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40화 (40/178)

〈 40화 〉 알펜시아 산맥 (6)

* * *

난 내 앞에 누워선 고통의 신음을 흘리고 있는 습격자를 묵묵히 바라봤다. 그를 살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전신 곳곳에 화상을 입은 사람을 살릴 능력도 없고.

도망치면서 본 바, 적들의 복장은 산에서 기동하기 편한 종류였다. 그러니까 면이나 비슷한 직물로 만들었단 뜻이다. 거기에 분명 검을 들고 있던 놈들은 간단한 가죽 갑옷을 위에 덧대 입고 있었는데, 이놈은 전면에 나서지 않는 궁수인 탓인지 그마저도 없었다.

한 마디로 화염에게서 이놈을 구할 수 있는 방어막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에 잘 타는 가연성 소재로 만든 옷 때문에 화상은 더 위중했다. 차마 예상은 못 했겠지. 고작 한 대의 화살 때문에 이렇게 될 거라고는. 그건 나도 못 했으니까.

옷에 난 구멍 너머로 보이는 광범위한 화상들. 빨갛게 녹아내린 피부에선 피와 함께 진물이 배어 나온다. 이렇게 보면 앞서 몸뚱어리가 인수분해 된 그놈들이 나은 것 같기도 하다. 깔끔하게 죽는 게 낫지.

"너... 넌 대체..."

그놈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어떻게 입을 움직여 말을 만들어냈다.

"네놈, 마법사인가...?"

마법사냐고? 하긴 화살에 마나를 담을 수 없다는 게 상식인 이 세계에서는 그렇게 결론이 나는 것도 당연한가. 하지만 이 새끼의 말은 틀려먹었다. 내가 마법사가 아니라서 틀린 게 아니고, 지금 나오면 안 되는 말을 했다는 뜻이다.

"지금은 네가 질문할 시간이 아냐."

"크으윽!"

난 놈의 손목에 발을 올리고선 체중을 실어 지르밟았다. 발을 이리저리 문지를 때마다 떨리는 근육에서 오는 경련이 느껴진다.

"어차피 넌 살아나긴 글렀어. 깔끔하게 죽여줄 테니까 성실히 대답해. 알았어?"

"으어..."

지금 신음소리나 낼 땐가? 씨발새끼야, 난 여자 신음소리는 들어도 남자 신음소리는 안 들어.

"대답하라고, 새끼야."

콰악!

나는 놈의 손목을 밟은 발을 잠시 떼었다가 다시 내리꽂았다. 놈은 다시 고통의 신음을 내뱉었다.

"대답."

"이, 이건 포로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 너도 명예를 아는 자라면 날 정당하게 대우..."

명예는 지랄.

"니네 나라 왕자 암살하러 온 새끼들이 명예는 무슨 명예?"

그 어디에도 증거는 없었지만 가능성은 높았다. 놈을 떠보려 내뱉은 말. 과연.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린다. 고통 때문은 아니다. 내 안에서 심증이 확증으로 바뀌었다.

"헛소리!"

"이 새끼가 대답을 하라니까 딴소리만 자꾸 지껄이네."

말을 듣지 않는 놈에겐 적절한 응징이 필요하다. 어떻게 할까? 나는 놈의 왼쪽 허벅지에 난 커다란 화상을 보고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마침 내 신발 밑창엔 흙이 잔뜩 묻어있었고. 뭐 어쩌겠나.

사각! 사가각!

단단한 알갱이들끼리 문질리는 소리가 난다. 난 지금 놈의 화상 위에 발을 올리고선 힘을 주어 제대로 문지르고 있다. 걸레를 발로 밟아 바닥을 닦듯이.

"으아악! 으아아아악!"

말도 제대로 못 하던 새끼가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났는지, 미친놈마냥 고함을 지르며 내 다리를 떼 놓으려 지랄발광을 했다.

하지만 난 순순히 발을 뗄 생각이 없었다. 백날 해 봐라, 병신아. 너만 더 아프지.

"깔끔하게 죽여줄 테니까 성실하게 대답하라고."

"대답...! 대답하겠다! 끄그극..."

그러니까 왜 개겨?

대답에 만족한 나는 천천히 발을 뗐다. 불에 탄 상처 위에 새겨진 또 다른 상처들이 눈에 들어온다. 흙 알갱이들이 상처에서 배어 나오는 피로 새빨갛게 물들어가는 모습도.

고통의 강도는 불합리할 정도겠지. 변경백을 따라 전쟁에 참여했다면 칼에 찔려도 봤고 베여도 보지 않았을까. 그래도 이런 고통은 난생처음일 거다. 완벽하다. 새로운 종류의 고통은 더 크게 받아들이게 되니까.

