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한 번 타오르는 불꽃처럼 (2)
* * *
"어떻게 아셨습니까."
망설이던 창공은 결국 자신이 이세계에서 넘어왔다는 것을 인정했다.
아스터는 이미 확신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정해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 그녀가 이 사실을 이용해 해를 끼치려 했다면 방금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았을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음... 그거야."
아스터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알기로 루툼족들은 그런 옷을 입지 않는걸요."
"아, 이런."
창공은 몰려드는 수치심에 두 눈을 꽉 감았다.
생각해 보니 그 자신은 남색 남방에 카키색 면바지, 어택은 군복, 나유는 바람막이 등 이쪽 세계에서의 일반적인 복장과는 한참이나 어긋난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방금 경비병들이 눈치채지 못했던 게 이상할 노릇이었다. 자신들을 루툼족이라 속이려던 창공의 계획은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던 것이다.
실로 그답지 않은 실수였다. 왜 이런 것도 생각을 못 했는지 어디에 머리를 박고 죽고 싶었다.
"보자마자 확신했어요. 여러분은 에트로지라는 것을."
"그 에트로지라는 게 도대체 뭡니까? 왜 그렇게 부르는 거죠?"
입을 다물고 있는 창공 대신 나선 건 어택이었다.
"고대어로 '손님'이라는 뜻이랍니다. 교황 성하께서 명명하셨죠. 여러분들처럼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분들을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아스터는 손을 뻗어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나머지는 가면서 얘기할까요? 다들 식사는 아직이시죠?"
"예... 그렇습니다만."
일행은 방금처럼 아스터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성하께서는 여러분들 에트로지를 핍박하지 말고, 내 이웃처럼 대하라고 말씀하셨어요. 물론 교황 성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도와야 하는 게 당연하겠지만요. 하지만 부끄럽게도 모두가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아니랍니다."
"..."
"저희들 교단, 그러니까 펠라고스 님을 따르는 미천한 종들은 주로 북대륙에서 활동하고 있거든요. 저희들이 미욱하여 이곳 남대륙에서는 주님의 은총이 충분히 미치지 못하고 있지요. 부끄럽네요."
그러고 보니 창공에게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가 산중에서 만났던 노인에게 듣기로, 북대륙에서는 지구인들의 처지가 적어도 노예는 아니라는 식으로 들었던 기억이 말이다.
"그렇다면 북대륙에서는 저희들을 원래 이 세상에서 태어난 사람들처럼 대해준단 말입니까?"
"음... 저희 교단에서는 그렇게 되기를 전심전력으로 바라고 있어요."
결국 그렇지는 않다는 말이었다.
하기야 아스터처럼 교단의 말을 잘 따르는 성직자라던가 정말 신실한 신도가 아니고서야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이방인에게 마치 제 이웃처럼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약속드릴 수 있어요. 여러분이 지금껏 어떤 대우를 받으셨건 간에, 북대륙으로 오신다면 훨씬 나을 거라고요. 특히 아퀴탄에는 정착하신 에트로지 분들도 종종 있답니다."
"그렇습니까?"
결국 손님은 허울 좋은 말이고 결국 그들은 떠돌이 이방인이었다. 그것은 이 세상 어디에서든 다 같았다.
하지만 뭐가 어찌 됐든 적어도 북대륙에선 대놓고 노예로 부리지는 않는다는 말이었다.
창공은 거기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물론 정착할 마음은 없었지만.
"여쭙고 싶은 게 많습니다만."
"다 대답해 드릴게요. 하지만 지금은 시장하시죠? 일단 배부터 채우셔야죠. 아, 마침 다 왔네요."
아스터가 조금 떨어진 건물을 가리켰다. '사슴 여관'이라 쓰인 건물이었다.
그랬다. 그들은 이세계의 글도 읽을 수 있었다.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언어소통도 되는 마당에 글자라고 못 읽을 이유가 없었다.
"이미 아시고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보통 여관 1층에서는 끼니를 해결할 수 있어요. 번창한 도시로 나가면 훌륭한 식당들도 있지만,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보통 여관이 식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답니다."
"그건 몰랐습니다. 그런데 저흰 돈이 없는데..."
"걱정 마세요."
창공은 돈 문제를 아스터가 해결해 주겠다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다른 일행들도 이견은 없었다.
부끄러움, 남에게 손을 벌리는 미안함이 있었지만 지금은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여관 안은 한적했다. 아스터는 종업원에게 간단한 식사를 주문했고, 그것은 금방 테이블에 내어졌다.
