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3화 (3/178)

〈 3화 〉 탈출을 꿈꾸는 노예들 (2)

* * *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사람 목숨이다.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경험을 한 창공은 끝없이 차오르는 자살 충동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으며 뒷정리를 하고 화장실을 나섰다.

"앗."

방금 뛰쳐나간 여자가 창공을 보고선 짧게 소리를 냈다.

창공은 쩔쩔매는 그 모습에도 불구하고 뭐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어째 그러면 더 죽고 싶어질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그는 그녀를 비난하는 대신 자기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뭐해요, 안 들어가고."

"앗, 그... 갑자기 괜찮아져서... 헷."

'헷은 씨발 뭔...'

아마도 멋쩍은 웃음이었을 테지.

비웃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빴다. 창공의 얼굴이 찌푸려졌고, 그 표정은 어스름한 등불 아래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여자는 크나큰 결심을 한 듯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혹시 담배 피시나요?"

"네. 근데요."

창공이 까칠하게 대답했지만 딱히 여자가 신경 쓰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는 이 여자가 만약 신경 쓰는 기색이었다면 한 번 쏘아붙일 마음이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창공의 대답을 듣자마자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선 뭔가를 꺼냈다.

누렇고 거친 종이가 얇은 원통 모양으로 기다랗게 말린 것. 담배였다.

그러나 어느 끝단에도 필터는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노예들에게 보급되는 보급품 중 하나였다.

십장이 위에서 받아와서 자기 몫을 챙기고는 자기 조원들에게 나눠주는 보급품 말이다.

담배는 십장이 얼마나 떼먹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일주일에 두세 까치나 간신히 나오는 보급품이었다.

질이 좋지 않고 필터도 없어 조금만 세게 빨아도 담뱃잎이 입안으로 잔뜩 들어왔지만,

그나마도 흡연자들에겐 사막에서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창공은 그 오아시스를 애타게 찾는 흡연자 중 하나였다.

그것도 원래 세상에선 보통 흡연자가 아니라 하루에 한 갑은 기본으로 해치우는 골초였다.

설마 방금 저지른 무례에 대한 대가로 주는 것인가.

창공은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자살 충동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제가 방금은 전적으로 잘못하기도 했고..."

'알았으니까 빨리 좀 넘겼으면.'

여자도 흡연자인지 아까운 것을 주는 것처럼 심히 망설였다.

비흡연자들은 담배로 거래를 신청할 때는 지금보다 훨씬 쿨하게 넘겼기에 창공은 그녀가 흡연자라고 생각했다.

자꾸 텀이 길어지자 목을 졸라서라도 담배를 넘겨받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 즈음에야 그녀는 눈을 꼭 감으며 담배를 내밀었다.

"죄송했습니다! 이거 받고 화 풀어주세요!"

"그러죠."

혹시라도 발언을 철회할까 잽싸게, 낚아채듯이 담배를 건네받은 창공은 바로 뒤돌았다.

취침 시간에 숙소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은 금지된다. 화장실에 들어가 필 셈이었다.

그런데, 뒤에서 여자가 창공을 불러 세웠다.

"저기! ...요."

"...네."

아직도 말할 게 남았단 말인가. 거래는 이걸로 끝이 아니었나.

창공은 불쾌감을 억누르며 여자를 바라봤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창공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진 담배를 보고 있었다.

어쩐지 불안한 그녀의 모습에 창공은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뭐 더 하실 말씀 있나요. 난 여기서 끝난 줄 알았는데.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면 이제 이 담배는 제 겁니다."

"그게, 저도 그걸 다시 가져올 마음은 없어요. 제가 잘못해서 드린 거고... 그것보다 그거 지금 피우실 거죠?"

"그런데요?"

창공은 '지금 피우든 말든 무슨 상관이죠'라고 대답하는 대신 인내심을 발휘했다.

여자도 지금 자기 모습이 퍽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건 알았는지 수치를 참는 표정으로 눈을 꼭 감고 말했다.

"옆에서 냄새만 좀 맡을 수 있을까요...! 피운 지가 너무 오래돼서..."

"..."

돌아버린 건가. 창공은 그리 생각하며 거절하려 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그러고 보니 여자들 쪽은 한 번도 떠본 적이 없었다. 남녀가 분리된 환경이기에 접촉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렇게 좋은 기회가 있는데 짜증과 불쾌감 때문에 그냥 보내는 건 너무나 아쉬웠다.

"냄새만 맡는 거예요. 태우는 건 저만 다 태울 겁니다."

"그럼 승낙하신 거죠? 아싸! 자, 빨리 들어가죠."

"..."

