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33화 (33/178)

〈 33화 〉 왕실의 의뢰 (2)

* * *

"다 온 모양이군. 내리지."

덜컹거리던 마차가 멈추었다. 문을 열고 나서니 커다란 성의 뒷면이 보였다. 이제 오후 3시쯤 되었건만, 이쪽 면은 빛이 잘 들지 않아 돌로 된 벽이 거무죽죽하게 보였다.

"왕비 전하의 명을 받고 오신 분들이십니까?"

"맞네."

그 자리에는 시녀가 하나 나와있었다. 창공과 자작은 그녀의 뒤를 따라 좁고 긴 통로를 걸었다. 그래도 왕성이라고 벽에는 그림들이 걸려있었고,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은 자신의 길이를 자랑하듯이 저 끝까지 뻗어있었다.

그림이나 카펫이나 따뜻한 색채를 띠고 있었지만, 사람이 다니지 않는 통로에는 적막과 싸늘함이 감돌고 있었다. 곳곳에 놓인 촛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로도 그것을 덮진 못했다.

"생각해 보니, 에트로지가 왕성 안으로 들어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 되겠군."

"그래봤자 비공식적인 방문 아닙니까?"

"...그렇지."

자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도 왕비가 왜 자신들을 불렀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그들의 왕성 방문은 기록에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얼마간 걸어가니, 커다란 창문이 달린 복도가 그들을 맞이했다. 방금 전 통로와는 달리 창밖에서 한껏 들어오는 태양빛은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고 있었다. 돌벽에는 화려한 그림이 새겨진 태피스트리가 냉기를 차단했다.

"좋군요."

창공이 중얼거렸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화려함으로 치면 베르사유 궁전이 더 나았지만 그곳은 너무나 붐비고 시끌벅적한 탓에 제대로 된 관람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사위는 적막했고 이 공간엔 오로지 그들밖엔 없었다. 게다가 실제 왕족이 살고 있는 궁전이 아닌가. 감상하기엔 최고의 공간이 아닐 수 없었다.

짧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카벨 자작이 옅게 미소지었다.

"심미안이 있는가?"

"그럭저럭입니다."

그는 자작에게 대꾸하며 창문 반대편에 걸린 태피스트리를 살펴보고 있었다. 단언컨대 여기서 제일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복도를 따라서 기다랗게 걸린 하나의 태피스트리엔 왕관을 쓴 왕, 도끼를 들고 말을 달리는 기사, 그리고 수많은 병졸들이 그려져 있었다.

묘사는 투박했지만 그렇기에 한눈에 똑바로 들어왔다. 그런데 태피스트리 자체는 기다란 한 조각이었지만, 위에 아로새겨진 그림들은 하나가 아니었다.

"여기 걸려있는 건 무슨 작품입니까?"

"아잔틴 대왕께서 연합군을 결성하고 키트라 제국을 멸하실 때의 전쟁을 묘사한 것이라네. 각 그림마다 하나하나 이야기가 존재하지."

"아... 그 아네르라는...?"

"자네도 알고 있군그래. 자랑스러운 선조의 역사지. 왕비 전하께서 무엇을 이르실진 모르겠지만, 모든 일이 끝나고 왕국이 안정을 찾는다면 자네에게 내 직접 소개하도록 하겠네."

"영광이군요."

"제전에서 우승하고도 조촐한 축하를 받았으니, 전례 대신으로서 그 정도도 못 한다면 알펜시아의 이름이 울지 않겠는가."

돈은 한 푼도 못 챙겼지만, 그래도 궁술 제전 우승자라는 타이틀은 꽤나 쓸모가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더 이득을 챙길 구석이 있지 않을까... 창공은 기회를 엿보기로 마음먹었다.

"다 왔습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시면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커다란 나무 문. 그들은 음각으로 여러 문양이 새겨진 짙은 갈색의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티 테이블에 앉은 왕비가 보였다. 수심이 짙게 깔린 그녀의 얼굴엔 생기가 없어 마치 죽은 사람과도 같았다.

"왕비 전하..."

"예는 됐네. 이리 와서 앉으시게."