대단하진 않았지만 탄광에서 주던 빵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드러운 빵, 버터, 토마토소스에 졸인 콩 요리였다.
"오...!"
나유가 빵을 잡고선 감탄사를 내뱉었다.
"빵이 안 딱딱해!"
아스터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나유는 그런 시선에는 개의치 않고 버터 나이프로 버터를 빵에 푹 발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음! 음!"
별것 아닌 식사. 하지만 이 별것 아닌 식사야말로 그들에겐 진수성찬이었다.
일행은, 심지어 창공마저도 나유의 반응을 보고선 기대되는 얼굴로 빵을 집어 들었다.
곧이어 그들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을 먹는 듯한 행복감을 느꼈다.
"크흐흑..."
심지어 히사시는 눈물까지 흘렸다. 빵을 한 손에 쥔 채로 볼을 잔뜩 부풀린 채 눈물을 흘리는 남자의 모습은 상당히 추했으나, 아스터는 안타까운 얼굴로 그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아니 도대체... 세상에..."
이것만으로도 그들이 그동안 겪은 고난이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 저 빵은 저들이 저 정도로 감탄할 정도로 좋은 빵이 아니었다.
평민들이 먹는 거칠고 딱딱하고 시큼한 호밀빵. 도대체 어떤 일을 겪었기에 별것도 아닌 빵에 이렇게까지 반응한단 말인가.
아스터는 그 즉시 두 손을 맞잡고 기도를 올렸다. 그 모습은 마치 TV에서 흘러나오는 지구 반대편에 사는 기아들의 모습을 보고 전화기를 집어 드는 사람의 그것과도 같았다.
눈물의 식사가 끝났다. 요리가 담겼던 나무 접시는 이미 설거지를 했나 싶을 정도로 깨끗했다.
토마토소스를 빵에 찍어 먹는 게 어찌나 맛있던지, 만약 빵을 다 먹고도 소스가 남았더라면 접시까지 핥아먹을 기세였다.
"음... 여러분?"
기도를 끝마치고 여관 주인과 이야기를 하던 아스터가 일행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일단 방에 좀 올라가실까요? 걱정 마세요. 식대와 여관비는 제가 지불했으니까..."
이 여관에는 3인실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내어진 방은 2인실 두 개와 1인실 하나였다.
방의 분배는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그들은 다 함께 2인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침대는 나무로 만든 프레임 위에 밀짚을 채우고, 그 위에 시트를 덮은 형식이었다.
일단 옷이 너무 더러웠기에 일행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아스터는 그들이 고생했다는 것쯤은 능히 짐작했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식사를 통해 눈치챘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요?"
일행은 아스터에게 그들이 그동안 겪었던 일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히사시도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그는 십장 역할을 맡았었기에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물론 그에게도 그 나름대로의 고생이야 있었겠지만 이런 자리에서 함부로 입을 열다간 아무리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이라도 맞아 죽는 수가 있었다.
아스터는 조용히 눈을 감고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아스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이 세계의 주민으로서 여러분들에게 깊은 사과를 드릴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다시 한번 소개를 드릴게요. 저는 교황청 직속 복음화성 소속 사제 아스터 퐁파두르에요. 북대륙에서 활동하던 제가 이곳 남대륙에 있는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비바 연방 지역 성당들의 어려움을 두루 살피는 것이에요. 하지만 진짜 이유는, 바로 여러분들 에트로지랍니다."
아스터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교단의 세가 약한 남대륙의 특성상 지구인들이 핍박받는 빈도와 강도가 북대륙보다 더 높았는데, 트리스카에서 그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국가적인 규모로.
해서 남대륙으로 진상 조사를 떠났던 차에 창공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주께서 저를 인도하셨음이겠죠. 이 소중한 만남에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혹시, 여러분들의 세계에서 넘어오신 다른 분들은 어떻게 되셨는지 아실까요?"
일행들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산 쪽으로 도망을 친 인원은 적어도 그들이 알기로는 자신들을 제외하고선 없었다.
아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애초에 그녀의 조는 나머지 인원들과 달랐고, 행방이 묘연한 사람들 가운데엔 그녀와 나름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군요... 알겠어요. 일단 여러분들이라도 무사히 도망쳐서 정말 다행입니다. 음, 이를 어쩐다."
아스터는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 눈치였다.
"지금 당장 트리스카로 가서 그들을 엄중히 추궁하고 싶지만, 여러분들을 이대로 두고 떠날 수는 없어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북대륙까지 여러분들을 안전히 모실게요. 적어도 그곳에 가신다면 트리스카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일은 없을 테죠."
