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알펜시아 궁술 제전 (6)
* * *
결승전이 개최되는 날, 창공은 새벽부터 사격장에 나와 마인드 컨트롤을 준비했다. 마침 결승에 진출한 두 선수를 위해 주최 측에서 준비한 천막도 있었고 말이다.
평소대로 시간에 맞춰 나오게 되면 주변에서 터프 슈터니 뭐니 하면서 온갖 지랄병을 떨어댔을 테지만 그는 그런 웃기지도 않는 별명으로 칭송받고 싶은 마음은 일절 없었다.
"자네 왔나?"
"...전례 대신님이십니까?"
그런데, 천막 안에는 그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또 다른 결승 진출자인 카벨 자작이었다. 4강에서 노섬벨 공자를 꺾고 올라온 그는 천막 안에 비치된 화로에서 나오는 불길에 자신의 활을 쪼이고 있었다.
민감할 수도 있는 사람들끼리 같은 천막을 주면 어쩌자는 건지. 창공은 속으로 툴툴거리며 화로를 사이에 두고 자작의 반대편에 앉았다.
"합성궁이군요."
"볼 줄 아는군. 하긴 당연한가. 내 활은 물푸레나무에다 알펜시아 산맥의 사슴뿔을 붙였다네."
시위를 풀어놓은 자작의 활은 C자형으로 돌돌 말려있었다. 저런 합성궁은 통짜 나무로 만드는 강화궁이나 나무토막 여러 개를 붙여서 만드는 복합궁보다 강한 위력을 자랑했지만, 틈만 나면 저렇게 불에 쪼여서 습기를 날려주는 작업이 필요했다.
창공이 사용하고 있는 활은 단일 소재로 만든 강화궁이다. 위력은 뒤떨어지지만 관리는 훨씬 편했다.
물론 그가 제일 좋아하는 활은 카본과 알루미늄으로 만든 리커브 보우다. 케이스 안에서 고이 잠들어 있을 그의 활을 생각하니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지금 그가 쓰는 활은 그것에 비하면 조잡한 장난감이었다. 쏠 때마다 자꾸만 위화감과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보게."
그런 상념에 잠겨 있으려니, 카발 자작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다른 세상에서 왔지 않은가?"
"그렇습니다만."
"그곳은 어떠한가? 그곳의 사람들도 자네처럼 활을 잘 쏘는가?"
활을 사랑하는 나라의 귀족 아니랄까봐, 묻는 것도 이 모양이다.
"저는 그렇게 잘 쏘는 편이 아닙니다만."
물론 프로들에 비하면 그랬다. 당장 프로를 해도 이상하지 않은 실력이라고 여러 번 말을 듣긴 했지만, 국가대표로 나가는 진짜 프로들과는 비교할 수는 없었으니까.
진실을 전부 말한 건 아니었으나 자작이 그런 것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정말인가? 그건 믿기 어렵군."
"진짜 선수들 모인 곳에 가서 제 실력 자랑하면 맞아 죽어도 할 말 없습니다."
"으으음..."
그는 깊은 침음을 흘렸다.
"그게 사실이라면, 대단하군. 자네가 이곳으로 오는 게 아니라 내가 그곳으로 갔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창공도 그 말에 깊은 동의를 표했다. 이런 세상에는 오고 싶지도 않았다.
두 남자는 그 뒤로는 서로 말이 없었다. 자작은 활을 관리하느라, 창공은 정신을 가다듬느라.
시간이 조금씩 지나고, 천막 바깥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슬슬 때가 된 모양이었다.
"대신님. 그리고 미스터 서. 이제 곧 경기가 시작됩니다."
진행 요원이 천막 안으로 들어와 통보했다. 창공과 자작은 활을 챙기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래쪽 고자에 시위를 걸고, 활 몸대를 바닥에 세우고, 한쪽 발로 받쳐 고정한다.
그다음엔 풀어진 시위의 끝을 잡고서. 양 무릎을 이용해 활을 지긋이 눌러준다.
이렇게 되면 풀어져있던 활이 점점 휘어지기 시작하는데, 이때 고자에다가 시위를 얹는 것이다. 이 과정이 끝나야 사람들이 떠올리는 활의 모양이 잡히게 된다.