"크허허... 허어..."

"이름이 뭐야?"

이제 와서 친구 먹자고 이름을 묻는 건 당연히 아니다. 사실 놈의 이름 따윈 그닥 중요한 사실도 아니다. 하지만 심문 과정에선 이런 귀찮은 절차가 필요하다. 대답하기 쉬운 질문부터 먼저 꺼내서 질문하고 대답한다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건 역할놀이다. 그런데 역할놀이는 내 역할에 몰입을 해야 재밌게 되는데, 프로 배우도 아니고 갑작스럽게 시작된 역할놀이에 몰입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냐고? 뭘 묻나.

"로저다..."

"소속은?"

"크..."

"아, 진짜 말 안 듣네."

문답 무용. 기다릴 것도 없다. 나는 방금 전 내가 발로 문질렀던 화상에 다시 발을 올려 세게 문질렀다.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며 허벅지가 경련한다. 그래봤자 내 발아래지만. 허벅지에 널따랗게 생긴 화상이라 그런지 문지르기도 좋았다.

"엘란 변경백령 소속이라는 거 다 아니까 대답하라고."

"아... 아는데 왜 물어보는 것이냐!"

이런 멍청한 새끼를 봤나.

"그럼 넌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면서 왜 대답을 안 하는데?"

바로 이런 절차를 통해 질문에 똑바로 대답을 하지 않으면 응분의 처벌이 있다는 것을 머리에 똑바로 각인시키는 거다. 이렇게 하면 누구나 명배우처럼 메소드 연기를 할 수 있다.

세뇌? 가스라이팅? 물론 그것들도 좋다. 하지만 단기적인 과정에서는 고통만큼 좋은 게 또 없었다. 고문에는 장사 없다. 북파 특작원도 안기부에 끌려가서 받은 고문엔 못 버텼다지 않은가. 정신력? 육체가 무너지면 정신은 자연스레 무너진다.

"소속이 어디야?"

"에... 엘란 변경백령의 기사다...!"

"너희는 이 산맥에 있는 왕자를 죽이러 온 거야. 내 말 맞아?"

"그건... 대, 대답하겠다!"

망설이던 로저는 슬그머니 허벅지 위로 올라가는 내 발을 보더니 황급하게 대답했다. 새끼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네.

"그래! 젠장! 하지만 영주님은 관련이 없는 일이다! 전부 우리 기사들이 모의한...!"

"누가 니네 영주가 시켰다고 했던가?"

"아, 아니 그게..."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병신 같은, 초보적이고 멍청한 말실수.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고통 때문에 벌어진 일이겠지. 봐라. 이처럼 고통은 효과적인 수단이다. 난 그저 고문을 했을 뿐인데 이렇게 다 말해주지 않는가.

혹시나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지? 혹시나 내 대답이 느리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라는 무의식이 의식을 건드리며 이런 결과를 내는 것이다.

"이게 누굴 병신으로 아나. 기사들이 단독으로 모의를 했어? 왕자 시해를? 니네 영주가 시킨 것도 알고 있어."

"주군... 용서하소서...!"

"이번만 봐주는 거야. 앞으론 그따위로 대답하지 마. 알았어?"

난 이번에는 로저를 응징하지 않았다. 괘씸하긴 했지만 고통은 적절한 한도 내에서 베풀어야 한다. 고통이 너무 적어 여유가 있으면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고, 여유가 없으면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미 로저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종류의 고통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정신이 멀쩡해야 추가로 주는 고통을 받을 수 있는 법이다.

"그래. 그 콘워스 변경백 말인데."

나는 일부러 로저의 허벅지 화상 부위를 신발 끝으로 툭툭, 쳤다. 도화지 위에 물로 희석된 물감이 떨어져 찍히는 것처럼, 신발코에 핏자국이 동그랗게 묻어난다.

스트레스는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언제든지 끔찍한 고문을 당할 수 있다는 그 긴장감과 불안감을 유지시켜야 한다. 특히 중요한 질문을 앞두고선.

"극... 흐윽.."

"계속 말하는 거지만 알면서 물어보는 거니까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지금 산맥에 있어? 없어?"

"그분께선... 으악!"

난 엉망진창이 된 화상 부위를 잠시 꾹, 밟았다가 떼어 주었다.

"정말 신중하게 대답해야 돼. 여기서 갑자기 헛소리를 지껄이면 나도 내가 뭘 어떻게 할지 몰라."

이 질문은 중요한 질문이다. 따라서 로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이미 알고 있다, 신중하게 대답해라... 같은 말을 자꾸 하면서 거짓을 꾸밀 여유를 주지 않아야 한다.

