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알펜시아 산맥 (4)
* * *
수색이 아주 헛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들은 대여섯 정도 되어 보이는 무리가 야영을 한 흔적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흔적일 뿐... 이미 이 자리에서 야영했던 이들은 한참 전에 이곳을 떠난 듯했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사람이 지나갔다는 흔적은 물론이요, 전투의 흔적 비스름한 것까지.
"다들 고생이 많군."
다 같이 휴식을 하던 차에 자작이 내뱉은 말이었다.
"냄새나는 육포가 식사라 불만들 있겠지만 부디 참아주게나."
애써 식량을 챙긴 보람도 없이, 그들은 바싹 마른 육포와 물로 배를 채워야 했다. 섣불리 불을 피울 수 없기 때문이다. 적에게 들킬 위험이 높아지니까. 어디까지나 선공을 하는 것은 가급적이면 그들이어야 한다.
"밤은 어떻게 보내실 겁니까?"
창공이 물었다.
"내가 알기로 자모닉스 골짜기엔 약초꾼들이 사용하는 동굴이 여러 군데에 있다고 하네. 해가 지기 전에 그곳을 찾아 자던가, 정 아니면 낙엽을 덮고 자는 수밖에."
"적들도 그런 동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럴 테지. 하지만 해가 진 뒤엔 그놈들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야. 야간 기동은 어려운 법이지. 그것도 산중에서는 더더욱. 따라서 일단 저녁때까지 동굴이 안전하다면, 밤새 안전할 거라네."
야간투시경이 존재하는 현대에서도 야간 작전은 어렵다. 더군다나 이곳 다이셀리시아에는 그런 편리한 물건 따위는 없다. 어둠을 밝힐 물건이라면 마법을 제외하면 횃불뿐인데, 서바이벌이 펼쳐지는 상황이라면 횃불은 오히려 위험했다.
어둠이 깔린 숲속에서 횃불을 든다고 멀리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횃불의 빛 자체는 그보다 멀리 뻗어나간다. 섣불리 횃불을 들고 쏘다니다가 기습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다.
"동굴에 들어가 안전히 확보되면 자그만 크기라도 일단 불을 피워 보세나. 찻잎도 가져왔다네. 따뜻한 차로 목을 축이면 피로가 어느 정도 풀릴 걸세."
알펜시아인들은 차를 참 좋아했다. 자작에게 듣기로 전쟁터에 나가도 차를 챙기는 사람들이 바로 알펜시아인이라나.
"생각보다 괜찮은 식사일 걸세. 비스킷과 육포를 잘라서 죽을 끓이고 차 한 잔을 곁들인다면... 물론 정찬에 비교할 수야 없겠지만 산악에서 움직이고 난 뒤니까. 오, 왕자 전하. 식사는 제대로 하고 계실런지."
시체를 보고 난 뒤로 자작의 수심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더군다나 시체의 부패는 이미 상당히 진행된 뒤. 이미 왕자가 이끄는 근위대와 적이 전투를 벌였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땠을까?
"대신님. 그러고 보니 갑자기 든 생각입니다만..."
"뭔가, 미스터 서?"
"이걸 왜 지금 생각했는지 모르겠군요. 도대체 왕자님께선 편지를 어떻게 보내신 겁니까? 이 첩첩산중에서 말입니다. 그것도 매일매일..."
"오, 그렇군. 전서구라네."
"전서구... 말입니까?"
"왕실에서 사용하는 전서구는 혈통이 아주 좋은 놈들이지. 그냥 비둘기를 생각하면 안 되네. 속도도 아주 빠르고, 발톱도 날카로워. 지능도 높다네. 근위대가 한 마리씩 데리고 갔을 것이야."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 매일매일 편지를 부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전서구라니. 아무리 창공이 머리가 좋다 한들 이런 일들은 쉽게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 현대물이 덜 빠진 탓이다.
"상상이 안 가는데 말입니다."
"국왕 폐하께서 전장에 나가 지휘를 맡게 되면, 전서구를 데리고 있는 근위대들이 큰 힘이 된다네. 그 전서구를 통해 휘하 부대들과 정보를 빠르게 주고받을..."
자작의 표정이 싸악, 굳었다.
"전서구...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왜 그러십니까?"
"아무리 왕실에서 부리는 전서구가 뛰어난 품종이라 하더라도, 결국 편지를 보내고 받는 장소는 정해져 있어야만 하네. 정해진 장소가 아니더라도 특정 깃발을 올리면 그쪽에 편지를 전달하는 경우도 있지만..."
"산중에선 불가능하겠죠."
