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 탈출 (2)
* * *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타인이란 전혀 반갑지 않은 존재였다.
적어도 창공에겐 말이다. 이제까지의 노예 노동과 산행으로 지친 그들은 적개심을 가지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의 흔적이 있다는 것은 유용한 무언가를 얻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당장에 제일 급한 건 물과 식량이었다.
무기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지도 등은 그다음의 일. 이것은 기회인가, 위기인가? 그 둘이 혼재되어 판단할 수 없었다.
"텐트... 이런 산중에..."
아린이 간신히 들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를 포함해 다른 사람들도 텐트를 보았지만, 왜 이렇게 풀숲에 숨어있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도 이것이 마냥 좋은 상황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돌아서 갈까?'
창공의 머릿속에서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 기회가 너무나 아쉬웠다.
"창공아."
어택이 그를 불렀다.
"텐트 크기랑 숫자로 볼 때, 저쪽이 여럿이라면 인원수는 우리랑 비슷하거나 한두 명 더 많은 수준이야.
만약 저쪽에서 적대적으로 나온다면, 우린 이길 수가 없어.
이런 산중에서 야영을 한다면 무기도 가지고 있을 테니까."
"네."
"그렇다고 돌아서 가기엔 너무나 아까워.
앞으로 얼마나 더 산행을 할지도 모르는데, 분명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물자가 있을 거야."
"형 생각은 어떤데요?"
"나는..."
망설임 끝에 머뭇거리며 대답이 나왔다.
"다른 사람들 의견도 한 번 물어볼까.
일단 의견 취합부터 해 보자. 나유랑 아린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저도 잘..."
"..."
나머지 인원은 판단할 정신도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 무리를 이끌고 있는 건 창공이니 어떤 것이든 최종적으로 그가 결정할 거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창공은 희미하게 웃었다. 정답을 알 수 없는 지점에서 강요되는 선택.
이런 상황에서 빠르게 답을 내리는 건 그의 특기 중 하나였다.
책임을 지운다? 지우는 만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대가를 취한다.
"텐트 안을 확인하기로 하죠."
그는 재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일행들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가득 물들었다.
하지만 그에게 반대나 우려를 표하는 의견은 없었다.
당연했다. 그들은 창공의 선택을 따르기로 했었으니까.
"다만, 무작정 가진 않을 거고... 다들 땅에 바짝 엎드려요."
창공은 한 번 주위를 확인한 후, 휘파람을 짧게 불었다.
삐익!
아드레날린이 온몸에서 분비되어 혈관을 질주하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잠시 멈췄던 땀이 머리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텐트 안에 사람이 있다면 반응할 법도 했다.
하지만 주변은 휘파람을 불기 전과 마찬가지로 조용했다.
대담해진 창공은 방금 전보다 더 길고 크게 휘파람을 불었다.
삐이익!
사람이 낸 것임이 분명한 소리가 충분한 크기로 울려 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갑시다. 확인하러. 정신 바짝 차리고."
일행은 풀숲에서 완전히 일어나 공터로 나섰다.
한 사람이 들어갈 법한 텐트가 총 3개, 2인용 텐트처럼 보이는 것이 2개가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떤 텐트는 한쪽 면이 갈기갈기 찢어져있었고, 또 어떤 텐트는 지지대가 부러져 반쯤 주저앉아 있었다.
모닥불을 피웠는지 타다 만 장작과, 바닥엔 화살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늘어졌고, 검집에서 완전히 뽑히지도 못한 검과... 그리고...
"아...!"
히사시가 놀란 기색으로 숨을 들이켰다.
창공은 설마 발목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건가, 싶어서 돌아보니 히사시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입을 가리고 있었다.
혈흔. 그리고 무언가가 질질 끌린 흔적.
"저... 저..."
"입 다물어."
창공은 무언가 말하려는 히사시를 제지했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그건 확실해.
그리고 우리가 그 일을 저지른 놈들에게 들켰다면, 이 공터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미 들켰겠지.
놀라도 늦었으니까 소리 지르지 마."
에둘러서 말했지만 진정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미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그의 말은 히사시에게 썩 위로가 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나마 벌벌 떨고는 있어도 소리는 지르지 않았다는 게 대견하다고 해야 할까.
그때, 어택이 히사시를 지나쳐 바닥에 흩뿌려진 혈흔에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바닥을 후후 불기도 했고, 또 혈흔에 손가락을 갖다 대어 무언가를 확인하기도 했다.
"말랐나요?"
아린은 그런 어택의 의도를 파악한 것 같았다. 창공도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말라있어. 시간이 좀 지난 것 같아."
"그나마 위안이 되네요."
아린이 손을 가슴에 갖다 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마 동물 발자국 같은 게 찍혀있어.
크기는 아주 크진 않아... 10cm가 조금 안 되려나. 발가락 네 개에 발톱..."
"무슨 동물인진 알겠어요?"
