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탈출을 꿈꾸는 노예들 (3)
* * *
고다 히사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인이었으며, 창공과 택, 그리고 나유가 속한 조의 십장이었다.
완장을 차고 뭐라도 된 것인 양 대놓고 조원들을 못살게 굴고 보급품을 착복한다는 다른 조 십장들에 비하면 좀 나은 사람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어택이 했던 말처럼.
하지만 중론은 그러거나 말거나 이세계인들에게 붙어먹은 씹새들 중 하나라는 것이었다.
보급품을 비교적 공정하게 배분? 대놓고 욕하지는 않는다고?
그래봤자 그는 광산 관리 측의 하수인이었고, 일반 조원들에게 그다지 친절하게 굴지도 않았다.
그냥 흔하디흔한 욕받이 중간관리직이 그의 지위였다. 그것도 악의 중간관리직.
딱 그 정도가 히사시에 대한 평가였으며, 이는 다른 조에서 조원들이 그들의 십장에 대해 내리는 평가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어, 창공아. 잘 잤냐."
"아뇨."
숙소 앞 자그마한 터에 모인 조원들은 서로 웅성거렸다.
기상 후 이곳에 모여 인원수를 파악하는 건 일상 있는 일이었으나, 지금처럼 전달 사항이 있다고 히사시가 아침부터 소리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근데 전달 사항은 또 뭔 소리예요?"
"몰라. 잔소리나 좀 하겠지.
우리 조 작업 능률이 다른 조에 비해 뒤떨어진다거나. 어차피 하는 얘기래봤자 뻔해."
"그런가. 하긴."
그렇게 잡담을 하고 있으려니 방금 전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깨웠던 히사시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사람들은 싫든 좋은 어쨌거나 완장을 찬 십장이기에 그쪽을 바라봤다.
태도들은 다들 불손했지만. 그리고 히사시도 딱히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여러분. 상부에서 전달 사항이 내려왔는데.
우리 조 작업 성과가 제일 개판이랍니다. 하기 싫은 건 알겠지만 좀 열심히 하면 안 됩니까?"
"이거 봐라. 내 말 맞지?"
어택이 창공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거렸다. 창공은 쓴웃음을 지었다.
'진짜 이딴 소리나 하려고 그 난리를 친 거냐.'
"아니 뭐. 저도 여러분들한테 큰 거 안 바랍니다.
그래도 꼴찌만은 하지 말자고요. 특히 남자들! 듣고 있습니까? 듣고 있는 거 맞아요?"
"..."
남자 조원들은 대답도 없이 팔짱을 끼거나 짝다리를 짚고 히사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당연히 미움의 대상인 십장의 말이 제대로 귀에 박힐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윽박지른다고 들을 사람들도 아닌데. 결국 히사시는 한숨만 쉬며 계속 말을 이었다.
"아무튼 좀 똑바로 좀 해주세요. 계속 꼴찌 하면 배식량도 줄고 담배도 안 나온단 말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전부 흡연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피우는 분이 있지 않습니까?
저도 위에서 욕먹어서 싫고, 여러분들도 저한테 아침부터 이런 소리 들어서 싫은데 다음부터 이런 말 좀 안 나왔으면 좋겠네요.
해산! 잠시 후에 작업 시작되니까 몸이라도 좀 풀고 계시고요."
히사시는 대답도 듣지 않고 단상을 내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물론 조원들도 대답할 마음은 일절 없었다.
그렇게 어떤 사람들은 숙소 밖에서 담배를 주섬주섬 꺼내고, 어떤 사람들은 숙소 안으로 흐느적거리며 들어갔다.
여자들 쪽을 바라보던 창공은 나유와 눈을 마주치고선 고개를 작게 끄덕였고, 나유도 알았다는 듯 제스처를 취했다.
"택이 형. 그러고 보니 할 얘기가 있는데..."
"응?"
"아, 이분이시구나."
"안녕하세요, 남나유라고 해요."
점심시간. 점심이래봤자 겨우 주먹보다 좀 더 큰 말라비틀어진 빵 두 덩어리가 전부다.
