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알펜시아 궁술 제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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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연도 알펜시아 궁술 제전의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 셋을 꼽아보라면 다음과 같았다.
우선 노섬벨 공작령의 셋째 공자인 찰스 라이든 노섬벨.
겨우 열여섯의 어린 나이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명궁으로 소문이 자자했으며, 벌써부터 무기에 마나를 싣는 요령을 터득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가 활 솜씨를 알펜시아 전역에 널리 알리기 시작했던 건 열 살 무렵이었는데, 처음에 사람들은 그것을 노섬벨 공작의 아들 사랑에서 나온 과장된 소문으로 여겼더랬다. 당연했다.
하지만 찰스 노섬벨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노섬벨 공작령에서 열리는 궁술 제전이 아니라, 수도 룬덴에서 열리는 제전에 출전하여 2년 전 우승을 차지하자 아무도 그것을 과장된 소문이라 여길 수 없었다.
들리는 말로는 성인식을 치른 후에 왕립 해군에서 복무할 것이라 한다던가.
두 번째로는 그링켓 숲의 사냥꾼인 '거인' 존을 꼽을 수 있었다.
그는 자라오며 항상 남들보다 머리통 두어 개는 더 큰 키를 자랑했는데, 그에 걸맞게 커다란 활을 쏘기로 유명했다.
물론 그의 활 크기만큼이나 솜씨 또한 유명했다. 나무들 사이로 도망가는 사슴에게 화살을 쏴 항문을 관통하여 장기들을 뚫고 심장을 맞춘 이야기는 유명했다.
세 번째로 알펜시아의 전례 대신 카벨 자작이었다.
그는 전례 대신이라 하면 흔히 떠올리는 고상한 이미지와는 달리 우락부락한 풍채를 자랑했는데, 1분 동안에 건빵 11개를 물 없이 먹을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소문이 도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활 솜씨도 대단하여 4년 전에 열린 제전에서는 준우승, 2년 전에는 3등을 차지한 전적이 있었다.
대체로 이번 제전은 위 셋 중에 한 명이 우승자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룬덴 사람들의 중론이었다. 그런데, 이 삼각 구도는 보기 좋게 깨져버렸다. 한 에트로지의 등장으로.
이름은 서창공. 처음에는 그저 이번 제전에 에트로지가 한 명 참가했다더라, 하는 식으로밖에 소문이 돌지 않았으나, 예선전이 끝난 지금... 그는 그야말로 태풍의 눈이 되어있었다.
6번의 예선을 치르는 동안 한 번도 46점 밑으로 점수가 내려가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위에 열거한 세 우승 후보도 마찬가지였지만, 문제는 서창공이 처음으로 두각을 드러냈다는 데에 있었다.
본선 진출자들은 총 16명. 다른 지방에서도 제전이 열리긴 하지만 알펜시아 전역과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이들 중에 16명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어느 정도 알려진 궁사들이 대체로 그 명단에 자기 이름을 올리는 형편이었다. 그리 유명하진 않더라도 누군가 그들을 아는 사람은 있었다.
그런데 서창공은 누구도 그 이름을 알지 못했다. 풍문으로라도 들은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욱 유명세를 탈 수 있었다. 초신성의 등장엔 낭만이 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들려주신 옛이야기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용사처럼, 그는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궁술 제전의 본선에 당당히 진출한 것이다.
거기에다 호사가들은 그가 맨손으로 활을 쏜다는 점에 주목했다. 활의 장력은 생각보다 강하다. 시위에 한두 번 생살이 스친 것만으로도 피멍이 들어 며칠은 알록달록한 색깔로 피부를 물들인다.
그런 지경이니 당연히 맨손으로 화살을 쏘면 손가락에 걸리는 부하는 상당했다. 따라서 궁수라면 손가락을 보호하는 장갑을 끼는 것은 기본이다. 하지만 서창공은 그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바로 그런 점이 사나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상남자는 왜 빨리 죽는가?
바로 쓸데없고 하찮은 일에 낭만을 느끼고 목숨을 걸기 때문이다. 서창공의 맨손 사격은 그런 상남자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활도 잘 쏘는데, 사법도 터프하기 그지없는 상남자. 게다가 출신조차 알 수 없는 에트로지. 그의 이름은 룬덴의 화제가 되었다.
세 우승 후보의 위상은 너무나도 공고했지만,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저 셋과 묶으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창공 "터프 슈터" 서.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에게 붙인 이름이었다. 그리고 다 같이 모인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것을 들은 창공은 코웃음치며 이렇게 반응했다.
"지랄을 하네."
"그치만... 멋있지 않아?"
나유가 생글생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창공은 가소롭기 그지없다는 기색이었다.
"핑거탭 없이 쏴서 손가락이 저릿거리는데 터프 슈터는 무슨."
