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왕들의 무덤 (2)
* * *
적의는 없으니 나오라고 해서 나갈 창공이 아니었다. 어지간해선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그다. 리더가ㅡ암묵적이긴 했지만ㅡ나가질 않으니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 그저 긴장 가득한 얼굴로 창공만 바라볼 뿐이다.
"어서 나오시게! 그대들의 안전은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네!"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소년의 목소리건만, 고상한 말투가 자연스럽다. 그 순간 창공의 뇌리를 스치는 어떤 생각.
"에드워드 왕자?"
"과연 그것이 바로 여의 이름일세."
왕들의 무덤이라는 허무맹랑한 전설을 찾아 산맥으로 떠났던 병신 왕자. 그가 바로 이곳에 있단 말인가?
'함정인가?'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함정이라고 치면 이미 동굴 아닌 다른 곳에 옮겨졌을 때부터 함정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무대뽀로 나설 수도 없는 일. 창공과 어택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앞서요. 내가 뒤따를 테니까."
"알았어."
어택은 군말 없이 창공의 지시를 따랐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다른 일행들을 돌아봤다.
"나머진 우리가 나오라고 하면 나오고."
두 남자가 수풀을 헤치고 건너편의 공터로 나섰다. 남겨진 일행들은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 1초를 10초처럼 기다렸다. 그 기다림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저편에서 창공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나와!"
잔뜩 긴장하며 무기를 치켜세우고 나갔던 창공과 어택의 뒷모습은 방금 전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편하게 팔을 늘어뜨린 채 선 모습에서 1차로 안도. 그리고 저편에 선 미끈한 소년의 모습에서 2차로 안도.
공터엔 싱그러운 초록빛 잔디가 햇빛을 따갑게 반사하고, 저 멀리에선 엄청난 수량의 폭포가 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뿐인가. 곳곳에는 알록달록히 핀 꽃들이 풍경을 장식하며, 허리까지 오는 침엽수들은 마치 누군가 지속적으로 관리한 것처럼 깔끔히 정돈된 상태다.
그리고 꽃들이 가장 많이 무더기로 핀 곳. 총 여섯 군데가 있었다. 그곳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들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솜씨 좋은 장인이 조심스레 깎아낸 티가 역력했다. 당장 어느 박물관에 전시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한데 이것을 문제라고 해야 할지. 그 조각상들의 앞에는 상과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 서있다. 아니, 사람이 맞긴 한 것인지 조금 의문이 든다. 햇빛이 이토록 쨍쨍한데 그림자가 없다. 기분 탓인진 몰라도 조금 모습이 희미한 것 같기도 하다.
머릿수는 총 여섯. 어떤 이는 노년의 모습으로, 어떤 이는 중년의 모습으로 이 자리에 섰다. 복식은 다 달랐지만 머리에는 찬란하게 생긴 관을 쓰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팔짱을 낀 이. 엄지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쓰다듬는 이. 머리를 긁는 이 등등 제멋대로 포즈를 취했지만 다들 흥미로운 표정으로 창공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쯤 되면 이곳이 어디인지 짐작이 갔다. 그 누구라도 그럴 터였다.
어쩐지 바보가 되는 느낌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공은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마법도 있는 세상인데 안 될 건 뭐란 말인가.
"설마 이곳이 왕들의 무덤입니까?"
"그 축복받은 이름이 실로 이곳이 맞다네."
왕자가 대답했다.
"그러면 저 뒤에 서계신 분들은... 제 눈에만 보이는 건 아닐 테죠."
"그러하네."
"미친..."
창공이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국 왕자가 맞았단 말인가? 정말로 이곳 알펜시아 산맥에 2천 년 전에 묻힌 왕들의 무덤이 있었단 말인가?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사실 먼저 말하기에도 어색한 분위기이긴 했다. 왕자의 뒤에 선 여섯 왕들의 영혼ㅡ그렇게 불러도 된다면ㅡ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들을 빤히 바라볼 뿐. 무언의 압박감이 이 자리를 무겁게 짓눌렀다.
"자. 이 복된 만남을 하늘에 계신 주님과 뒤에 계신 위대한 선조들이 바라보고 계시네. 우리 서로 통성명을 하지 않겠는가? 나는 알펜시아의 왕자이며 에코스 공Prince of Ecosse. 에드워드 크리스티안 케이브 다네인일세. 그대들은 누구인가?"