"아니. 동물은 잘 몰라. 어쨌든 사람을 습격할 수 있는 맹수가 이 산에 사는 것 같아."
묵묵히 아린과 어택의 대화를 듣던 창공이 불쑥 말했다.
"늑대 아니려나."
"늑대...?"
나유가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작다면 곰이나 호랑이는 아닐 테고.
그 외에 산에 살면서 사람을 사냥할 수 있는 맹수라고 하면 늑대겠죠.
적어도 내가 아는 바로는 그런데. 혹시 다른 의견 있는 사람?"
"..."
반박은 없었다.
"뭐, 좋아요. 택이 형. 발자국이 몇 개나 찍혀 있어요? 더 끌린 자국은 없어요?"
"어... 꽤 여러 개. 끌린 자국은 글쎄. 찾아봐야 알겠지만 일단은 이거 하나려나."
"그럼 한 마리는 아니지만, 사람 여럿을 끌고 가서 먹어치울 정도로 수가 많은 건 아니라는 건가?"
창공은 더 생각했지만 딱히 뭔가가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정보가 부족했다.
"잠깐만."
나유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텐트들을 돌아봤다.
"늑대들이 습격했는데 끌려간 게 한 사람이라고 치자고요...
그런데 여긴 아무리 봐도 한 사람이 야영한 곳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럼 다른 사람들은... 설마...?"
그녀는 그다음으로 말을 잇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시선이 그것을 대신했다.
"어쨌든, 텐트 안은 확인 한 번 해봐야 되니까. 자신 없는 사람은 주변 경계하고 있어요."
창공은 그렇게 말하고선 가장 가까운 텐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택도 마찬가지. 나유도 머뭇거리며 동참했는데, 의외로 아린도 확인 작업에 참여했다.
남은 건 얼굴이 하얗게 질린 히사시였지만 그에게 무어라 하는 사람은 딱히 없었다.
과연 텐트 안에는 시체가 있었다. 자다가 습격당한 것인지 모포를 덮고 살해당한 시체에는 선명한 이빨 자국과 선혈이 낭자했다.
'파리가 날리지는 않으니 그렇게 오래된 시체는 아닌가. 냄새도 심하지 않아. 어젯밤 습격당한 건가?'
창공은 시체에 관심을 떼고 뭐 챙길 만한 것이 없나 텐트 안을 둘러봤다.
피 묻은 모포는 그다지 챙겨가고 싶지 않았다.
찝찝해서가 아니라 피 냄새 때문에 짐승들을 불러 모을까 걱정돼서였다.
그 외엔 단검이 좀 쓸만했다. 집어 들어 뽑아보니 반짝반짝 빛나는 양품이었다.
마침 허리에 둘러서 채울 수 있는 홀스터도 있어 창공은 그것도 챙기고 텐트를 나섰다.
"그쪽은 어때요?"
마침 확인이 끝났는지 저쪽에서 어택이 텐트를 나오고 있었다.
"한 구 있었어. 가죽으로 된 물병도 있길래 챙겼고."
"좋네요. 안에 물은요?"
"묵직해. 가득 찬 것 같아. 아마 물을 데운 다음 끌어안고 자려고 했던 게 아닐까."
"끓인 물이면 더 좋죠. 마실 수 있는지 한 번 확인해 주실래요?"
"알았어."
아린도 텐트 안에서 물병을 발견했다. 어택이 찾았던 것처럼 안이 가득 찬 물병이었다.
"나유 씨. 그쪽은요?"
"여긴 좀 이상한데요. 뭐랄까. 사람이 잔 흔적은 있는데 막상 사람이 안 보이네요."
"도망친 건가? 아니면 이 주변 어딘가에서 죽었을 수도 있죠."
"음. 그... 렇겠죠?"
나유는 찜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쨌든 이 안에 육포도 있네요. 물병은 있는데, 비었어요."
"육표 좋죠. 일단 챙겨 줘요."
수확은 나쁘지 않았다. 이제 확인되지 않은 텐트는 2인용 텐트 단 하나뿐이었다.
"저기... 이번엔 제가 들어갈까요?"
히사시가 저만 혼자서 있기 미안했는지 다가와 물었다. 창공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는... 없네요. 오, 가방이 있어요.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텐트 안에서 히사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창고 비슷한 곳이었나 보네요. 활이랑, 화살... 악기까지."
"알았으니까 일단 좀 꺼내 봐."
창공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히사시에게서 물건들을 건네받아 바닥에 늘어놓았다.
활의 크기는 대략 1.6m 정도.
전형적인 리커브 보우였다. 활과 화살은 당연하게도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건 제가 챙기죠."
"쏠 줄 아세요?"
"아마추어 양궁 대회 나가서 우승도 했어요."
나유의 질문에 대답한 건 엉뚱하게도 아린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이자, 아린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게... 학부 건물에 플래카드 보고서..."
"그런 게 걸리긴 했죠."
창공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며 활을 구부리고 시위를 잡아당겼다.
