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30화 (30/178)

〈 30화 〉 알펜시아 궁술 제전 (5)

* * *

날이 밝고, 드디어 본선이 개최되었다. 예선전을 거쳐 선발된 16인의 궁사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방의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 귀빈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는데, 창공이 슬쩍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열넷 먹은 왕자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16명의 본선 진출자는 8개의 조로 나누어졌다.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되며, 오늘은 최후의 2인이 남을 때까지 진행한다는 것이 주최 측의 설명이었다.

진행 방식은 한 세트에 세 발씩, 세 세트를 겨루어서 세트 점수를 가장 많이 가져간 사람이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는 식이었다. 이기면 2점, 비기면 각 1점씩, 지면 0점. 1,2세트를 연달아 이기면 자동 진출이고, 3세트까지 진행했는데 동점이 되면 위닝샷으로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경기는 바로 시작하지 않았다. 본선까지 올라오는 궁사들은 애초에 활 솜씨로는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소개 없이 넘어갈 수가 없었다. 흥행이라는 측면도 중요했으니까. 포고관이 커다란 목소리로 선수들을 하나하나 소개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조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우선 우리 알펜시아의 자랑스러운 전례 대신, 윌리엄 에테르 카벨 자작이십니다!"

보디빌더와도 같은 육중한 덩치의 사나이가 관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귀족답게 멋들어진 옷을 입고 있었지만, 품이 남는 부분이 없이 다분히 실용적인 옷이었다. 전례 대신이나 되는 사람이 저런 옷차림이라니... 알펜시아의 기풍이 느껴지는 듯했다.

"...네 번째 조! 직전 정기 제전 우승자인... 찰스 라이든 노섬벨 공자이십니다!"

카벨 자작만큼은 아니었지만 퍽 다부진 인상의 청년이었다. 듣기로 열여섯이라 했던가. 이미 얼굴이나 몸집은 청년이 아니라 성년의 것이었다. 활 또한 광택으로 번쩍번쩍했다. 공작의 자제에다 개인적으로도 활의 달인이라고 하니 필시 좋은 활이리라.

"다섯 번째 조에는... 그링켓 숲의 사냥꾼! 존입니다!"

별명이 거인이라고 했던가. 과연 그 별명이 무색하지 않은 키였다. 창공의 키는 178cm. 아주 크진 않았지만 어디 가서 작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었는데, 딱 보기에도 존은 창공보다 30cm는 더 커 보였다. 그가 사용하는 활도 그만큼 커서, 활이 아니라 무슨 발리스타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들과 같은 조에 속한 선수들이나, 다른 조의 선수들도 물론 소개가 있었지만 대체로 저 셋이 소개되었을 때 가장 관중들의 반응이 좋았다. 강력한 우승 후보였으니 당연했다. 전에 개최되었던 제전들에서도 자주 본선에 진출했을 터였다.

"마지막 여덟 번째 조! 열다섯 번째 순서로 라간 남작령의 기사! 가빈 맥킨타이어!"

열다섯 번째 선수까지 소개가 마무리되었다. 이윽고 사격장엔 알 수 없는 흥분이 차올랐다. 혜성처럼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선수... 터프하기 짝이 없는 사격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그 선수의 소개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관중들이... 심지어 귀빈들마저 목을 길게 빼고 창공을 쳐다봤다. 그가 어떤 성과를 거두든, 이미 이슈거리가 되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열여섯 번째! 마지막 참가자! 다른 세상에서 온 이 에트로지를 뜨겁게 맞이하여 주십시오! 창공 서!"

"터프 슈터!"

"터프 슈터어어어!"

민중들은 그에게 붙여진 별명을 목놓아 외쳤다. 가히 세 우승 후보들에게 바쳐진 환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주인공인 창공은 뚱한 표정으로 과녁만 바라볼 뿐이다.

'터프 슈터가 뭐야, 터프 슈터가. 누군 좋아서 이러는 줄 아나.'

안 그래도 손가락 끝이 아리고 간지러워서 자꾸 신경이 쓰이는 중이다. 관절도 뻐근했다. 다행히도 상처가 나지는 않았으니 사격하는 데 지장은 없었지만, 어쨌든 남의 속도 모르고 저렇게들 좋아하니 괜히 짜증이 났다.

"그럼 곧바로 1조부터 경기 시작하겠습니다! 선수들은 모두 각 사로에 들어가 주시길 바랍니다!"

1조에선 앞서 소개되었던 카벨 자작과 아퀴탄에서 온 부용이라는 궁수의 대결이 펼쳐졌다. 과녁까지의 거리는 70m 정도. 예선보다 한 단계 더 멀어진 셈이었다. 창공에겐 가장 익숙한 거리이기도 했다.

쉬익!

화살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과녁에 꽂혔다. 두 선수 모두 첫 화살로 10점을 쏘았다. 과연 본선은 예선과는 수준이 달랐다. 창공은 그들을 보며 각오를 새로이 다졌다. 사실상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이다.

"6점!"

부용이 탄식을 터뜨렸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10점과 9점을 연달아 쏘면서 17점을 쏜 카벨 자작을 앞지르는가 싶었더니, 마지막에 6점을 쏴 버린 것이다.