그래도 왕위를 계승하게 될 왕자라고 꽤나 격식 있게 인사하는 모습이었다. 창공은 아직도 그를 정신 빠진 왕자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가 노리는 바를 위해선 잘 맞춰줄 필요가 있긴 있었다.
다른 일행들도 창공을 쳐다봤다. 이젠 이런 상황에서 그가 대표로 말하는 게 당연시되는 수준이었다. 물론 창공은 마다하지 않았다.
"서창공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에 이곳 다이셀리시아에 온 에트로지입니다."
"오, 그런가. 다른 세상에서 온 손님이로군. 그런데 내가 그대를 어떻게 불러야 하겠는가? 아무래도 우리 세상의 작명법은 아닌 것 같은데."
"전례 대신께선 저를 미스터 서라고 부르셨습니다만."
"전례 대신? 카벨 자작 말인가?"
왕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이리저리 고개를 내밀어 자작을 찾는 듯했으나, 당연히 자작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그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당장 왕자에게 달려가 안위를 물었으리라.
"왕자님이 이곳 알펜시아 산맥에서 실종되셨다는 말을 듣고, 전례 대신은 저희와 함께 왕자님의 행방을 수색하러 이곳에 왔었습니다."
"자작이..."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곳에는 함께 오지 못한 것 같군요. 분명 동굴에서 함께 잠들었는데 말입니다."
"동굴이라."
왕자가 제 턱을 쓰다듬었다. 이제 막 수염이 나기 시작하는 어린애가 그런 행동을 하니 어딘가 우스웠다.
"여도 동굴을 통해서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지. 아무래도 그대들이 있던 동굴은 내가 아는 그 동굴인 것 같군. 맞아... 근위대가 습격자들과 대치했고, 여는 그곳에 몸을 숨겼지. 음... 당장 묻고 싶은 것은 많지만 우린 통성명 중이었지 않은가? 끝나기 전까진 그대의 말을 끊지 않을 터이니 계속 소개해 주지 않겠나?"
"이쪽은 어택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신가."
어택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왕자도 고개를 끄덕여 그의 인사를 받았다. 기껏해야 십 대 초반인 주제에 저러니 은근히 아니꼬운 데가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이곳은 공화정이 아니다.
그 뒤로도 창공은 제 일행들을 소개했다. 간단한 통성명이 끝나고, 왕자는 기다렸던 질문을 꺼내들었다.
"이름들은 잘 들었네. 이제 여가 묻고 싶은 것이 있다네. 근위대는 어떤가? 무사하겠지? 그렇다고 말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의 목소리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왕자라고 체통을 지키느라 말을 다급하게 몰아붙이진 않았으나, 질문을 따로 치장하는 말이 없으니 왕실 인사로서는 꽤나 성급한 질문인 셈이다.
물론 창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위대 이야기를 꺼내며 경직되었던 왕자의 얼굴이 한 층 더 굳었다.
"전부 전사했습니다."
"오..."
왕자는 두 손으로 고개를 감싼 채로 잠시 말이 없었다. 그야 사람이라면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어쩌다 보니 왕들의 무덤을 찾긴 한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한들 가능성이 희박했던 일에 근위대의 목숨을 날려버리고 자기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흉수들은... 도대체. 그 간악하고 악독한 자들의 정체를 아는가? 앨버트 숙부가 보낸 자들이겠지? 당연히 그럴 테지. 내 왕성으로 돌아가면 가장의 권한으로 숙부의 계승권을 박탈하고 종신 가택 연금에 처할 것이야. 감히 에코스 공과 그의 근위대에게 칼을 들이대다니...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일세!"
아무래도 그는 이번 일을 선왕의 동생인 앨버트 왕자가 꾸민 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철저한 감시 아래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지만 왕자가 저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창공 일행은 이미 진정한 범인을 알고 있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창공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를 갈며 분노하던 왕자가 시선을 홱, 돌려 그를 바라봤다.
"범인은 앨버트 왕자가 아닙니다."
"숙부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웨스토니아 공작이? 아니지. 링컨 백작인가. 실로 지독한 자였으니 그럴 법해."
"콘워스 변경백 그자입니다."
"..."
잠시 정적.
"...이보게."
왕자가 길을 가다 갑자기 뒤통수를 세게 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여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맞습니다."
