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알펜시아 궁술 제전 (3)
* * *
옛 아이카나에서 창공 일행과 헤어진 아스터는 쉬지 않고 트리스카로 향했다. 빵을 사서 마차 위에서 먹는 건 기본이었고, 하루에 3~4시간 정도 자는 잠마저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운전하며 꾸벅꾸벅 조는 것으로 때웠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하루라도 빨리 비아투 탄광에서 강제 노역을 당하다 탈출한 에트로지들의 생사 여부를 파악하고, 구할 수 있다면 구하기 위해서였다. 고된 여정으로 인해 금으로 뽑아낸 실과도 같던 그녀의 머리칼은 푸석푸석해졌고,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렇게 아스터는 고생 끝에 트리스카의 수도인 비제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여관을 잡고 침대 위에 쓰러져 몇 날 며칠이건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아스터는 수면욕을 마음 깊은 곳에 꾹 눌러 담았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고통받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트리스카의 왕궁으로 가서 외무대신과의 접견을 신청했다.
이번 사건 자체로만 본다면 성질상 외무성에 문의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스터가 이리 한 까닭은 자신이 사제 개인으로서 온 것이 아니라 교황청에서 파견한 사절임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다행히도 일단 접수되긴 했지만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였다.
본래 이런 일은 사제 개인이 직접 하는 것이 아니고 각 국가의 수도에 위치한 교구에서 대행하는 것이 상례다. 하지만 남대륙에 위치한 교구라고는 헬라스와 비바 연방에 위치한 것들이 전부였다. 나머지 국가들에선 교구조차 설치되지 않을 정도로 그 세가 미약했다.
그나마 평사제에 불과한 아스터의 신청이 수리가 된 것도 그녀가 교황청 직속 사제이며, 복음화성 장관의 협조 요청 공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마저 아니었다면 아스터의 접견 신청서는 그대로 소각로에 투입되었을 것이다.
다음 날, 트리스카외무성에선 아스터의 접견을 수락한다는 공문을 보내왔다. 하지만 자리에 나온 이는 외무대신이 아니었다.
"주무관 핫산입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복음화성 소속 사제 아스터 퐁파두르입니다."
아스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교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트리스카에서 공들여 자신을 맞이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외무대신이 안 된다면 부대신이나 정무관이라도 나왔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일반 사무 업무를 맡고 있는 주무관을 내보냈다는 건, 그녀의 방문을 딱 그 정도 수준으로 취급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할 것은 너무나 명백했다.
"우선 저의 무리한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여주신 외무성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께 신의 축복이 가득하길 빕니다. 제가 이렇게 방문하게 된 까닭은 다름이 아니오라, 최근 귀국에서 일부 세력이 에트로지들을 사로잡아 탄광에서 강제로 노역을 시켰다는 소문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황청에선 트리스카의 이름에 불명예스러운 자국이 남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소문에 대해 귀국의 의견을 듣고자 이리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핫산은 아스터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습니까...? 방금 퐁파두르 사제님께서 말씀하신 그것은 본국으로써는 상당히 뜬금없는 소문이군요. 그런 사실 또한 제가 알기로는 일절 없고 말입니다. 일단 저희 외무성에선 에트로지에 대한 업무를 맡고 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탄광의 관리는 현재 재무성에서 담당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재무성에 접견 신청을 하시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원하신다면 담당자와 연결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이랬다.
[좆까.]
아스터는 더 이상의 협조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사실 협조를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여기서 관료를 붙들고 하루 종일 캐물어봐야 새로운 사실은 나오지도 않을 것 같았다.
어렴풋이 이렇게 될 거라고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아... 더 이상의 수고는 끼쳐드리기가 저어되네요. 알겠습니다. 전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신께서 트리스카를 보살펴주시길."
"예. 그럼 부디 조심히 들어가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짧은 만남은 끝이 났다. 아스터는 고작 이런 만남을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니었지만, 교단의 세가 약한 남대륙에서 평사제인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아스터는 느린 발걸음으로 왕궁을 나와 길거리를 걸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초점 잃은 것처럼 그저 멍했다. 이미 피로가 극심한 터라 침대에 쓰러져서 잠만 내내 자고 싶었다.
'이러면 안 돼. 정신 차려.'
그녀는 손으로 제 뺨을 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남아있었다. 국가에서 협조를 해주지 않는다면 개인적으로라도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남아있었다.
'우선 비아투 탄광으로 가자. 못해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탈출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흔적이 남아있을 거야.'
그렇게 아스터의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그녀는 마차를 끄는 말을 독려한 뒤에 마부석에 올라 비제트를 빠져나갔다.