어쩌다가 맛대가리 없는 야채나 정체 모를 고기 같은 것들이 나오는 날도 있었지만 이런 것만 먹다가 몸 망가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어쨌거나 창공과 택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으려니, 어젯밤 한 약속을 잊지 않고 나유가 찾아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미리 창공에게 언질을 받았던 택은 당황하지 않고 나유를 맞이했다.
흔들리는 등불 아래에서 봤을 때에도 한눈에 미인인 게 느껴졌었지만, 화창한 햇빛 아래에서 그녀의 미모는 더욱 빛을 발했다.
그녀는 윗옷으로 이제까지의 노동 탓인지 땀에 젖은 회색 면 티에, 아래쪽은 짧은 돌핀 팬츠를 입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검은색 얇은 바람막이를 허리에 두르고 팔 부분을 묶어 고정시킨 옷차림이었다.
건강하고 활기찬 봄의 처녀.어택은 왜 이런 사람과 같은 조면서 지금까지 몰랐는지 의문을 품으며 마주 인사했다.
"전 어택입니다. 성이 어고 이름이 택이에요."
"이름 진짜 특이하시네. 아, 놀리는 건 아니고 멋지다구요.
몸집도 크시고 군복 차림이라 전부터 눈에 띄었는데... 우리 같이 앞으로 잘해봐요. 아자!"
"네. 활기차서 좋네요. 보통은 다들 긴장해서 자기소개도 제대로 못 할 텐데. 안 그래? 창공아."
"아, 네..."
창공은 속으로 뭔가 글러먹었음을 느끼고 있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진지하게 접근해도 모자랄 일인데 저건 너무... 방정맞은 면이 있었다.
저런 사람일 거라고 대충 예상하고 끌어들인 거지만 갑자기 후회가 막심했다.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끌어들인 이상 이제 와서 나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어택은 창공의 시원스럽지 못한 대답에 뭔가 좋지 않음을 깨달았지만 똑같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웃는 낯으로 나유를 대했다.
"어쨌든 어서 와요. 이제 나유 씨까지 포함하면 셋이네. 설명은 여기 창공이한테 대충 들으셨죠?"
"그럼요. 처음에 들었을 땐 깜짝 놀라긴 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는 없잖아요. 저도 같이 하기로 했죠."
그나마 나유는 목소리를 낮춰서 말하는 눈치 정도는 있었다.
그마저도 없었다면 창공은 자기 목을 조르던지 나유의 목을 조르던지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행했을 것이다.
"그럼 핵심만 딱딱 이야기하죠."
그렇게 창공이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전개하려는데, 나유가 그의 말을 중간에 탁 치고 들어왔다.
"아, 그전에 궁금한 게 있는데요. 창공 씨랑 택 씨는 나이가 어떻게들 되세요? 같이 일하게 됐는데 한 번 알고 가자고요."
"..."
창공은 괜히 마른 세수를 하며 분을 삭였다.
그는 누가 자신의 말을 자르는 것을 싫어했으며, 심지어 그 이유도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이 상황에서 어택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그는 이런 분위기를 잡아내는 데에 재주가 있었다.
"전 올해로 스물넷입니다. 창공이는 스무 살이고요. 나유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오, 저도 스물인데. 창공 씨랑 동갑이었구나. 어택 씨는 앞으로 택이 오빠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 물론 편하게 반말하셔도 돼요. 그렇게 하는 걸로 하죠."
그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러면서도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러자. 그럼 궁금한 건 이제 없지? 우리 얘기 시작해도 될까? 나유 너도 알겠지만 시간이 그렇게 많지가 않잖아."
"그럼요."
어택이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하는 동안, 창공은 화를 꾹꾹 눌러 담고 다시 원래 표정으로 돌아와있었다.
후회를 하든 자기 목을 조르든 이미 늦었는데 뭘 어쩌겠는가.
"어젯밤에 생각해 봤는데, 더 사람을 모으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아요. 발각될 위험도 점점 올라가는 데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들도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동참해 준 두 분께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나유가 '에이, 뭘 그런 걸로 다...' 같은 소리를 하며 흐름을 끊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결국 사람들을 선동해서 여길 뒤집는 건 아무래도 무리 같아요. 탈출로 가닥을 잡죠.