방금 있었던 일은 미안하게 생각하지도 않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나는 담배 줬으니까 이제 미안한 건 없다는 심보인지...

여하튼 창공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벽에 걸린 등불에 담배 끝부분을 태웠다.

불이 붙자 바로 입에 갖다 대고 세심하게, 하지만 짧지는 않게 숨을 들이켰다.

겉담배는 사치였다. 담배를 쉽게 구할 수 없는 이쪽 세상에선 무조건 속담배였다.

담배 연기가 폐 안을 가득 채우고, 몸 안에 니코틴이 채워지는 게 느껴졌다. 담배를 처음 하는 사람처럼 머리가 띵했다.

지구에 있을 때처럼 담배를 수시로 피우질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후우..."

창공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연기를 쭈욱, 뱉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탈출이고 귀환이고 전부 하찮은 일이었다.

불길이 이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우기 전에 최대한 많이 빠는 것, 그것이 지금 창공의 지상과제였다.

"후읍, 파하... 아이고, 살겠네."

'맞다, 이 여자가 있었지.'

아니, 돌이켜보니 그것은 지상과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담배가 다 타면 더 대화를 이어갈 명분이 궁했다. 재빠르면서도 너무 급하지 않게 이 여자의 속을 떠봐야 했다.

적어도 그렇게 해야 수치스러운 광경을 들킨 값은 하지 않겠는가. 사실 그걸로도 턱없이 부족했지만.

"이름이 어떻게 돼요?"

"네? 이름이요? 전 나유에요. 남나유."

나유도 오랜만에 맡는 담배 연기가 흡족했던지 살짝 미소 띤 얼굴로 선선히 대답했다.

일렁이는 불빛 아래에서 그녀의 얼굴도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어깨를 넘어 등까지 내려오는 흑단 같은 머릿결에 초롱초롱한 새까만 눈동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SNS에 셀카를 찍어 올리면 인기몰이 꽤나 할 법한 외모였다.

진한 현자타임 후에 담배를 빨고 있는 남자에겐 아무래도 좋은 얘기였지만.

"전 서창공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랑 비슷한 시기에 여기 떨어지셨나요?"

"아, 네. 아마도요? 세 달쯤 되었던가..."

"세 달이요. 그쯤 됐네요. 서로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들끼리 이렇게 개고생을 할 줄은..."

당연히 시기는 비슷했다. 애초에 비슷한 시기에 온 사람들끼리 같은 조로 묶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에겐 이런 게 필요했다. 대화 상대와 비슷한 요소를 많이 공유할수록 이야기를 꺼내기가 쉬워지는 법이니까.

특히나 같이 고생하는 사람들이란 상황은 하루 만에 자기 사생활을 공유하게도 만들 정도가 아니던가.

"진짜 어떻게 하고 싶은데 뭐 방법이 없으니까요. 쥐어박고 싶다니까요. 조금 허리 피려고 하면 지랄해대고."

"아휴, 그래도 여자들한텐 조금 덜하더라고요. 고생이 많으시네요."

"아뇨. 뭘요. 다 같이 힘든데."

"그래도 저희가 하는 일이 곡괭이질보단 낫죠. 으이그, 진자 곡괭이만 내 손에 있었어도 확 그냥..."

"그냥?"

창공은 다시 담배를 입에 가져가며 그녀의 대답을 유도했다.

나유의 시선은 담배에 꽂혀있었지만 대답은 성실했다.

"그냥... 에헤헤. 닥치고 일해야죠 뭐. 어차피 저 혼자선 이기지도 못할 거고. 왜 그런 생각도 가끔 해봤거든요. 다 같이 들고일어나서 확! ...앗."

신나게 말하던 나유는 깜짝 놀란 얼굴로 입가에 두 손을 가져다 댔다.

창공이 밀고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친 것이다.

창공은 오해를 풀 필요가 있음을 느꼈고, 이에 슬며시 담배를 나유에게 내밀었다. 1/3은 이미 타고 없어진 상태였다.

"한 번 하시죠."

"아... 정말로요?"

"한 번만."

나유는 감사의 말도 하지 않고 정신없이 담배를 건네받았다.

바로 전까지 남이 피던 담배라도 자긴 상관하지 않는다는 투였다.

그녀가 담배를 물고 깊숙이 빨자, 끝단에서 벌건 빛을 발하며 담배가 더욱 짧아져갔다.

지켜보는 창공은 애간장이 타는 느낌이었다. 이게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어야 할 텐데.

"콜록, 콜록... 고마워요. 콜록... 아우, 오랜만에 기침이 다 나오네. 으흠!"

