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9화 (9/178)

〈 9화 〉 탈출 (4)

* * *

해는 서쪽으로ㅡ이 세상에서도 해가 서쪽으로 진다면ㅡ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해가 빠르게 지는 만큼 달도 빠르게 어둠을 몰고 맹추격을 펼쳤다. 산에서 밤의 장막이 드리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창공이 오늘의 목적지로 삼은 곳은 산의 정상, 혹은 그 부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용케도 그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어느 순간 탁 트인 개활지가 그들을 맞이했고, 칼날처럼 솟아오른 능선 아래 구름과 세상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큰 산맥이었군요..."

풍경을 보던 히사시가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그들이 오르던 곳은 탄광 뒷산 정도가 아니었다.

앞에 펼쳐진 능선은 이쪽에서 저쪽까지, 끝 간 데를 모르고 쭉 이어져있었다.

오른 편으로 이어진 능선은 그들이 있는 곳과 높이가 비슷했으나, 왼편으로 이어진 능선은 오르막이 점점 험해지다가 눈이 쌓인 봉우리로 향했다.

정말인지 하늘이 도왔다고 밖엔 할 수 없었다. 산으로 향한다는 것 외엔 무계획이나 다름없었던 창공의 탈출 계획이었다.

만약 그들이 오르는 산의 정상이 눈 덮인 봉우리였다면, 그들은 넘는 것은 고사하고 생존의 시험장에서 버티지 못하고 죽었으리라.

창공도 그것을 깨닫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저 아래가 우리의 목적지가 되겠네요."

그가 저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늘이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평야에 펼쳐진 밭과 마을, 그리고 솟아오른 성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일행은 괜히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곳에 가면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도 탄광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나유는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들이 온 트리스카 방향이었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추격대가 그들의 뒤를 쫓고 있다는 낌새는 없었다.

"그럼 야영 준비를 하죠. 마침 저기 딱 좋은 장소가 있으니까... 고다. 너는 이 근처에서 마른 나뭇잎을 주워서 가방 안에 가득 담아서 와.

택이 형이랑 나유 씨는 마른 나뭇가지 한 아름 주워다가 오실 수 있나요? 너무 작은 것만 주워오지는 마시고. 혹시 모르니까 셋이 같이 움직이세요."

셋은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호명되지 않은 아린이 창공에게 자긴 뭘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아린 씨는 저랑 같이 야영지 정리하러 갑니다."

아직까지 바람이 심하게 불진 않았지만 한밤중이 되면 어떻게 될진 알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침 딱 좋게 눈에 들어온 곳이 하나 있었다.

높이가 3m는 족히 되는 매끈하고 커다란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서있었고, 그 가운데에 5명은 충분히 누울 법한 공간이 있었다.

바위는 바깥쪽으로는 매끈하고 가팔랐지만 안쪽으로는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턱이 있어서 위로 올라가 주변을 둘러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바위 위엔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어 한 사람이나 간신히 올라갈 정도였다.

"삽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야영지에 도착한 창공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활과 화살통을 몸에서 내려놓아 바위에 기대어 놓았다.

물론 시위는 활대에서 풀어두었다. 아린도 마찬가지로 악기와 활을 창공의 물건 옆에 내려놓았다.

"음... 낙엽들은 굳이 치울 필요 없겠죠?"

"네. 아린 씨는 저기 중앙 부분에 한 2에서 3미터 정도 직경의 원을 그린다고 생각하시고, 그 안쪽에 불이 붙을 만한 것들은 다 치워주세요."

"거기 모닥불을 피울 건가요?"

"그렇죠. 불이 붙는다면 말이지만."

그렇게 야영지를 정리하고 있으려니, 보내놓았던 세 사람이 돌아왔다.

히사시는 가방 안에 마른 나뭇잎을 꽉 채워왔고, 창공은 이것을 바닥에 깔아 조금이라도 냉기가 올라오는 것을 막을 생각이었다.

캠프에서 발견했던 모포가 못내 아쉬웠지만 짐승이 접근할 위험을 끝내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택과 나유는 센스 좋게도 여러 크기의 나뭇가지들을 끌어안고 왔다.

처음에 불을 피우려면 작고 가는 나뭇가지들이 좋겠지만, 오래가는 불을 피우려면 굵은 나무토막이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불은 어떻게 피우면 좋을까... 막 이렇게 이렇게 비벼서?"

나유가 양 손바닥 사이에 나뭇가지를 끼우고 손을 비비며 말했다.