굽어있던 활대가 반대로 굽어지니 익숙한 활 모양이 드러났다.
시위를 거는 건 더럽게 힘들었다. 창공이 쓰던 경기용 활과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게, 스포츠용 활과 병기용 활은 당연히 차이가 났다.
그는 시험 삼아 시위를 쭉 당겨봤는데, 대단히 묵직하긴 했지만 만작??은 가능했다.
그럼 쏠 수도 있단 말이었다.
"야. 다른 건 없어? 핑거탭이나, 아대 같은 거."
"핑거탭... 이요?"
"오케이. 수고했어. 나와 봐. 그동안 찾은 것들 꺼내고. 내가 들어가서 확인할 테니까."
창공은 히사시를 텐트 밖으로 내보내고 자신이 직접 들어갔다.
핑거탭은 보이지 않았다.팔뚝에 차는 아대도 마찬가지였다.
시위가 스치면 더럽게 아플 테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이렇게 수색이 종료되었다.
물병은 총 세 개가 발견되었다. 두 개가 꽉 차있었는데, 확인 결과 마실 수 있는 물이었다.
다섯은 물부터 나누어 마셨지만 오직 한 사람에 두 모금뿐이었다.
식량은 육포뿐이었는데, 아껴서 먹는다면 사흘은 먹을 수 있을 법한 양이었다.
다음으로는 단검과 홀스터 네 개. 히사시를 제외한 모두가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그에게 돌아가는 무기는 없었지만, 그는 감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직까지는 그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고 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검은 나유의 차지가 되었다. 검을 쓸 줄 아냐고 물어본 일행의 질문에 그녀는 당당하게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튼 휘두르면 되는 거 아닌가요?"
납득은 안 갔지만 무기가 필요하긴 했으니 말리기도 뭐했다.
창공은 내심 그 검을 어택이 잡길 바랐지만, 어택은 자긴 검보단 몽둥이가 좋다며 철제 부지깽이를 손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아린은 마지막 텐트 안에서 발견된 악기를 집어 들었다.
바이올린 비슷하게 생긴 현악기였다. 활도 곁에서 발견되었다.
"악기는 뭐 하려고..."
"바이올린 켤 줄 알거든요. 뭐... 이게 바이올린은 아닐 테지만요.
어차피 전 검도, 활도 휘두를 줄 몰라요. 무기를 들어도 도움 안 될 거고요."
"음... 그래도 그렇지."
"걱정 마세요. 위급하면 이거라도 휘두를 거니까."
불만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따로 그녀에게 쥐여 줄 무기도 단검 외에는 없었고.
그리고 창공은 그 불만과 실망을 굳이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정말 어쩌면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 때가 올진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모닥불 근처에 이리저리 널려있었던 화살들도 주워 담아 화살통을 가득 채운 창공은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아직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럼 빨리 출발하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산행은 계속 이어졌다. 경사도 계속 일정했다.
히사시는 방금 전보다는 나은 표정이었는데, 텐트를 찢어서 그의 발목에 묶어서 응급조치를 했던 게 통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무기라고 들고 있으니까 좀 안정이 되는 것 같네."
나유가 혼자서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무기를 갖추니 불안감이 약간은 해소되는 것 같았다. 더럽게 무겁긴 했지만.
게다가 물과 식량도 조금이지만 얻었다. 별거 아니었지만 방금 전보다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의외로 희망이란 사소한 것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에고. 그나저나 이 검 생긴 것보다 무겁네.
차라리 택이 오빠처럼 부지깽이나 잡는다고 할 걸 그랬나. 그건 짚을 수라도 있지."
"바꿔줄까?"
"아뇨아뇨! 바꿔달라는 말은 아니고."
힘들 법한데도 나유는 쉴 새 없이 조잘댔다. 창공의 머릿속에선 점점 그녀에 대한 이미지가 상승하고 있었다.
경박한 면은 있었지만 일행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녀도 어택처럼 그가 기대한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린과 히사시는 어떤 기능을 할 수 있을까.
정 시킬 게 없다면 잡부로라도 써먹어야 하는데... 일단 지금 이것을 판단하기엔 이른 감이 있었다.
그때, 창공이 발을 멈추고선 손을 들어 올렸다. 일행들이 그의 신호를 보고선 곧바로 정지했다.
'너무 늦게 알아차렸어...'
창공은 저 앞쪽에서 뭔가가 풀숲을 헤치며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심지어 그것은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른 일행들도 알아차렸는지 긴장한 얼굴로 손에 힘을 꽉 주었다.. 히사시는 그게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화살이 화살통에서 소리 없이 빠져나오고, 노크가 시위에 걸렸다.
이 활로는 한 번도 실사격을 한 적은 없었지만 근거리라면 맞출 자신은 있었다.
그런데, 이윽고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무언가는 맹수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어...?"
풀숲 사이로 나타난 건 바구니를 등에 메고 있는 노인이었다. 아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창공은 끝까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저 노인이 어떤 노인인 줄 알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