우리라도 일단 여길 나가서 외부의 도움을 얻든,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든 해야지 여기서 상황이 변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에요."
"음. 솔직히 저놈들한테 우리 목숨은 벌레만도 못한 목숨이니까.
당장 내일 구실 하나 잡혀서 맞아죽어도 이상하지 않지. 또 작업 도중에 사고가 나서 저세상 갈 수도 있는 거고."
창공은 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유도 진지한 표정으로 듣다가 한마디 거들었다.
"나가는 건 좋은데, 나간 다음에 어떻게 할 거죠?
외부의 도움이라곤 해도, 우리를 보면 여기 이 사람들이랑 똑같이 우릴 취급하지 않을까요?"
"맞아요. 그럴 우려가 크죠."
나유가 그럴듯한 지적을 하자 창공이 동의했다.
그녀가 진지하게 대화에 동참해 준다면 창공으로선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마치 그녀에게 담배를 건네받았을 때처럼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도박이에요. 죽을 각오로 도망쳐서 무사히 살아남았다고 해도 추적대에게 잡힐 수도 있죠.
그러면 아마 죽겠지만. 또 추적을 뿌리치고 도망친다고 해도 나유 씨 말대로 바깥 사람들이 우리에게 적대적이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어요.
아니, 오히려 똑같이 우릴 노예 취급할 가능성이 높겠죠."
그는 빵을 작게 한 입 물고선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미 이런 도박에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요. 이런 게 싫긴 하지만."
"..."
나유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차피 창공 씨 말대로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한 번 끝까지 발버둥 쳐 봐야죠.
그럼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방향은 어느 쪽을 생각하고 계신가요?"
노천 탄광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렇게 높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산은 엄연히 산이었다.
나머지 한 군데만ㅡ일단 보이는 바로는ㅡ산이 보이지 않았는데, 나유의 말은 산과 평지 중 어느 곳으로 도망칠 것인지 묻는 것이었다.
나도 힘들고 추적대도 힘들 산이냐, 그도 아니면 나도 쉽고 추적대도 쉬울 평지냐.
이에 대해 창공은 진작에 생각이 정리된 참이었다.
"저는..."
"나유 언니이!"
무겁게 입을 열던 창공은 그의 등 뒤에서 나유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선 고개를 푹 숙였다.
도대체 나유를 맞아들인 첫날부터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뭐가 어찌 됐든 오늘은 이미 글러먹었으리라.
'씨발. 씨발. 씨발...'
창공은 속으로 나유에게 동참을 권유한 어제의 자신을 천 갈래로 찢어발기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유는 당황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부르는 사람을 쳐다봤다.
170이 넘는 늘씬한 체격의 나유와는 달리 160도 안 되어 보이는 자그마한, 아직 소녀 티를 채 벗지 못한 여성이었다.
따뜻한 갈색 머릿결은 뒷머리에 자그맣게 모아져 꽁지로 묶여 있었고, 머릿결과 같은 갈색 눈망울은 졸졸 흐르는 개울물 위에 산산이 부서지는 태양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하얀 블라우스는 땀에 젖어 안쪽에 입은 하늘색 속옷이 아슬아슬하게 비춰 보이고 있었고, 검은색 나팔바지 곳곳엔 흙과 먼지로 더럽혀진 흔적이 가득했다.
나유가 활기찬 치타와도 같은 이미지라면, 그녀는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슴과도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둘 중 어느 쪽도 지금 고개를 푹 숙인 창공에겐 짜증 유발자와 다름이 없었다.
"아니 아린아... 어쩐 일이야."
나유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행동하자 아린이라 불린 그녀는 이마에 손을 턱, 짚었다.
창공은 고개를 들어 어택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재차 마른 세수를 시작했다.
"어쩐 일이냐고요? 그새 잊었어요? 나랑 한 약속. 담배 한 개비 주면 오늘 빵 한 덩어리 준다면서요."
"아. 아아아... 맞다. 그랬지이..."
아린은 비흡연자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보급품으로 담배가 나왔고, 그녀와 같은 비흡연자들은 흡연자들과 담배로 거래를 하곤 했다.
들어보니 이번에도 그런 것 같았다.
'좀 중요한 얘기하기 전엔 이런 일들 미리 처리하고 오면 어디 덧나냐고.'
