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탈출
* * *
"극한 상황에서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때, 학생이라면 어떻게 하겠나?"
"법리적으로 판단했을 때, 죽여도 된다고 봅니다. 그것은 전장에서 적병을 죽인 병사에게 살인의 죄를 묻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 적의를 보이지 않는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가능성이 있을 때는 어떻게 행동하겠나? 그 확률은 짐작할 수 없네."
"가능성만으로는 섣불리 행동에 옮길 수 없습니다. 제게 협력할 수도 있는 사람을 위협이 될지도 모르니 죽이고 본다는 것은..."
몽펠리도 대학, 어느 교수와 학생의 문답 中
흔들리던 천지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은 것들이 더 많았다.
무너진 건물들,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사람들...
그래도 다행히 창공의 주변은 큰 피해가 없었다.
"다들 일어나요."
그는 머리를 감싸고 엎드렸던 주변 사람들의 등을 두드렸다. 다친 사람들은 없는 것 같았다.
탈출 기회일까? 창공은 고민했다.
지진 때문에 이 탄광을 둘러싸고 있는 방벽에 피해가 갔다면 탈출할 기회인 건 맞았다.
게다가 감시 인력들도 혼란스러울 테니까.
하지만 남들은 다 가만히 있는데 그들만 움직인다면 오히려 더 눈에 띌 것임이 자명했다.
게다가 지금은 해가 중천에 뜬 대낮.
아무리 혼란스럽더라도 탈출 시도는 너무나 튈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기회는 기회였다.
이제껏 지구에서 자유인으로 살다 영문도 모른 채 억압받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
지금까지 쌓여온 분노와 원한을 한 번에 폭발시킬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혼란을 틈타서 창공도 도망갈 수 있다면...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이 기회라고. 모두 어서 도망치라고 외치기 위함이었다.
지금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누군가 등을 밀어줄 사람이었으니까.
죽을 수도 있었지만 이런 기회가 왔음에도 도망치지 못하느니 차라리 죽고 만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소리치려는 그 순간.
"여기 방벽이 무너졌어! 모두 도망쳐어어어!"
저쪽 어디에서 누군가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저앉은 채로 멍하니 주위만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달리고 싶던 사람들에게 등을 밀어주니, 미친 듯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만! 돌발행동은 용납하지 않는다! 모두 자리에서 대기... 끄아악!"
"이 씨발 새끼!"
사람들이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감시원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사람들을 제지하려 했지만, 본디 쪽수가 밀렸던 그들은 군중을 억제할 수 없었다.
공포에 의한 통제는 공포보다 더 큰 분노 앞에서 무력했다.
"택이 형, 나유 씨. 지금이에요. 우리도 도망치죠. 아린 씨. 정신 차려요."
"아... 앗, 넵!"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어택, 아드레날린이 도는지 고조된 얼굴로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는 나유, 제 손으로 두 뺨을 탁, 치며 정신을 차리는 아린.
그런데 여기엔 그들 말고도 한 명이 더 있었다.
"사... 사람 살려요..."
"음?"
그러고 보니 십장 고다 히사시도 여기 쌓여있었던 폐석 무더기에 등을 기대고 서있었더랬다.
지금 보니 돌무더기는 무너지고, 히사시는 그 아래에 깔린 상태였다.
혼자 힘으로는 나올 수 없어도 잡고서 함께 끌어당기면 빠져나올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저 새낀 무시하죠."
그러나 창공은 깔끔하게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히사시가 딱히 그들에게 못살게 군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잘해준 것도 아니었고, 어차피 저편에 붙어먹었던 존재였다.
같은 지구인이면서 이세계인들에게 붙은 대가를 지금 치를 뿐이라고 생각했다.
'죽던지 말던지.'
그리고 그런 생각은 어택과 나유도 비슷한 것 같았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구해주면 안 될까요? 어쨌든 같은 지구인이잖아요. 넷보단 다섯이 더 나을 거예요."
아린이 창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짜증이 확 피어났다.
그러나 그 짜증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어지는 그녀의 말 때문이었다.
"물론 저도 저 사람이 그렇게 좋게 보이진 않아요.
하지만 이대로 버리고 가면, 우리에 대해 누설할 수도 있어요."
머릿속이 꽃밭으로만 가득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납득은 갔다. 하지만 굳이 구할 필요가 있을까.
히사시는 십장 자리에 앉음으로써 이미 지구인들을 한 번 배신한 셈이 아닐까?