왕비는 자작이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숙이려는 것을 만류하고선 자기 반대편에 놓인 두 의자를 가리켰다. 자작은 물론 창공도 사양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그들 몫의 잔이 준비되어 있었고, 왕비의 뒤에 시립했던 시녀가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랐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마음껏 들게."

창공은 찻잔을 들어 입에 갖다 댔다. 올라오는 냄새만 맡고도 눈치챘었지만, 홍차였다. 얼마 만에 마셔보는 차란 말인가.

"그래. 미스터 서. 제전의 우승자."

왕비가 그를 부르자,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대가 보여주었던 놀라운 솜씨는 아직도 눈에 선하다네. 그런데... 원래 맨손으로 활을 쏘는가? 힘들 텐데."

"이쪽 세상에서는 제게 맞는 장비가 없더군요."

"손에 맞는 장갑이 없던가?"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이 말을 하려고 부른 건 당연히 아니겠지만, 그 주제가 또 활이라니. 이놈의 나라에서는 왕비까지 활에 미쳐있는 것 같았다.

"제가 원래 살던 곳에서는 보호구로 장갑이 아니라 다른 것을 씁니다. 하지만 여기엔 그게 없어서 말입니다."

"그런가? 대신."

"예, 전하."

"시간이 나면 미스터 서를 데리고 왕실 공방으로 가서 그가 원하는 보호구를 맞춰 주도록 하시오. 겸사겸사 다른 세상의 지식이 우리 알펜시아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

"명을 받잡습니다."

창공을 찻잔을 기울이며 생각했다. 당연히 호의를 베푸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가 활을 쏠 때 어떤 장비를 쓰는지 알아내려는 목적도 있을 거라고. 하기야 정치인은 한 가지 행동으로 여러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법이다.

"그래... 그럼 그것으로 됐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미스터 서?"

"네."

왕비의 검은 눈동자가 창공의 눈을 똑바로 향했다.

"왜 내가 자네를 이곳에 불렀는지 짐작이 가는가?"

"물론입니다."

"들을 테니 말해 보게나."

그는 마차 안에서 추측했던 것들을 입 밖으로 가지런하게 늘어놓았다. 요점은 그랬다. 왕자는 현재 실종 상태고, 그 수색의 의뢰를 자기에게 맡기려고 한다는 것. 왕비가 찻잔을 든 채 말했다.

"몇 마디 들었던 말로 거기까지 짐작했단 말인가?"

"그닥 어렵진 않았습니다."

"맞아. 천천히 생각하면 짐작하긴 어렵진 않지. 그렇다면 왕자가 어디로 향했는지... 그것도 알 수 있겠나?"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실종인 이상 왕립 해군 사령관에게 향했을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면 그 대신에 왕권 확립에 도움이 될 행보... 그것도 제전을 빼먹으면서까지 갈 가치가 있는. 여기부터는 창공이 가지고 있는 정보로는 추측할 수가 없었다.

"그렇겠지... 미스터 서. 알고 있겠지만, 우리가 오늘 나누는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선 아니 되네. 만약 새어나간다면, 내가 누굴 먼저 의심할진 알고 있겠지?"

그거야 당연히 알펜시아와 아무 연고도 없는 창공이다. 그는 미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전하. 도대체 왕자 전하께선 어디로 향하신 겁니까?"

카벨 자작이 왕비에게 물었다. 궁정 귀족에다 근왕파 귀족들 중 왕비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그마저도 왕자가 어디론가 향했다는 사실만 알지, 어디로 향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알펜시아 산맥이라오."

왕비가 대답했다.

'산맥? 도대체 산맥에는 왜?'

점점 더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뜬금없이 왜 산으로 간단 말인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두드리던 창공이 입을 열었다.

"산맥에 뭐가 있습니까?"

"산에 있는 것이 나무와 짐승을 빼면 무엇이 있을까. 다만 그곳에 있다고 전해지는 것은 있지."

"있다고 전해지는 것?"

"그 무슨!"

자작이 황당한 얼굴로 아연실색했다.

"전하. 그렇다면 왕자 전하께서는 설마...?"