"주군께선 지금. 흐억... 이곳에 계시지 않는다... 저, 정말이다! 정말이다!"

로저가 내 오른발이 슬쩍 움직이는 것을 보고선 기겁하며 결백을 주장한다. 음, 만족스럽다.

"나도 알아, 임마. 그냥 자세 좀 고친 거야. 왜. 쫄리냐?"

당연히 거짓말이다. 방금 전엔 마치 다시 고문을 할 것처럼 발을 움직이며 로저의 반응을 본 것이었다. 거짓말 탐지기가 따로 필요한가? 이 사람을 보라! 로저의 표정이 바로 거짓말 탐지기다.

혼비백산하는 얼굴. 억울함과 두려움과, 고통스러움이 한데 섞여 잘 어우러진 표정이 마치 현대미술의 한 작품과도 같다. 진실로 결백한 사람의 얼굴이다.

내 생각에 이 시점에서 로저의 마음은 꺾인 것 같았다. 그 뒤로 질문과 대답은 물 흐르듯 깔끔하게 진행되었다.

"..."

그리고, 얼추 심문이 끝났다. 바닥에 대자로 누운 로저의 얼굴에서 죄책감과 허무함이 진하게 묻어났다. 끝나고 나서야 그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것처럼. 하지만 누가 그를 탓하랴. 자고로 고문에는 장사 없는 법.

"좋아. 대답은 잘 들었어. 이제 내가 약속을 지킬 차례야."

만족스러웠다. 이만큼 만족했으면 서비스를 베풀어도 좋았다. 아린의 단검이 있었지만 사람을 죽일 땐 활이 좋았다. 근육과 뼈를 파고드는 감각이 손에 남지 않으니까.

로저가 말없이 눈을 감았다. 적에게 잡혀 살아남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데다 기사면서도 고문에 굴복하여 정보들을 술술 털어놓았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퉁!

시위가 튕겨지고, 내 손을 떠난 화살이 로저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의 몸이 한 번 펄쩍 뛰어오르더니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 * *

"적이다아아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함. 동굴 안에서 일용할 양식을 바라보던 수색대는 서로를 돌아봤다. 나무들 사이로 바람을 뚫고 전해지느라 작고 불분명한 소리였지만 이건 분명 창공의 목소리였다.

"자작님."

어택이 자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틈이 어딨어! 당장 가야지!"

나유가 다급하게 무기를 챙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동굴 바깥을 향해 달렸다. 자작이 황급히 그녀를 말렸다.

"남 양! 기다리게! 혼자서 움직이면 안 돼!"

"이, 이건 어떻게 하죠?"

히사시가 팬을 잡고 당황한 티를 냈다. 여차하면 무기로 쓰려 들고 온 팬인데, 그러자면 끓고 있는 저녁거리를 버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관심사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런! 어 군. 어서 우리도 가세. 나유 양 혼자서만 보낼 수는 없네."

"알겠습니다."

어택과 자작도 나유의 뒤를 쫓았다. 결국 동굴엔 히사시 혼자만 남겨지고 말았다.

"아, 이거... 에잇!"

그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히사시는 동굴 바깥에 비스킷과 육포로 만든 죽을 쏟아버리고선 팬을 한 손에 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창공아! 아린아! 창공아아아아아!"

맨 앞에선 나유가 창공과 아린을 다급하게 부르며 뛰어갔다. 카벨 자작이 이를 꽉 깨물었다. 물론 물통 개수라던가 정황을 파악한다면 구원하러 올 일행이 더 있다는 사실을 적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겠으나, 굳이 이렇게 접근하는 티를 낼 이유는 없다.

따라서 빠르게 움직이되 정숙을 기해야 한다. 하지만 나유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냥 정신이 없거나.

일행들이 창공의 말을 잘 따르는 것을 지켜보았던 자작은 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나유의 통제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막상 습격당한 건 창공인데.

어택도 마찬가지로 나유를 제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그녀와의 차이는 꽤 벌어진 상태였다. 안 그래도 길쭉한 신장에다 운동신경이 좋았는데, 다급함까지 더해진 나유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어택은 100m를 11초대 후반에 끊는다. 키도 185cm에 달하니 보폭도 무시무시한 수준이다. 그런 그도 나유를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 그래도 차이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남 양!"

자작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 멀리서 석양빛을 받아 반짝이는 무언가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엎드리게!"

허나 나유는 자작의 만류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쏘아진 화살은 그녀의 목숨을 노리고 재빠르게 날아왔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그때, 나유에게 천운이 일어났다.

"우아악!"