어택이 말했다.
"맞네. 가장 먼저 수색해야 할 곳이 있었군. 시야가 탁 트인 공간. 그래서 전서구를 날릴 수 있을 법한 공간. 이곳 자모닉스 골짜기에 그런 공간이 있을 것이야."
왕자의 마지막 편지는 자모닉스 골짜기로 향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편지는 끊겼다.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 자모닉스 골짜기로 넘어오는 도중 편지를 부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거나, 골짜기로 넘어와서 편지를 부치는 도중 일이 생겼거나.
따라서 전서구를 날릴 수 있는 장소를 찾게 되면 어느 정도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만약 거기에서 전투의 흔적을 발견한다면 왕자가 자모닉스 골짜기에서 실종되었다고 확정 지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적 세력이 그곳을 점거하고 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건 그것대로 좋다. 잡아서 심문하면 정체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 테니.
"높은 곳... 절벽 근처로 가야겠군. 올라가세."
"..."
아무래도 창공은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한 나라의 계승자를 시해하는 일이다. 실패는 용납할 수 없다.
물론 기밀을 기해야 하니 대규모 병력은 동원할 수 없고, 소수 정예부대를 데리고 기동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말이 되나?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이 적다는 말은, 지역의 봉쇄가 불가능하다는 뜻. 따라서 왕자 일행은 일단 추격만 뿌리친다면 어디로든 도망칠 수 있었다. 아니, 산을 넘는 건 안 된다. 타국이니까. 그것도 왕위 계승권자가 타국으로 넘어가는 건 미친 짓이다.
그럼 그냥 산 아래로 도망치면 안 되나? 물론 뻔하긴 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산에서 술래잡기를 할 수는 없다.
왕자는 반드시 산 아래로 도망쳐야 한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왜인가?
'봉쇄는 불가능하고 왕자는 충분히 하산을 택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첫째. 이미 죽었다. 둘째... 도무지 그럴 수 없었다.'
둘째라고 가정하면, 도대체 왜?
산 아래는 바로 근왕파 귀족인 콘워스 변경백이 다스리는 엘란 백작령이다. 변경백은 반란군과의 전투에서 앞장서 치열하게 싸울 정도로 충성 높은 귀족이 아닌가. 이보다 더 좋은 선택지가 있나?
그럼에도 선택할 수 없었다.
왜?
'콘워스 백작. 그자가 범인이니까.'
이유는 모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충성스럽기 짝이 없던 귀족이 왜 왕자를 시해하려 드나? 이럴 거였으면 반란이 일어났을 적에 반란군에 가담했으면 그만이다. 그게 상식적인 판단. 카벨 자작도 그래서 콘워스 변경백을 의심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창공은 콘워스 변경백이 강력한 용의자라고 생각했다. 그가 범인이라고 가정하면 상황이 맞아떨어진다.
'어디까지나 현재 왕자가 자유롭게 진로를 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전제 하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심각한 문제였다. 그들은 지금 범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미 범의 아가리 안에 있었다.
수색대는 그로부터 수 시간 동안 산을 뒤지며 전서구를 날리기 좋은 포인트를 찾아다녔다. 두 군데 후보지를 발견하긴 했지만, 그곳에선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뿐인가. 시체와 야영지 흔적을 빼면 딱히 유의미한 발견도 없었다. 힘들 거라고 각오는 했지만 그래도 성과가 있어야 하는 맛이 나지 않겠는가. 이렇게 되면 결국 목적지 없이 산악을 헤매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목적지 없는 떠돎은 사람을 더 지치게 만든다. 땀으로 옷이 흠뻑 젖고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산 초입에선 다들 긴장을 해소하려 간단한 대화를 했었지만 이제 와선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지친 것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오, 택 군. 뭔가."
일행의 면면을 둘러보며 상태를 점검한 어택이 자작에게 말을 걸었다.
"슬슬 밤을 지낼 곳을 찾아야 합니다. 해도 떨어지고 있고 말입니다. 산은 해가 더 빨리 지지 않겠습니까."
"음..."
선두의 카벨 자작이 잠시 일행을 멈춰세우고선 뒤를 돌아봤다. 체력이 평균 이상인 창공, 어택, 나유 3인방은 아직 충분히 버틸만했지만 아린과 히사시가 조금 버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둘은 일행이 쓸 짐을 넣은 배낭을 메고 있었다. 물론 다른 이들도 무기를 잡고 있었지만 검이나 몽둥이 같은 경우 여차하면 지팡이로라도 쓸 수 있지, 배낭은 그저 어깨를 짓누르는 짐일 뿐이다.