"그대의 짐작이 맞소. 왕자는 왕들의 무덤을 찾으러 간 것이오."

"대체 그게 뭡니까?"

그의 기분이 조금 불쾌해졌다. 기껏 사람 불러놓고 자기들만 아는 이야기를 하는 꼴이라니. 다행히 자작이 곧바로 설명했다.

"일곱 아네르 이야기는 알고 있다고 했지. 키트라 제국이 멸망하고, 그분들께선 자신들의 영원한 우정을 기리며 장지도 같은 곳을 쓰기로 약조하셨다 하네. 그리고 그곳이 바로 알펜시아 산맥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야."

"확실한 이야깁니까?"

"아니."

자작이 쓰게 웃었다.

"분명 기록에는 남아있어. 그래. 2천 년 전 기록이지만. 그 기나긴 세월 동안에 우리가 얼마나 그곳을 찾았겠나? 모험가들은 얼마나 산맥을 들쑤시고 다녔겠나? 물론 알펜시아 산맥이 좁은 지역은 아니지만, 2천 년 동안이나 왕릉이 발견되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곳은 더더욱 아니야."

"그럼 그 기록이 잘못된 게 아닙니까?"

"우리뿐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때 연합했던 다른 국가들의 기록에도 같은 내용이 남아있단 말일세. 아퀴탄, 아르토스, 헬라스... 요르문과 헬베트는 노르마크로 합쳐졌고. 다섯 국가의 기록이 일치한다면,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낮지 않겠는가?"

"2천 년 동안 발견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까?"

"그게 문제지. 이제 와선 왕들의 무덤은 그저 전설이 되어버린 이야기일세. 부와 명예에 미친 모험가들도 그곳은 찾지 않아. 그런데 왕자 전하께서 그곳으로 향하셨단 말인가..."

창공이 다시 제 머리를 두드리며 생각했다. 그제서야 왕자가 왜 산맥으로 향했는지 알 것 같았다. 선왕은 반란 진압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왕자는 나이도 어린데, 정국은 불안정하고 당연히 받아야 할 충성 맹세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왕자는 자신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 도박수를 던진 것이다. 왕들의 무덤ㅡ정말로 그것이 있다면ㅡ에 묻힌 아잔틴 2세는 그의 조상이면서 전 대륙에서 존경받는 위인. 그 무덤을 찾을 수 있다면 무너진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겸사겸사 자신의 치적도 쌓아올릴 수 있다는 계산이 아니었을까?

'병신이네. 그냥.'

이것이 바로 왕자에 대한 창공의 평가였다. 그의 입장에선 병신이 따로 없었다. 이 수상쩍은 시국에, 왕위에 올라야 할 당사자가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이야기에 도박수를 던지다 실종된다? 이게 병신이 아니면 뭐냐는 것이다.

"만약을 위해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왕비와 자작의 시선이 창공에게 모여들었다.

"계승 서열 2위는 어떤 분이십니까?"

"으휴..."

카벨 자작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왕자 전하께선 형제자매가 없으시네. 따라서 선왕의 형제 되시는 앨버트 왕자..."

"그건 아니 되오."

엘레오노어 왕비가 이글거리는 눈길로 자작을 노려봤다.

"대신께선 지난 반란에서 역도들이 누굴 권좌에 옹립하려 했는지 벌써 잊어버린 것이오?"

창공은 조용히 차를 마시며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듣기로 선왕의 동생을 옹립하려는 반란이었다던가. 하긴 계승권자 2위라는 것은 꽤나 배알이 꼴리는 상황이리라. 본인이 주동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반왕파 귀족들에 의해 얼굴마담으로 내세워진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러나 전하. 앨버트 왕자의 계승권은 아직까지 존속되고 있나이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계승권은 왕실의 가장이 박탈해야 하는데, 선왕께서 서거하신 지금 알펜시아 왕실의 가장은 에드워드 왕자 전하가 아니십니까. 왕자 전하께선 아직까지 앨버트 왕자에 대해 별말이 없으셨으니..."

"후..."

왕비의 깊은 한숨.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앨버트 왕자를 내 친히 쏘아 죽이고 싶은 심정이오."