창공이 그리 생각했지만 이미 이렇게 되어버린 것을 어쩌랴.
오늘 이야기는 글러버린 이야기였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니 그의 마음은 편했다.
아니, 사실 불편했지만 체념했다는 얘기다.
"아고, 근데 아린아. 언니가 깜빡 잊고 벌써 다 먹어버렸거든?"
"네?"
"아니아니아니. 그냥 쌩까려고 했던 건 절대! 아니야. 그냥 오늘따라 너무 배고파서... 내일은 진짜 줄게. 정말 미안해. 내가 막 떼먹고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거 알잖아. 어떻게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
"나유 언니..."
아린은 눈을 꼭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다 먹었다는데 받아낼 방법도 없고, 또 내일 반드시 주겠다는데 뭐라고 더 할 수도 없고...
어쩔 줄을 몰라 하던 나유는 아린에게 다가가 한 팔로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다른 한 팔을 창공과 어택 쪽으로 뻗었다. 어떻게든 주제를 돌리기 위함이었다.
"자자, 언니가 미안하니까 화 풀어. 내일 무슨 일이 있어도 줄 테니까.
그것보다 이렇게 왔는데 이것도 인연이잖아. 우리 조원분들 소개할게.
...여기 군복 입고 계신 오빠는 택이 오빠야. 성이 어고 이름이 택이래. 신기하지?"
어택이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창공도 고개를 돌려 아린을 쳐다봤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혹시 모르니 얼굴이나 알아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쪽은, 창공 씨야. 서창공. 정말 좋으신 분이야. 언니랑 나이도 같아."
' 속 보인다, 이년아.'
창공은 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아린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와 눈이 마주친 아린의 반응이 요상했다.
말도 없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창공을 바라보던 그녀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김아린이라고 합니다... 열아홉이에요..."
"아, 네. 서창공입니다."
"..."
"..."
미묘한 침묵 속에 오고 가는 시선.
어색해서 누가 먼저 눈을 돌릴 법도 했건만, 창공과 아린 둘 다 그러는 일은 없었다.
먼저 침묵을 깨뜨린 쪽은 아린이었다.
"저, 혹시 초면에 실례지만."
"네."
"서울대 정외 아니신가요?"
"...맞는데요."
어택과 나유가 놀란 눈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럼 혹시 양궁 동아리라던가..."
"했었죠."
"아, 안녕하세요! 21학번이시죠! 저 22학번이에요! 정외!"
창공의 머리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유 때문에 이 자리는 완전히 글러먹은 줄만 알았는데... 아니, 실제로 글러먹었지만.
여하튼 이렇게 아는 사람을 만났단 말인가. 정확히 말해서 그는 그녀를 모르지만 그녀는 그를 아는 것 같았다.
탈출로 계획을 잡은 이상 은밀성을 확보하려면 사람이 너무 많아도 좋지 않지만 넷이라면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설마 이 사람도 나유처럼 방정맞진 않겠지... 그건 나유 하나로도 충분했다.
창공은 반짝반짝 눈을 빛내고 있는 아린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정외 21학번 서창공입니다."
"네... 네...! 22학번 김아린입니다...!"
아린이는 창공의 손을 맞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제 대학교 1학년. 말이 성인이지 미성년자나 다름없는 나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세계에 뚝 떨어졌는데, 아는 사람을 만났다. 얼마나 반갑고 감격스러울까.
"그런데 저를 어떻게 아시는지..."
"그... 훌쩍. 71동 앞에 지나가다가... 자주 봐서요... 강의동에서도 몇 번 봤었고..."
"아."
양궁부의 연습은 71동 종합체육관 앞 보조운동장에서 진행된다.
창공은 아마추어 대회에 나가서 우승한 경력도 있는 양궁 동아리의 핵심 멤버였으니만큼 연습에 매주 참여하고 있었고, 그런 그를 지나가다 보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으리라.
창공은 시계를 슬쩍 봤다. 14분.
점심시간은 대략 30분 정도 주어지는데, 5분에 시작했으니 대략 20분 정도 남은 셈이었다.