"그렇군. 하늘도 주황색으로 물들고 있어."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어느샌가 그 푸른 빛깔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자작은 왕자를 찾아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첫날부터 일행을 무리시킬 순 없었다.
"자네 말이 맞아. 아쉽지만 오늘의 수색은 여기서 종료하도록 하지. 이제 동굴을 찾아보세. 가서 곧 다가올 밤에 대비해야지."
배낭을 멘 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택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둘 중에 나 진짜 못 들겠다, 하는 사람. 내가 대신 메 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린과 히사시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어택은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대신에 못 참겠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창공도 선두 그룹에서 뒤돌아서서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어택을 맨 처음 동료로 포섭했던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일행엔 저런 사람이 필요했다. 뒤를 맡길 수 있고, 일행원을 케어해 줄 수 있는 사람.
그러면서도 창공이 일행을 이끌 땐 그의 권위를 존중하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나유야, 넌?"
나유는 어택이 물음에 표정을 찌푸리며 옷깃을 잡고 안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찝찝해. 씻고 싶은데 그건 무리겠지?"
"조금만 참아."
그녀가 자작을 한 번 곁눈질하고선 어택과 창공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짜증나. 도대체 그 왕자라는 사람은 어디 박혀있는 거야?"
꽤나 흥미로웠다. 어택의 장점만큼이나 나유의 단점도 보인다. 기분이 좋을 땐 앞에서 으샤으샤하며 일행의 사기를 끌어올리지만, 기분이 나쁠 땐 그 반대 기질이 보였다.
생리 때문은 아니었다. 그건 딱 어제 끊겼으니까.
'그래도 택이 형이 있으니까 일단 완충은 시킬 수 있어.'
어차피 대충 예상은 하던 일이었다. 그는 자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신님. 슬슬 가시죠."
"그러세. 적도들도 밤을 지새울 곳을 찾거나, 혹은 자신들의 은신처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야. 마주칠 수도 있으니 정신 바짝 차리게."
확실히 그건 그랬다. 수색대는 다시금 정신 무장을 새로이 하고 산행에 임했다. 그로부터 30분 정도 지났을까, 작은 계곡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능하면 이 근처에서 머물고 싶은데..."
"동굴이 있다면 그렇게 될 것이야."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머물기 적당한 동굴을 찾을 수 있었다. 계곡으로부터 10분쯤 떨어진 곳이었다. 다만 창공은 일행들을 멈춰세우고선 휘파람을 불거나 돌멩이를 동굴 안으로 집어던지거나 했다.
내가 머물기 좋은 곳은 남도 머물기 좋은 곳. 적대적인 선객이 점거한 동굴일 수도 있으니 확인이 필요했다. 다행히 동굴 안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가시죠."
동굴 안은 그렇게 넓진 않았지만 여섯 명이 발을 뻗고 눕기엔 충분한 크기였다. 구석에 배낭을 내려놓은 아린과 히사시는 이제야 좀 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불을 피우세. 물도 끓이고..."
나유와 어택이 나뭇가지를 주워와 성냥으로 불을 피우고, 히사시가 적당히 돌을 배치해 그 위에 팬을 올렸다. 팬이긴 하지만 깊이가 생각보다 있어 죽을 끓이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각자 가지고 있는 수통을 열어 팬에 부었다. 꺼림칙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기엔 너무 피곤했다. 일단 먹은 다음에 생각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물을 좀 채워야겠네."
창공이 중얼거렸다. 방금 전 계곡에서 다들 수통을 꽉 채우긴 했었지만 일단 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따뜻한 차 한 잔이라면 꽤나 괜찮은 위안이 되리라.
"어차피 차도 끓이고 할 테니까... 다들 동굴 밖에서 남은 물로 좀 씻던가 해요. 나랑 아린이가 채워 올 테니까."
"좋아."
나유를 필두로 자리에서 일어선 일행들은 밖으로 나가 얼굴과 머리에 물을 부으며 땀을 씻어냈다. 방금 전 계곡이 있었음에도 뛰어들어 마음껏 씻지 못했더랬다. 은신처를 찾아 불을 피우기까지의 시간이 길어지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었으니.
"밥 먹고 몸이나 한 번 담그고 와야지."
"밥 먹고 해."
창공과 아린은 일행에게서 텅 빈 수통을 건네받아 계곡으로 향했다. 물론 무기는 지참한 채로. 해가 완전히 떨어지진 않은 지금은 아직 위험한 시간이었다.
"오빠."
"왜."