그녀는 정말로 한 번만 쭉 피우고는 다시 창공에게 담배를 건넸다.

"나유 씨는 대단하네요. 어지간한 남자들도 그런 생각은 못 하던데."

"아뇨, 뭐..."

"나유 씨 말이 맞아요. 우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할 사람들도 아니고. 솔직히 이러고 있으면 죽기를 기다리는 것밖에는 안 되잖아요."

"무슨 방법 있으세요?"

창공은 대답하는 대신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이번에는 최대한 천천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슬쩍 떠보려던 것이 어느새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 와있었다. 지금 끌어들이면 이쪽에 붙을 가능성은?

'애초에 이 상황을 유도한 건... 그건 아닌가.'

창공은 나유가 프락치일 가능성부터 검토했다.

하지만 그건 어려웠다. 이세계인들이 지구인들과 직접 대화하는 경우는 없었고, 평소에는 접촉조차 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언가를 지시하려면 십장을 통했고, 나유가 프락치라면 그들의 십장과 뭔가 대화를 나누는 낌새가 있었어야 했지만 그런 낌새는 없었다.

물론 그가 하루 종일 십장의 동태를 보는 것도 아니니 가능성이야 있겠지만,

그렇게 치면 이렇게 따지는 의미가 없었다. 계산할 수 없는 건 계산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 나유는 충동적인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방금 그런 꼴을 봐놓고선 옆에서 담배 연기라도 맡게 해달라니, 담배가 아무리 급하더라도 어지간해선 그러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녀의 얼굴 표정으로 미루어보아 방금 대화의 흐름은 그녀의 감정이 온전히 개입한 결과였다.

프락치였다면 반드시 어색한 낌새가 있었겠지.

그렇다면, 솔직히 말한다면 이쪽에 붙을까?

일단 창공은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감정에 솔직한 충동적인 사람. 이 분석이 맞는다면 방금 말이 진심 그대로를 드러냈으니 만큼 광산 관리자들에게 저항하자고 한다면 흔쾌히 수락하겠지.

하지만 충동적인 사람은 감정을 끝까지 그대로 갖고 가는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열렬한 협력자에서 방관자, 더 나아가 배신자로 변하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어쨌거나 확실한 건 없었다. 그리고 창공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있습니다."

"오."

결국 그는 나유를 끌어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위험했지만 그에겐 너무나 기회가 모자랐다. 어차피 기회만 기다리다간 가혹한 노동을 버티지 못하고 죽을 뿐이다.

지금은 100%가 아닌 가능성이라도 어떻게든 걸어야 했다. 어차피 그의 계획도 너무나 불확실한 계획이 아니던가.

"실은 나유 씨 같은 사람들을 알아보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쉽지가 않네요."

"당연히 그렇겠지만... 우와. 이거 진짜죠? 나 막 내일 잡혀가고 그런 거 아니죠?"

나유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창공은 다시 담배를 빨며 생각했다. 저게 연기면 그냥 깔끔히 뒈지고 만다고.

"나유 씨가 입단속만 제대로 해준다면 들킬 일은 없겠죠."

"전 의리 끝판왕이거든요?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아이고.'

좀 진지하게 생각할 수는 없는 건가.

창공은 이마를 짚는 대신 이젠 얼마 남지 않은 담배를 쭉 빨았다.

음, 좀 낫군.

"어쨌든 이야기는 이쯤 하죠. 오밤중에 구구절절 다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러다가 누군가에게 보이면 의심받을 수도 있으니까.

내일 점심시간에 내 쪽으로 와요. 자, 남은 거 다 피시고."

"우왓. 고마워요."

창공은 이제 한 모금 정도 남은 담배를 나유에게 건네고선 화장실을 나왔다.

시계를 슬쩍 보니 18시 20분이었다.

꽤 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10분밖에 지나지 않았었다.

어쨌거나 교대 시간이라고 추정되는 19시 28분에 다시금 확인을 해야 했다.

어차피 방금 있었던 일 때문에 잠도 잘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한 창공은 침상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다가 간간이 뜨고선 시계를 계속 확인했다.

18시 32분...

18시 45분...

19시 10분...

...

22시 55분...

...?

"어, 씨발."

창공은 눈을 비비며 시계를 확인했다. 하지만 몇 번을 확인해도 22시 55분이었다.

아, 이제 56분이 되었다. 눈만 깜빡이던 그는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설마 깜빡 잠이 들어버릴 줄이야.

"기상! 다들 기상하세요! 빨리들 나와요! 말할 거 있으니까!"

마침 기상시간이었는지 십장이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와 그들을 깨웠다.

안 그래도 더러운 기분이 곱절로 더러워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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