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5화 (5/178)

〈 5화 〉 서창공 외전 ­ 자기확신

* * *

학교 앞에 있는 이 카페는 내가 특별히 애정 하는 곳이다.

유명한 프랜차이즈 카페는 아니고 그냥 이름 없고 작은 동네 카페지만, 주인의 음악 선곡도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이 자몽허니티가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시원한 자몽허니티. 얼음 없이.

쌉쌀함 뒤에 오는 달달함. 보통 이 두 맛이 균형을 맞추지만 내 취향을 아는 이곳 주인은 시럽을 더 넣어서 균형을 무너뜨리곤 했다.

자몽의 쓴맛은 뒤에 오는 단맛을 돋보이게 만들 정도면 좋았다.

자몽허니티는 달아야 한다고. 쓴맛이 그렇게도 좋으면 에스프레소나 잔뜩 마시라지.

스피커에서는 관악기와 팀파니가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이 쏟아져 나왔다.

베토벤 9번 4악장의 도입부였다. 음악도 완벽했다.

혹자는 베토벤 9번은 클래식 초보들이나 듣는 음악이라고 폄하하지만, 꼭 그런 인간들을 보면 듣도 보도 못한 음악가의 음악을 최고라고 치곤했다.

그러면서 자기들만 아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는 찐따마냥 이 음악가는 어떻고, 시대적 배경은 어떻고... 같은 것들을 늘어놓기 시작하는데,

솔직히 말해 추하기 짝이 없었다. 자기가 베토벤보다 음악을 잘 알아?

클래식은 베토벤이 최고야.

아무튼 완벽한 차, 완벽한 음악이 있으니 내 상황도 으레 그랬던 것처럼 완벽하면 좋겠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원인은 내 앞에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여자친구 때문이었다.

기껏 커피를 시켜놓고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인상을 쓰고 있는 꼴이라니. 카페에 왔으면 마셔야지. 고민을 하는 게 아니라.

"나 지쳤어. 이제 우리 그만 헤어져."

이제 여자친구가 아니게 되었군.

알았으니까 그만 일어나서 어디론가 가줬으면.

그것보다 이런 말이나 하려고 만나자고 한 건지. 그냥 전화나 문자로 해도 되는 일이지 않나?

내가 여길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 왜 하필 여기서 날 불쾌하게 만드는 거야.

"내 말 듣고 있어?"

"아, 응. 듣고 있지. 헤어지자며. 그래. 그동안 널 만나서 즐거웠어. 좋은 남자 만나길 바라."

"..."

내가 대답도 안 하고 찻잔만 바라보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녀는 내게 대답을 요구했다.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해 줬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헤어지자길래 헤어지자고 해줬더니 왜 넌 나처럼 후련하지가 않은 걸까.

"날 사랑하긴 했어? 너한텐 내가 생판 남이었던 거야? 어떻게 대답이 그렇게 쉽게 나오니?"

결국 이렇게 된단 말이지. 날 사랑하긴 했냐고? 너무 뻔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뻔한 질문이라고 대답도 뻔하게 하면 그건 병신 같은 대응이다. 여기선 이렇게 해야 한다.

"내가 널 사랑하긴 했냐고?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너야말로 날 사랑하긴 했어? 어? 넌 나한테 진심이었냐고."

아마도 그랬겠지. 먼저 고백한 것도 그녀였고, 어디 가자고 여행 계획을 짜서 오는 것도 그녀였고, 기념일을 먼저 챙기는 것도 그녀였으니까.

다 알면서 물어봤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진심...? 내가 너한테 정말 진심이었냐고...? 그걸 몰라서 물어?

창공아. 난 널 좋아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지금까지 너한테..."

"그랬으면 됐잖아."

나는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너는 대답을 하면 안 됐었어. 그냥 나갔어야지.

그랬으면 이런 일은 안 당했을 텐데.

그래도 괜찮지? 넌 날 불쾌하게 했으니까.

"네가 내게 고백했을 때, 난 받았어. 왜냐면 난 여자친구도 없었고, 네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도 없었거든.

네가 나와 같이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난 좋다고 했어. 스케줄도 딱히 없었고, 안 갈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것 말고도 모든 것들이 다 그랬었어. 넌 내게 잘해줬고, 나도 성실하게 너와 어울렸어."

"그건...! 그런 건 연인이 아니야. 내가 널 소중히 대해주는 만큼 너도 날 소중히 대해줬으면 안 됐었던 거야...?

창공아. 나 쓸쓸했어. 남자친구가 있었는데도 쓸쓸했다구.

네 태도 어딘가에서 날 사무적으로 대하는 느낌이 전해졌단 말야... 난 너를...!"

"마음은 강요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녀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래도 내게 잘 대해준 사람이었는데.

