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북대륙 도착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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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룸에서 룬덴까지는 어림잡아 20km가 조금 안 되는 거리였다. 수도로 이어지는 길이라 그런지 도로는 폭이 넓고 평탄하며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 옆으로는 배가 드나드는 큰 강이 흘러서 경관도 좋았다.
공도에는 유동인구도 많았다. 짐마차와 행인들은 끊임없이 오며 가며 행렬을 만들었는데, 유독 활을 몸에 걸친 사람들이 많았다.
궁술 제전이 열린다고 말로만 듣던 때와 이렇게 활잡이들을 직접 보았을 때 와닿는 그 느낌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수시로 검문 받았던 비바 연방 때와는 달리 여정은 평화로웠다. 그리고, 곧이어 커다란 요새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와아..."
일행들이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솟아오른 산 사이로 높다랗고 하얀 성벽이 펼쳐져 있었다. 성벽 아래로는 활짝 열린 커다란 철문이, 위로는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들과 여러 구조물들이 있었다.
어딘가 위협적인 그 모습은 외적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 지어진 건물임이 틀림없었고, 그렇기에 심미적인 고려가 전혀 들어가지 않았을 법도 한데 요새는 그림보다 더 그림 같은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문 앞에는 평야가 펼쳐졌고, 길을 따라 흐르던 강은 크게 굽어져 저 멀리 달리고 있었다. 성벽 근처에는 정박 시설이 있어 그곳을 통해 선박들이 짐을 상하역했다.
알펜시아의 수도 룬덴을 지키는 관문, 틸버리 요새였다. 요새를 통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방위병들의 검문이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탓은 아니었다.
기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것이다. 통행을 원하는 사람들의 줄이 어마어마하게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공 일행은 족히 30분은 가까이 기다리고 나서야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대신 관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바로 룬덴이었다.
물론 방벽 뒤에 바로 중심 시가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벽돌로 만든 2층집들이 그들을 먼저 맞이했다.
거리는 관문 바깥의 도로를 지날 때보다 몇 배는 더 시끌벅적했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짐마차의 바퀴가 구르는 소리, 개가 짖는 소리, 고양이가 우는소리 등등 온갖 소음이 도시를 꽉 채우고 있었다.
사람들도 많았다. 아이, 청년, 처녀, 노인 등등... 온갖 행인들이 도로를 지나다녔고, 2층 창문 바깥으로 거리를 내려다보는 룬덴의 거주민들부터 멋지게 옷을 빼입고 말을 타고 다니는 이들까지.
"확실히 활기차네요."
주위를 둘러보던 아린이 평했다. 그녀의 말대로 이곳 룬덴은 지금까지 그들이 지나왔던 그 어느 곳보다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났다.
비바 연방에서는 공도는 따라가되 큰 도시들은 피했었고, 옛 아이카나와 텔룸은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이세계에 떨어져서 당장 먹고사는 것도 어려운 상황만 아니라면 꽤나 낭만적인 광경이었다. 일행들은 지금 이 순간의 시름을 잊고 정말 어디 관광이라도 온 것마냥 즐겁게 길을 걸었다.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선.
"모두 짐 간수 잘 해요. 꼭 사람들 많이 모인 곳엔 소매치기도 많더라."
창공은 허리춤에 찬 화살통에 한 손을 얹고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특히 그의 품 안에 있는 돈주머니에는 극도로 신경을 썼다.
수도이니만큼 큰길로만 다니면 치안은 나쁘지 않겠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일단 털리고 나면 늦으니까.
일행들도 창공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자기 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상시 긴장하는 것은 사람을 빠르게 지치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풀어질 수도 없다는 게 창공의 생각이었다. 마음을 편안히 가지는 것은 모든 일과를 끝내고 침대에 누웠을 때뿐.
침대. 침대 하니까 생각이 났다. 섹스를 알게 된 나유는 침대가 있는 곳에 묵을 때마다 창공의 방을 찾아왔고, 그러다 보니 다른 일행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기야 그게 아니더라도 둘 사이에... 주로 나유 쪽에서 창공에게 일방적으로 흐르는 그 특유의 기류를 보면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티를 내는 일행은 없었다. 원래 남녀가 같이 있다 보면 서로 연애도 할 수 있고 당연한 게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부끄러움은 나유만의 몫이었다. 창공은 그래서 그게 어쨌냐는 태도로 일관할 뿐이었으니.
"그나저나 오빠."
아린이 그를 불렀다.
"장비는 더 안 사도 돼요? 전에 말했던 핑거탭도 그렇고..."
"핑거탭? 이쪽 세계에는 그런 게 없나 보더라."
"아..."
