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34화 (34/178)

〈 34화 〉 왕실의 의뢰 (3)

* * *

"일단, 저에겐 일행이 있습니다."

"일행이라."

왕비가 제 찻잔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얼마나 되는가?"

"저를 포함해서 다섯입니다."

"다섯... 모두 믿을 만한 이들인가?"

"왕비님께서 우려하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정보가 새어나갈 우려는 적다. 창공은 그리 생각했다. 그가 일행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의 일행들은 어디 가서 함부로 비밀을 떠벌릴 만큼 입이 가볍지는 않았다.

아니. 나유는 조금 우려가 되긴 했다. 그래도 나유는 1 대 1로 전담 마크가 가능하니까...

"그 일행들을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오히려 잘 됐네그려. 둘보단 여섯이 낫지 않겠는가."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대신께선 사병이라던가... 없으십니까?"

"궁정 귀족이 사병은 무슨 사병인가. 난 월급쟁이라네."

카벨 자작은 영지 없이 왕성으로 출퇴근하는 궁정 귀족에 불과했다. 당연히 사병 따위는 없었다.

"사실 그 넓은 산맥을 수색하려면 여섯으로도 한참 모자란 감이 있긴 합니다만... 어쩔 수 없겠죠. 떼로 몰려가 들쑤실 수 있었으면 저를 부를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물론 그러하네."

왕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과 또한 자네들에게 온 산맥을 다 수색하라고는 하지 않겠네.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차라리 그전에 왕자가 제 발로 돌아오길 빌고 말지."

"그 말씀은... 범위를 한정시킬 단서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맞다네."

그녀는 품속에서 돌돌 말린 양피지를 꺼내들었다.

"당연하지만, 왕자는 홀로 산맥에 간 것이 아니야. 근위대 다섯을 이끌고 갔지. 하루에 한 번씩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편지일세."

창공은 왕비에게서 편지를 건네받아 빠르게 훑었다. 곁가지를 쳐내고 요점만 본다면, 왕자는 자모닉스 골짜기로 향한다는 내용이었다.

"자모닉스 골짜기... 여길 찾아보면 되겠습니까?"

"가능하면 그 주변까지도."

"언제 도착한 편집니까?"

"아흐레 전. 그 뒤로 편지는 없었네. 매일 편지를 하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었는데, 이렇게 늦을 리가 없네. 분명 무슨 일이 생겨도 단단히 생긴 게야."

혼자 간 것도 아니었다. 근위대 다섯을 데리고 갔다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소식이 뚝 끊겼다는 건...

'평범한 수색은 아니야.'

창공은 이번 의뢰를 수행하는 도중 전투가 일어날 가능성을 높게 점쳤다. 천재지변으로 조난당했을 가능성도 있긴 했지만, 어쩐지 예감이 그랬다.

"일단 알겠습니다. 그러면 전 왕성을 나가 동료들에게 준비를 시켜야겠군요."

"시간은 많이 줄 수 없네. 당장 내일 새벽에 출발해야 하네. 은밀하게 말일세."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입니다만..."

사실 창공이 일행들을 끌어들이려 한 것도 두 번째 이유 때문이 컸다.

"우선 가장 먼저 다른 세계에서 온 제가 이렇게 명예로운 임무를 맡게 되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물론 합당한 보상이 있을 것이야.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말일세. 물론 성공한다면 고과는 크게 기뻐하겠지."

왕비는 그의 생각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보상을 약속했다. 창공의 입가에 호선이 그어졌다. 사람을 더 끌어들였으니, 보상은 수 배가 될 터였다.

"명예로운 일에 보상을 논하기가 저어되지만, 명예로 살 수는 있어도 명예만으로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순간 왕비와 자작이 멈칫거렸다. 덕분에 괜히 찔린 창공은 잘못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스운 우연이군."

자작이 중얼거렸다.

