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한 번 타오르는 불꽃처럼
* * *
위업을 이룰 능력, 위업을 이룰 기회, 위업을 이룰 운을 갖추고도 끝끝내 성공하지 못한다.
'엘프에게 활을 쥐여 줄 수는 있어도 활을 쏘게 할 수는 없다'라는 격언처럼, 무언가를 이루는 데 있어 하고자 하는 의지,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마음은 실로 필수적인 것이다.
어떠한 고난이 닥쳐도 하고야 말겠다는 마음. 불리한 상황에서도 웃음 지으며 물러서지 않는 마음.
아흔아홉 번을 넘어져도 포기하지 않고 백 번째로 일어나는 마음. 그 마음. 바로 열정이다.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열정을 가진 사람들은 빛이 난다. 그 빛은 주변의 다른 사람에게도 스며들어, 다 함께 어려움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준다.
2천 년 전, 알펜시아의 아네르가 분연히 일어서자 세계 곳곳에서 호응해 끝내는 강성했던 키트라 제국을 무너뜨린 것처럼.
그러나 우리가 가진 다른 덕목들이 그렇듯이, 열정 또한 지나치면 독이 된다.
고난에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은 숭배받으나, 누가 봐도 불가능한 일에 매달리며 평생을 허비하는 사람은 비웃음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열정에 가득 찬 이들이여, 세상에 부딪히는 이들이여. 주의할지어다. 열정으로 마음을 불태움과 동시에, 마음 한편에 차디찬 냉정을 겸비하라.
그러지 않으면, 열정의 불길은 오만의 불길이 되어 그대를, 그대의 곁에 있는 모든 것을 불사를 것이니.
열정과 냉정은 결코 상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이며, 둘 중 하나로만 이루어진 세상은 마치 사막과 설원처럼 가혹하리라.
하지만 냉정과 만난 열정은, 족히 놀라운 일을 행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 우리 시대의 아네르 중 하나. 수습 기사들의 수호자인 그녀와 같이...
제임스 엘린 저, [아네르의 덕목에 관하여] 中
"진짜 허리 끊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와, 그 늑대 진짜 힘 한 번 끝내주게 세더라. 끌려가는데, 어? 그냥 아무 생각도 안 나더라고. 하여간 이놈의 바람막이, 쓸데없이 튼튼해가지고선. 거기서 타이밍 맞게 탁! 끊어졌으면 좀 좋냐고."
나유가 실실 웃으며 썰을 풀어놓았다. 늑대에게 잡혀가 맛있는 밥이 될 뻔한 사람의 이야기는 흔히 들을 수 없는 진귀한 것이었으나, 아린은 오히려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나유를 쳐다볼 뿐이었다.
"언니 진짜 대단하다... 죽을 뻔 해놓고서 그런 말이 나와요?"
"안 죽었잖아. 살았으면 됐지."
"와... 진짜..."
아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택과 히사시도 그런 나유가 보통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저게 방금 전 생과 사를 오갔던 사람의 태도란 말인가. 하지만 창공은 나유가 얼마나 익살스럽게 말을 하건 말건 저 혼자 생각에 골똘히 잠겨있었다.
방금 전에 일어났던 일 때문이다. 의문의 파란빛. 과연 그건 무엇이었을까?
* * *
"...?!"
창공은 팔로 스루 자세 그대로 잠시 굳어있었다. 물론 정확성을 위해 팔로 스루를 정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지금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화살촉이 파랗게 빛났었다. 그뿐인가. 마치 별똥별처럼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은 늑대를 말 그대로 산산조각 내놓고선 그대로 관통하여 숲속 어딘가로 사라졌다.
보통 화살은 그러지 않는다. 표적이 늑대라면 그것을 조각내지도 못하고, 관통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그는 재빠르게 바위 위에서 뛰어내리고 나유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땅 위에 주저앉아 그대로 굳은 채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여러 일들에 충격이 컸으리라.
그녀는 달려오는 창공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더니, 그가 그녀의 옆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자 그를 끌어안고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흐윽... 흐아아앙..."
