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35화 (35/178)

〈 35화 〉 알펜시아 산맥

* * *

"맞아, 젊은 친구. 알펜시아 산맥에 왕들의 무덤이 있다는 전설이 있지. 그걸 모르는 모험가도 있던가? 다만 내가 충고 하나 하지. 전설은 그냥 전설로 받아들이게."

"하지만 모험가는 전설에 의지해 미지를 밝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적어도 왕들의 무덤은 아니야. 2천 년 동안 자네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나?"

"그럼 제가 첫 발견자가 될 겁니다."

"자넨 모험가는 때려치고 그냥 가서 농사나 짓게."

­두 모험가의 대화 中­

새벽부터 달린 마차는 멈추지 않고 도로를 질주했다. 물론 중간중간에 쉬는 타이밍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말들을 쉬게 하려는 휴식이었지, 사람이 쉬는 휴식이 아니었다.

고된 노동에다 일찍 일어나서 생긴 피로가 겹쳐 일행들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적어도 일은 하지 않은 창공과 강철 체력인 어택만이 쌩쌩했다. 아린은 악기만 켜지 않았냐고? 하루 종일 연주를 하면 그것도 노동이다.

"마을이 보이네요. 자작님. 슬슬 점심시간 아닌가요?"

"음."

점심시간. 히사시에겐 그래도 점심은 제대로 식당에서 챙겨 먹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지만 그 기대는 무참히 배신당했다.

일단 점심은 안에 야채와 고기를 다져서 넣은 빵이었다. 빵집에서 포장해 온 빵이었는데,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배 안에 쑤셔 넣는다는 느낌으로 먹느라 맛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그랬다. 마차는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다. 조금은 느긋하게 밥을 먹을 시간도 없었다. 묵묵히 빵을 씹는 자작이 은근히 원망스러웠지만 다들 이해는 하는 분위기였다. 그의 주군이 실종된 상태가 아닌가. 마음속에선 이보다 더 빨리 가지 못하는 것을 원통해하고 있으리라.

"속이 좀 울렁거리는데..."

아린이 표정을 슬며시 찌푸리며 중얼거리자, 창공이 창문을 가리켰다.

"급하면 저기에. 알지?"

"으... 말 안 해도 알거든요?"

그녀는 창공을 한 번 흘긴 다음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바람이라도 통하면 조금 나을 텐데, 자작은 창문을 여는 것조차 금하고 있었다. 기동에 은밀을 기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자작님."

결국 보다 못한 나유가 말했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창문을 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알겠네. 살아서 산맥에 도착하긴 해야겠지. 활짝 열지는 말고 환기가 될 정도로만 열게나."

"고마워요. 냄새가 빠져나갈 때까지만 열죠."

허락이 떨어지자 어택과 히사시가 양쪽에 달린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초록빛 풀내음을 이끌고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음... 미스 남?"

"미스 남이요? 푸하하학..."

나유의 방정맞은 웃음. 자작은 자기가 뭔갈 잘못 말했나, 싶은 표정이었다.

"음... 본인이 뭔가 실례라도 했는가? 어쩐지 비웃는 것 같아 심히 무안하네만."

"큼. 크흠! 아니요. 갑자기 웃어서 죄송해요. 너무 격식 차리지 말고 적당히 불러주세요."

"전례 대신에게 격식을 차리지 말라니, 어려운 요구를 하는군. 남 양으로 괜찮겠나?"

"그거라면야 뭐... 네."

"미스터 서의 실력이야 옆에서 봤으니 익히 알고 있네. 그런데 자네들은 어떤가? 나유 양은 검을 들고 있지 않은가. 믿어도 되겠나?"

"글쎄요. 적어도 아군한테 휘두르지는 않아요."

"..."

자작의 얼굴에 실망이 잠깐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하긴 실력자들을 모집한 게 아니라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을 모집한 게 이 수색대가 아닌가. 실력이야 있으면 좋고, 없으면 어쩔 수 없었다.

"어 군. 어 군이라고 불러도 되겠나?"

이번엔 어택 차례였다.

"원하시는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자네는 근골을 보아하니 타고난 장사로군. 범상치가 않아. 혹시 원래 세상에선 어떤 일을 했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해군에서 복무 중이었습니다."

"오, 해군이라!"

알펜시아 사람과 대화할 때 먹히는 두 가지 주제. 바로 활과 해군이다.

"나도 전례 대신을 맡기 전에 왕립 해군에서 복무했었다네. 우리 알펜시아의 귀족들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려면 반드시 해군 복무 이력이 있어야만 하지."

"재밌군요. 실례지만 어떤 직책을 맡으셨는지...?"

"부끄럽지만, 조그만 배의 갑판사관을 맡았었지. 어 군. 자네는 어떤가?"

그의 직별은 무장이었지만 곧이곧대로 말하면 자작이 알아들을 리가 없다.

"배의 병기를 관리하는 일을 했었습니다."

"병기라면... 화살이나 총각 말인가?"

"음, 그게...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물론 아니다.