"명예로 살 수는 있어도, 명예만으로 살 수는 없는 법... 아잔틴 대왕의 말씀이네. 물론 지금과는 다른 상황에서 하신 말씀이네만."

"그렇습니까?"

그거 참 괜찮은 말도 할 줄 아는 왕이라는 생각을 하는 창공.

"대 키트라 제국 연합을 창설하실 때, 타국은 키트라 제국의 사실상 속국이었던 아국에게 불신의 눈길을 보냈네. 그때 대왕께선 그런 말씀을 하시며 아국의 부역에 대해 철저히 사과하는 내용의 국서를 보내셨다네. 국가의 위신이 꺾일까 두려워 반대하는 신하들에겐 이미 우리에겐 남은 명예가 없다는 말씀 또한 하셨지."

"그렇군요."

"아무렴 우리가 그대를 무보수로 동참시키겠는가."

대회에서 우승해놓고도 돈 한 푼 안 준 알펜시아이기에 믿음이 가지 않은 측면이 컸다.

"오히려 솔직하게 말해주니 좋다네. 이곳 사람도 아닌 그대가 순수한 선의로 이런 일에 동참할 리가 있겠나. 이편이 마음이 놓이는군. 다만 최선을 다해주길 바랄 뿐이네."

"당연합니다."

돈을 준다면야 안 될 건 없다. 창공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슬슬 준비하러 가 보겠습니다."

"그래야겠지. 카벨 대신. 아까 지시했던 대로 미스터 서를 먼저 공방에 데려다주시겠소? 계속 맨손으로 활을 쏠 수는 없으니."

"알겠습니다. 그럼 부디 낭보를 기다려주시길..."

"한 달 안으로 수색을 끝내주시오. 그 이상은 버틸 수 없음이니..."

두 사내는 왕비에게 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섰다. 사실 한 달도 아슬아슬했다. 이미 왕자는 중요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이번 제전을 계기로 심상찮은 소문이 본격적으로 돌고 있으리라.

"일단 공방으로 가서 자네가 원하는 장구를 만들어보세. 그리고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가?"

"가능합니다."

"새벽 4시에 출발하는 것으로 하지. 마차를 대기시키겠네. 어디에 묵고 있는가?"

"스트렌드 광장의 사우스엔드 성당이라고 하면 아시겠습니까?"

"알고 있네."

창공은 왕성 내부에 있는 공방에서 장인에게 핑거탭에 대해 설명했다. 적당한 예시까지 그려가면서. 장인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가죽을 자르고 철판을 작게 잘라 이어붙여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놀라웠다. 처음으로 만들어보는 것일 텐데도 꽤나 만족스럽게 뽑혀 나왔다. 물론 그가 현대에서 쓰던 것에 비하면 조잡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것까지 바라면 너무 양심이 없지 않겠는가.

자작은 퍽 신기하다는 시선으로 핑거탭을 바라보고선 장인에게 십수 개를 더 만들어 보라고 지시했다.

'지구 문물을 이세계에 전파한 셈인가?'

딱히 상관은 없었다. 대단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창공과 자작은 내일을 기약하며 해어졌다. 이제 일행에게 알릴 차례였다. 성당으로 돌아가니 일행들은 전부 모여있었다. 그들은 이미 창공의 우승 소식을 전해 들은 상태였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폴짝폴짝 뛰며 다가온 나유는 숨을 쉬기 곤란한 정도로 창공을 꽉 끌어안았다. 나머지 사람들도 그를 열렬히 축하했다.

"여러분."

창공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상으로 뭐 받았을까요?"

"두둑한 돈주머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일행들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게 아니면... 뭐야?"

"기사 작위라도 받았나요?"

아린의 추측 역시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하기야 누가 예상이나 하겠는가. 우승 상금은 단돈 1두셀도 없다고.

"우승자라는 명예를 얻었지."

"음... 그거 말곤?"

"없어."

이어지는 침묵. 침묵 다음에는 부정. 부정 다음에는 분노.