"기대하고 있겠네."
"저도 마찬가집니다."
둘은 시위가 얹힌 활을 들고 천막을 나섰다. 사방에서 햇빛과 함께 환호성이 쏟아진다. 흥분될 법도 했지만, 그들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실력자는 주변 환경에 휩쓸리지 않는다.
"대망의 결승전이 시작됩니다. 1번 사로! 전 정기 제전 우승자인 노섬벨 공자를 꺾고 결승에 진출한... 자랑스런 알펜시아의 전례 대신! 윌리엄 에테르 카벨 자작! 과연 이번에는 우승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일반 관중석의 호응도 대단했지만, 역시 궁정 귀족이니만큼 귀족들로 이루어진 귀빈석의 반응이 훌륭했다.
그래도 높은 신분이라고 체통을 지키긴 했으나 상기된 얼굴로 열렬히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2번 사로! 6연속 10점으로 그 "거인" 존을 꺾은... 그야말로 이번 제전의 초신성! 창공 "터프 슈터" 서! 이 에트로지를 열렬히 맞아주시길 바랍니다!"
굳이 진행자가 목놓아 외칠 필요도 없었다. 이미 관중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창공이 알펜시아인이고, 카벨 자작인 타국의 귀족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오늘은 9연속 10점이다!"
"잘 좀 쏘라고! 내 딸내미 옷값을 자네에게 몽땅 걸었으니까!"
"난 일주일 치 품삯을 모두 꼬라박았다니까? 젠장, 우승하지 못하면 마누라가 날 죽이려고 할 거야!"
의외로 신예에 불과한 창공에게 내깃돈을 건 사람이 많았다. 준결승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6연속 10점의 임팩트가 그만큼 컸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창공에겐 관중들의 판돈을 보전해 줄 의무는 없었다. 아마 그가 우승을 놓친다면 퍽 재밌는 광경들을 많이 보게 되리라.
하지만 칼을 들고 남편을 추격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기 위해 준우승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과녁을 바라보며 천천히 화살을 집어 들었다.
'읏...'
시위를 잡는 세 손가락이 심하게 뻐근거렸다. 보호 장구 없이 계속 시위를 당긴 탓에 손가락 인대에 무리가 간 것이다. 버틸 수 있을까?
'버텨야지.'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대회가 끝나면 얼마가 들게 되던 반드시 핑거탭을 제작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럼, 각자 최선을 다해주시길!"
깃대에 묶인 깃발은 축 처진 채로 미약하게 흔들리고만 있었다. 바람의 세기는 완전히 무풍은 아니되, 고려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다만 그가 쏘면서 느낀 사실인데, 확실히 목재 화살은 카본 화살에 비해 직진성이 떨어졌다. 게다가 수작업으로 만든 화살이다 보니 화살 간에 편차가 조금 있었고 말이다. 다루기 까탈스럽다는 이야기다.
물론 자작의 화살이라고 기계로 찍어낸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남이 쓰던 화살을 주워 사용하는 창공보다는 좋은 화살을 쓰고 있지 않겠는가?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기면 핸디캡이고, 지면 변명일 뿐.
"9점!"
자작의 뒤에서 쌍안경으로 과녁을 지켜보던 심판이 점수를 외쳤다. 거리는 어제와 같은 70m. 1세트에 3발. 5세트로 진행된다는 점만이 달랐다.
창공도 시위에 화살을 메기고선 그대로 쭉 당겨 턱 밑에 앵커링했다. 시위를 잡은 손가락 마디에서 찌르는 것 같은 격통이 전해져왔다. 그냥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창공은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위닝샷까지 간다 해도 16발이면 끝나는 경기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조준을 끝낸 창공은 그대로 시위를 놓았다. 퉁, 하고 시위가 원래대로 돌아가며 손가락에 충격을 주었다.
"윽...!"
꽉 깨문 이빨 사이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남들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분명 이상이 있었다.
"9점!"
이어지는 박수소리. 카벨 자작이 곧바로 활을 들어올렸다. 창공도 화살을 시위에 걸어야 했지만,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참아내느라 동작이 재빠르지 못했다.
그는 시험 삼아 손가락을 굽혀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완전히 굽혀지지 않았다. 관절에 뭔가가 자리를 잡고 움직임을 방해하는 느낌이었다.