말하자면 그는 창공에게 있어 위험분자였다.
'죽일까? 죽여야 하나?'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바로 단념했다. 지금 일행들과 같이 탈출해야 하는데, 사람을 죽이게 되면 시작이 너무나 좋지 않았다.
게다가 살인은 집 앞 편의점에 가서 담배를 사는 것과 같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젠장... 어쩔 수 없지."
시간이 없었다. 결정은 빨리 내려야 했다.
"야. 우리가 꺼내줄 테니까 허튼 생각하면 살아남긴 틀린 줄 알아.
여기 중에서 너 하나 없어진다고 아쉬워할 사람 없어. 알았냐?"
"네! 네! 명심하겠습니다!"
"너 같은 새끼도 일이 이렇게 되니까 탈출하고 싶은가 봐?"
창공은 그렇게 히사시를 비꼬면서도 어택에게 눈짓을 했다.
어택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창공의 맞은편에 서서 히사시의 팔을 잡았다.
나유와 아린은 그들이 히사시를 더 쉽게 꺼낼 수 있도록 그의 위에 쌓인 돌들을 잡아 주변에 던졌다.
"흐으으읍!"
넷이서 합동 작전을 펼치니 히사시는 의외로 어렵지 않게 끌려 나왔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절대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절대 잊지 않아야 할 거야."
고개를 수없이 숙이는 히사시에게 창공은 이글대는 눈빛을 한 번 보여주고는 다시 일행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우리도 탈출하죠. 빠르게."
"어느 쪽으로요...?"
나유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에도 이 부분에서 대화가 끊겼었다.
산 쪽인가, 그 반대쪽인가. 창공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서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산 쪽으로."
"하지만 그쪽은 사람들이 도망간 곳과 반대인데..."
"맞긴 한데. 시간 없으니까 가면서 설명하죠. 잘 따라와요."
설명할 시간도 없었다. 갑자기 터진 상황이니 만큼 일단 사람들을 이끌어야 했다.
납득은 천천히 시키면 되니까. 창공은 주위를 살피면서도 작고 분명한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감시인들은 다행히 보이지 않았다. 인력은 사람들이 대거 탈출한 쪽에 집중되었으리라.
"탄광만 탈출한다고 끝이 아니에요.
내 생각엔 분명 바깥에 있는 이쪽 사람들도 우릴 노예 비슷한 존재로 보고 있을 건데, 그럼 평야로 도망가 봤자 어차피 글러먹었단 거예요.
우리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이 없을 테니까."
"아..."
"또 우리는 지리도 모르고, 두 다리로 도망쳐야 하는데 분명 저놈들은 지리도 잘 알겠죠.
또 여기 기술 수준이 얼마나 되는진 모르겠지만 분명 이동 수단이 있을 거 아닙니까.
제 생각엔 평야로 도망치면 금방 잡혀요. 산이라고 안전하진 않겠지만 더 나은 쪽을 택한 겁니다."
"사람들한테 알려줬어야 했는데... 산으로 가자고..."
아린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정말로 아쉽다는 듯 주변을 둘러봤지만 보이는 사람들은 없었다.
전부 평야 쪽으로 도망간 것 같았다.
"아린 씨. 다시 말하지만 우리라고 안전한 거 아니에요. 일단 우리가 사는 거에 집중해야죠."
"그래도..."
아린은 무어라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창공은 불만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선 대놓고 악을 추구할 필요는 없었지만, 자기 목숨 건사도 못 하면서 선을 추구하려다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의 생각에 아린은 그럴 위험이 일행들 중에서 제일 높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일은 벌어지고 일행은 구성되었다. 지금 와서 갑자기 버릴 수도 없었다.
"아, 여기도 무너졌다. 감시원들은 안 보이네."
어택이 무너진 방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평소에 방벽을 수비하던 병력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이쪽은 산이라 감시도 반대편에 비해 느슨했었다.
창공은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까지는 일이 잘 풀렸으니까.
"속도를 더 높이죠. 일단 빨리 숲속으로 들어가야 돼요."
창공은 그렇게 말하며 발걸음 속도를 거의 뛰기 직전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다른 일행들도 그를 따랐다. 심장이 강하게 뛰고 몸에서 땀이 쏟아졌다.
방벽! 이세계로 넘어와 그들 세상의 전부였던 방벽을 지금 넘는 것이다.
이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 희망만이 아니라도 좋았다.