멀리서 다른 일행들이 볼 때엔 훈훈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죽을 뻔한 여자를 구하고 그녀에게 달려간 남자.
목숨을 구해준 남자를 끌어안고 안도의 눈물을 터뜨린 여자.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좀 다른 모습이었다. 나유는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같은 모습이었지만, 창공은 한 팔로 나유의 어깨를 끌어안았을 뿐, 그의 시선은 그녀에게 있지 않았다.
갈가리 찢긴 늑대의 사체. 창공의 시선은 바로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야. 화살이 아니라 총에 맞아도 이렇게는 안 돼.'
처음에는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확인하러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분명 이 처참한 광경은 그가 발사한 화살이 만들어냈음이 틀림없었다.
그다음으로 그가 생각한 건 꿈을 꾸고 있거나 미쳤다는 것이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이건 그가 한 일이 맞았다. 하지만 어떻게? 그리고 그 빛의 정체는?
커져가는 나유의 울음소리만큼이나 그의 고민도 커져갔다.
* * *
"...아!"
"음?"
모닥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창공이 고개를 들었다. 일행 모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택이 형? 나 불렀어요?"
"세 번."
"아, 미안해요. 잠깐 생각 좀 하느라고. 그런데 왜요?"
"너 마지막에 쏜 화살 있잖아. 빛이 나던데. 어... 그러니까 적어도 나한텐 그렇게 보였다고.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어서."
"저도 봤어요."
아린이 끼어들었다. 히사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것은 실존했다는 말이었다.
"나유 언니는 못 봤어요?"
"난... 글쎄. 정신이 하도 없어서."
창공은 검지 손가락으로 머리를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거 말인데... 저도 잘 모르겠네요. 보통 화살은 그렇게 빛나진 않으니까."
"하기야 그렇지... 그럼 다시 한번 쏴볼 수 있을까? 우리가 앞으로 뭘 만날지 모르고, 그게 또 가능하다면 도움이 많이 될 텐데."
"그럴까요?"
어택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창공은 선선히 수락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활과 화살을 집어 들었다.
왼손으로 활대를 말아 쥐고, 화살 끝에 달린 노크를 시위에 메긴 다음, 활을 머리 높이까지 올린 다음 살포시 내리며 시위를 당긴다.
달빛을 받으며 활을 쏘는 모습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우와... 개 멋있다..."
나유가 창공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방금도 그가 저렇게 해서 자신의 목숨을 구한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웅장해졌다.
하지만 창공은 마음이 심란했다. 전과 같은 빛이 화살촉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유를 구할 때처럼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느낌은 없었지만, 그런 초집중 상태는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납득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과 맞물려 생각해 볼 때, 빛나는 화살은 초집중 상태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단 말인가? 창공은 간단히 부정했다.
만약 그랬다면 현실에서 양궁을 했을 때에도 같은 현상이 있었을 테니까.
혹시나, 싶어서 아쉬운 마음에 그대로 시위를 놓았지만 화살은 그냥 화살이었다.
쉬익ㅡ
공중을 가르며 쏘아진 화살은 저 멀리 어딘가로 사라졌다.
"안 되네요."
결론.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창공은 결론을 낼 수 없는 문제에 매달리는 대신 보다 현실적인 부분에 집중하기로 했다.
"자, 그거야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다들 피곤할 테니까 잠부터 자죠.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설 거고, 불침번은 주변 경계도 경계지만 모닥불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도 잘 해야 하고요. 시간은... 이 시계."
그는 자기 손목에 채워져 있던 시계를 풀어서 흔들어 보였다.
"1시간 30분씩 설 거예요. 한 번에 두 명이서. 다섯 번째 조가 1시간 30분을 다 채우고 나면, 기상해서 산을 내려갈 거고요. 순서는 저, 고다, 택이 형, 나유, 아린이. 그러니까 첫 번째로 서는 사람은 저랑 고다가 되겠죠. 이 순서대로 밀어낼 거예요. 질문 있는 분?"
"저... 해도 되겠습니까?"
"해 봐."
히사시가 손을 들었고, 창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과거의 관계야 어찌 됐든 방금 전 함께 목숨 걸고 싸웠기도 했으니 대놓고 박대하진 않을 작정이었다.