"앉으시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창공은 아린에게 자리를 권했고, 그녀는 그가 가리킨 자리에 잽싸게 앉았다.
어택과 나유는 아직까지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탄광에 끌려온 지구인들 중에 서로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창공아. 아는 분이야?"
어택이 창공에게 그리 물었지만, 창공은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모르지만 제 학부 후배이신 것 같네요. 어쨌든 만나서 반갑습니다. 고생 많으셨을 텐데..."
"아, 아니... 크흡. 케흑, 컥..."
아린은 창공의 말을 듣고선 감정이 복받치는 듯 본격적으로 눈물을 흘렸다.
옆에서 나유가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시선을 끌기 원치 않는 창공은 주변에 그들을 감시하고 있는 자들이 있는지 둘러봤지만, 특별히 그런 낌새는 없었다.
얼마 있지 않아 아린은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코를 훌쩍거리고 눈가가 불그스름한 것이 차분하고 깊은 대화, 예를 들어 탈출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무래도 가능할 성싶지 않았다.
그래도 창공은 상관없었다. 비록 나유와 이야기 다운 이야기는 못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새로운 멤버로 영입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만났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더 도움이 될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건 조금 아쉬웠지만, 아무튼 그랬다는 얘기다.
"그럼 둘 다 서울대였던 거야? 놀랐네, 진짜. 윽! 세종대 국어국문인 저는 짜지겠습니다!"
나유는 싱글벙글 웃으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처박는 시늉을 했다.
창공와 어택은 피식 웃었고, 아린은 눈물을 훔치며 웃었다. 창공은 어쩌면 나유가 의외의 방향에서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친 정신은 육체를 더욱 지치게 한다.
하지만 일행들 중에 나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쳐진 분위기를 띄워주는 역할을 기대해도 좋았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아귀가 맞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 그의 기분을 잡치게 하는 자가 나타났다.
"어이! 서 상! 어 상! ...남 상까지. 뭣들 해요?"
십장, 히사시의 등장이었다.
창공은 한숨을 푹 내쉬었고, 어택과 나유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물론 히사시도 이 분위기를 알고 있었지만 크게 상관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는 완장 없는 노예들에겐 비호감의 대상이었으니.
"우리가 뭘 하든 상관없잖아요?"
나유가 쏘아붙였다. 히사시는 잡석 무더기에 등을 대고 비스듬히 서서 그녀의 시선을 받았다.
"상관없습니다. 특히 일만 제대로 하면."
"그런데 지금은 일하는 시간이 아니잖아."
이번에는 어택이었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근로 감독뿐 아니라 다른 업무도 맡고 있죠.
예를 들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 참견하는 업무 말입니다.
보아하니 다른 조에 계신 분 같은데, 왜 여기서 울고 계시는 겁니까?"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에요."
아린이 직접 대답했다. 히사시는 그의 앞에 앉아있는 네 사람을 차례대로 돌아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더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조심 좀 해주세요.
이런 상황에서 다른 조랑 트러블이 생기면 여러분들뿐 아니라 저까지 곤란하단 말입니다."
"딱히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네, 네. 믿습니다. 하지만 그쪽 조장도 그렇게 생각할진 별개의 문제죠. 안 그래도 요즘 저희 조가 상황이..."
히사시는 말하다 말고 갑자기 잡석 더미에서 등을 떼고 뒤돌아 눈을 부릅떴다.
창공 일행은 도대체 저 인간이 왜 저런 쇼를 하나, 하는 표정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달그락달그락...
잡석 더미 맨 위에 올려져 있던 돌 쪼가리가 흔들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누가 흔들지도 않는데 스스로 흔들리며 소리를 내는, 소리를 더해가는 모습은 그 어떤 공포심마저 불러일으켰다.
"지진이다!"
히사시가 크게 외치며 잡석 무더기에서 멀리 떨어지려고 했지만, 바로 그 순간에 땅이 크게 흔들렸다.
서있기는커녕 제대로 앉아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결국 그는 크게 휘청이다가 그 자리에 그대로 엎어졌다.
"엎드려! 젠장!"
창공 일행도 그저 그 자리에 엎드려서 팔로 머리를 감싸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지진이 끝나기만 기다리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진이 끝나자, 그들이 알던 풍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