아린은 뒤를 돌아봐 동굴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창공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이 사건의 범인 말인데요. 콘워스 변경백이 아닐까요?"
"너도 그렇게 생각해?"
"아, 오빠도요?"
그녀도 창공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아마 자작도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지 않을까. 다만 같은 근왕파 귀족으로서 입 밖으로 차마 내지는 못하는 것이리라. 일단은 증거가 없으니까.
"여긴 너무 위험해요."
"맞아.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창공은 선선히 인정했다. 그는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자책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가 이 근래에 저지른 실수들은 너무나 어이가 없는 것들이었다. 조금만 더 생각하고 행동했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것들.
대학에 있을 때까진 완벽했던 그도 실전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말인가. 창공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분을 삭였다.
'멍청한 놈. 남들 보고는 안일하게 생각하지 마라, 정신 차리라고 해놓고선 막상 내가 그러질 못했어.'
그는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일행을 조직했고, 그 자신의 생각에 조직한 일행은 그가 완벽에 가깝게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일행들이 창공의 말을 잘 따라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실수가 누적된다면 그의 권위에 손상이 간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이라는 건 말야. 뒤로 호박씨를 까는 데 특화된 존재야. 아빠가 검찰에서 조사하는 범죄자들 있지? 눈물을 흘리면서 검사님, 검사님 하면서 온갖 약한 척은 다 하는데 그거 아주 역겨운 놈들이야. 그놈들 다 남한테 해코지해서 아빠 앞에 불려온 놈들이거든?]
[서창공. 절대 남들 앞에서 실수하지 마. 네가 책임을 지는 자리에 올라가면, 주위 사람들은 다 너를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혈안이 돼. 덮을 수 있는 실수라는 건 거의 없어. 중요한 건 처음부터 실수하지 않는 거야.]
부모가 그에게 했던 말이다. 그는 그의 부모에게서 부모 자식 간의 친밀감은 그닥 느끼지 못했으나, 그들의 능력만큼은 존중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창공에게 했던 말들 중에서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던 말은 확실히 기억했다.
실용적인 부모다. 육아의 면에 있어서도 그랬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저런 말을 더 많이 듣고 컸던 것 같다. 그는 그런 그의 부모를 혐오했지만, 동시에 그들이 옳다고 여겼다. 스타 검사 부부가 하는 말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
"그래도 그건 오빠 잘못이 아니니까요. 상황이 이렇게 된 걸 어쩌겠어요. 또 필요한 여정이기도 했고..."
아린의 말이 그를 상념에서 일깨웠다.
"그런데 변경백은 왜 갑자기 이런 일을 벌이는 걸까요."
"일단 반란이 진압될 때까지 역심은 없었다고 봐야겠지. 국왕까지 죽을 정도로 치열했던 반란이야. 그런 상황에서 적들을 맞아 싸워서 자기 아내까지 잃은 사람이니까. 반란 진압 후부터 왕자의 실종 전까지 변경백의 마음을 바꿀 무언가가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가진 정보는 얼마 없지만, 그래도 유추하자면... 사람의 마음이 바뀔 정도로 큰 사건은 두 가지 있었네요."
"아끼던 아내가 죽은 것. 유일한 자식이 죽은 것."
"엄청난 비극이에요. 아마 여기에 힌트가 있지 않을까요? 그 정도라면 사람 마음이 바뀔 만해요."
"비극을 겪고 나서 마음이 거칠고 약해진 상태라면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서로 생각을 교환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계곡은 금방이었다. 바위들 사이로 물이 졸졸 흐르며 굽이치고, 그 위로 주황 빛깔 햇빛이 부딪혀 파편으로 알알이 쪼개진다. 산에서 벌어진 일과 다르게 계곡의 모습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그리고 그 계곡을 배경으로 삼아 수통을 든 아린의 모습은 한 폭의 도화지에 그려진 가냘픈 암사슴과도 같았다. 천연 갈색 머리와 눈동자. 아담한 몸집에 수수한 복장. 창공을 향해 살며시 웃음 짓는 얼굴.
그들은 각자 수통을 잡고 물을 가득 채웠다. 맑고 차가운 계곡물에 손을 담그니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온 김에 조금 씻고 갈까. 세수만이라도 하자."
"그럴까요?"
창공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아린은 머리를 묶은 끈에 손을 갖다 대며 무심코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데 그녀의 시야에 있어선 안 될 무언가가 들어왔다.
"오빠!"
"...!"
그토록 찾아다녀도 보이지 않던 이들. 녹색 옷을 두르고 무장한 사람 셋이 창공과 아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