그렇다고 잘해줄 생각도 없었지만.
"이 늑대들 말입니다만... 처리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냄새를 맡고 다른 동물들이 몰려오진 않을까 저어 됩니다."
히사시의 지적은 타당했다. 야영지에 있는 늑대의 사체는 두 구. 어떻게 처리하지도 못하고 방치하는 중이었다.
이 산에 늑대보다 상위 포식자가 없을 거라고 말을 못 하는 이상, 안전을 위해서는 처리하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거기엔 현실적인 걸림돌이 있었다.
"나도 그 생각은 해봤는데, 어쩔 수 없어. 지금처럼 힘 다 빠진 상태에서 이거 옮기지도 못해. 다 같이 용쓰면 옮길 수는 있겠지. 그런데 그게 효과를 보려면 내 생각엔 300m는 떨어진 곳에 놓아야 할 것 같단 말야. 길도 모르는 이 산중에서 야밤중에 그건 어려워."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래서 불침번도 세우고 하는 거지. 납득했으면 됐고. 그러니까 불침번 서는 사람은 졸지 말고 사방을 잘 경계해 주시고요. 더 질문 없으면 이제부터 취침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탄광 탈출 후 첫날밤이 도래했다. 다행히도 그가 첫 번째, 두 번째 불침번을 끝내고 다 같이 일어나는 그 순간까지 다른 맹수의 습격은 없었다.
1시간 30분씩 다섯 번을 돌았으니 총 7시간 반을 잔 셈이었다.
물론 불침번 두 번을 빼면 실질적으로는 4시간 반 남짓이었지만.
"흐아암... 죽겠다 죽겠어."
나유가 기지개를 켜며 하품했다. 다른 일행들도 몽롱한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산에서 더 머무르고 싶진 않았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었다.
나뭇잎을 최대한 깔아봤지만 그래봤자 맨바닥이었기에 피로가 제대로 풀린 것 같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이 늑대들, 어떻게 못 써먹으려나."
늑대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아린은 창공과 눈이 마주치자 추가로 말을 이었다.
"가죽이라도 벗겨서 가면 어떻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팔아서 돈을 얻거나, 아니면 마을의 유력자에게 증여해서 환심을 사거나."
"좋은 생각이긴 한데, 여기 가죽 벗길 줄 아는 사람이 없잖아... 그래도 시도나 한 번 해 볼까."
그래도 다들 영화나 다큐멘터리 같은 곳에서 동물의 가죽을 벗기는 것을 본 경험은 있었다. 보는 것과 하는 것은 천지차이지만.
말이야 쉬웠다. 머리는 포기하고, 몸통 부분을 절개한 다음 가죽과 살 사이로 칼질을 해서 가죽을 분리하면 되니까.
하지만 처음 하는 사람들이 그게 잘 될 리가 없었다.
결국 결과물은 거의 누더기가 된 가죽 쪼가리 몇 장이었다. 차라리 결과가 나온 것만 해도 용할 지경이었다.
그마저도 손재주가 제일 좋았던 히사시가 벗긴 가죽이 상태가 제일 좋았다.
"이거 보니까 고기도 좀 구워 먹고 싶은데... 냄새는 좀 나겠지만."
어택이 새빨간 늑대의 살을 보며 한 말이었다.
"저도 그러고 싶긴 한데 이젠 불도 다 죽어서... 게다가 이거 먹고 탈 나지는 않을까 걱정도 좀 되는데요."
"그러려나."
"사람들 사는 곳에 가면 기회가 있겠죠. 늑대 고기 말고 더 맛있는 걸 먹을 기회가."
창공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일행들을 선도했다. 그 노인의 말대로 비바 연방 쪽 경사는 완만했다.
하지만 길이 없는 곳을 가는 건 매한가지였으니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낙엽 잔뜩 쌓인 곳은 미끄러지기도 쉬우니 등산할 때보다 더 조심해야 하는 측면도 있었다.
그렇게 걷다 쉬다를 반복하다 보니,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숲이 끝났다.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들 대신 사람이 쌓은 목책이 그들을 마주했다.