"콘워스 변경백? 변경백이? 자네가 뭘 잘못 안 게 아닌가? 그는 둘도 없을 충신일세. 지난 반란에서 변경백이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지 안다면 그런 말은 못 할 걸세. 심지어 콘워스 부인은 앞장서 싸우다 전사하기까지 했어. 그런 그가 왜 여를... 믿을 수 없군."
창공은 슬며시 올라오는 짜증을 눌러 담았다.
'애새끼 비위 맞춰주는 것도 힘드네.'
그는 바로 그 충성스럽기 짝이 없는 콘워스 변경백의 기사들에 의해 죽을 뻔했던 사람이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미 습격자들에게서 자백을 받은 상태입니다. 전례 대신인 카벨 자작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그가 대체 왜..."
왕자는 혼란 가득한 상태가 되어 쉬이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렇게 답답함을 느끼던 차, 왕자의 뒤에 서있던 왕이 드디어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여 앞으로 나섰다. 창공은 자연스레 반색했다. 설마 열네 살짜리 왕자보다 더 갑갑할까.
"왕자."
중년의 굵고 중후한 목소리에선 너무나 자연스러운 위엄이 느껴졌다. 남들의 위에 군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생득적인 위엄이다.
"너를 구하기 위해 사선을 뚫고 온 이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냐. 듣는 태도가 그래서야 쓰겠는가."
"대왕님. 하지만..."
"에드워드 크리스티안 케이브 다네인."
그가 풀네임을 부르니 왕자는 심하게 움찔거렸다.
"저쪽에 가면 개울이 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가서 머리를 좀 처박고 오너라."
"예?"
왕자는 대왕이라 불린 사내에게 등을 떠밀렸다. 그는 왕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수시로 멈칫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물론 왕은 손을 내저을 뿐이다.
"내 후손이지만 못마땅하기 그지없군. 왕위를 이을 자로서 열넷이라는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할 뿐, 어리숙한 행동에 대한 변명거리는 되지 못하거늘."
창공 일행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촌극도 촌극이지만, 역시 왕이라면 이렇게 시원시원한 데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아네르... 아잔틴 2세 되시나요?"
아린이 왕에게 물었다. 그의 말로 미루어보았을 때, 정체 정도는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그리고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가 에드워드 왕자보다는 더 총명하고 대담하군. 왕자는 처음 우리들을 보고 얼이 빠져선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는데 말이야."
아잔틴 2세. 2천 년 전 일곱 왕들을 규합한 알펜시아의 왕. 그가 바로 이곳에서 창공 일행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끄러운 후손도 틀림없는 내 후손. 그렇기에 이곳 우리들의 무덤에 다다를 수 있었겠지."
"무슨 뜻입니까?"
창공이 물었다.
"이런 말일세. 이곳에 들어오려면, 우리 일곱 왕의 직계 후손이라는 조건이 있어야 하네. 우리의 피에 마법을 엮었지. 그렇다면 왕자는 틀림없이 내 직계 후손이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2천 년이 흐르는 동안 그 누구도 이곳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왕이나 왕세자가 무덤을 찾아 산을 헤매진 않을 테고, 아네르의 직계 후손이 아닌 이상 수천의 모험가가 산맥을 들쑤시고 다닌들 소용이 없다. 그렇다면 카벨 자작이 이곳에 들어오지 못한 것도 설명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그들과는 생판 남인 지구인. 창공 일행은 어찌하여 무덤에 들어올 수 있었단 말인가?
"물론 두 번째 조건도 있지."
그리고 아잔틴 2세는 충분히 그들이 품게 될 의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언젠가 이곳에 당도할 아네르의 후계자. 새 아네르에게 무덤의 문이 열릴 것이다... 솔직히 엘렌튀네가 말했을 적엔 사기인 줄로 알았는데 말일세. 자네들을 보니 이제야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겠군."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까?"
"맞네. 이해하기 쉽게 말해주자면, 자네들이 우리 후임일세."
"..."
평소 어떤 상황에서도 혀를 잘 굴린다고 자부하는 창공도 뭐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방금 전 콘워스 변경백이 습격의 주범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왕자의 표정이 이번엔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꾸벅꾸벅 졸다가 일어나 보니 이세계의 탄광이라는 기막힌 상황에서부터 간신히 탈출하여 지구로 돌아가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2천 년 전 유령이 나타나서 자기들 후임이란다.
아잔틴 2세도 그런 그들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임이라는 게 말입니다."