창공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어택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어려워. 대신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예전에 산 위에서 재미로 해봤는데..."

그는 주머니에서 마른 침엽수의 잎을 한 움큼 꺼내 손으로 비벼 뭉친 다음, 살짝 평평하게 생긴 나무토막의 단면 위에 올려놓았다.

"원래는 휴지로 하는 건데 이게 잘 될지 모르겠네."

"안 되면 어쩔 수 없으니까 일단 해 보죠."

어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나무토막을 한 손으로 잡고 땅 위에 놓인 나무토막 위를 세게 비볐다.

한 10초쯤 비볐을까, 어택은 잡고 있는 나무토막을 들어 이파리 뭉치의 상태를 확인했다.

미약하지만, 분명히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

일행들이 흥분에 젖었다. 설마 한 번에 성공하는 것인가?

어택은 주머니에서 침엽수 이파리를 더 꺼내 연기가 나는 이파리 뭉치와 합쳐서 약하게 숨을 불어넣었다.

연기가 더욱더 올라오기 시작했다. 흥분도 그만큼 더 커져만 갔다.

이윽고, 어택의 두 손 위에 올려진 마른 이파리 사이로 불길이 올라왔다.

그는 재빨리 그것을 땅 위에 올려놓고선 주머니에서 마른 이파리를 꺼내 투하했다.

"나뭇가지! 작은 것부터 그 위에 올려놔요!"

창공이 급한 목소리로 나유를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나뭇가지들을 가리켰다.

멍하게 있던 나유가 황급히 불길 위에 나뭇가지들을 올려놨다.

처음에는 미약했던 불길이 나뭇가지들을 불사르며 만족할만한 크기로 그 세력을 키웠다.

일행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형제자매였다.

"제... 제가 나뭇가지들 더 주워오겠습니다!"

"다녀와. 큰 놈들로!"

"네!"

창공이 기분 좋게 히사시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에 대한 증오를 거둔 건 아니었지만 지금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고, 괜히 좋은 분위기를 깰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들은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두 다리를 끌어안았다.

불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심리적인 안정감을 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다들 어딘가 꿈결 같은 눈길로 불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을 좀 끓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린이 중얼거렸다. 따뜻한 물이 몸 안에 들어가면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된다.

물 끓이는 도구를 캠프에서 챙겨올 수 있었지만, 최소한의 체력 소모로 산을 주파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창공은 그러지 않았다.

일행들은 지금 상황에서 그것이 아쉽긴 했지만 그의 판단을 이해하기에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뭐 먹고 싶어요? 다들."

나유가 불쑥 내뱉은 말에 다들 그녀를 바라봤다. 나유는 자기에게 쏠린 시선을 알아채고는 싱긋 웃어 보였다.

"저는 치킨이랑 맥주. tv에 야구 틀어놓고 소파에 기대서 닭다리 크게 한 입 물고, 냉장고에서 막 꺼낸 맥주 한 모금..."

"아... 그거 알지..."

어택이 육포를 씹으며 홀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른 일행들도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바삭한 튀김옷이랑 팡팡 터져 나오는 육즙... 목구멍 따끔하게 찌르는 얼음장 같은 맥주면... 크으... 못 참겠다. 다시 먹을 수 있겠지...?"

"되겠죠."

창공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정말요?"

"치킨이야 뭐... 닭 구해서 튀기면 되는 거고.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맥주도 있지 않을까요.

저 아래에 성 보셨죠? 그거랑 우리가 탄광에 있을 때 감시자 놈들 복장이랑 숙소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은 우리의 중세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그 정도면 치킨도 만들 수 있겠죠. 맥주도 있을 거고."

"오... 좋았어."

그가 괜히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배고프고 지친 상태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면 더 배고파지기야 하겠으나, 삶에 대한 의지를, 힘든 여정을 극복할 수 있는 의욕을 채울 수 있었다.

마침 나유는 일행의 의욕을 끌어올리는 적절한 주제를 꺼낸 셈이었다.

"택이 오빠는 뭐 먹고 싶어요?"

나유가 이번에는 어택의 대답을 재촉했다. 그는 묵묵히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라이에다가 바나나우유 가득 붓고 하루 종일 마시고 싶어."

"바나나우유 한 다라이? 킥킥킥..."

나유가 웃자, 다른 일행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의 풍부한 감정은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적셔주었다.

"아 왜 웃는데."

"그냥... 바나나우유 한 다라이가 뭐야. 킥킥..."

"참 나. 맛있잖아. 바나나우유."

