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김아린 외전 당연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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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한다.
원래 그랬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러니까, 규칙상으로 옳으니까.
내가 어떤 사실에 대해 왜?라고 물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내게 했던 말이다. 그들을 그런 말로 내가 스스로 품은 의문에 대하여 납득하길 바랐다. 하지만 난 그런 대답으로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내가 이 의문에 대하여 스스로 답을 내린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생각하길 싫어하니까.
난 사람들이 가치 판단의 문제에서 놀라울 정도로 판단을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맡기길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결론이 정해지면 더 이상 의문을 가지지 않고 그것에 순종한다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건 효율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착실히 따라 하기만 하면 중간은 간다. 크게 앞서가진 못해도, 크게 뒤떨어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사회는 그런 대다수에 의하여 지금까지 유지된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판단의 준칙이 되는 되는 기준들 중 최고봉은, 단연 법이다. 법을 어기면 나쁜 사람이 된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모두 여기에 동의했다. 그런데 법을 어기지 않는다고 그 사람이 선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악한 사람이 되지 않는 선에서 만족하고, 그 이상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깨달은 사실은 나에게 불만이 되었다.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더 나은 나를 위해서. 하지만 사람들은 발전을 바라면서도, 막상 그 발전의 과정에 그들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면 발을 슬슬 뺀다. 발전의 과실만을 탐하려는 것이다.
평범하고, 당연하고, 효율적이다. 그런다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실제로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살 거니까.
그런데 그건 너무 비겁하지 않나?
이런 나는 불만이 많은 아이였다. 사실 지금도 많지만. 나도 안다. 피곤한 성격이라고. 그래도 타고난 성격인데 어쩌겠는가. 덕분에 사귄 친구들은 한 손에 꼽을 정도지만, 나를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는 부모님이 계시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난, 품은 불만만큼이나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정의를 지키는 경찰관. 사람을 구하는 소방관. 생명을 살리는 의사. 마음을 씻겨주는 음악가. 희망을 보여주는 정치인.
그리고... 억울한 사람을 도와주는 변호사.
내가 최종적으로 택한 건 변호사의 길이었다. 유명한 로펌에서 비싼 돈 받고 사건을 수임하는 변호사가 아니다.
인생이 걸린 재판에서 변호인을 선호할 형편조차 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국선변호인이다.
멋지지 않은가? 누구 하나 도와줄 이 없는 사람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외로울 사람에게 의지가 될 만한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다니.
대한민국 헌법 제12조 제4항. 이걸 만든 사람은 천재임이 분명해.
어쨌든 난 어려서부터 국선변호인의 꿈을 꾸었다. 변호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본 나는, 학사 학위 취득 후에 로스쿨에 입학해서 변호사 시험을 쳐야 한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아빠. 우리나라 로스쿨 중에서 최고는 어디예요? 거기 가고 싶어요."
"음... 잘은 모르지만 서울대가 아닐까?"
그날 이후로, 내 1차 목표는 서울대에 입학하는 것이 되었다. 로스쿨은 그 대학 출신이 아니라도 들어갈 수 있다고? 그거야 그렇지만... 멋지잖은가, 서울대.
어쨌든 아빠는 초등학생 5학년의 질문에 웃으면서 답하셨다.
어린아이들이 흔히 하는 소리인 줄로 아신 거다. '나는 나중에 커서 서울대에 갈 거예요!'라는 식으로. 하지만 내가 하고 싶다면, 진짜로 하고 싶다는 말이다.
그리고 난 무난히 입학할 수 있었다. 서울대 정치외교학부에. 왜 하필 여기였냐면, 그나마 이곳이 폐지되고 없는 법학부와 가장 분위기가 비슷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단정하게 묶은 갈색 꽁지머리. 하얀 블라우스. 검정 나팔바지. 화장은 기본만. 여기에 목과 손목에 향수를 한 번씩 뿌린다.
이게 내 캠퍼스룩이었다. 별로라고? 원래 간단한 게 최고인 법. 뭐, 솔직히 말해서 남자 사귈 마음은 없었기에 이러고 다닌 것도 있었다.
천재들만 모인 곳에서 공부하려면 어쩔 수 없지. 연애는 변호사 자격을 갖추게 된 뒤로도 충분하니까.
그리고 내 결심은, 학기가 시작한 후 한 달도 되지 않아 깨져버렸다.
"우와아..."
그날따라 걷고 싶은 마음에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하교하던 중이었다. 71동 앞에 있는 보조운동장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기에 무심코 쳐다봤더니, 양궁부가 연습을 하고 있던 게 아니겠는가.
TV에서나 보던 그 모습은, 나에게 너무나도 멋지게 다가왔다. 사람들은 제 키만 한 활을 들어올리고선 시위를 잡아당기고 화살을 발사했다.
그리고 그중에 한 사람. 그가 활을 쏘는 모습은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차원이 달랐다.
아무래도 대학교 양궁 동아리이니만큼 자세들이 어딘가 어색한 면도 있었는데, 그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프로들의 동작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화살이 발사되고 그 사람의 손에서 활이 빙그르르 돌아가는 모습이 얼마나 멋지던지.
나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고,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왜 그랬는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자세 그대로 굳어 그의 모습을 바라볼 뿐.