적어도 지금의 삶만 아니라면. 미래, 희망, 자유... 모든 것이 그 방벽 너머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방벽을 넘었다. 무너진 벽의 틈새 사이로.
나유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방벽 안의 공기와 바깥의 공기가 다르게 느껴진다면 믿겠는가? 숨이 너무 달았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난 것만 같았다.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어떤 기운. 함성으로 내뱉지 않고서는 몸이 터질 것만 같은 이 느낌. 참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다.
다른 일행들도 그건 비슷한 것 같았다. 다들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보단 더 자유와 권리를 누렸을 히사시마저도.
하지만 선두에 있는 창공은 아니었다. 빼앗기면, 죽으면 자유도 끝이었으니.
다행히 탄광을 둘러싼 산이 깎아지른 절벽은 아니었다.
완만하진 않지만 올라갈 수는 있는 경사였다. 나무 틈새 사이로 탄광이 보였지만 그 누구도 돌아보진 않았다.
전혀 섭섭하지 않았고, 영원한 이별이길 바랐으니까.
아니, 나유는 뒤를 돌아보았다.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올리며 팔뚝을 탁, 치는 게 별로 좋은 감정은 아닌 것 같았지만.
창공은 그녀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한 번 정리하죠. 우선 정상은 아니더라도 이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위치가 나올 때까지 산을 오를게요.
포지션도 한 번 잡고. 여기서 운동해보신 분?"
창공은 자기도 손을 들며 말했다. 어택과 나유가 손을 들었다.
아린은 각오에 찬 표정으로 창공을 바라봤지만, 히사시는 벌써부터 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있었다.
"일렬로 산을 오를 거고... 택이 형. 맨 뒤에서 와주실 수 있나요?"
"응."
어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행군은 모두가 힘들지만 속도 조절을 할 수 없는 최후방이 제일 힘들다고 얼핏 들은 적이 있었고, 그래서 가장 체력이 좋은 어택을 맨 후위에 세운 것이었다.
또한 군인이었으니 만약 뒤에서 추적대가 붙는다면 그 기척을 더 잘 알아챌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다음 순서로는 나유였다.
얼마나 운동을 했는진 모르지만 어쨌든 했다니 후미는 후미이되 어택 바로 앞에 세우게 되었다.
중간에는 히사시였는데, 일단 딱 봐도 그렇게 탄탄한 몸은 아닌 데다가 배신 가능성도 있는 위험분자였다.
적어도 창공에겐 말이다. 따라서 감시가 제일 용이한 중간에 그를 배치했다.
아린은 그런 히사시 앞이었다.
일단 일행들 중에 제일 체력적으로 부족하니 앞쪽에 서야 했고, 또 히사시를 바로 창공 자신의 뒤에 붙이기엔 히사시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다.
이 위치에서 그냥 아린이 잘 버텨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맨 선두는 창공이었다. 그가 일행을 이끄는 모양새였으니 맨 앞에 서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길은 모르지만 그건 나머지 일행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자기 위치가 마음에 안 드는 분?"
쉽게 바꿔줄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창공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렇게 물었다.
만족스럽게도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가겠습니다. 들켰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추격대가 언제 따라붙을지도 모르고, 일단 이 근방에서 빨리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지간해선 휴식하지 않을 테니 잘 붙어주길 바랍니다. 후방에 있는 분들은 앞사람이 힘들어하면 밀어주시고요. ...출발."
창공은 말을 마치고선 바로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기온은 높았지만 그래도 바람이 간간이 불어와 땀을 식혀주었고, 우거진 나무들은 적당한 그늘을 만들었다.
하지만 본디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이기에 등산의 난이도는 높았다.
"후우... 하으으..."
20분쯤 산을 탔을까. 뒤에서 아린이 거칠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산세가 거칠었지만 그녀는 불평 없이 잘 따라오고 있었다.
창공은 간간이 뒤를 돌아보며 일행들 상태를 체크했는데, 아린은 힘들어하면서도 결연히 창공의 뒤에 따라붙었다.
적어도 그녀의 그런 점은 마음에 들었다. 힘은 없어도 근성은 있었으니까.
나긋나긋한 몸이나 생각으로 볼 때 온실 속의 화초인 줄로 알았는데, 의외의 면모도 있었다.
문제는 히사시였다. 그의 체력은 아린급이면서 근성은 그녀보다 훨씬 뒤떨어졌다.
"허억... 허억... 우으윽..."
"어이, 앞에! 빨리 따라붙어야지!"