1세트에서 그의 총점은 25점. 하지만 희망은 있었다. 카벨 자작은 최소한 8점을 쏘아야 했고, 70m 거리에서 8점은 결코 장담할 수 있는 점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카벨 자작은 왜 자신이 우승 후보인지 그 실력으로 증명했다.

"9점! 1세트는 카벨 자작님의 승리입니다!"

자작이 주먹을 치켜세웠다. 그의 자세는 안정적이었다. 창공도 인정할 정도로. 바람이 강하게 불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점수를 낼 수 있다는 것. 과연 실력자였다.

부용도 본선 진출자이니만큼 자신의 실력을 뽐냈지만, 결국 이어지는 2세트도간발의 차로 내리 패하면서 탈락하고 말았다. 카벨 자작이 연승을 거두며 8강에 진출했다.

그 뒤로도 다른 조의 경기가 이어졌다. 창공은 노섬벨 공자와 존의 사격에 특히 집중했다. 그가 무사히 순위권에 진출한다면, 저들과 맞붙게 될 가능성이 제일 높았으니까.

노섬벨 공자의 활은 제 키의 반밖에 되지 않는 작은 활이었다. 창공은 물론이고, 다들 자기 키만큼은 되는 장궁을 썼는데도 말이다. 물론 활이 크다고 다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그의 자세는 카벨 자작과 같이 지극히 정석적인 자세였다. 대체로 안정적인 자세에서 안정적인 탄착군이 형성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존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자세는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큰 키에 걸맞지 않게 다리를 쭉 벌리고 허리를 잔뜩 굽힌 채 사격했던 것이다. 게다가 얼굴은 완전히 전방을 향하고 있었다.

'몽골리안 사법인가?'

적어도 그가 이번 제전에서 본 참가자들은 개인적인 차이는 있으되 기본적으로는 전부 지중해식 사법을 쓰고 있었다. 양궁을 배운 창공도 마찬가지. 하지만 존의 사법은 몽골리안 사법이라고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세 손가락으로 시위를 당기고 있었으니까.

자세야 어찌 됐건 그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쏘는 화살마다 7점 바깥으로 벗어나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하긴 정석적인 폼이든 그렇지 않든 활만 잘 쏘면 그만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드디어 그의 차례가 다가왔다.

"마지막 8조 경기 시작하겠습니다! 선수들은 각 사로로!"

"잘 부탁하네."

맥킨타이어가 창공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사답게 커다랗고 거친 손이었다. 창공은 그의 손을 마주 잡고 악수를 나누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맞잡은 손이 떨어지고, 창공은 사로에 서서 시위에 노크를 걸었다. 옆에서 맥킨타이어가 활을 당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끼이이이익... 쉭!

"8점!"

나쁘지 않은 점수였다. 준비가 이미 끝나있던 창공도 활을 당겼고, 만작되었다는 느낌이 오자 그대로 시위를 놓아주었다.

"7점!"

창공이 씨익, 웃음 지었다. 이번 대회에서 처음으로 쏜 7점이었다. 딱히 낭패감은 들지 않았다.

'이번 세트는 영점 조절하는 걸로 치면 되지.'

한 세트 정도는 내줘도 괜찮았다. 다음에 이어질 세트들에서 이기면 그만이었으니까.

"7점!"

이번엔 상대편에서 7점이 나왔다. 이러면 이야기가 달랐다. 이길 수 있다면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창공은 여유롭게 시위를 당겼다. 방금 조준했던 위치는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약간만 더 위로 들어주면 그만이었다.

"9점!"

화살이 금빛 동그라미에 꽂히고 관객들이 손뼉을 쳤다. 그는 만족한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 3세트도 미스터 서의 승리! 그에게 축하의 박수를! 맥킨타이어에게 격려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창공은 먼저 상대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졌으니 기분이 좋진 않겠지만, 어쨌든 그는 내색하지 않고 창공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며 기꺼이 악수를 받아주었다.

"날 이겼으니 꼭 우승하게나."

"그럴 생각입니다."

오늘도 아린은 광장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이날 그녀가 선택한 음악군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였다. 물론 그것에서 음을 따와 현에 실어 연주하는 중이었지만.

어쨌거나 지금 그녀가 공연하는 곡은 베토벤 소나타들 중에서도 유명하기로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14번 소나타. 흔히 월광 소나타로 많이 알려진 그 곡이었다.

가장 유명하며 잔잔한 분위기의 1악장, 톡톡 튀는 짧은 2악장. 다음으로 폭풍처럼 빠르게 몰아치는 3악장이 연주되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관중들은 자기들끼리 쑥덕대느라 그녀의 연주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주에 힘을 쏟던 아린에겐 그들이 뭐라 말하는지 들리지 않았지만, 이건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나름 비장의 무기였는데, 집중해서 연주한 '월광'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충분히 이끌어내지 못하는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아린은 온전히 연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창공 때문이었다. 본선에 무난히 진출한 모양이었지만 거기부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최고의 선수들끼리 맞붙으면 실력뿐 아니라 운이나 컨디션 같은 자기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요소들이 큰 영향을 끼치곤 하니까.

