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살아가는 방식 (2)
* * *
일행은 총 다섯. 아스터까지 포함하면 여섯. 마차는 사람 여럿을 싣고 움직이는 그런 마차가 아닌, 단순한 짐마차였다. 당연히 차양과 같은 햇빛을 가릴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마부석에 아스터가 앉고, 짐칸에 다섯이 쭈그려서 앉으니 어떻게든 다 탈 수 있었다. 마차를 끄는 말은 단 한 마리였는데, 이게 움직일까라는 우려와는 다르게 제대로 속도를 내고 있었다.
아스터는 좋은 길동무였다. 계속되는 질문에 짜증 날 법도 했지만 그녀는 웃는 낯으로 일행의 질문을 받아주었다.
마침 그녀도 혼자서 여행을 해 적적하던 차에 이야기를 할 사람들을 만나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키트라 제국의 황제는 아이카나를 점령하고 그곳의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었어요."
"아, 멜로스의 대화."
"네?"
아린은 자신이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로 아스터의 이야기가 끊기자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그냥 저희가 원래 있던 세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어서..."
"그렇군요. 이야기를 계속해도 될까요?"
"네."
아스터는 창공 일행에게 이천 년 전 일곱 아네르의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이 세상ㅡ이제야 알게 된 이쪽 세계의 이름은 '다이셀리시아'였다ㅡ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였다.
"키트라 제국은 그 자체로도 융성하고 강대했었지만, 욕심 때문에 중립국이던 아이카나를 점령했던 거예요. 이 일로 키트라 제국은 주변 왕국들의 도전을 받게 되죠. 맨 먼저 떨쳐 일어난 건 알펜시아 왕국의 아잔틴 2세였어요. 일명 '최초의 아네르'라 불리던 사람이죠."
"그 아네르라는 건 영웅인가요?"
"영웅이라... 결과적으로는 영웅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지만, 원 뜻은 심판자예요. 구원자라는 뜻도 있어요."
"아하."
"당시 알펜시아 왕국은 키트라 제국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인 신세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잔틴 2세는 분연히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 거예요. 하지만 그는 단순히 열정만으로 키트라 제국을 상대하진 않았어요. 알펜시아 단독으로는 이길 수 없었고, 키트라 제국의 패권에 불만을 표하는 왕국들은 많았거든요."
어차피 따로 할 것도 없긴 했지만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아스터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다. 특히 정치외교학을 공부하던 창공과 아린은 더욱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잔틴 2세는 각국에 호응을 요청했어요. 그중에서 아퀴탄, 헬베트, 요르문, 아르토스, 헬라스. 이렇게 다섯 국가가 알펜시아와 함께 대 키트라 연합에 참가했죠."
"나머지 국가들은 중립이었나요? 아니면 키트라 제국의?"
"음... 중립을 지켰다고 해요. 사실 당시 키트라 제국의 힘은 저 여섯 국가들을 합쳐도 감당할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연합의 왕들은 엘피타스에 사절을 보내 엘프들의 협조를 구하죠."
"엘프!"
히사시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엘프라니! 아름다운 얼굴에 길쭉한 귀, 활을 잘 쏘는 그 엘프?"
"아, 네. 정말 잘 알고 계시네요."
"아하하..."
아스터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엘피타스는 노비스 대양 건너 먼바다에 있는 섬 국가에요. 대륙과는 교류가 거의 없죠. 엘프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들의 일에 끼어들기 싫어하거든요. 하지만 아네르들은 엘피타스를 연합으로 참가시키는 데 성공했어요. 그리고 치열한 싸움 끝에 키트라 제국을 무너뜨렸어요. 특정 국가를 지목해 가장 많이 공헌한 나라는 어디인가 순위를 매기진 않았지만, 아퀴탄의 공이 상당히 컸다고 해요."
그녀는 아퀴탄의 이야기를 할 때면 자부심 넘치는 얼굴이 되었다.
북대륙의 강국인 아퀴탄은 풍부한 물산과 대륙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인구를 자랑하며, 타국에게 선망받는 문화를 가졌다는 게 아스터의 설명이었다.
창공과 아린은 프랑스를 떠올렸다. 그리고 프랑스 사람들의 자국에 대한 넘치는 자부심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아퀴탄은 프랑스와 실로 비슷했다.
"아퀴탄은 키트라 제국과의 국경에 자연적인 방벽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아퀴탄의 용감한 병사들은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키트라 제국군을 정면으로 받아내야 했어요. 그렇게 피 흘려 버티면서 다른 국가들이 키트라 제국을 공격할 틈을 만들었던 거죠."
문제는 그 뒤였다. 그렇게 키트라 제국을 멸망시킨 연합군은 각국의 왕들, 일곱 아네르들이 살아있을 때엔 우호를 유지했지만 엘프의 왕이 엘피타스로 돌아가고, 나머지 왕들이 서거하자 옛 키트라 제국령의 분배를 놓고 사분오열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누구도 승자가 될 수는 없었고, 그 틈을 타서 신흥 국가 키르케가 옛 제국령을 절반이 넘게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 정도 영토만으로도 키르케는 현재도 가장 넓은 영토와 인구수를 보유한 강대국이 되었다.