마디는 부어올랐고, 통증과 함께 열이 느껴진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중단하는 게 맞았다. 인대에 무리가 가다니. 초보자 시절을 제외하면 한 번도 겪은 적이 없는 부상이다.
"9점!"
역시 카벨 자작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흔들리지 않는 정확한 자세, 앵커링 이후 빠른 발사. 창공에게 호흡을 고를 틈을 주지 않고 있었다.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한 창공은 화살을 걸고 시위를 잡아당겼다. 그가 잡고 있는 것이 줄이 아니라 마치 칼날처럼 아리게 느껴졌다.
조준. 발사.
"8점... 혹은 9점!"
아마도 경계에 걸친 모양이었다. 이런 경우엔 세트가 끝나고 직접 과녁을 확인해 점수를 결정하게 된다.
한편, 표정조차 변하지 않은 자작은 1세트의 마지막 화살을 쏘았다.
"10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 창공이 반드시 10점을 쏘야아 하는 상황이었다. 또, 10점을 쏘더라도 두 번째 화살이 8점 판정을 받는다면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걸 고민하며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저 과녁 중앙을 노리고 쏘면 되는 것이다. 점수라던가 상황은 그다음에 생각할 하찮은 문제였다.
"10점!"
방금 전 자작에게 쏟아진 것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찬사가 창공에게 바쳐졌다. 1세트, 자작의 점수는 28점. 창공의 점수는 27점 혹은 28점.
지면 자작이 세트 스코어 2점을 가져가고, 비기면 각각 1점씩 가져가게 된다. 창공의 과녁에 심판 셋이 달라붙어 탄착점을 면밀히 살폈다.
"미스터 서의 두 번째 화살은 8점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따라서 1세트는 카벨 전례 대신님의 승리입니다!"
심판에게서 판정 결과를 전달받은 포고관의 외침. 이어지는 안타까움의 탄성. 창공이 1세트를 지고 들어가는 것은 이번 대회에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 있습니까? 차가운 걸로."
그는 자기 뒤에 있던 진행요원에게 물을 찾았다. 고개를 끄덕인 요원은 준비된 가죽 물병을 가져왔다.
창공은 병뚜껑을 열고선 시위를 잡는 세 손가락에 골고루 뿌렸다. 물은 얼음장같이 차가웠고, 격통이 조금이나마 진정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오래 못 가겠지만.'
그는 옷에 손을 슥슥 문질러 물기를 닦아냈다. 두 번째 세트 역시 전 세트에서 승리했던 카벨 자작이 선공을 가져갔다.
"10점!"
2연속 10점. 아무래도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창공에게도 감각은 살아있었지만 문제는 통증이었다. 그가 아무리 자신에 대한 통제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통증을 두려워하는 것은 통제가 미치지 않는 본능에 새겨진 것이었다.
'큭...!'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턱 밑에 시위를 잡은 오른손을 갖다 대고 앵커링을 하던 중에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손가락이 펴져버린 것이다.
"...4...점!"
쌍안경을 눈에 갖다 대고 있던 심판이 머뭇거리며 점수를 불렀다. 창공은 이번 대회에서 이제까지 7점 보다 낮은 점수를 기록한 적이 없었다. 관중들이 웅성댔고, 부동을 유지하던 자작도 슬쩍 그를 쳐다봤다.
"..."
하지만 창공은 아무 말 없이 화살을 잡을 뿐이었다. 자작도 고개를 돌려 다음 사격을 준비했다. 이미 2세트도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렇게 되었다.
"2세트 또한 카벨 전례 대신님의 승리!"
패색이 짙어졌다. 물러설 곳이 없었다.
"내게 남는 장갑이 있네만."
자작이 그에게 말했다. 맨손으로 사격하느라 손가락에 부담이 간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창공은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이제 와서 갑자기 장갑을 낀다면 감각이 흐트러질 수 있었다. 아마 그럴 공산이 높았다. 자작 또한 내심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었는지 별말은 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3세트에선 통증을 참아낼 수 있었다. 두 선수가 쏜 네 발의 화살은 전부 9점을 기록했다. 자작은 세 번째 화살을 당겼고, 역시 9점을 기록했다. 그의 집중도는 오늘 최고조였다.