"짠돌이 씹새끼들... 돈도 안 줄 거면 대회는 왜 열어?"

"하긴 프로 스포츠라는 개념은 없겠죠..."

"아마추어 대회라고 상금 안 주는 거 봤어?"

창공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일행들이 욕하는 것을 지켜봤다. 내가 욕 한 대상을 남들도 같이 욕한다는 건, 썩 괜찮은 경험이다.

"그 대신에 일거리 하나를 물어왔죠."

그제서야 그는 왕자 수색 건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의 이야기를 경청한 일행은 애매모호한 반응을 보였다.

"또 산인가요?"

히사시가 작게 실소했다. 트리스카를 탈출할 때 너무 고생한 탓인지, 일행은 산만 봐도 속이 울렁거리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조금... 위험할 것 같은데..."

아린의 중얼거림.

"음."

어택이 망설이자, 나유가 대답을 재촉했다.

"택이 오빠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나야 뭐... 내 생각이 어떻든 간에 창공인 이미 결정한 거 아니야?"

"이미 간다고 말 다 해놨어요."

"이거 봐."

어택이 다른 일행들을 돌아보며 웃었다.

"음... 그래도 오빠. 오빠 말대로면, 여섯 명이 그 산맥을 다 뒤지는 거예요? 왕자를 찾을 때까지?"

"그건 아니야. 장소도 한정되어 있고, 기간은 2주까지. 힘들긴 하겠지만 할 가치는 있어."

"아마도 위험... 하겠죠?"

"여유로운 피크닉은 아니겠지. 하지만 우리가 일을 가릴 상황이 아니잖아. 먼저 돈이 없어. 다들 여기 눌러살 마음은 없잖아? 그런데 알바나 해가지고 언제 방법을 찾아서 떠나겠냐고. 그건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는 것밖엔 안 돼."

창공은 일행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의견을 피력했다.

"그리고 뒷배가 필요해. 좀 든든한 뒷배가. 북대륙은 남대륙보다 우릴 대하는 태도가 훨씬 나은 것 같긴 해. 그래봤자 우린 이쪽 세상엔 적도 없는 떠돌이들이야. 이럴 때 왕실한테 은혜를 입혀 봐. 특히 왕자라도 무사히 구하는 날엔?"

"아."

"내가 볼 땐 충분히 위험을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야. 그리고 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돌아갈 방법을 찾아서 이곳저곳 떠돌아야 하는데, 캠핑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떠날 만한 세상은 아니니까. 리스크만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 해."

그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도 마음속에 미약하게나마 망설임이 남아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결국 이미 저쪽과 합의가 끝난 일인 데다, 창공의 말이 먹혀들어갔기 때문에 반대를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다.

"서 상. 그러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어, 고다. 말해."

"식량을 좀 챙겨야 할 것 같습니다. 프라이팬도 하나 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팬 하나만 있어도 여러 용도로 쓸 수 있습니다."

"팬? 좋지. 여차하면 무기로도 쓸 수 있고."

썩 마음에 드는 의견이었다. 어차피 산행을 하려면 먹기도 잘 먹어야 했으니까.

"다른 분들도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준비 자금 명목으로 500키트를 받았으니까."

"저는 히사시 씨랑 같이 식량을 챙길게요. 땀을 많이 흘릴 테니까 소금이랑 설탕도 필요하고..."

하긴 어차피 전투원도 아닌 아린이니 짐이나 나눠드는 게 나으리라.

"담배랑 성냥!"

"아, 좋지. 챙겨야지."

이어지는 나유의 말에 창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담배는 중대 문제였다.

"그거랑 날도 갈아야 되고..."

"대장간에 가자. 나도 화살 좀 사야겠다. 택이 형은요? 뭐 필요한 거 없어요?"

"튼튼한 몽둥이가 낫겠어. 어지간하면 쓰던 거 계속 쓰겠는데, 아무래도 이건 묵직한 감이 좀 모자라."