이번에는 아린이 대답할 차례가 돌아갔고,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우유푸딩 위에다가 초콜릿 시럽 잔뜩 뿌려서 크게 한 입... 하고 싶네요."

"너 디저트 좋아하는구나?"

"책 읽다가 보면 단 게 땡기거든요."

아린은 그 맛을 상상하기라도 하는 듯 눈을 감고 슬며시 미소 지었다.

"선배는요? 뭐 먹고 싶어요?"

"선배는 무슨. 그냥 오빠라고 불러."

이 말은 창공이 아니라 나유가 한 말이었다. 그가 그녀를 황당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아니 그걸 왜 나유 씨가..."

"그렇지, 그냥 우리도 말 까죠? 어차피 동갑인데."

"음."

"생각해 봐요. 우리 앞으로 얼마나 더 볼지 모르는데. 집에 갈 때까지 데면데면하면서 어... 으... 이럴 거예요? 서로 목숨 걸고 탈출한 사인데."

창공은 잠시 그녀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하기야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녀가 그를 만만하게 보는 건 아닌지 의심도 들었지만 그녀가 그에게 보여줬던 행동거지를 생각해 본다면 이렇게 스스럼없는 게 나유의 원래 성격이지 싶었다.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어택과는 형 동생 하는 사이였고.

"그래. 그럼 앞으로 너라고 부른다?"

"너가 뭐야, 너가. 나유라고 불러."

나유는 바로 이거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린 씨한테도 말 놓을게요?"

"앗, 네. 오... 오... 오... 빠..."

"푸하하하하!"

괜스레 아린의 얼굴이 빨개졌고, 나유가 그 모습을 보며 포복절도했다.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을 사람이었다.

"그... 오빠는 뭐..."

"나는 아이스자몽허니티."

"뭐야."

나유가 정색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창공의 대답이 낙엽 굴러가는 것보다 재미가 없었다는 뜻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싸늘한 반응에 굴하지 않고 계속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얼음 빼고. 시럽은 150%."

"아... 혹시 소방서 앞에 있는 그 카페요...?"

"...어떻게 알아?"

"앗."

아린이 잠깐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가 모닥불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냥... 거기 몇 번 갔던 적이 있어서요 어... 디저트 잘 하잖아요!"

"그래?"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이미 아린이 그를 대하는 태도에서 어떤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창공에게 꽤나 관심을 많이 품고 있던 모양이었다.

초콜릿 시럽을 듬뿍 뿌린 우유 푸딩. 그의 작은 카페에서 그런 건 팔지 않았다. 해봤자 그리 달지도 않고 퍽퍽한 쿠키 정도.

그 말인즉슨, 아린이 디저트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그 카페를 몇 번이고 방문할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언젠가 그의 뒤를 밟은 적이 있었으리라. 그런 심증이 강하게 들었다. 짝사랑이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창공은 그다지 내색하지 않았다. 짝사랑? 하고 싶으면 계속 하라지.

지금 아린은 일행으로써의 가치를 그에게 의심받고 있는 중이었다.

괜히 애매한 관계가 되었다가 나중에 질척해지면 상당히 곤란했다. 단순한 엔조이라면 또 몰라도.

이제 그는 말없이 앉아있던 히사시를 쳐다봤다.

"야. 너는 뭐 먹고 싶은데."

"제가 말해도 되겠습니까?"

"하기 싫으면 하지 말고."

히사시는 작게 고개를 흔들고선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갓 지은 따뜻한 밥 위에다가 계란 하나 톡, 까놓고... 그 위에다가 간장 뿌려서 살살 비빈 다음에 한 입..."

"아, 씨 미치겠다."

나유가 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창공조차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수성찬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끈한 밥이 바로 정답이었다.

"저... 성함이 고다... 히사시 씨였던가요."

아린이 나지막이 물었다.

"네. 편하신 대로 불러주세요."

"앗, 말 놓으세요. 저보다 나이 많으실 거 같은데."

"아뇨... 저는 존댓말이 편해서."

나이. 그러고 보니 그들은 히사시의 나이도 모르고 있었다.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았음에 괜히 우스워진 어택이 히사시에게 나이를 물었다.

"올해로 스물 하나입니다."

"스물 하나? 미친..."

창공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히사시는 그와 나유보다 한 살이 많았다.

"우와. 나랑 창공이보다 한 살 많았네? 오빠라고 불러야 되나? 야, 창공아. 너 형이라고 불러야겠다?"

"절대 안 돼."