히사시는 수시로 걸음이 느려졌고, 그럴 때마다 나유가 뒤에서 그의 등을 치며 재촉했다.
그녀는 운동해봤냐는 질문에 괜히 자신 있게 손을 든 게 아니었던지 아직까지 호흡이 크게 거칠어지진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히사시가 자꾸 앞에서 뭉그적댄다면 체력 소모가 커질 수 있었다.
그래도 제일 힘든 건 어택이었다.
속도를 일정하게 가져가지 못했고, 자길 거기에 배치한 창공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고선 수시로 뒤를 바라보며 추격대가 따라붙지는 않는지 확인했다.
어쨌거나 창공은 완전하진 않아도 자기 생각대로 돌아가는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솔직히 말해서 기대 이상이었다. 자신과 어택의 체력에 대한 확신이야 있었고, 나유는 만족스러웠고, 아린은 예상치도 못한 근성을 보여주었으니.
히사시? 그는 그냥 큰 말썽만 안 일으키면 그만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객원 멤버였으니. 어쨌든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아 그는 속도를 계속 유지했다.
"저기... 후우... 서 상...?"
"뭐야."
얼마나 더 걸었을까. 뒤에서 히사시가 창공을 불렀다.
"조금만... 쉬면 안 되겠습니까?"
"어지간하면 안 쉰다고 했을 텐데. 그래도 쉴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니까 조금만 참아.
아니면 뭐 문제라도 있어?"
"예... 그게 사실은 발목이 조금..."
"돌아버리겠네."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걸 데려왔더니 문제까지 생겼다.
창공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찡그린 표정으로 히사시를 바라봤다.
"진짜 못 참겠어? 아니면 지금은 어떻게든 참을 수 있어? 확실히 말해. 어차피 쉬긴 쉴 거니까."
"...참아보겠습니다."
"그래?"
창공은 일행들의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히사시는 참는다고 했고, 후방의 어택과 나유는 아직까진 상태가 괜찮은 것 같았다.
아린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으로 가득 젖어있었다. 탄광에선 아슬아슬하게 보이던 하얀 블라우스 안에 입은 브래지어가 그대로 비쳐 보일 정도로.
하지만 힘들다는 내색 하나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 출발."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출발 신호를 보냈다. 사실 무리하고 있긴 했다.
시계를 슬쩍 보니 출발하고 나서 1시간이 조금 지나 있었는데, 지구에서의 일반적인 산행 1시간보다 훨씬 가혹한 조건이었다.
혹사에 가까운 노동을 수개월 동안 했었고, 그러는 동안 마음껏 먹은 적도 없었다.
급하게 탈출했으니 마실 물을 담을 병도 챙기지 못해 물 한 모금 못 마셨고, 산행도 등산로를 타는 게 아닌 완전히 자연 그대로의 산을 타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평소에 운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힘든 소리 한 번 안 하는 아린이 대단한 거지 히사시가 크게 모자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게 아니겠는가.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창공이 그 짜증을 겉으로 표출하지는 않았다.
일행을 이끄는 건 그였고, 이런 상황에는 그의 책임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산이니 작은 계곡이나 실개천이라도 있으면 했는데...
어쨌든 굳이 산으로 일행을 이끈 이상 물과 식량을 구하지 못해 일행의 체력을 완전히 방전시킨다면 그건 창공의 책임이 컸다.
'형편 좋게 민가라도 하나 안 나타나나...'
가능성은 낮았지만 그런 기대가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민가 안에 사람이 있다면 순순히 협력할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으니 강제로 빼앗아야 하리라.
그런 상황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일행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쩌겠는가.
그런데, 앞에 보이는 나무들 사이로 빛이 더 강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창공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자세히 보니, 전방에 공터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속도를 늦추며 시선을 앞에 고정한 채 일행에게 말했다.
"천천히 걷겠습니다. 앞에 공터가 있는 것 같은데, 제가 신호할 때까지 절대로 소리 내지 마세요. 대답도 하지 마세요."
"..."
멍청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대답할 힘도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혹여 공터에 무언가가 있다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었다.
테이블 위에 정찬이 마련되어 있더라도 적대적인 누군가가 있다면 다 소용없었으니.
"자세 낮춰요."
일행들은 네 발로 기었다. 히사시가 흡, 하고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자세의 변경 때문에 발목에 느낌이 온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몸을 숨겨야만 했다. 정말로 공터가 있었고, 나무들 사이로 공터에 설치된 텐트들이 보였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