"중요한 일을 했군. 하긴 승조원들이 하는 일 중에 중요하지 않은 일은 없겠네만. 김 양은 어떤 일을 했나? 악기를 들고 있는 걸 보니 어디 악단에서 일한 듯한데..."

"대학생이었어요. 창공 오빠랑 같은 대학교를 다녔고요."

"대학생이라고? 미스터 서 자네도?"

그는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는 눈빛으로 창공과 아린을 번갈아 쳐다봤다.

"하긴 그렇게 이상한 것은 아니군. 생각해 보면, 저 헬라스와 아퀴탄의 대학에선 대학생들에게 음악과 무예를 가르친다고 했으니까 말일세. 자네들이 다니던 대학도 그런 곳이었던 모양이로군그래."

이것도 아니었지만 일행들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전 그냥 고다라고 불러주시면 충분합니다."

"그래, 고다. 자네는 어떤 일을 했는가?"

"이발사였습니다."

"이발사라고? 욕탕에서 일했나?"

"그건 아닙니다. 저는 돈 많은 손님들의 머리를 잘랐죠."

커트 한 번에 12000엔을 넘게 받았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귀족인 카벨 자작에게 자신이 천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덧붙인 사족이었고, 괜찮게 먹혀들어간 모양이었다.

과연 눈칫밥을 먹으며 산 경험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다.

"돈 많은 손님이라면... 부호들인가?"

"보다 높으신 분들입니다."

"오... 이름난 이발사였던 모양이군. 실례했네."

'손님은 신이다.' 일본에 있는 말이다. 당연히 부호 따위가 신과 비교가 되겠는가. 어쨌거나 히사시는 거짓말은 하지 않은 셈이고, 착각은 자작의 몫이었다. 그는 히사시를 단순한 이발사가 아닌, 왕족과 귀족의 이발을 전담하는 고급 인력으로 생각했다.

창공이 쓰게 웃었고, 나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쨌든 만족스럽군. 자네들은 본 대신이 여정을 급하게 몰아치는 것이 불만이겠지?"

"왜 그러시는지 이해하고 있습니다."

창공이 대표로 대답했다.

"고맙네. 이리도 길을 재촉하고 있지만 날아서 가지 못하는 내가 원망스러울 지경이네. 도대체 지금 왕자 전하께서 어떤 곤경에 처해계실지 생각하면..."

"이 속도로 간다면 산맥까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밤에도 도로를 따라 달릴 예정이네. 일주일은 걸릴 게야."

"밤낮없이 달려도 일주일..."

어제 왕비를 만났을 때 마지막으로 도착한 편지가 아흐레 전이었다고 했다. 문제는 그 편지가 산맥에서 룬덴까지 가는 시간이다. 마차로 밤낮없이 달려도 일주일이 걸리는 거리다. 물론 왕자가 부친 편지이니 특급편으로 말을 달렸을 것이다.

당연히 그렇지는 않겠지만 편지 전달에 똑같이 일주일이 걸린다고 가정하면, 왕자가 편지를 발송한 날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17일쯤 전이다. 여기에 산맥까지 가는 시간 일주일을 얹으면 24일.

근위대와 같이 행동하는 왕자가 더는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상황이 된 후 24일이 지나서야 수색에 들어가는 셈이다. 여기선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왕자는 살아있을 것인가?

'죽었겠지.'

자작도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추측을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은 없었다. 창공은 차라리 시체의 일부분이라도 건질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이 나라가 어쩌다가 이지경이 되었는지... 이러면 안 되겠지만 신이 원망스럽기만 하네."

우울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물론 창공은 그에게 전혀 공감하지 않았다. 남의 나라 망하는 게 무에 대수란 말인가. 다만 알펜시아가 혼란에 빠지면 약속된 응당의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 걱정될 뿐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고맙네, 남 양."

나유의 봄바람 같은 목소리가 자작에게 자그마한 위안이 된 모양이었다. 그는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얼굴에 그리며 나유를 바라봤다.

"자작님."

"음. 뭔가, 미스터 서."

"왕자님께선 모종의 이유로 연락이 불가능한 상황에 빠지신 게 아닙니까."

창공은 고민하던 주제를 꺼냈다. 확실히 각오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었다.

"우선 천재지변으로 왕자님이 조난을 당하신 경우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맞네. 따라서 자모닉스 골짜기에 도착하면 현지민에게 최근 그 일대에서 산사태나 지진이 있었는지 알아봐야 할 것이야."

"다음으로... 왕자님이 적대 세력에게 습격을 당한 경우입니다."

"그 경우라면, 배후도 짐작할 수 있겠는가?"

"앨버트 왕자라고 했던가요. 지금 가택 연금 중입니까?"

"맞네. 룬덴의 모처에서 엄중하게 감시 중이지. 외부와의 연락은 취할 수 없네. 결코."

"그 왕자를 옹립하려 시도했던 귀족들 말입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태반은 전사했네. 처형당한 이들도 있고. 다만 살아남은 자들이 많지. 반왕파의 두 거두 중 하나인 웨스토니아 공작은 자식들에게 상속 후 퇴위당했고, 켄터리 변경백은 사면을 받기 위해 막대한 벌금을 냈다네."