"편하신 대로 불러주세요..."

히사시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나유는 몰라도 창공이 그에게 형이라고 부르면 어색해 미칠 것 같았다.

"아린이는 나보다 한 살 적고... 택이 오빠는?"

"스물 넷."

"아재!"

"맞는다?"

타오르는 모닥불처럼 영원히 따뜻할 것만 같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온기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온몸에 소름을 돋게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아우우우우우우!]

"...젠장."

늑대 소리였다. 야영지에 퍼지는 싸늘함은 모닥불의 온기로 가릴 수 없었다.

"오늘 잠자긴 글렀네."

어택이 부지깽이 끝을 불길 속에 넣어 달구며 중얼거렸다.

이 밑에 있었던 캠프를 습격한 늑대가 지금 이곳에 있다면 이는 비상사태였다.

창공은 바위에 기대놓았던 활을 잡고 시위를 얹은 다음 어택의 도움을 받아 바위 위로 올라가 주위를 살폈다.

"뭐가 보여?"

"아직. 아무것도..."

[아우우우우우우우우!]

두 번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보다 더 가깝고, 큰 울음소리였다.

창공은 이미 지금이 최악의 상황이라고 가정하고 있었다. 그들이 늑대에게 발각되었으며, 습격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사실로 드러났다.

"...나왔다."

"보여? 몇 마리야?"

나유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밤하늘 아래, 찬연한 빛을 뿌리는 상현달 아래로 한 쌍의 타오르는 듯한 안광이 저 멀리 보이고 있었다.

창공은 시위에 화살의 노크를 걸며 대답했다.

"일단 한 마리. 근데 아마 한 마리가 아닐 거야. 다들 정신 바짝 차려요. 야영지 밖으로 나가지 말고.

입구는 두 개니까 두 명이 짝지어서 하나씩 맡아요. 택이 형, 아린이 한 조. 나유랑 고다 한 조. 고다. 너는 적당한 장작 하나 꺼내들어."

일행은 그가 말한 대로 움직였다. 망연자실 멍 때리는 사람이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맞출 수 있을까?'

보통 과녁까지의 거리는 계속 달라지지만 최장 90m. 아마추어 대회에서 우승도 해봤으니 활쏘기에 자신은 있었다.

이게 양궁 경기였다면 말이다.

지금 그가 쥐고 있는 활은 조준기도, 스태빌라이저도, 클리커도, 애로우레스트도 없었다.

나무로 만든 리커브 보우. 화살도 나무로 만든 목재 화살.

풍향계도 없으니 바람을 측정할 수 없다.

심지어 표적의 위치는 계속 변한다.

또한 8점도, 9점도, 심지어 10점을 맞춰도 안 된다. 무조건 엑스텐을 쏘아야 한다. 그나마 기회도 몇 번 없을 것임이 자명했다.

"접근하면 말할 테니까 각오 단단히들 해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느껴질 정도로 피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탄광에서 탈출할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실체적인 위협에는 그 무엇도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시위에 세 손가락을 대자 거짓말처럼 차분해졌다. 호흡이 가지런해졌고, 그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났다.

머리를 식혀주는 것에 활만한 게 또 어디 있을까.

원래부터 감정이 다른 사람들보다 옅었던 그에게 활은 운명이었다.

엑스텐이 필요한 상황? 그러면 엑스텐을 쏘면 된다.

물론 그가 마음만 먹으면 엑스텐을 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

늑대가 있는 방향에 직각으로 서서 활을 들어 올린다. 레스트가 없으니 활대를 쥔 왼손 위에 화살을 올려놓아야 했다.

검지는 화살 위로, 중지와 약지는 화살 아래로. 화살을 꽉 잡는 게 아니다.

세 손가락으로 시위를 당기면 화살은 시위에 걸린 노크를 따라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늑대가 달리기 시작했다.

"접근 중!"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마치 남의 말처럼 멀게 느껴졌다.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는 창공의 코와 입술 위를 누르고, 턱 밑에 그의 오른손이 위치했다.

평소에 쓰던 활과는 장력 자체가 달랐다. 그의 등 근육이 어서 시위를 놓아달라고 비명을 질렀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시위를 다 당긴 것 같아도, 실은 만작 상태가 아니었다.

미세하게. 끊임없이. 시위는 당겨지고 있었다.

딸깍.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클리커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시위를 놓을 때는 바로 지금.

퉁!

시위에서 해방된 오른손이 턱선을 따라 몸 뒤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순간, 창공과 늑대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