사실 본선에 진출한 것만 하더라도 충분히 잘한 일이었다. 하지만 창공의 목표는 본선 진출 따위가 아니었지 않은가. 목표는 우승. 최소한 3위 안에 드는 것이었다. 아린은 그를 믿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와아아아아!"

"왔다! 왔어!"

그 순간, 함성소리가 아린이 연주하는 칼란드라의 소리를 완전히 묻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연주할 수 없었다. 어차피 관객들의 정신도 다 저쪽에 가있는 것 같았고 말이다. 그녀는 활을 내리고선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터프 슈터!"

"터프 슈터 서!"

"아...!"

아린의 얼굴이 기대로 가득 물들었다. 인파가 갈라지고, 그 사이로 창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창공은 터프 슈터를 연호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줬다.

구리고 하찮은 별명이라고 그토록 폄하했었지만, 이제는 체념한 모양이었다.

"오빠...!"

"어, 그래."

그녀가 반갑게 창공을 불렀다. 마침 창공도 그녀를 찾고 있었던 모양인지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바로 아린과 눈을 마주쳤다.

"어떻게... 됐어요...?"

"결승전 진출했어."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말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전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아 글쎄 여섯 발을 연속으로 만점을 쐈다니까!"

"존 그놈이 사슴 후장 뚫는 재주는 있어도 11점 쏘는 재주는 없는데 어떻게 이기겠는가 말이야! 죽여줬다니까 정말!"

"고마워! 자네 덕분에 크게 땄어! 으하하하!"

왁자지껄한 분위기. 하지만 창공은 무수히 쏟아지는 악수의 요청에도 그저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아린의 얼굴에 그대로 꽂힌다.

"아린아."

"네, 네! 오빠."

아린이 활짝 웃자 주변에서 다시 환호성과 휘파람이 터졌다.

"뭐야. 둘이 사귀기라도 하나?"

"키스해라!"

"키스해!"

사람들의 장난기 어린 외침에 아린의 두 귀가 빨개졌다. 하지만 창공은 담담한 얼굴로 그녀에게 계속 말을 건넸다.

"뭐해. 빨리 연주해서 돈 벌어야지."

"..."

아린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도대체 왜 자긴 이런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건지 진지한 자아 성찰이 필요할 것 같았다.

"터키 행진곡 가능해? 모차르트 거."

"네. 네. 오빠가 원하는 대로 다아아아아 해드려야죠. 돈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그녀는 은근히 창공을 비꼰 다음 다시 연주할 준비를 갖추었다.

한 번 들었던 음악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았다. 절대음감과 뛰어난 기억력을 갖춘 그녀는 음악을 듣게 되면 그 음을 하나하나 분리해서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은 다음, 바이올린을 통해 그대로 연주하는 재주가 있었다.

아린은 자신에게 들었던 회의감을 떨쳐내고 좋은 성적을 거둔 창공을 위해 연주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그를 축하하기 위해선 어떻게 연주하는 게 좋을까.

'빠르게. 더 발랄하게. 그러면서 힘차게.'

머릿속으로 분위기를 결정한 그녀는 활을 힘차게 움직여 현을 긁기 시작했다.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이 스트렌드 광장에 경쾌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광장에 모인 모두가 듣고 있었지만, 기실 이 음악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연주되는 음악이었다.

'오빠가 듣고서 즐거워했으면 좋겠어.'

그 연주는 이제까지의 연주와는 달랐다. 분명 소리를 내고 있는 악기는 칼란드라 한 대인데, 어째서인지 다른 악기의 소리도 같이 나는 것만 같았다.

플루트, 비올라, 첼로, 드럼, 바순... 창공은 그녀의 독주에서 마치 오케스트라의 합주를 듣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적에 빠졌던 광장이 다시 소리로 가득 찼다. 악기 소리와 사람들이 내는 시끌벅적한 소리로. 다만 이번에는 연주에 집중하지 않고 각자 떠드느라 시끄러운 게 아니었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곡조를 흥얼거리더니, 박자에 맞추어 고개를 까딱거렸다.

맨 앞에 서서 그녀의 연주를 듣던 한 사람이 몸을 들썩였다. 간단하게 들썩이던 동작은 어느새 본격적인 춤이 되었다. 한 사람의 춤은 두 사람의 춤으로, 두 사람의 춤은 다시 네 사람의 춤으로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이제 돌아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매력적인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빠른 박자로 춤을 출 수 없던 어떤 노인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도대체 왜?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강제로 시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들은 음악과 하나 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창공의 마음속에서도 즐거운 감정이 솟아올랐다. 자꾸만 몸을 움직이고 싶어 근질거리는 느낌이었다.

'대체 왜...?'

창공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봤다. 광장은 어느새 거대한 무도회장이 되어있었다. 아린은 눈을 감고 연주에 집중하느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건.'

그의 시선은 아린이 힘차게 움직이는 활에 박혔다. 은은한 푸른빛이 그녀가 현을 긁은 자리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유리 조각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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