그가 양궁을 할 적엔 몸에 착용하는 장비가 세 가지였다. 암가드, 체스트가드, 핑거탭. 암가드와 체스트가드는 아스터가 기꺼이 베푼 호의 덕분에 구할 수 있었지만, 핑거탭은 도무지 구할 수 없었다.
이곳 다이셀리시아에서는 핑거탭이라는 장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궁사들은 가죽이나 직물로 만든 장갑으로 손가락을 보호하는 모양이었다. 해서 창공도 장갑을 하나 사볼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느낌이 너무나 이질적이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맨손으로 활을 쏘는 게 훨씬 나았다. 맨손으로 많이 쏘면 손가락이 얼얼하기야 하지만 적중률은 좋았다.
얼마 뒤, 주거 지역을 벗어나자 큰 광장이 나왔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탁자에 앉아 뭔가를 작성하고 있었고, 그 앞에 활을 등에 멘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딱 봐도 제전에 참가 신청을 하는 곳이었다.
"서 상, 저기서 신청을 하는 모양인데요."
"나도 보고 있어. 음... 이 광장이 딱 좋겠다. 다들 저쪽에 성당 보이죠?"
"아, 진짜네."
널따란 광장. 늘어선 식당들과 여관 사이로 성당이 보였다. 다이셀리시아에서의 십자가라고 불릴 만한 상징은 바로 원이었다. 원도 그냥 원이 아니라 안쪽에 동심원이 여러 개 그려진 원이었다.
그리고 이 종교적 상징물은 지구의 그것처럼 지붕 위에 구조물로서 장식되어 있었고 말이다.
"택이 형. 아스터 씨한테 받은 거 가지고 있죠."
"어."
"난 신청 좀 하고 갈 테니까, 저기 성당에 가서 잠시 숙식을 제공받을 수 없겠냐고 좀 물어봐 줘요. 그리고 일자리. 다들 이 근처에서 일자리 좀 알아봐요. 식당이나 여관도 많고 사람들도 몰릴 시기니까 구하려면 구할 수 있겠네요. 아린이 너도 이왕 하기로 했으면 어디에 사람 몰리는지 좀 유심히 살펴보고."
창공은 그 말을 끝으로 줄을 섰고, 어택은 일행들을 선도하여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부디 아스터가 준 서류가 먹혀들어가야 할 텐데...
어쨌거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보니 곧 그의 차례가 다가왔다.
"이름이?"
"서창공. 성이 서. 이름이 창공."
"이상한 이름이군... 아하, 에트로지인가?"
"그렇습니다."
접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미스터 서. 자네의 조 번호는 24고, 제전은 당장 내일부터 시작일세. 일단 자네가 활을 장식으로 달고 있는지 아닌지부터 확인하는 절차가 있을 거고, 그다음부터가 예선전일세. 예선전에서 1등을 해야만이 본선으로 진출할 수가 있다네."
그는 상당히 피곤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이해가 가는 것이, 당장 이 안내만 오늘 몇 번을 했을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참가 자격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만큼 어중이떠중이들 다 신청할 터였으니 피로가 막심한 게 당연했다.
"본선에 대한 안내는... 본선에 진출하면 들으시게. 어쨌든 시간과 장소는 내일 오전 8시까지 아잔틴 사격장으로 오면 되네. 더 질문 있는가?"
"혹시 이 주변에 시계가 있는 건물이 있습니까?"
"이쪽 길 따라서 가다가 보면 크고 빨간 건물이 하나 나올 텐데, 사우스엔드 구청일세. 거기에 시계가 있지. 더 질문 없다면 비켜주겠나?"
창공은 고개를 끄덕이고 줄에서 비켜났다. 사격장의 위치를 듣지 못했지만 그건 이제부터라도 알아보면 될 일이고, 드디어 제대로 된 시간을 손목시계에 입력할 수 있다는 것에서 깊은 만족감이 느껴졌다.
"오, 창공아. 이제 끝났어?"
"지금 막."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어떻게 찾았는지 나유가 그에게 다가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성당에서 무사히 허락을 받은 모양이었다. 일단 이걸로 당장의 숙식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된 셈이었다.
"부담 가지지 말고 머물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있다가 가래."
"그런 말 그대로 믿으면 안 되는 거 알지?"
"킥킥."
나유가 작게 웃다가 아쉬운 표정으로 팔꿈치로 창공의 가슴을 툭, 쳤다.
"그런데 좀 불편하네. 성당 안에서 너랑 잘 수는 없으니까."
"돈 많이 벌던가. 여관으로 옮겨버리게."
"못 참겠으면 말해. 저번에 배에서 했던 것처럼... 응?"