하지만 대부분의 관계는 언젠가는 끝나. 이게 너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럼 됐잖아. 넌 내가 남자친구이길 원했고, 너와 같이 다니길 원했어. 난 그걸 들어줬고.

내가 널 사랑했냐고? 그건 중요하지 않아. 네가 날 사랑했잖아. 그래서 넌 내 여자친구가 됐고.

그리고 오늘은 네가 내게 이별을 요구했지.

네가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도 네 남자친구일 이유가 없어."

"..."

"네가 그런 말을 꺼낸 이유를 알아. 마지막 기회였겠지. 네가 내게 헤어지자고 하면, 난 네게 사과하고 관계를 이어가려고 할까 봐.

내가 너에게 진심이 될까 봐.

하지만 관계의 지속에 그런 확인이 필요한 사이라면, 우리 사이는 이미 끝난 거야. 너도 알잖아."

나는 자몽티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아까보다 더 씁쓸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스무디를 시킬걸.

"그동안 즐거웠어. 다음엔 널 사랑해 주는 남자 만나길 바랄게. 진심이야.

...계산은 내가 할게."

마지막 찻값이야 내가 낼 수 있지.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찻잔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반쯤 줄어든 찻물 위에 자몽편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드니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내게 꿈처럼 왔던 그녀는 꿈처럼 사라졌다.이젠 다 식어버려 김도 올라오지 않는 커피 하나를 남기고.

내 자몽티는 아이스니까 당연히 처음부터 식어있었다.

너도 이제 식었구나. 뜨거웠던 너도 이젠 식었구나. 아이스 옆에 핫이 달라붙으니까 빨리 식어버린 거야.

하지만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당연한 법칙인데.

"난 널 사랑하지 않았어."

나는 이제야 그녀의 질문에 똑바로 대답했다. 그녀는 사라진 뒤였지만.

하지만 지금까지 이 질문에 난 성실히 대답해왔다.

여자에게 섹스는 사랑의 확인이라지. 지금까지 수십 번은 확인했지만 그래도 부족했던 걸까.

[O Freunde, nicht diese Töne!오 벗들이여, 이 소리가 아니오!Sondern laßt uns angenehmere anstimmen, und freudenvollere!좀 더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르지 않겠는가!]

4악장의 도입부가 다시금 반복되고, 베이스 독창이 그 유명한 합창 교향곡의 성악부 첫머리를 열었다.

이 다음부터 남자 합창과 베이스 독창은 환희를 외치며 주제부를 노래한다.

하지만 난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후우..."

흡연부스 안에는 나밖에 없었다. 잠시 동안 꿀꿀해졌던 마음은 니코틴의 도움을 받아 안정을 되찾았다.

여자친구ㅡ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ㅡ였던 사람은 날 떠났고, 다시 혼자가 되었지만 딱히 외롭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 인간관계는 어렸을 때부터 좁디좁은 우물과도 같았으니까. 좁으면서 깊지도 못한 우물 말이다.

물론 가끔 어울리는 친구라던가 선후배들은 있었지만, 오랫동안 알아 온 인간관계라고는 딱 셋뿐. 양친과 가정부 아주머니뿐이다.

그나마도 부모 되는 사람들보다 가정부 얼굴을 더 많이 보고 자랐다.

대학에 입학한 뒤로는 그나마도 통 보질 못했고.

부모는 둘 다 바쁘기로 소문난 특수부 검사라고 말은 들었는데 자기 자식에게 관심도 제대로 쏟지 못할 만큼 바쁜 걸까.

아무리 바빠도 이 정도는 아니었겠지. 가정보다 일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도대체 결혼은 왜 했는지.

"씨발."

순식간에 담배 두 개비가 사라졌다. 나는 흡연부스를 나와 걸었다. 그저 앞으로 걸었다.

캠퍼스를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다.

좋은 기억만 있었던 그 카페가 불쾌한 기억으로 덮어씌워지다니, 이제까지의 그 공간이 아니게 된 것만 같아 마음이 심란했다.

아니 대체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그쪽이 좋아서 왔고, 이젠 좋지 않아서 떠났을 뿐이다.

나도 안다. 나도 좋아해 줬다면, 더 배려해 줬다면.

어쩌면 그랬다면 우리의 관계는 더 밝게, 오래 지속되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오히려 사과받아야 하는 쪽은 나란 말이다.

일방적으로 제시된 인간관계에도 상대방의 성의를 봐서 어울려줬고, 내가 남자친구로서 할 최소한의 의무는 다했는데.

그래. 내가 네 첫 남자라서 아쉬웠는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런데 내가 네 처녀를 가져갔으면 평생 끌어안고 살아야 하기라도 하나? 처음 섹스한 상대방이 날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게 불법은 아니잖아?

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어.

내가 나쁘지 않은진 잘 모르겠어. 사실 그건 판단 불가능한 문제지.

하지만 넌 나쁜 사람이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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