최소한 9점을 쏘아야 하는 상황. 창공은 시위를 당겼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앵커링 후에 시위를 미세하게 당기며 홀딩을 가져가는 상황에서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엄습했다. 결국 그는 시위를 원래 그의 타이밍보다 일찍 놓을 수밖에 없었다.
'젠장!'
그는 패배를 직감했다. 방금 4점을 쏘았을 때와 느낌이 거의 비슷했다. 그런데, 여기서 천운이 일어났다. 발사와 동시에 뒷바람이 한 번 강하게 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더 아래쪽을 향했어야 할 화살이, 바람을 타고 중력을 이겨냈다.
"10점! 28 대 27로 미스터 서의 승리! 벼랑 끝에서 간신히 살아납니다!"
"그렇지! 역시 터프 슈터!"
"우와아아아! 살았다!"
열화와 같은 찬사가 사격장을 가득 메웠다. 그들 중 절반은 허무하게 판돈을 잃을 뻔한 사람들의 환호였지만. 어쨌든 세트스코어는 이걸로 4 대 2.
창공의 뇌하수체에서 아드레날린이 잔뜩 분비되었다. 그가 인생에서 쏜 10점짜리 화살 중에 제일 짜릿한 한 발이었다.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혈관을 달리는 호르몬이 아픔을 지워버린 것이다.
"...하늘이 돕는군."
카벨 자작이 중얼거렸다. 역시나 그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 거리에서 그토록 강한 바람이 불었는데 과녁 정중앙에 꽂히다니... 원래대로라면 그의 우승이었으리라.
창공은 이 순간 마치 무적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겨우 손가락이 아프지 않게 되었을 뿐인데, 최악에서 최고의 몸상태로 변한 이 느낌.
그는 그 기세를 타고 4세트를 제압할 수 있었다. 자작도 물러서지 않고 29점을 쏘았지만, 세 발 연속으로 10점을 쏜 창공에겐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30 대 29로 4세트 역시 미스터 서의 승리! 3세트까지 포함하면 네 발 연속 10점입니다!"
이쯤 되니 귀빈석에 앉은 사람들도 얼굴에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차마 펄쩍펄쩍 뛰며 환호성을 지를 수는 없었지만. 체면을 지켜야 하는 자리에 앉는 것은 참 어려운 법이다.
이어지는 마지막 5세트. 창공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이 넘쳤다.
노킹. 시위에 화살을 메긴다.
후킹. 시위에 손가락을 걸친다.
셋업. 활을 슬며시 들어올리고선 시위를 당기기 시작한다.
드로잉. 만작이 될 때까지 당겨준다.
앵커링. 당기는 손을 턱 밑에 갖다 대어 고정한다.
그 뒤에 과녁을 바라보며 에이밍.
두 팔을 세심하게 당기고 밀며 홀딩.
릴리즈는 지금이었다.
쉬익!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그의 오른손이 턱 선을 따라서 재빠르게 움직이며 귓불을 살짝 스친다.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 매끄럽게 이어졌다. 결과는 당연했다.
"10점!"
완벽한 명중. 퍼펙트 골드다. 이걸로 5연속 10점이었다. 이쯤 되면 기가 죽을 법도 하건만, 자작은 무표정으로 활을 당겼다. 이번 5세트에선 창공뿐 아니라 그도 최고의 상태였다.
"10점!"
"10점!"
"10점!"
그 누구도 감히 감탄이나 박수 소리를 내지 못했다. 뭔가 일어나고 있었다. 과녁 전체가 10점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면 이럴 수 있는가? 하지만 엄연히 그들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이어지는 창공의 5세트 마지막 사격. 이제까지 그는 6연속으로 10점을 쏘고 있는 중이었다. 과연 7연속도 가능할 것인가? 모두가 그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심지어 카벨 자작을 응원하는 사람까지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신기를 직접 볼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창공은 그들의 청원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10점!"
창공이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30점을 획득하긴 했지만, 자작 또한 연속으로 10점을 쏜 상황이었다. 그가 10점을 쏜다면 승부의 행방은 위닝샷으로 넘어가게 된다.
"..."