하지만 아쉽게도 내 구경은 거기서 끝이었다. 그네들의 연습 시간이 끝이었던 것이다. 내가 지켜보던 그 사람은 활을 거치대에 내려놓고 짐을 챙겼다. 그러던 와중 우연히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문득 부끄러워진 난 고개를 홱, 돌리고선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다음날도 난 걸어서 하교했다. 물론 코스는 보조운동장을 지나는 코스로. 그런데 운동장엔 양궁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핸드폰을 꺼내 우리 학교 양궁부를 검색하니, 페이스북 페이지가 나왔다.
아하, 연습하는 날이 정해져있는 거였다. 날짜와 시간은 친절하게 게시되어 있었다. 그렇게 나의 새로운 일과가 추가되었다. 양궁부의 연습을 지켜보는 일과가.
물론 들키면 무안할 것 같아 길게 구경할 수는 없었다. 어떤 날은 커피를 들고 주위를 서성이며, 또 어떤 날은 이어폰을 꽂고 통화하는 척 혼잣말을 하며 그들을 지켜봤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사회과학대학 건물에 자그만 플래카드가 걸렸다.
[정치외교학부 서창공(21) 중세자동차배 한국양궁대회 리커브 부문 대학부 남자 개인전 우승!]
설마하니 그 양궁부 학생들 중에 우리 학부 사람이 있었을 줄이야... 그것도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니. 물론 프로는 출전하지 않는 대회였지만 그래도 대단했다. 우리 학부 출신 누구가 판검사로 임용되었다는 플래카드보다 더.
그게, 난 반드시 법조인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지만 양궁 대회에 나가서 우승할 자신은 없었으니까. 난 공부밖엔 못 하니까 말이다.
"앗."
"에고."
그렇게 멍하니 플래카드를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충격이 전해져왔다. 누군가 지나치다 내 가방을 친 모양이었다.
"미안합니다."
"아니에... 앗."
그 사람이었다. 멋진 자세로 활을 쏘던 그 사람. 그럼 이 사람이 플래카드의 그 사람인가? 거의 확실했다. 다른 학부 사람이 수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이때 여길 지날 리가 없으니까.
나는 그 사람의 뒤를 밟았다. 왜 그랬는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건물 안으로 들어간 남자는 2층에 있는 한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 옆에 걸려져있는 시간표를 보니, 비교정치론 시간이다.
교양 수업이 아니라 전공 수업이었다. 아, 이렇게 난 우연히 그에 대해 알아낸 것이다. 정치외교학부 21학번 서창공. 그날의 강의는 내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선 침대에 누워 구글에 그의 이름을 검색했다.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그 어느 곳에도 그의 계정은 없었다. SNS를 안 하나?
"미친년..."
갑자기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지금 난 완전히 미친년이었다. 왜 이런 걸 검색하면서 아쉬워하는 거지? 괜히 애타는 거지?
"아."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사랑이라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시야가 흐려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은 안 나는데 입은 자꾸만 뻐끔거렸다. 보는 사람은 없는데 괜히 부끄러워져 핸드폰을 내던지고 베개를 꼭 끌어안았다.
이게 말이 되나? 몇 번이나 봤다고. 얼마 전까지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말도 걸어본 적 없는 사람을? 이건 아니야.
나는 안고 있던 베개를 괜히 한 대 때려준 다음, 책장에 손을 뻗어 집히는 아무 책이나 꺼내들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었다. 음, 좋은 책이지.
"사람들은 지배자의 권력을 제한하고자 다음과 같은 두 방법을 시도했다. 첫째, 정치적 자유 또는 권리라고 불리는..."
원래 난 책을 읽을 때 소리 내어 읽지 않는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데 왜 난 지금 괜히 소리 내서 읽고 있는 걸까. 이렇게 하면 머릿속이 책의 내용으로 꽉 채워지니까?
좋아. 그러면 한 번 해 보자.
"...그러나 두 번째 방법에 대해서는 사정이 달랐다. 자유를 사랑하는... 사랑하는... 아 진짜!"
존 스튜어트 밀! 죽어!
아, 이미 죽었지.
나는 책을 내려놓고 다시 베개를 끌어안았다. 이런... 이런 건 내 분야가 아니었다. 정말로. 이럴 땐, 다른 사람의 지식을 빌려야 했다.
"엄마."
해 본 사람이 여기 있었으니까.
"예전에요. 아빠랑 처음에 만나자마자 이 사람이라고 느낌이 들었다면서요."
"얘는 갑자기 그걸 왜 묻니?"
"아뇨 뭐...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요. 어쨌든. 왜 그렇게 된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그러니까! 지금은 몰라도 그땐 엄마가 아빨 사랑한 거잖아요."
엄마는 내가 이런 질문을 왜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냥 갑자기 보자마자 사랑이 생긴다는 게 말이 돼요?"
"불만이니?"
"불만은 아닌데."
"음... 아린아. 그런데 그게 사랑이야. 원래 그게 그래. 다른 사람들도 다 그랬고."
"원래 그런 게 어딨어요..."
"사랑에 이유가 있으면 그게 어디 사랑이니?"
나는 엄마의 말에 한 방 맞은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좋아하는 남자라도 생겼어?"
"아아아뇨!"
나는 강하게 부정하고선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사랑이라고? 그게 당연하다고?
당연한 건 없어.
그렇게 부정하고 싶은데.
부정하고 싶은데.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