창공이 간신히 입술을 달싹여 목소리를 냈다.
"설마하니 저희들이 그 아네르... 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봐야겠지. 아, 물론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건 알고 있네. 그야 당연하겠지. 이게 다 짐이 충분한 사전 설명 없이 본론부터 꺼낸 탓일세. 하지만 순서가 좀 바뀌면 어떠한가."
그는 뭐가 재밌는지 슬쩍 히죽댔다.
"자네가 방금 전 궁금했던 사실은 우리 일곱 왕의 직계도 아닌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는가, 그것이 아니었나? 그런데 그걸 처음부터 설명하려면 조금 길어진단 말이야. 짐이야 죽은 지 2천 년이 지난 사람이니 못할 것도 없지만 자네들은 그렇게 되면 많이 답답하지 않겠는가."
"..."
"물론 설명은 해줄 터이니 걱정하지 말게나. 그전에 한 번 물어보세. 세상 한 번 구해보지 않겠는가?"
잠시 망설이던 창공은 슬며시 팔짱을 끼며 아잔틴 2세를 마주 보았다.
"저희들이 말입니까?"
"그렇지."
"이 세상을?"
"음."
"왜... 그래야 합니까?"
"오, 이런."
그의 솔직한 심정으로, 아네르고 뭐고 이딴 세상 당장 망해버려도 상관없으니 지구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너희는 옛 영웅의 후임이고 이제 세상을 구하라니.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따로 없었다.
그건 다른 일행들도 비슷했다. 아린과 히사시는 눈빛을 반짝이긴 했지만 나유와 어택은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눈치다.
"안타깝군."
"뭐가 말입니까."
"생각보다 재밌는데 말이야. 세상을 구하는 일 말일세. 명예롭기도 하고. 조금은 전향적인 태도를 품어보는 건 어떤가?"
"저는 말입니다."
창공은 씹듯이 말을 뱉었다.
"그저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입니다.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고요. 명예로 살 수는 있어도 명예만으로 살 수는 없다. 당신께서 했던 말 아닙니까?"
"아, 그 말이 지금도 전해내려 오는가."
"이렇게 말하면 섭섭하게 생각하실진 몰라도, 원래 사는 세상이 있는 저희는 엄밀히 말해 남의 세상인 이곳에서 얻는 명예가 소용이 없습니다. 명예만으로 살 수는 없는데, 명예로 살아도 원래 세상에서 살지 이곳에서 사는 의미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해하네."
"이해하신다고요?"
이해는 지랄하네. 네가 2천 년 전에 영웅적인 행동을 했을진 몰라도, 남의 세상에 뚝 떨어져서 탄광 노예로 구른 기억은 적은 없을 거다. 왜 내가 날 이따위로 취급한 세상에서, 노예가 아니라고 해 봤자 떠돌이 이방인인 세상에서 영웅이 되어야 하는데?
그는 속사포로 아잔틴 2세를 향한 비난을 쏟아내려다 간신히 목구멍에서 멈춰세웠다. 얼음으로 된 폭포수가 그의 머리에 끼얹어지고, 천 길로 솟구치던 불길은 저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감정이 옅다는 게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넘칠 것 같아 시원하게 쏟아내려고 하면 어느새 바닥까지 줄어있다. 화가 삭혀지는 것에 대한 화도 삭혀진다.
"짐의 말이 그대들을 모욕하는 것처럼 들렸다면 사과하겠네. 다만 그것이 결코 짐의 본의가 아니라는 점은 알아주었으면 좋겠네."
아잔틴 2세는 깔끔하게 사과했다. 창공도 더는 거기에 대고 뭐라 할 수는 없었다.
"한 번 차분하게 우리의 말을 들어보는 건 어떤가? 들어서 손해 보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야.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뒤의 결정은 오롯이 그대들의 몫일지니, 거기에 대고 뭐라 하진 않겠네. 짐의 명예를, 우리들 일곱 아네르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
창공은 말없이 일행들을 돌아봤다. 아린이 제일 먼저 고개를 끄덕이고, 히사시가 머뭇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던 나유와 어택도 동참했다. 일단 자초지종은 들어야 뭐가 되지 않겠는가.
"좋습니다. 사과를 받아들이죠. 부디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길 바랍니다."
"짐도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네."
아잔틴 2세가 그리 말하며 손짓하자, 뒤에 있던 다섯 왕도 걸음을 옮겨 그들에게 다가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