"왕비 전하. 저는 어디까지나 이 나라의 전례 대신으로서 드린 말씀일 따름입니다."

"알고 있소."

그러니까 그 앨버트 왕자라는 사람은 아직까지 살아있긴 한 모양이었다. 반란은 진압되었으니까 연금이라도 당한 상태가 아닐까.

하기야 미우나 고우나 1순위 계승권자가 후사를 생산하지 못한 상황이다. 당연히 쉽게 죽일 수가 없는 인물이다.

"그러니까."

창공이 말을 꺼냈다.

"왕비님께선 저와 전례 대신이 함께 알펜시아 산맥으로 가서 왕자님의 수색을 하길 바라신다는 게 아닙니까?"

"정답이네."

"일단은... 왜 접니까? 저는 알펜시아 왕국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습니다. 단지 궁술 제전에서 우승한 이방인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자네가 적임자라는 것이지."

왕비가 창공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래. 나도 이런 상황이 개탄스럽기 짝이 없네. 도무지 믿을 사람이 없어. 반란에 가담했던 귀족들은 물론이요, 왕실을 도왔던 귀족들도 본 왕비가 볼 때엔 믿고 맡길 사람이 없으이. 당장에 왕자가 실종되었다면 그들이 계속 충성을 바칠까? 도저히 짐작할 수 없네."

그녀의 눈빛엔 강한 불신과 의혹이 깃들어있었다.

"궁정 귀족들은 어떠한가? 당장 이 꼴을 보게.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전례 대신인 카벨 자작뿐이네. 나머지? 나는 모르겠네. 모르겠어..."

방 안은 난로에서 뿜어지는 온기로 따스했지만, 왕비는 오한이 느껴지는 듯 두 팔로 몸을 끌어안았다. 남편을 잃고. 이젠 하나뿐인 자식까지 잃게 생긴 미망인이다. 보이지 않는 칼이 난무하는 정치판에서 그녀를 지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하... 소신이 불충한 탓이옵니다..."

자작이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알펜시아 왕국과 아무런 연고가 없다고 했나? 그 말이 사실이길 바라네. 자네야말로 내가 찾던 적임자야. 반란 세력과 내통했을 가능성이 가장 적은 사람. 이세계에서 날아온 에트로지 말일세. 그것도 제전에서 우승할 정도로 실력이 좋은."

"그렇습니까."

"왕자의 판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왕위를 이어받을 자격이 없는 병신. 하지만 어미 앞에서, 그것도 왕비 앞에서 내뱉을 말은 아니었다.

"왕자님께선 위험하지만 과감한 용단을 내리셨군요."

"다른 말로는 병신이라고 하지."

창공은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는 것이 조금 힘에 부쳤다. 왕비의 말은 너무나도 적나라했다. 자기 자식이면서 다음 왕이 될 자에게 하는 말로써는.

그리고 전례 대신 앞에서 내뱉을 말도 아니었다.

"왕비 전하! 그런 말씀은..."

"심히 부적절하외까? 물론 그럴 것이오. 하지만 고과는 본래 중앙 정계와는 연이 없던, 사내아이들과 흙바닥을 구르며 자란 변경백의 딸일 뿐인지라. 병신이라는 단어 외엔 이 상황을 가장 적절히 묘사할 고풍스러운 단어를 찾지 못하겠구려."

"허어..."

"왕자는 쓸데없는 부분에서 어미를 닮은 게지. 그래. 고과도 이젠 그런 왕자를 비웃을 수 없게 되었소. 똑같이 병신이 될 예정이거든."

자작은 더 말하길 포기했다.

"위험하지만 과감한 판단이라고 했던가, 미스터 서? 고과는 자네가 대신과 함께 알펜시아 산맥으로 가서 왕자를 찾아주었으면 하네. 어떤가? 이만하면 그 정의에 부합하는 판단인가?"

그가 말없이 웃었다.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면 너도 병신이라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승낙하기 전에 우선 두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기탄 없이 해 보게."

왕비가 힘없이 웃었다. 허탈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자신은 왕비. 상대는 떠돌이 이방인.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그가 제시할 조건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단 말인가.

실로 비참한 기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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