나무뿌리에 발이 걸린 나유가 바닥을 뒹군 것이다. 불과 0.5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녀의 가슴이 있었던 곳을 화살이 꿰뚫고 지나갔다. 허공을 가르고 나무에 꽂힌 화살이 파르르르, 몸을 떤다.

"적이다!"

자작이 활을 들어 화살이 날아온 곳을 향해 사격했다. 적 사수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적의 화살로부터 수색대를 엄호해야 했다.

"다 죽여버려! 한 놈도 살아나선 안 된다!"

저 앞에서 검을 든 사내 넷이 몰려왔다. 원래는 저격으로 최소 한 명은 처리하고 급습할 예정이었지만 저격이 실패한 이상 근접전으로 어떻게든 수색대를 처리할 작정이었다.

"남 양! 어 군! 놈들을 막게! 궁수는 내가 맡겠네!"

자작이 계속 저 너머로 화살을 날리며 적 궁수를 견제했다. 그 사이에도 나유에게 바람같이 달려간 어택은 긴 쇠몽둥이를 휘두르며 그녀를 엄호했다. 헐떡거리며 달려온 히사시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눈을 꽉 감고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깡! 카앙!

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어택은 최전방에서 힘으로 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가진 바 기술은 없어도 힘만큼은 자신 있었다. 기세 좋게 달려온 적들도 갑자기 나타난 떡대를 만나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이 나쁜 새끼들아아아!"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나유도 검을 들고 어택에게 가세했다. 비록 중간에 의도치 않게 멈추긴 했었지만 이제까지 달려온 기세를 몰아 부딪혔다. 어택이 둘, 나유와 히사시가 각자 하나씩을 담당했다.

"어! 어어!"

탱! 탱!

다만 히사시는 막기에 급급했다. 애초에 프라이팬이다. 당연히 제대로 된 무기보다 길이가 훨씬 짧다. 그나마 다행인 건 통짜 무쇠로 만든 팬이라 검을 막을 수는 있다는 것이었다. 칼날이 팬 밑면에 튕기며 묵직한 소리를 냈다. 아슬아슬한 일촉즉발의 상황은 계속 이어졌다.

나유는 조금 상황이 나았다. 검술 실력은 일천했지만, 우연찮게도 적의 검법은 찌르기 위주였다. 그리고 그녀가 잠깐이나마 검술을 배웠던 상대인 아스터도 비슷한 검법을 사용했더랬다.

그 때문인지 의외로 나유는 상대와 아슬아슬한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다만 수세에 몰린 균형이었고, 조금만 허점을 보인다면 바로 무너지고 말 교착이었다.

어택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을 맞아 싸우는데도 전혀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꽂히는 두 칼을 쇠몽둥이를 한 번 휘둘러 강하게 튕겨내니 상대들이 몸을 휘청거렸다. 때는 지금이었다.

"이야압!"

그는 군홧발로 왼쪽에 선 적의 가슴을 강하게 걷어찼다.

뿌각!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 숨이 턱 막히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무너졌다. 말발굽에 차인다면 이러할까. 바닥에 쓰러진 사내는 검을 놓치고 강하게 경련했다.

"고든! 이런 젠장!"

쓰러진 사내의 동료가 그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어택을 상대했다. 순식간에 공방의 균형이 맞춰졌다. 히사시와 나유는 아직까지 밀리고 있었지만, 어택이 잠깐잠깐 그쪽에 신경을 쓰는 기색을 보이면 적의 공세가 일순간이나마 늦춰졌다.

"잘하고 있네! 조금만 더 버티게!"

전세를 지켜보던 자작이 그들의 용기를 북돋았다. 이젠 마음 놓고 적 궁수를 상대할 수 있었다. 근접전을 펼치는 이들을 도와주고는 싶었지만 적들과 뒤엉키는 바람에 제대로 조준하는 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건 적도 마찬가지일 터.

역시 활잡이는 활잡이끼리 붙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작이 호승심을 끌어올렸다. 비록 이번 제전에서는 아깝게 준우승을 했지만, 알펜시아에서 활 솜씨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상대는 보이지 않았다. 허나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적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위치를 유추해야 하지 않겠는가?

원거리에서 저격하는 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위치 선정이다. 첫 저격이 실패한 이상, 그는 위치를 반드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미 들통났거니와 자작이 그곳에 제압 사격을 쏟아부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위치를 옮겼을까? 일단 자작의 전방은 아니다. 그와 자작의 사이에 동료들을 둔다면 오발의 위험이 존재했다. 그렇다고 후방으로 빙 돌기도 어렵다. 공백이 길어진다면 자작은 수색대를 지원하려 시도할 테니까.