저곳이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는데도 가슴속에서 안도감이 자꾸만 들었다.
"뭔 울타리를 이렇게 쌓아놨대."
"산 아래에 있는 곳이니까. 야생 동물에 대비한다는 게 아닐까."
나유가 어택의 답을 듣고선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살포시 끄덕였다.
하지만 울타리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람이 출입하는 문도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곳에는 경비병들이 있었다.
창공은 앞으로 걸어가며 뒤를 돌아보거나 하지 않고 자연스레 말했다.
"어지간한 대화는 제가 할게요. 우리는 토리오에서 살던 루툼족이고, 부족에서 떨어져 나와 따로 살 곳을 찾아 떠난 거예요."
"..."
일행이 따로 대답하는 소리는 없지만, 아마 다들 알아들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윽고 그들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경비병들과 마주했다.
딱히 정예병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창공은 적의가 없음을 드러내려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누구요?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수고들 많으십니다. 저희는 루툼족입니다만, 혹시 들어보셨는지요?"
경비병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는 다시 창공을 바라봤다. 질문을 하는 건 그들 중 맨 앞에 있는 이었다.
"내가 알기로 루툼족은 우리 비바 연방에는 거주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
"예. 사실은 저희가 부족에서 독립해 나와 정착할 곳을 찾아다니는 중입니다. 몇 날 며칠을 저 산에서 헤맸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젠 물과 식량도 다 떨어져가던 차에 간신히 이곳을 찾은 겁니다. 진입을 허락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음..."
경비는 팔짱을 끼고 고민하며 일행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꽤나 고생들 한 것처럼 보이는군그래."
"고생 좀 했습니다."
"통행증은 있나? 아니면 자네들 신분을 보증할 만한 거라던가."
창공은 당황했지만 표정으로 그것을 나타내진 않았다.
"통행증... 말입니까. 없습니다만."
"이거 참. 불쌍해서 내가 웬만하면 들여보내 주고는 싶은데 말이야. 실은 우리 연방의 정세가 조금 불안해서. 통제가 강화되었거든. 차라리 트리스카로 가지 그랬나."
'그 트리스카에서 우리가 탈출했는데.'
머리가 아파왔다.
"그게...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실은 저희가 늑대 가죽을 좀 가지고 있는데..."
"어허, 이 사람이."
쓸데없이 직업 정신 투철한 경비가 아닐 수 없었다.
"내 비록 하찮은 병사에 불과하지만 자랑스러운 누베 영지의 경비로서, 그런 것은 받을 수 없네. 게다가 설령 내가 통과시켜 주더라도 자네들에겐 다음 문제가 있다네."
"그다음 문제라는 게...?"
"자네들이 우리 영지에 머무르지 않는 이상 결국 길을 떠날 게 아닌가. 그런데 방금 말했듯이 연방 전체가 조금 불안정하단 말이야. 길을 가다가도 통행증을 요구받을 거고, 관문을 통과할 때도 통행증을 요구받을 텐데 자넨 그때마다 늑대 가죽을 내밀 셈인가? 자네가 상단을 꾸리지 않는 이상 그건 불가능하지 않겠나?"
창공은 착잡한 마음에 마른 세수를 했다. 저 경비의 말이 사실이라면 비바 연방으로 진입하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아, 그렇습니까.' 하고 물러날 수도 없었다.
이미 그들의 체력은 한계에 다다랐고, 물과 식량도 없었다.
다행히 그들을 보자마자 노예로 부려먹으려 달려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굶어 죽자고 탄광을 탈출한 건 아니었다.
"알았으면 이만 가 주게. 정말 안됐지만,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일세."
그러나 물러설 수 없었던 창공은 한 번 더 시도를 해볼 생각이었다.
기적은 바로 그때 일어났다.
"무슨 일이신가요?"
경비들의 뒤에서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목소리가 들린 곳에서 빛이 뿜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경비들이 갈라지고 목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창공은 그 느낌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그 옷이 빛을 반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옷의 주인은 옷만큼이나 주변에 빛을 뿌리는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살짝 구불거리는 탐스러운 금발은 어깨를 슬며시 덮었고, 눈동자는 비 갠 뒤 활짝 열린 맑고 푸른 하늘과 같은 색깔이었다.