"그럼 지금의 슈퍼파워는 키르케인가?"
"그렇지 않을까요?"
창공과 아린의 한 마디에 다른 일행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을 본 아린은 친절하게 설명했다.
슈퍼파워는 마치 미국처럼 전 세계에 국력을 투사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강대국을 뜻한다고. 하지만 그녀의 설명을 들은 아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키트라 제국이라면 아린 님이 설명하신 슈퍼파워의 정의에 걸맞겠네요. 하지만 지금의 키르케는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우선 당시 키트라 제국의 국력은 다른 국가들을 전부 합친 것보다 더 강대했지만, 지금의 키르케 왕국은 주변국들이 연합한다면 이기지 못하고 무너질 거예요."
"아..."
"또 키트라 제국은 알펜시아를 사실상 속국으로 부렸으니까, 해군력도 세계 최고였죠. 알펜시아의 해군은... 음. 지금도 세계 최고로 손꼽히거든요. 물론 저희 아퀴탄의 해군도 만만치 않답니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자기 나라의 위상을 높이려 사족을 붙이는 아스터의 모습은 귀엽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키르케 왕국은 키트라 제국과 같은 패권을 부정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두 나라는 공식적으로는 관계가 없거든요. 키르케 왕실에서는 키트라 제국과 키르케와의 관계는 그 어떤 것이든지 부정하고 있다고 해요. 자신들은 말 그대로 신흥 국가에 불과하다는 거죠."
"처세술이 좋네."
"그래도 키르케 왕국은 주변국들에게 있어 현실적인 위협이에요. 언제 제국 선포를 할지 모르니까요. 다시 엘프들이 도와준다는 보장도 없고... 그래도 너무 걱정은 마세요. 저희 교단과 아퀴탄에서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어택은 그녀가 입에 침이 마르게 자랑하는 아퀴탄에 대해 물었다. 아스터의 입에서 나오는 아퀴탄의 이미지는 말만 들어보면 그야말로 지상낙원이 따로 없었다.
창공은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프랑스인도 저렇게까지 프랑스를 찬양하진 않을 거라고.
"...학문도 세계 최고라니까요? 헬라스의 델피 대학을 세계 최고의 대학으로 손꼽는 사람들도 있지만, 제 생각에는 역시 저희 아퀴탄의 몽펠리도 대학이 최고예요. 한 번 가보시면 제 말에 동의하실 거예요."
"아스터 씨도 거기 다니셨나요?"
"아뇨, 아쉽게도. 저는 어릴 적부터 교황령에서 사제 수련을 받았거든요. 하지만 저희 부모님이 하신 말씀이니까, 틀림없어요. 제가 읽었던 신학 논문들만 봐도 몽펠리도 대학에서 나온 것들이 델피 대학 것보다 훨씬 좋았다구요."
그녀의 자국 찬양은 듣는 사람의 귀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계속되었다. 아퀴탄에 대해 질문한 어택이 일행의 살기를 받을 정도로. 그래도 이야기가 이젠 끝날 것 같았다는 게 위안거리였다.
"아... 너무 정신없이 제 얘기만 했네요. 죄송해요. 지루하셨죠?"
"아뇨..."
"다행이네요. 어쨌든 나중에 아퀴탄에 한 번 꼭 들러보세요. 뤼테스에서 뚝뜨도 꼭 드셔보시고요. 아, 맞아. 그러고 보니 저희 아퀴탄 포도주가 세계 제일로 유명한데요..."
"오..."
끝날 것 같던 그녀의 자국 찬양이 다시 시작되었다. 차라리 도적이라도 나오길 내심 바랄 정도였다.
"아스터 씨. 혹시 목마르지 않아요?"
"그러고 보니 좀..."
"자."
나유가 물로 아스터의 입을 막으려 시도했다. 아스터는 조심스럽게 물병을 기울여 몇 모금 마신 뒤에 나유에게 감사를 표하며 돌려주었다.
다행히 그녀는 그 뒤로 이야기를 멈추었다. 하기야 한 시간이 넘게 혼자 떠들었는데 지칠 법도 했다.
풍경을 바라보기도 지루해진 창공은 활을 쥐고 이리저리 뒤집으며 상태를 점검했다. 물론 여관에서 생각했던 대로 시위는 메겨놓은 상태였다. 언제든지 쏠 수 있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창공 님은 활을 쏠 줄 아시나요?"
"그럼요!"
아스터의 질문에 답한 건 나유였다.
"끝내줘요! 저 멀리서 달려오는 늑대도 맞췄고요. 저 죽을 뻔했는데 그것도 살려줬고요."
"멋지네요. 그러고 보니 알펜시아는 예로부터 활쏘기를 중시했던 나라에요. 해전에서는 활이 중요하니까요. 장려하는 의미에서 대회도 자주 여는데 혹시 나가보시는 게 어떤가요?"