"괜찮아?"
"아직까지는."
빵을 한 입 베어 물고 그 자리에 세심히 버터를 바르던 아린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면... 주문 제작은 가능하려나..."
"음."
창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조만간 하나 만들 생각이야. 뭐... 당연히 공금을 써야겠지만. 다들 어떻게 생각해요?"
"그 정도면 써도 되지 않을까요?"
"우리 창공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아린과 나유가 대번에 동의했다.
"무기는 생명하고 직결되는 거니까. 당연히 돈 써야지."
"..."
찬성하는 어택. 히사시는 묵묵히 밥을 먹고 있었다. 창공이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고 히사시를 바라봤다.
"야, 고다."
"네, 네."
"넌 왜 말이 없냐? 반대해?"
창공의 말에 히사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의사를 말씀드릴 자격이 있을까 해서..."
"공금 중에는 네가 벌어오는 분도 있잖아."
그는 창공이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서 상은 저를 싫어하셨던 게...?"
"그럼 시발 니가 좋겠어요? 탄광 새끼들이랑 붙어먹은 니가? 그래도 지금까지 일행에 공헌했고, 배신할 기색은 없는 것 같으니까. 그럼 너도 일행이지."
"감사합니다... 그...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당연히 열심히 해야지."
사실 나머지 일행들은 이미 히사시를 파티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전향한 배신자이지만 지금은 도움이 되니 받아들였다는 창공식 마인드가 아니라, 같이 고생하는 '우리' 중 하나로.
하지만 히사시는 전과가 있어 그동안 자격지심을 품고 있었다. 천성이 남 괴롭히는 일은 못하는 그였으니, 일단 편하기 위해 십장 역할을 받아들였음에도 내심 괴로웠으리라. 하지만 누가 십장을 하라고 강요한 것은 아니었으니 누굴 원망하겠는가.
그랬으니 그동안 구박을 받고 의심의 눈초리로 주변에서 바라봐도 아무 말 못 하던 그였다. 그것은 그가 암묵적으로 동료의 한 사람이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뭐라 하는 이 없었지만 괜히 눈치를 보며 하루하루를 산 것이다.
히사시의 눈이 촉촉해졌다. 공식적으로 일행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는 기쁨. 십장으로 부역했던 자신의 전적이 용서받았다는 안도, 미안함...
사실 창공은 딱히 용서한 적은 없었지만.
"남자가 이런 일로 울면 쓰나.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와. 음료수나 한 잔 하면서 이야기 들어줄 테니까."
어택이 히사시의 등을 두드렸다. 히사시는 소매를 들어 눈가를 재빨리 닦아냈다. 나유는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소리 없이 '아자!' 하고 기운을 불어넣었고, 아린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동의하냐고."
창공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히사시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음껏 써주세요."
"좋아... 그리고 다들 필요한 거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말해요. 특히 무기 같은 건. 우리 생명이랑 직결되는 문제니까. 특히 나유나 택이 형은 맨 앞에서 싸우게 될 텐데, 장비가 중요하잖아요."
다들 그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하지만 나유와 어택은 아직까지 무기를 바꿀 마음이 없었다. 무기는 그 품질도 중요하지만, 일단 손에 익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그들이 쓰는 무기는 쉬이 바꿀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게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창공은 생각도 정리할 겸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일행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룬덴에서 열리는 궁술 제전은 국왕이 주최하는 국가 행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회사를 맡은 건 왕비였고, 사람들은 왕이 아닌 왕자가 등장하지 않는 것을 의아해했다.
따라서 그는 이 나라에 어떤 형태로든 국왕이 부재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예선전이 끝난 후에 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알펜시아의 상황은 개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알펜시아의 국왕... 지금은 선왕이었다. 죽었으니까. 창공이 이곳 다이셀리시아에 오기 직전에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다가 전사한 것이다.
그것도 승리를 결정짓는 마지막 전투에서. 운이 지지리도 없는 국왕이었다.
심지어 그 반란도 자신의 동생을 권좌에 옹립하는 것이 목적인 반란. 어쨌거나 나라가 반쪽으로 쪼개진 내전에서는 근왕파가 승리했다.
문제는 왕위를 이어받을 왕자의 나이가 겨우 열넷이었다는 것이다.
유일한 왕자였으니 논란이 일어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확정 상속인인 현 왕자는 아직 대관식을 치르지 않아 공식적으로 국왕이 아닐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국왕이었다. 여기서 일이 터지게 된다.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는 격언처럼, 국왕이 국왕 노릇을 하려면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물리적인 힘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간 알펜시아 국왕들이 써먹던 총부리는 바로 알펜시아 왕립 해군이었다.