그녀의 말에 창공은 지금 당장 나유를 으슥한 뒷골목으로 끌고 가서 입에 자지를 물리고 싶다는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그렇지만 때로는 참는 것도 필요했다. 섹스에 안달 난 것은 나유였고, 그녀의 성욕을 숙성시킬수록 더 극진한 봉사를 받게 될 테니까.
"그럼 조금 쉬다가 다른 일행들이랑 일자리나 좀 알아봐. 가능하면 이 근처에서."
"창공이 너는?"
"난 따로 할 게 있어서. 그럼 이따가 보자."
그는 나유와 헤어지고선 방금 접수인이 가리켰던 방향으로 향했다. 5분도 되지 않아 그가 말했던 빨갛고 큰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우스엔드 구청이었다.
문은 활짝 열린 채였고, 안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시계가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제전에 참가하시는 거라면, 저쪽으로 가면 나오는 스트렌드 광장에서 접수하셔야 합니다."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평범한 인상의 남자였다. 방금 전 접수인들처럼 깔끔한 옷차림인 것이 아마도 이 구청에서 일하는 공무원인 것 같았다.
"다른 건 아니고 잠시 시간을 좀... 그러고 보니 여기 아잔틴 사격장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하, 이미 등록하셨군요. 마침 같은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여기 많이 오셔서 도와드리고는 있습니다만."
공무원은 품에서 접어놓은 종이를 꺼냈다. 간략한 약도였다.
"여기가 스트렌드 광장입니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참가 신청을 하던 곳이 그곳이라면, 네."
"좋습니다. 그곳에 사우스엔드 성당이 있는데 그것도 보셨고요?"
"봤습니다."
"성당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난 길을 쭉 따라서 15분 정도 걸어가시면, 안내원들이 잔뜩 서있을 겁니다. 그들의 안내를 받고 이동하시면 됩니다. 뭐... 활 든 사람들이 전부 똑같은 곳으로 향할 테니 길을 잃을래야 잃을 수 없겠지만요."
"설명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그는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고, 창공은 구청의 시계를 바라봤다. 오후 3시 20분이었다. 그대로 시간을 조정하려는데, 어쩐지 손이 멈칫했다.
오전 8시 15분. 지구의 대한민국에선 지금 이 시간이라는 말이었다. 한 번도 시간을 조정한 적이 없었으니까.
시간을 이곳 알펜시아의 시간으로 맞추게 되면, 그와 지구를 연결하는 끈이 하나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감상은 잠시뿐이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잠시 여행을 왔을 뿐이었다.
고국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끝나는 날짜도 정해지지 않은 여행을. 그리고 남의 나라에 여행을 왔으면 시간도 그곳에 맞추는 게 당연했다.
그래. 이건 여행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딱히 시간을 바꾸는 게 어렵지 않았다.
"꽤나 신기한 것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음?"
고개를 들어보니 처음 보는 남자가 창공의 앞에 서있었다. 백발에 백안의 남자. 상하의는 매끈한 가죽으로 만든 옷을 걸치고 있었다.
수수한 옷이었지만 범상치 않은 외모는 가려지지 않았다.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누구신지."
"별 볼 일 없는 사람입니다. 이름은 글라키스라고 합니다만... 부디 저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처음 접하는 문물에 그만."
"사과를 받아들이죠."
창공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기 이름을 밝혔다. 이상한 느낌이 드는 남자였다. 분명 처음 보는데, 익숙하면서도 다른 것을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서창공이라고 합니다."
"에트로지.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과연 그랬군요... 이거, 시간을 허비하게 해서 거듭 죄송합니다. 서창공.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겠습니다."
"네. 뭐."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드는군요. 다시 만날 테니, 작별 인사는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세요."
그는 팔짱을 끼고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미묘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남자가 제 할 말만 하고 사라져서는 아니었다.
"죄송합니다만."
"아, 네. 말씀하시죠."
창공은 방금 전 대화를 나누었던 공무원에게 다가갔다. 그는 탁자에 앉아 서류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혹시 방금 저와 이야기했던 남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예? 그것이..."
"하얀 머리에 하얀 눈. 갈색 가죽 옷을 입은 남자였습니다. 이름은 글라키스라던데... 혹시 아시나 해서 말입니다."
"백발에 백안입니까? 글쎄요, 그런 분이 오늘 이곳에 출입한 기억은 없군요. 그리고 그런 이름도 처음 들어봅니다. 저야 뭐 지금 문서들을 만지고 있으니 금방 들어오셨다가 금방 나가셨으면 못 봤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쇼."
그 남자에 대해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찝찝했지만 그는 더 신경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지금 당장 어떤 위협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남자의 말대로 언젠가 만나게 된다면 그때 더 캐물으면 그만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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