모두가 숨죽이고 카벨 자작의 마지막 사격에 집중한다. 천천히 시위가 당겨지고... 만작되자, 그 상태로 홀딩. 가슴 졸이며 지켜보던 사람들은 몸 안에서 뭔가 터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퉁.
5세트 최후의 화살이 발사되었다. 매끈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이 과녁 위에 안착했다.
"10점!"
"5세트는 무승부!"
관중들이 박수를 쳤다. 누굴 응원하고 있는지를 떠나서 모두가 한마음으로. 놀라운 기예를 보여 준 두 선수에 대한 감사의 박수였다.
창공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이렇게 될 것만 같다고 어렴풋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딱히 동요심이 일어나진 않았다.
심판들이 과녁에 다가가 꽂혀있는 화살들을 뽑아냈다. 위닝샷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이제까지 누가 몇 세트에서 몇 점으로 이겼는가, 하는 것들은 전부 하찮은 것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쏘는 화살 한 발. 그것이 모든 걸 결정하는 것이다.
"제가 먼저 하지요."
5세트가 무승부가 되었으니, 선공의 선택권은 4세트에서 승리한 창공에게 있었다. 자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좋을 대로 하게나."
창공은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선 화살을 집어 들었다. 우연인지 뭔지, 그의 화살통에 남은 화살은 단 한 발이었다.
그는 오늘 십수 번 수행했던 동작을 그대로 반복했다. 가장 중요한 화살이지만, 특별할 것은 없었다.
숨을 가득 들이마셔서 폐를 한껏 부풀린 다음, 1/3만 뱉어주고 기도를 막는다. 호흡을 하면 조준이 흔들리니까. 호흡이 멈추자 맥박이 몸 안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그 느낌이 점점 사라졌다. 손에 쥔 모래알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천천히. 시야가 좁아졌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점점 작아지다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
그는 이 느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집중이 극에 달한 상태. 그것이 지금 찾아온 것이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점점 좁아지던 시야는 과녁만을 남기고 그 축소를 멈추었다. 대신 과녁이 점점 확장되기 시작했다. 아니, 앞으로 다가오는 것인가? 둘 다인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게 하나 있었다. 그는 과녁의 한가운데에 곧바로 화살을 갖다 대고 있었다. 영거리조준을 하는 것이다.
그는 그제서야 시위를 놓았다.
과녁은 다시 저 멀리 도망가고, 감각들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위로 날아오른 화살은 최고점을 찍은 뒤, 완만하게 곡선을 그리며 하강했다.
"10점!"
쌍안경을 통해 과녁을 바라보던 심판이 크게 외쳤다. 따로 검수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깔끔한 명중이었다.
창공은 자작을 바라봤다. 그가 쏘는 화살에 모든 것이 달려있었다.
퉁!
시위가 튕겨지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화살이 공중을 날다가... 이내 과녁에 꽂혔다.
"9... 9점...! 혹은 10점!"
심판들이 카벨 자작의 과녁에 달라붙었다. 판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심판진은 포고관에게 결과를 전달했고, 포고관은 연단 위에 올라서서 목청을 가다듬었다.
"카벨 전례 대신님의 점수는... 9점으로 판명되었다! 따라서 3331년 알펜시아 궁술 제전의 우승자는 미스터 서!"
귀빈석과 관중석의 모든 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공을 상찬했다.
위닝샷 포함 8연속 10점. 도무지 믿기 어려운 기적과도 같은 신기.
먼 옛날의 기록이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일을 실제로 보았으니, 알펜시아인이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은 없었다. 있을 수 없었다.
"축하하네. 오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줘서 고맙네."
"감사합니다. 대신님도 수고하셨습니다."
자작은 먼저 창공에게 다가와 축하를 건넸다. 준우승, 3위에 이어 이번 제전에서 준우승을 했으니 상당히 아쉬울 법도 했지만 표정에 그것이 드러나진 않았다.
"그런데... 정말 자네가 잘 쏘는 편이 아니란 말인가?"
"사실이 그렇습니다."
"도대체 그곳은 어떻게 된 세상이란 말인가..."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창공을 앞으로 이끌었다. 귀빈석과 관중석에선 아직까지도 기립박수와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창공은 기꺼이 그들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것이 우승자로서의 의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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