따라서 그가 선택할 위치는 측면. 이제 좌측인가, 우측인가? 여기서 자작은 시위에 화살을 메기고선 우측을 노려봤다. 해가 지는 쪽이었다. 태양은 적의 앞에, 나의 뒤에. 전장에서 위치 선정을 할 때의 기본이다.

그리고 과연 적은 그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긴 활을 잡고 있으면 생각들이 전부 비슷해지는 법이다. 엘프라면 또 몰라도.

카벨 자작의 시야에 적 궁수의 손이 들어왔다. 수풀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손과 화살. 화살이 천천히 당겨지는 것으로 보아 시간이 얼마 없었다. 하지만 자작은 속사라면 자신 있었다.

태앵!

그가 재빨리 활을 들어 올려 화살을 발사했다. 화살이 수풀을 통과하고, 적 화살촉의 지향점이 기우뚱하며 위로 기울더니 힘없이 허공을 향해 쏘아졌다. 자작은 명중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가 신경 쓰지 못하던 사이, 앞쪽의 상황은 급격히 변화했다. 결국 히사시 쪽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와 함께 프라이팬이 날아가고, 그는 손목을 쥐며 바닥에 쓰러졌다.

"죽어라!"

다행히 눈치를 챈 어택이 한 번 크게 몰아쳐 상대하고 있던 적을 떼어낸 다음 히사시를 베려 검을 들어 올린 사내에게 돌진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나유는 아니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히사시에게 고개를 돌린 사이, 상대하던 적이 그 틈을 타고 나유의 칼을 세게 쳐냈다.

그녀의 가슴과 배가 훤히 노출되었다. 적은 재빨리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

"카학!"

나유가 고통스럽게 숨을 내뱉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간신히 검은 놓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고 만 것이다. 사내는 그녀의 위에 자리를 잡으며 두 손으로 검손잡이를 말아 쥐고 아래로 내리찍었다.

그냥 당해줄 수는 없었다. 그녀도 다급하게 검을 휘둘렀지만, 쓰러진 상태에서 한 손으로 휘두르는 검이 두 손으로 세게 내려찍는 검을 튕겨낼 수는 없었다. 보통은 그랬다.

쨍강!

유리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며 사내의 검이 두 동강 났다. 튕겨나간 검의 반쪽이 사내의 목에 틀어박혔다.

"끄... 허어..."

믿을 수 없다는 눈동자. 그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난다. 검을 붙든 오른손이 축 늘어지고, 왼손이 힘없이 들어올려져 목을 더듬거리지만 자신의 목에 박힌 건 틀림없는 칼날이었다.

털썩.

사내의 몸이 뒤로 기울더니 흙바닥에 쓰러졌다. 목에 박힌 칼날에서는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의미 없는 최후의 발악이 먹힌 것이다. 왜? 왜 검이 두 동강이 난 걸까?

"이, 이거..."

그녀의 검신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그날 보았던 창공의 화살과 똑같은 빛깔. 은하수 별빛을 잔뜩 머금어 파랗게 빛나는 밤바다처럼, 시린 푸른빛의 검. 하지만 그 빛은 금세 꺼져버리고, 검신은 다시 투박한 금속의 색으로 돌아왔다.

"엘베르! 젠장, 이 무슨!"

"이 새끼가 한눈을 팔아!"

히사시를 구한 어택이 당황한 얼굴로 멍하니 검을 늘어뜨린 적에게 무기를 휘둘렀다. 빠각! 하며 골통이 박살 났다. 비산하는 붉은 피와 하얀 뇌수. 그 역시 땅에 쓰러졌다. 신경에 강하게 자극이 갔는지 어시장 바닥에 나온 물고기처럼 몸을 이러 저리 떨어댔다.

"한 놈은 살려두게! 그놈한테 들어야 할 게 많으니!"

카벨 자작이 활을 바닥에 내던지고 허리춤에 찬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하나만 남게 된 적도 잡히면 곱게는 못 죽으리라는 것을 예감했는지 뒤돌아 도망쳤다. 하지만 곱게 놓아줄 그들이 아니었다.

이번에 나설 차례가 된 사람은 히사시. 그는 떨어진 프라이팬을 주워들고 적의 뒤통수를 향해 힘차게 내던졌다. 이래 봬도 중학교 시절 야구 동아리였던 몸이다. 실력은 그냥저냥이었지만.

깡!

청아한 소리와 함께 프라이팬이 달아나던 사내의 머리를 힘차게 때렸다. 그러자 어택과 나유가 달려들어 그를 제압했다. 이미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터라 크게 어렵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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