왕립 해군의 사령관은 왕이 바뀌게 되면 즉시 수도로 올라와 충성 맹세를 바쳤고, 왕은 이로 인해 자신의 권위를 공고히 세우게 되는 식이다.
그러나 무슨 일에서인지 이번 대의 사령관은 확정 상속인인 왕자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수도로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반기를 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충성을 맹세하지도 않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자칫하면 이 나라에서 다시 내전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네요."
창공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아린이 말했다.
"말하자면 지금의 왕자는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생아 취급을 받고 있다는 거니까요... 반란이 진압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왕실에서 강력한 권위로 귀족 세력을 통제하지도 못하고 있을 거예요. 애초에 통제력의 상실이 반란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지만요."
"왕립 해군의 충성 맹세를 받지 못해 권위가 실추됐고, 또 왕자 자신이 카리스마적인 타입도 아닌 것 같아. 그런 인물이라면 이번 개회식을 기회로 삼았겠지."
"오빠 얘길 들으니까 갑자기 난 생각이 있는데요, 왕자에 대해서 두 가지 가정을 해 볼게요."
"해 봐."
모두의 시선이 아린에게 쏠렸다. 그녀는 한 번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차분하게 말을 풀어놓았다.
"첫째. 현 왕자는 남의 시선이 두려운 철부지다. 열넷이니까요. 버스킹을 하면서 사람들과 말도 섞어봤는데요, 궁술 제전은 중요한 국가적 행사에요. 게다가 룬덴에서 열리는 제전은 국왕이 주최하죠. 그러니까 이번 제전은 왕자가 국민들의 앞에 나서서 자신이 정당한 상속자임을 널리 각인시킬 수 있는 기회였죠. 방금 오빠가 말했던 대로, 왕자에게 능력과 의지가 있었다면 이번 제전은 절호의 기회였어요."
창공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하지만 왕자는 그러지 않았어요. 설령 연설로 대중을 휘어잡는 능력이 없더라도 얼굴은 비췄어야 했어요. 국왕의 이름으로 개최되는 중요한 행사니까요. 그러니까 철부지죠. 열넷이니까. 무리도 아니에요."
"그냥 열넷이 아니지. 어렸을 때부터 차기 국왕으로 키워진 왕자가 열넷이나 먹어놓고 남의 시선을 두려워한다면... 그건 그냥 병신이야."
"그래서 두 번째. 왕자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다른 중요한 작업을 하느라 이번 제전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음."
"어차피 추측이잖아. 과감하게 해."
잠시 망설이던 아린은 창공의 재촉에 의견을 개진했다.
"아마 궁성을 비웠을 거예요.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궁성에 있었더라면 얼굴 정도는 비출 수 있잖아요. 그것도 비밀스럽게 궁성을 나갔겠죠."
"그렇겠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왕자가 나타나지 않자 당황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대중은 당연히 왕자가 궁성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으니.
"그럼 어디로 갔을까?"
"제 생각엔... 왕립 해군의 사령관을 만나러 가지 않았을까요."
"비밀스럽게 행차해서 담판을 짓는다고. 무모하긴 한데 어떻게 보면 왕다운 대담한 모습이긴 하네."
"왕자는 궁술 제전이라는 기회비용을 희생한 셈이니까... 당연히 급부는 그것보다 커야겠죠. 얻을 수 있는 이득이 같으면 더 쉬운 쪽을 택할 거니까요. 그리고 기회비용에 대한 합리적인 반대급부는 사령관의 충성을 얻어내는 거고요."
"그렇겠지. 연설이고 뭐고, 왕립 해군의 지지가 곧 정통성의 확보인 상황이니. 그럼 왕자는 어떻게 사령관을 회유하려고 하는 걸까?"
"모르겠네요. 다만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을 따져본다면 영지의 수여라던가... 계약 관계를 사령관에게 유리하게 고친다던가..."
"하긴 신하가 왕에게 개기는 이유가 다 그렇지 뭐."
절로 비웃음이 나왔다. 간신히 붙여놓은 쪽박 풀이 마르기도 전에 알펜시아의 근간이나 마찬가지인 왕립 해군 사령관이 왕자에게 등을 돌리는 꼴이라니. 환상적인 나라였다.
"아무래도 궁술 대회가 끝나면... 이곳을 뜨는 게 좋을까."
창공의 중얼거림에 일행들은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또 떠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선 한곳에 머무르기만 할 수도 없는 처지이니...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일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좋아... 어차피 대회가 끝날 때까진 여기 머물러야 돼. 유예가 조금 있으니까 나중에 생각하자고. 내일도 힘들 테니까 다들 자죠. 네?"
"맞아. 나 피곤해."
"저도..."
일행들은 피로를 호소하며 침대로 향했다. 왕자고 뭐고, 어차피 그들의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 그들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는 다름아닌 내일 있을 노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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