창공은 아스터가 '사실 아퀴탄 사람들도 활쏘기라면 뒤처지지 않는데...' 같은 소리를 하기 전에 재빨리 대답했다.
"대회 말입니까?"
"네. 아마도 올해 여는 걸로 알아요."
"그렇군요... 맞아. 그러고 보니 아스터 씨."
그는 늑대와 싸웠던 그날 밤의 파란빛의 화살을 떠올리고는 아스터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의 설명을 듣는 아스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창공은 직감할 수 있었다. 대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고.
"세상에... 화살에 마나가 담겼다니! 그런 예는 지금까지 없었는데...!"
"마나라고요? 혹시 마법사와 무슨 연관이 있는 겁니까?"
그의 생각에 마나 하면 마법사였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마법사들이 마나를 가장 잘 다루긴 하지만, 마나는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에요. 이름난 기사들도 마나를 다루거든요. 마나가 담긴 무기는 빛을 내는데, 그 상태에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놀라운 일이 가능하다고 들었던 적이 있어요."
"도대체 그 마나라는 게 뭡니까? 전 이제까지 이런 일과는 관련 없는 사람이었는데... 왜 제가 갑자기 사용할 수 있는 겁니까?"
"아... 어디부터 대답해드려야 할지."
창공은 아스터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도대체 왜? 이제까지 화살은 수없이 많이 쏴봤지만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왜 갑자기 이쪽 세상에 와서 그에게 그런 힘이 생겼는가?
"우선... 마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쾌하게 답변을 내릴 수는 없어요. 학자마다 다 정의가 다르거든요. 게다가 전 마법 이론에는 문외한이라... 이럴 때 언니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언니 되시는 분이 혹시...?"
"어렸을 적에 마탑으로 공부하러 떠났거든요. 간간이 집에 돌아오긴 했지만 저도 못 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어쨌든 조악하게 말씀드리자면, 마나는 힘이에요. 보통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하게 해 주는 힘... 이 힘이 어디서 왔고, 또 어떻게 발현되는진 알 길이 없어요."
"..."
아무래도 마법사를 만나야 할 필요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았다.
"그래서 솔직히... 모르겠어요. 어떻게 다른 세상에서 넘어오신 창공 님이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지... 게다가 마나를 무기에 실을 줄 아는 기사들도 유독 활이나 석궁 같은 무기에는 마나를 싣지 못했다고 해요."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불쾌함이 가득 차올랐다. 남들은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는 사실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자신이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곳에서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안 기분이었다.
"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 정도일까요.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뇨. 굳이 사과하실 필요까지야."
창공은 먼 산만 쳐다봤다. 지구로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진 알 수 없었으나, 그 과정에서 지금처럼 우호적인 사람들만 만난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가 자유자재로 그날 쏘았던 푸른 화살을 쏠 수 있게 된다면 큰 도움이 되리라.
역시 문제는 그 방법이었다. 어쨌든 마나라는 것에 대해 좀 더 알아야 뭔가 길이 열리지 싶었다.
"..."
그 뒤로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계속 이야기하던 아스터가 지치기도 했거니와 다른 일행들도 아직 피로가 덜 풀린 까닭이었다.
노곤한 기분에 살살 흔들리는 마차, 하늘에서 내려오는 따뜻한 햇볕. 잠이 오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평야를 질주하던 공도는 고개로 이어졌다. 나무가 잔뜩 우거진 고개는 마치 야트막한 산처럼 보였다.
산. 일행에게 산이란 도무지 좋은 기억이 없는 곳이었다. 산 비슷한 곳만 봐도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길이 그곳으로 난 것을.
"저 고개까지 넘고 잠시 휴식할게요."
아스터가 모자를 벗어 머리카락에 바람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금발이 번쩍이며 공중에 휘날렸다.
반짝이는 머리카락은 그녀가 입고 있는 옷만큼이나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일행들 중엔 눈이 아팠는지 일부러 다른 곳을 쳐다보는 사람도 있을 지경이었다.
마차는 완전히 언덕으로 진입했다. 나무가 잔뜩 우거진 언덕은 그늘을 제공했고, 시원한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왔다. 하지만 한편으로 어딘가 으스스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쨌거나 일행은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고 시원함을 만끽했다. 아스터도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치마에 옆트임이 있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긴 옷에다 망토까지 뒤집어쓰고 있는 그녀에게 그늘과 바람은 위안이 되어주었다.
"혹시나 산적이 있지는 않겠죠?"
"뭔 쓸데없는 소리를 하냐."
히사시의 중얼거림에 창공이 반응했다. 안 그래도 비바 연방의 치안이 불안하다길래 어디서 도적이 나타나지는 않을까 신경 쓰고 있었는데 저런 말까지 들으니 짜증이 난 탓이다.
"아니, 대비해서 나쁠 건 없어 보여요. 길도 좁고... 오르막길이라 속도를 내기도 쉽지 않으니까."
아린이 히사시를 변호했다. 물론 창공도 그녀의 말이 맞다는 건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툴툴대면서도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쳐두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정지! 정지해라!"
녹색 옷을 입은 사내들이 마차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