝을 흐렸다.
솔직히, 어느 순간부터 그는 포기하고 있었다.
지구에서 어딘지도 모르는 이곳으로 어떻게인지도 모르게 끌려왔는데, 다시 돌아갈 수 있는지 심히 의문이었다.
하지만 창공의 눈빛은 뜨겁게 타올랐다.
"맞아요. 이러다가 죽느니 차라리 탈출하다가 죽고 말지.
그리고 탈출하면 제일 첫 번째 목표는, 지구로 돌아가는 게 아니에요. 그건 좀 후순위고."
마치 탈출만 하면 지구로 돌아가는 건 일도 아니라는 말투였다.
어택은 그 당당함에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창공에게 질문했다.
"후순위? 지구로 돌아가는 게 후순위야? 그럼 1순위는 뭔데."
"당연히 우릴 부려먹고 있는 이 새끼들한테 복수하는 거죠. 난 당하고는 못 살아. 그게 어떤 새끼든 간에."
"..."
오밤중에 눈을 뜬 창공은 시계를 확인했다.
18시 10분. 교대 시간으로 추정되는 시간까지는 아직 1시간여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몸을 일으켜 침상 위를 벗어났다. 그가 향한 곳은 숙소 문밖의 복도에 있는 화장실이었다.
그곳으로 통하는 문은 남자 숙소로 들어가는 문과 여자 숙소로 들어가는 문의 사이에 있었다.
화장실 안쪽은 손을 씻을 수 있는 작은 공간과 여러 칸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창공은 제일 첫 번째 칸의 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잠갔다.
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 듯 잠금장치가 덜컹거렸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바닥에 뚫린 구멍 위에서 바지를 내리고선 몸을 돌려 바깥쪽을 향해 쭈그려 앉았다.
악취가 올라왔지만 어차피 금방 끝날 일이었다.
그는 화장실에서 으레 보는 일을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참 곤란했다. 처음에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엔 정신없이 일하느라 성욕이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살았는데,
이 짓거리도 나름 적응이 되니 가장 먼저 고개를 치민 욕구가 바로 성욕이었다.
군대도 다녀오지 않고 대학교 2학년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한창때 중의 한창때인 창공에게 이런 환경은 상당히 가혹했다.
그렇다고 연애를 할 수도 없으니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이런 것밖에 더 있겠는가.
"후우..."
창공은 오른손으로 성기를 잡고선 앞뒤로 움직였다.
원래 조루는 아니었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정감은 금방 올라왔다.
뇌에서부터 척수를 타고 내리꽂히는 전류가 가랑이 사이까지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시청각 자료는 필요 없었다. 여자가 건드리면 바로 터질 것 같은 이런 때에는 상상만으로 충분했다.
지금 그가 떠올리고 있는 건 깨진 지 오래되지 않은 전 여자친구의 알몸이었다.
자괴감은 사정 후 자신의 몫이었고, 지금 그는 그저 본능에 따라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았다.
"어우, 아우... 배 아파 죽겠네. 먹은 것도 없는데 뭐 이렇게 배가 아파."
바로 그때, 화장실에 누군가 급하게 들어왔다.
짜증 난다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눈을 감고 상상에 몰입하고 있던 창공에게 그 여성의 목소리는 당황을 불러일으키긴커녕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였다.
'...잠깐.'
창공은 눈을 뜨고 황급히 잠금장치를 바라봤다.
영 불안하긴 하지만, 어쨌든 잠금장치였다. 게다가 이미 사정 직전이었다.
멈추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잠금장치를 믿고 최후를 향해 나달렸다.
하지만 그는 믿어선 안 될 것을 믿어버렸던 것 같다.
"에이, 씨. 급해 죽겠는데 이 문짝은 왜 이리 안 열리는 거야!"
아무래도 저 여성도 급한 건 매한가지였던 것 같았다.
차마 안에 누군가 있어서 문이 잠겨있다고 생각은 못 했던 건지,그녀는 힘차게 문을 당겼고, 잠금장치는 박살이 나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창공이 안에 사람 있다고 말할 틈도 없었다.
그와 그녀의 눈의 마주쳤고, 하필이면 이때 창공의 성기가 정액을 토해냈다.
힘차게. 찌익, 하는 소리까지 내면서. 야속하게도 벽면에 걸린 횃불은 이 광경을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었다.
"..."
"..."
오른손으로 자기 성기를 움켜쥐고 쭈그린 채 여자를 올려다보는 남자와,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멍하니 남자를 내려다보는 여자의 모습은...
참 꼴사나웠다. 그녀의 눈동자는 본능적으로 창공의 시선을 피해 아래쪽을 향했다.
그리고 그녀가 본 건 그때까지도 정액을 흘리는 자지였다.
그제서야 이 상황이 이해가 된 듯 여자는 두 손을 벌벌 떨며 들어 올리고는 입에서 아무 의미 없는 말을 내뱉었다.
"아... 음... 그..."
창공은 무표정으로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나가."
"네... 네엣! 죄송합니다!"
여자는 쾅 하고 소리를 내며 문을 세차게 닫고선 바람처럼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미 잠금장치가 박살 난 문은 문 구실을 하지 못했다.
닫혔던 문은 삐걱거리며 다시 열렸고, 그때까지도 창공은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애미."
자위 후에 자괴감은 느낀 적이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창공은 맹세컨대 지금 그가 느끼는 자괴감이 전무후무 최고라고 느꼈다.
탈출이고 뭐고 그냥 이대로 죽고 싶은 기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