"원래 부지깽이니까요. 좋아요. 그럼 시장에 가죠. 그다음엔 저녁으로 고기나 먹으러 가고. 힘써야 하는데 오늘도 빵을 먹을 순 없으니까. 아, 그전에 아린아. 너 나 좀 보자."

그와 아린을 제외한 일행들은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둘이서 할 이야기인 줄 지레짐작한 것이다. 게다가 창공과 아린 사이엔 마찰도 있었으니... 자연히 이번에도 비슷한 레퍼토리라고 생각할 만도 했다.

그건 아린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녀의 표정은 살짝 굳어있었다. 그러나 창공은 살짝 어이가 없었다.

'내가 뭐 얠 잡아먹으려고 눈깔 돌아간 미친놈으로 보나...'

그가 그녀를 부른 건 야단치기 위함이 아니었다. 헛소리도 안 하고 돈만 잘 벌어다가 주는 아린을 왜 책을 잡겠는가? 게다가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일행들이 들어도 상관은 없는 얘기였다.

물론 자신의 말투가' 나 아린이랑만 할 이야기 있으니까 당신들은 자리 비켜라'라고 충분히 생각할 법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표정 풀어. 뭐라고 하려는 거 아니니까."

"네? 아... 네..."

"어제 터키 행진곡 연주할 때. 기억나?"

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엔. 너한테도 마나가 있는 것 같아. 아스터 씨가 했던 말 기억나?"

"오빠가 화살에 마나를 담았다고..."

"맞아. 그리고 내가 봤을 땐 너도 그런 재능이 있어. 음률에 마나를 담는 재능이."

"음."

그땐 그녀도 당황했었다. 연주 중 눈을 뜨고 보니 광장은 거대한 무도회장이 되어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활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색의 빛줄기.

"그 뒤로는 그런 일 없었어? 길거리에서 연주는 계속했었잖아."

"없었어요."

"미치겠네. 그럼 그거 연주했을 때. 다른 곡 연주할 때와는 다른 점 없었어?"

"잠시만요..."

속으로 차이점을 생각하던 아린은 창공에게서 얼굴을 슬며시 돌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있었다. 다른 점이.

'그건 오빠한테 바쳐진 연주였어... 오빠만을 위해서 한 연주였어. 즐거워했으면 좋겠다고. 그것만 생각하면서 칼란드라를 켰어.'

하지만 말하기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이걸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머뭇거리던 아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기회가 되면 다시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다시 한번 같은 마음으로 연주한다면... 아마 확실해지지 않을까.'

창공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래? 도무지 모르겠네. 너나 나나 제대로 마나를 쓸 줄 알게 되면 정말 도움이 많이 될 텐데. 그나저나 다른 일행들도 우리랑 똑같이 마나를 가진 거 아냐?"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겠죠?"

"가능성이야 있겠지... 아무튼 알았어. 가자. 가서 장이나 보고 고기나 먹자."

"네."

그렇게 모든 일정은 종료되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 알람 소리에 일어난 창공은 일행을 깨워 준비시키고선 성당 밖으로 나섰다. 자작이 말했던 대로 커다란 마차 한 대가 대기 중이었다.

"어서 타게."

카벨 자작이 창문을 열고 말했다. 마차는 여섯이 모두 타고도 남을 정도로 널찍했다. 이것도 모험이라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수색대가 탄 마차는 룬덴성을 나서서 알펜시아 산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하얀 머리, 하얀 눈동자의 사내가 룬덴 성의 첨탑 위에서 공도를 달리는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공에게 자신을 글라키스라 소개한 남자였다.

"이제 시작이다. 얼마 남지 않았어."

그는 주먹을 꽉 쥔 두 팔을 힘차게 뻗으며 중얼거렸다.

"세상이여... 우리가 돌아온다. 너희는 우리가 있었음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마차는 점점 멀어져 점이 되더니,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