시야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귓가에는 윙윙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심장이 불안하고 아프게 뛴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아울러 선수들에게도 이르노니, 부디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자신의 모든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기를 바라노라. 신께서 그대들과 그대들의 재능을 축복하시길."
길고 긴 개회사가 끝났다. 왕비는 할 말을 마치고는 바로 연단을 내려갔고, 예선전이 시작되었다. 창공이 눈대중으로 가늠해보니 표적까지의 거리는 대략 50m. 9점이나 10점을 장담할 수만은 없는 거리다.
다만 여러 번 실전 상황에서 활을 쏘아보니 이쪽 세상의 활에도 꽤나 적응이 된 터라 조준기 없이도 현대에서 양궁을 하던 때와 비슷한 정확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점은 다행이었다. 그는 별일만 없으면 순위권에 들 자신이 있었다.
방식은 화살을 다섯 번 쏘아서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은 사람이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는 식이었다. 만약 동점을 쏘게 되면 위닝샷으로 넘어가는 식이다.
사로에 선수들이 들어서자 관중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소리는 이내 사그라들었다. 시끄럽게 떠들거나 소리 지르는 사람은 없었다. 정기적으로 궁술 대회를 연다더니 과연 매너를 아는 사람들이라고 창공은 생각했다.
"6점!"
"7점!"
기다랗고 무겁게 생긴 쌍안경을 든 심판들이 과녁에 꽂힌 화살을 보고선 점수를 불렀다. 과녁 가운데에 위치한 금빛 원 안에 꽂히는 화살은 다섯 개 중에 둘이 될까 말까 하는 수준이었다. 창공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회...?'
생각했던 것보다 대회 수준이 낮기 그지없었다. 그가 아는 지구의 양궁 대회에선 세 발 중에 한 발이라도 8점 이하를 쏘게 되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물론 이건 프로 대회 이야기고, 본인이 출전하는 아마추어 대회는 보다 수준이 낮았지만 어쨌든 이 정도는 아니었다.
다섯 발이 다 쏘아지고, 승자가 환호했다. 그가 얻은 점수는 50점 만점에 33점. 아무리 예선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좀 심각하지 않나, 하고 창공은 생각했다.
"다음으로... 미스터 서. 미스터 길포드."
창공은 과녁과 수직이 되도록 선 다음, 왼발을 뒤로 살짝 뺐다. 전형적인 오픈 스탠스였다. 이제야 좀 본격적으로 대회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50m 앞의 과녁. 10점은 장담할 수 없었다. 9점과 8점이라면 자신 있었지만.
물론 그라고 항상 8점 이상을 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떨 때는 긴장도 되곤 했다. 하지만 그 긴장이 일정 정도 이상으로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그럴 때마다 그의 머리는 알아서 차가워지며 냉정을 되찾았다. 항상 그래왔던 창공은 어쩌면 자신은 목표로 하는 법관보다는 양궁 선수가 더 어울리는 게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할 마음은 없었지만.
"7점!"
먼저 활을 쏜 길포드라는 사람의 점수였다. 창공은 천천히 활을 들어올리고선 시위를 당겼다. 깃발을 보건대, 바람은 우에서 좌로 약하게 불고 있었다. 조준기는 없었지만 이미 그것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의 감은 끌어올려진 상태였다.
퉁!
포물선을 그리며 체공했던 화살이 과녁에 비스듬히 내리꽂힌다.
"9점!"
관중석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이미 창공은 알펜시아 궁술 제전 역사상 첫 에트로지 출전자로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그가 어떤 실력을 보여줄지는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바, 관중들은 9점을 쏜 그에게 환호를 보냈다.
'느낌 왔었는데...'
하지만 그에겐 박수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직 아쉬움뿐이었다. 바람이 그의 생각보다 약간 더 셌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9점이면 나쁘지 않은 점수다. 그는 아쉬움을 몰아내고 마음을 다잡았다.
"...점...!"
아마 길포드가 두 번째 화살을 쏜 모양이었다. 점수를 외치는 심판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사실 그가 몇 점을 쐈던 이미 창공에겐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상대방의 실수를 바라는 마인드로는 대회에서 순위권에 들 수 없다. 오직 자신이 실수하지 않는 것만이 중요했다.
바람은 계속 일정하게 불었고, 창공은 첫 번째보다 약간 오른쪽을 조준했다. 그렇게 두 번째 화살이 발사되었다.
"10점!"
화살은 멋지게 한가운데에 꽂혔다. 창공은 그제서야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준기 없이도 정확하게 조준할 수 있다는 결과를 얻자, 그의 안 어딘가에 조그맣게 남아있던 의혹이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
길포드는 기죽지 않고 활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가 시위를 당기고 있는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진 것이다.