그 외에도 많을 것이다.

"그중에서 조금 좁힐 수는 없겠습니까? 왕자님을 습격할 정도로 끈질기고 간 큰 자들 말입니다."

"애초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 자체가 끈질기고 간 큰 자들이라는 것 아니겠는가..."

"알펜시아 산맥. 특히 자모닉스 골짜기와 접한 곳에 영지를 가진 영주는 누굽니까?"

"콘워스 변경백. 그는 근왕파네."

"믿을 수 있습니까?"

"물론. 반란군을 진압하는 도중 아내와 사별하기까지 했네. 실로 격렬한 전투를 치렀지... 콘워스 부인께선 뛰어난 무재로 유명하신 분이었는데, 실로 안타까운 일일세. 변경백은 평소에 부인과의 금슬을 자랑했었지. 아마 지금도 큰 상실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야."

하지만 창공은 콘워스 변경백 또한 후보군 안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속 다르고 겉 다른 게 사람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근왕파, 태어나면서부터 반왕파가 있던가? 물론 그러한 추측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후보가 많다면 추측하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극단적으로 생각해서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주변국에서 왕자님이 산맥으로 향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암수를 펼쳤다던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게 실로 통탄할 노릇이군."

"미치겠군요."

"국가 전체가 혼란에 빠진 시기야. 국경 방비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겠나? 왕립 해군도 말을 듣지 않는 마당에... 아! 도대체 왜 왕자 전하께선 이런 시기에 산맥으로 향하셨단 말인가..."

자작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일행들도 이것으로 다시 한 번 경각심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왕자를 시해하려는 무장 집단이 아직도 산맥을 돌아다닐 수도 있다는 얘기였으니.

"이쯤에서 잠시 야영하는 것이 좋겠군."

밤의 장막이 하늘을 덮고, 창공이 찬 시계는 지금이 2시 17분임을 알리고 있었다. 밤낮없이 달린다고는 했지만 사람과 말이 쉴 시간이 필요했다.

야영이라곤 해도 텐트와 타오르는 모닥불이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텐트는 실을 공간이 없어 침낭으로 대체했고, 모닥불은 괜히 시선을 끌까 두려워 피우는 것을 금지당했다.

그나마 자작이 인원수에 맞춰 준비한 침낭은 꽤나 괜찮은 품질이라는 게 자그만 위안거리가 되었다.

"미스터 서. 자네가 가지고 있는 시계 말인데, 정한 시간이 되면 울리게 할 수 있다고 했던가?"

그는 창공의 시계를 처음 보고선 지대한 관심을 표했다. 당연한 게, 다이셀리시아에서 시계라고 하면 커다란 기계장치를 의미했다. 그런데 손목에 찰 수 있을 정도로 소형화된 시계라니, 이곳 사람인 자작에겐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받아들이는 것 자체는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하기야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던가.

"맞습니다. 지금은 2시 17... 이제 18분입니다."

"4시간만 자세나. 어쨌든 자야 움직일 수 있으니까. 오, 크리스토퍼. 수고했네. 어서 잠에 들도록 하게."

자작은 마부에게도 침낭을 내주었다. 듣기로 그를 10년이 넘게 보좌한 충성스러운 인물이라던가.

"그럼 맞춰두겠습니다."

창공은 시계에 손을 얹었고, 사람들은 꾸물꾸물 침낭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그가 사람들을 하나씩 둘러보던 와중, 나유와도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의 눈 안쪽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20분 뒤.'

그는 입을 뻐끔거리면서 소리 없이 말하며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나유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 기회였다. 나유와 마지막으로 섹스를 한 지가 일주일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배 위에서 그녀의 기특한 봉사를 받기도 했지만 그걸로는 둘 다 모자라기 짝이 없었다.

특히 창공이야 그렇다 쳐도 막 섹스에 눈을 뜬 나유의 욕구는 무서운 데가 있었다. 야외 섹스에도 거리낌 없이 동의하는 걸 보면 말이다.

"쿠우우..."

"크허어..."

기대되는 마음으로 침낭 안에 들어가 있으려니 얼마 안 되어 사방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많이 피곤하리라. 새벽에 일어나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온종일을 보냈으니.

당연히 그와 나유도 피곤했다. 하지만 섹스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건 없는 힘까지 짜내서 할 가치가 있으니까.

'38분.'

약속했던 20분이 지났다. 창공은 소리가 최대한 안 나도록 조심스럽게 침낭 안에서 빠져나왔다. 나유도 그를 따라서 침낭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은근한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그럼 어디가 좋을까. 여기서? 남들 보는 앞에서 하는 취미는 없다. 마차 안? 둘의 체취로 그곳을 가득 채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조금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창공과 나유는 발걸음도 조심스레 밟아가며 야영지에서 벗어났다. 족히 200m는 걸었을까. 적당한 공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침 구름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하현달이 달빛을 뿜어냈다.

"휴... 나 어떻게 참았지."

나유가 두 팔로 창공을 한 아름 끌어안았다. 그의 몸에 부드럽게 닿는 가슴 너머로 콩닥콩닥 뛰는 그녀의 심장이 느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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