"어떤가요?"
창공이 일행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제님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일단 안전한 곳으로 몸을 뺀 다음에 뭘 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게 어떨까 싶네. ...나유 너는 어때?"
"나도 오케이. 어차피 남대륙은 다 분위기 비슷하다며?"
"저도..."
히사시까지 아스터의 제안에 동의했다. 대답을 하지 않은 건 오직 아린 뿐.
나머지 사람들은 그녀를 바라봤고, 울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던 아린은 쏟아지는 시선에 입을 열었다.
"저도 그게 좋다고 생각해요."
"결정됐네요.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라니요. 당치도 않아요.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아스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 저에게 묻고 싶으신 게 산더미 같겠지만 일단 지친 몸을 쉬게 하시는 게 어떨까요? 다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보이네요. 우선 제가 바깥에 나가서 여러분이 겉에 덮을 만한 옷가지를 좀 사 올게요. 로브라도 덮어쓴다면 좀 덜 튀어 보일 테니까..."
"혹시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괜찮다면 담배를 좀..."
"담배... 요?"
남이 보면 조금 뻔뻔하다고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담배는 창공에겐 중대 문제였다.
그리고 그 중대한 문제는 창공의 것만이 아니었다.
"앗! 담배 사 오실 거면 저도!"
"크흠."
나유는 대놓고 말해버렸고, 어택은 차마 나유처럼 말하긴 뭐했는지 헛기침으로 의사를 대신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아스터는 이내 싱그러운 웃음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스터는 그녀가 했던 말대로 후드가 달린 로브를 다섯 개 사들고 왔지만, 흡연자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고 담배부터 찾았다.
이윽고 아스터에게서 담배를 건네받은 그들은 마치 신줏단지 다루듯 담뱃갑을 손으로 감쌌다.
"택이 오빠... 이거 좀 봐. 담배가 스무 개비나 들어있어."
"그게 정상이잖아."
"적어도 이 세상에 온 뒤로는 아니었잖아. 오오... 담배..."
아스터는 친절하게 성냥도 건네주었다. 하기야 가스라이터 같은 편리한 물건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창공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천천히 살펴보았다. 생긴 것 자체는 탄광에서 받았던 담배와 똑같았다.
그랬다. 필터가 없었다는 것이다.
"저... 퐁파두르 씨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냥 아스터라고 불러주세요, 무슈. 퐁파두르는 좀 어색해서..."
"무슈...?"
"제가 태어난 곳인 아퀴탄에선 남성에게 붙이는 경칭이랍니다."
"혹시 마담이나 마드모아젤이라는 호칭도 있습니까?"
그는 혹시나 해서 아스터에게 질문했다. 창공의 추측이 맞았는지, 그녀가 살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어떻게 아셨나요? 기혼 여성에겐 마담, 미혼 여성에겐 마드모아젤이라고 부르기는 하는데..."
"실은 저희 세상에서도 그런 호칭을 쓰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녀는 퍽 감명 깊어하면서도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지구와 이곳은 완전히 관련 없는 세계는 아니지 않을까, 하는 작은 추측이 들었다.
"그럼 마드모아젤..."
"아... 저는 그... 그냥 사제이기 때문에.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냥 아스터가 편해요."
"그럼 아스터 씨. 이런 말 하는 것도 뭣하지만, 필터가 있는 담배는 없나요?"
"필터...?"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비흡연자라 모르는 건지, 아니면 이쪽 담배에는 필터가 아예 없는 건지. 창공의 생각에는 후자가 더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래도 필터가 있는 담배는 원래 세상으로 복귀해서나 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그럼 쉬라고 하셨으니... 내일도 오시는 거겠죠?"
"그럼요. 아침식사 끝날 때쯤 찾아뵐게요. 아, 여관 주인께서 호의를 베푸셨어요. 상당히 지친 것 같다고 하시면서 방 하나에 포도주 한 병씩 돌리시겠다고 하시더라고요. 필요하신 분은 1층에 내려가셔서 방 번호를 불러주세요."
아무래도 방금 전 식사가 상당히 가슴에 와닿았던 모양이었다.
"아스터 씨는 그럼 어디에...?"
"저는 이곳의 영주님께서 숙소를 따로 제공해 주셨거든요. 그럼, 편안히 쉬세요. 내일 뵐게요."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스터를 배웅하고, 방을 나누었다.
일단 여자 둘이 2인실 하나를 차지하기로 하고, 어택과 히사시가 2인실, 창공이 1인실을 쓰기로 결론이 났다.