그리고 생각이 많아지면 대체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었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이 바둑에 있듯, 양궁도 비슷했다.
그렇게 첫 번째 시합은 창공의 승리로 끝났다. 46 대 32. 압도적이었다. 관중들은 신성의 탄생을 축하하며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어른이 학생을 상대로 이긴 것만 같아 떨떠름하긴 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여하튼 승리라는 건 기분 좋은 것이다.
"에고, 허리 아파 죽겠네!"
나유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신음했다. 그녀의 앞엔 접시들이 잔뜩 쌓여있었고, 심지어 그것들은 계속 밀려드는 중이었다. 집에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돈이 복사가 되는 삶을 살아온 그녀에게 식당 알바는 너무나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창공을 생각하며 버티고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다가온 사랑과 성의 쾌락에 눈뜬 나유는 마치 바싹 목이 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창공과의 섹스에 목마른 상태였고, 그와의 밤을 즐기기 위해선 성당에서 나와 여관에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면 돈이 필요했다. 하루에 5키트. 알아본 바 목욕과 식사, 밀짚을 채운 깨끗한 침대가 있는 여관에 묵으려면 아무리 싸구려라도 3키트 약간 안 되는 돈이 필요했다. 게다가 경비가 숙박비만 있는 것도 아닐 테니... 어쨌든 열심히 벌어야만 했다.
"남 상. 괜찮아요?"
히사시가 그녀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봤다. 나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 처음엔 십장으로 부역했던 그가 고깝기 짝이 없었지만, 어쨌든 동료가 되고 같이 지내다 보니 사이는 자연스레 원만해졌다.
히사시는 근본부터 나쁜 사람이 아니었고, 또 자기 원죄를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는 잡일이 있으면 헌신적으로 나서서 도맡아 처리했기에 일행들 사이에서 점점 평가가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젠 그에게 대놓고 구박을 주는 건 창공 외에는 없었다. 그마저도 초기의 불신과 증오 가득한 시선은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지만.
"힘들면 잠깐 쉬고 있어요. 제가 조금 더 속도를 내면 되니까."
"아뇨. 그러면 쓰나요. 힘내서 벌어야죠."
나유는 다시 신나게 설거지를 시작했다. 이게 다 돈인데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손님들 많이 빠졌으니까, 이것만 다 닦으면 쉴 시간이 조금 나겠죠."
"그... 러겠죠...?"
히사시의 희망적인 관측에도 불구하고 나유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있지 않아 가게 안으로 사람들이 잔뜩 몰려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님들 들어오신다! 주문받아라!"
주인장은 즐겁게 외쳤지만, 나유와 히사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그들만 바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은근히 위안이 되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화로 앞에서 주문을 소화하는 요리사들보단 적어도 설거지를 하는 게 쉬워 보이긴 했다.
"아야아, 그나저나 활 진짜 잘 쏘더라."
"아 그거야 본선에 진출하는 실력자라면 그 정도는 다들 하지 않나."
주방 근처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궁술 제전의 관객들인 것 같았다. 자연스레 나유와 히사시의 귀가 쫑긋 섰다. 제발 창공이 본선에 진출했어야 할 텐데... 하는 마음으로.
"그래도 그렇지, 나는 에트로지가 그렇게 활을 잘 쏠 줄은 몰랐단 말일세. 그치들은 다들 활을 잘 쏘나?"
나유의 표정이 점점 기대감으로 차올랐다. 가슴속에서 뭔가가 부풀어 올랐고,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갔다. 저 사람들이 말하는 그 에트로지라면, 아마도 그가 아닐까?
"그건 자네가 몰라서 하는 소린데. 아 우리도 다 같은 다이셀리시아 사람이지만 그 안에서도 알펜시아, 아퀴탄, 키르케 등등 나라가 나뉘지 않나? 에트로지도 똑같아."
"과연 그렇겠군. 그나저나 참 신기해."
"이 사람은 대체 뭐가 그리 신기한 게 많다는 건가?"
"장갑도 끼지 않고 시위를 당기는 게 말일세. 손가락이 꽤 아플 텐데 말이야. 아마 지금쯤 시뻘겋게 달아올랐을걸?"
"에트로지들은 손가락 가죽이 두꺼운 게 아니겠나."
"모르고 말을 하는 건 자네도 똑같구만 그래."
나유와 히사시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지금 그들은 왜 이쪽 세상에는 핑거탭이 없냐며 할 수 없이 맨손으로 쏴야겠다고 툴툴대던 창공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 진짜. 사랑스러워 미치겠네."
그녀가 진한 미소를 그리며 중얼거렸다. 접시를 바라보는 나유의 시선에 사랑이 듬뿍 담겨있었다. 당연히 접시를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