오뚝한 코에 선명한 입술. 나유가 봄과 같다면 그녀는 가을과도 같았다. 샛노란 색으로 익은 밀이 넘실거리는 가을의 언덕.
아린보다는 키가 크지만 170cm가 넘는 나유보다는 작았다. 하지만 도담한 가슴은 나유보다 한 수 위였다.
외모만큼이나 옷 또한 볼거리였다.
머리에는 하얀 빵모자를 쓰고 겉에는 목부터 발끝까지 이어지는 코트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부드러워 보이는 재질의 그 옷의 상체 부분은 몸에 딱 달라붙어 그녀의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팔 소매와 치마 부분은 품이 넓었다. 하얗게, 금빛으로 번쩍이는 전신의 옷. 그것이 그녀의 외모를 한 층 더 빛나게 해주고 있었다.
동시에 어깨에는 앞부분이 트인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왼쪽 어깨 부분은 허리까지 내려왔지만 오른쪽 어깨는 상박을 간신히 덮었다.
마지막으로 허리춤에는 폭은 얇아도 긴 칼을 차고 있었다.
정체를 알듯 말듯 한 그녀는 창공 일행과 눈이 마주치자 살며시 목례했다.
"퐁파두르 사제님!"
'아, 사제였구나.'
경비병들이 그녀에게 머리를 숙였다. 창공은 이것이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직감했다.
"그것이... 외부인이 찾아와서 말입니다. 사제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요새 저희 연방의 사정이 어떤지 말입니다. 통행증이 없다는데, 그렇다면 저로서는 통행을 허가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그랬죠."
그녀가 경비병에게 동의하자 창공이 매달리듯이 말했다.
"그걸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부족에서 떨어져 나온 지가 얼마나 됐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그동안 저 산에서 온갖 고생을 다 했고요. 저희에겐 물도, 식량도 없습니다. 사람 살리는 셈 치고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부족... 에서 떨어져 나오셨다고요."
"루툼족입니다."
"루툼족..."
금발의 사제는 찬찬히 일행을 둘러봤다.
일행들도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았는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군요... 루툼족이라..."
'젠장. 들켰나?'
어쩐지 뜨끔한 느낌이 들었지만 창공은 이미 뻔뻔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마주 보았다.
십여 초를 넘게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분들의 신원을 보증하죠. 그러면 될까요?"
"사제님...!"
창공은 경비병들이 뭐라 반발하기 전에 크게 외쳤다.
"감사합니다! 사제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영주님께는 제가 말씀드리도록 하죠. 책임은 제게 돌리시면 돼요."
"사제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일행들도 환호했다.
"아싸! 사제님 최고!"
"감사합니다!"
경비병들은 우물쭈물했지만, 그녀의 말을 거스를 순 없었는지 벌려 서서 길을 비켜주었다.
일행들은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양 그 사이를 당당하게 통과했다.
사제는 가슴에 오른손을 얹으며 그들에게 다시 목례를 했다.
"반갑습니다. 교황청 직속 복음화성 소속 사제, 아스터 퐁파두르라고 합니다. 먼 곳에서 오셨군요."
"아, 네... 저희 부족이 사는 곳이 여기서 좀 멀어서..."
"따라오실까요? 우선 쉴 곳이 필요하신 것 같군요."
"호의를 베푸신다면 거절하진 않겠습니다."
일행은 엄마 닭을 쫓는 병아리마냥 쫄랑쫄랑 아스터의 뒤를 따랐다.
마을 안은 한적했다. 다들 일할 시간이라 그런지 통행인은 몇 없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던 아스터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일행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환영합니다, 먼 곳에서 오신 여러분. 그동안 고생 많으셨지요."
어쩐지 아스터의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다.
"그렇긴... 합니다만..."
"다른 세상에서 오신 분들이시니, 많이 당황스러우실 거예요. 교단은 여러분 에트로지를 환영합니다."
내리쬐는 태양빛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