히사시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아무래도 창공보단 어택과 방을 같이 쓰는 게 백배 나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자기 방을 찾아간 창공은 간단히 마련된 욕실에서 몸을 씻은 다음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물고서 불을 붙였다.
"하아아..."
끝내줬다. 탄광을 탈출한 뒤로 제대로 쉬지도 못했고, 늑대 무리와 생사를 건 싸움을 벌였던 데다, 그 뒤로 불침번을 서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침대에 걸터앉아 피는 담배. 이보다 더 좋은 건 있을 수 없었다.
창공은 장담할 수 있었다. 앞으로는 몰라도, 이제까지 핀 담배 중에선 지금 피는 담배가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최고라고.
행복이 별거 있겠는가. 개고생 뒤에 피는 담배가 바로 행복이다.
여자친구와 했던 수십 번의 섹스는 이 담배 한 개비보다 더 가치가 없었다.
"음... 아까운데."
담배는 금방 타들어갔다. 창공은 연이어 피우려다가 담뱃갑을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본래 그는 하루에 한 갑은 기본으로 피우는 골초다. 이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스터와 얼마나 동행할 수 있을지 모르고, 그녀가 베푸는 호의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었다.
결국 창공은 크나큰 결단을 내렸다. 담배를 더 피지 않고 침대에 누워버린 것이다.
밀짚으로 만든 침대는 현대에서 쓰던 침대보다 당연히 질이 더 떨어졌지만, 지친 몸을 누이기엔 그걸로도 충분했다.
눈을 감으니 몸이 두둥실 뜨는 느낌이 들고, 정신은 금세 끝없는 심연으로 추락했다.
추락하는 노인에겐 날개가 없었다.
거꾸로 뒤집어진 채 떨어지는 노인은 창공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도대체 내가 자네에게 못해준 게 뭔가? 왜 나를 죽인 건가? 일행들도 자네가 힘없는 노인을 죽인 비겁한 살인마라는 것을 알고 있나?"
"일행들이 모르는 사실은 내가 자기들 목숨을 구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거야, 노인네."
창공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당신은 운이 없었던 거라고. 그냥 산에 사는 늑대에게 물려 죽었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말하자면 당신이 죽은 건 자연재해 같은 거야. 번개에 맞아 죽었다고 번개를 원망하는 사람이 있던가?"
"살인자의 변명답게 하잘것없군."
"피해 입은 선량한 사람인 척하지 마. 우러처럼 지구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노예로 부려먹히는 걸 알고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주제에.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잖아. 당신이 한 말이야."
"나를 죽이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나? 살인이야말로 자네가 그 쬐그만 머리로 생각해낸 최고의 방법이었나?"
"그때 내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지. 이제 꺼져. 죽었으면 그대로 죽어있으라고."
노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런 짐승만도 못한 새끼를 봤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건가! 하다못해 미안하다고 한 마디라도 못 하는 건가!"
"사과를 원해? 미안. 됐지?"
순간 그의 시야가 새까만 거미줄로 뒤덮였다. 줄 하나하나는 얇았지만 촘촘히 쌓여진 거미줄은 그의 눈을 가렸다.
그가 원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보고 있기 불편한 노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좋았다.
똑 똑 똑.
"...!"
창공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창밖은 벌써 완전히 어두워진 상태였다. 정신없이 밤까지 잔 모양이었다. 저녁 시간은 지났을 테지만 딱히 배고프진 않았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창공은 그제서야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는 걸 떠올렸다.
"네."
나유가 문을 열고 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야. 술 한잔할래?"
그녀가 나무 병을 들어 보였다. 1층에서 얻어 온 모양이었다.
그는 어차피 정신이 또렷한 게 누워봐야 잠도 안 올 것 같았고, 이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어서 선선히 나유의 제안을 수락했다.
"침대에 앉는다? 그래도 되지?"
나유는 물어보고선 허락도 구하지 않고 그대로 걸터앉았다.
그녀는 병에 입을 대고 한 모금 마시고선 그대로 창공에게 내밀었다.
"컵 없어. 그냥 마시자."
창공은 그대로 병을 건네받아 똑같이 입을 대고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10도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는 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몇 달 만에 마셔보는 술이었다. 찌르르한 알코올 느낌이 입안에서 강하게 느껴졌다.
"너... 안 좋은 꿈이라도 꾼 거야?"
"응?"
"아니, 땀에 젖어있길래."
그는 그제서야 자기 상의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