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45화 (45/178)

〈 45화 〉 왕들의 무덤 (4)

* * *

솔직히 말해 아주 불쾌했다. 물론 창공은 일이 그렇게 되었다니 일단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를 취했으나, 애초에 순순히 '이게 너희들의 운명이니 받아들여라' 같은 허무맹랑한 말에 따를 의사는 전혀 없었다.

만약 누군가가 그들을 이세계로 소환한 거라면 반드시 복수하리라는 마음을 품었던 그다. 1차적인 복수의 창끝은 그를 노예로 부린 트리스카를 향했었고. 그런데 이제 와서 듣자 하니 어긋난 균형을 맞추기 위한 조정자로 뽑혔다고?

이딴 세상 따위 망하면 좀 어떤가. 나유 말이 지극히 맞았다. 이건 그들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이 세상이 무너진 균형으로 인해 불타는 것과 균형을 수복하고 지구로 돌아가는 것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후자다.

아네르들이 말하길 선택은 자유라 했던가. 이건 자유로운 선택이라 부를 수 없었다.

"드디어 내 미욱한 후손이 오는군."

아잔틴 2세의 말대로 왕자는 머리칼과 얼굴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등장했다. 정말 그가 시킨 대로 개울에 머리라도 처박고 온 모양이었다. 조상의 명을 충실히 따르는 후손이 아닐 수 없다.

"에드워드 왕자. 왔는가. 이젠 좀 정신이 드나?"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과는 짐이 아니라 이들에게 해야 할 것이로다."

아잔틴 2세가 창공 일행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왕자는 곧바로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건넸다.

"여의 무례를 용서하게. 여를 구하러 온 그대들임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대우를 하지 못했네. 너무나 충격적인 소식이라 어쩔 수 없었네."

"사과를 받아들이죠."

어쨌든 시원스러운 사과였다. 에드워드는 일국의 왕자다. 그것도 왕위 계승이 확정된 왕자. 그런 그가 이쪽 세상에서는 근본도 없는 사람에 불과한 창공 일행에게 머리를 숙여 사과한 것이다.

물론 지엄하신 조상이 시킨 일이긴 했지만 적어도 그의 행동에서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들에 대한 보상은 내 섭섭지 않게 할 것이네. 이 경우엔 어떻게 해야 옳은지 전례 대신과 상의해야겠지."

"말이 나와서 말입니다만."

창공은 이 기회에 받아먹을 수 있는 건 다 받아먹을 작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알펜시아 궁술 제전에서 우승한 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에드워드 왕자에게 축사를 받았어야 하는 사람이란 말이다.

물론 하등 쓸데없는 국왕과의 식사라던가... 그런 것은 바라진 않았지만 어쨌든 제전의 우승자라면 알펜시아에선 꽤나 먹혀주는 느낌이 아니었던가?

"실은 제가 얼마 전에 룬덴에서 열린 궁술 제전에서 우승을 차지했었습니다. 전례 대신인 카벨 자작과 결승에서 맞붙어 승리했죠."

"오, 자네가? 실로 믿기 힘들군. 아니, 자넬 의심하는 것은 아닐세. 다만 여는 이번에야말로 틀림없이 대신이 우승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네."

"허어!"

과연 창공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에드워드 왕자는 물론이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아잔틴 2세까지 반응한 것이다. 물론 다른 나라 국왕들은 영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2천 년 뒤인 지금에까지 제전은 무사히 열리는 모양이로군!"

"아니 그놈의 활쏘기가 뭐 대수라고..."

"조용히 하게, 라인하르트."

헬베트 국왕 라인하르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네가 이번 제전에서 우승을 했단 말인가. 여봐라, 왕자."

"아... 예. 대왕."

에드워드 왕자가 괜히 찔리는 표정을 지었다. 어떠한 질책이 내려질지 뻔히 안다는 기색이었다.

"룬덴에서 열리는 궁술 제전은 정말 피치 못할 상황을 제외하고는 국왕이, 국왕이 부재중이라면 그 후계자가 직접 주재해야 할 것이로다. 그럼에도 왕자는 무덤을 찾아 산맥을 배회했단 말인가?"

"그것이..."

"그대가 무슨 짓을 한지 아는가? 그대는 우리 알펜시아의 전통과 기상을 무시했어. 자그마치 수 천년을 이어진 우리 알펜시아의 역사를 짓밟았어. 그것을 아는가?"

"대왕! 이 에드워드, 그럴 의도는 결코 없었습니다!"

왕자가 허겁지겁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창공은 괜히 고소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거나 처음 이미지부터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았던 데다, 이렇게 남이 털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라, 나유와 어택, 그리고 히사시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딜 가서 왕세자가 제 조상에게 힐문 받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다만 아린은 아직 어린애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모습의 왕자가 저토록 엄히 문책 받는 모습에 약간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기실 그녀가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도 했다.

"부족하다. 그대는 너무나도 부족하다. 에코스 공의 자리는 단지 왕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해서 부여되는 자리가 아니로다. 단순히 후계자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하여 주는 자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자신의 자리에 보다 더 책임감을 가지고, 통치의 시기를 위해 더욱 정진하라는 의미에서 후계자에게 에코스 공위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어떠한가?"

에드워드 왕자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머지 다섯 아네르들도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일국을 이끌었던 왕이니만큼 철없는 왕자의 모습에 한 마디씩 건넬 말이 있으리라. 다만 지금은 아잔틴 2세의 시간이었다.

"그대는 그대의 신성하고 막중한 책임을 방기했어! 우리의 궁술 제전은 단순히 궁술을 자랑하는 자리가 아니다! 궁술은 우리 알펜시아의 국기로, 다른 이들과 경쟁하고 과녁의 중심에 화살을 맞추려 온 집중을 쏟게 되는 그 무아의 순간에서! 우리는 선조들과 하나가 되어 그분들의 기상을 영원히 이어갈 수 있노라!"

그는 정말로 진노한 모습이었다. 물론 그깟 활쏘기라며 농담을 했던 라인하르트 국왕도 제전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물론 라인하르트는 아잔틴 2세와 권위가 동등한 타국의 왕이자, 사사롭게는 그의 친우이기도 했으니 그런 농담도 충분히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알펜시아의 왕세자는 아니다.

"그런 중요한 제전을 주재하지 않고 진위도 불확실한 전설에 의지해 산맥에 와! 그것도 충성스러운 근위대의 목숨까지 잃게 만들어! 그러고도 왕자가 왕위를 이을 자격이 있단 말인가!"

"대, 대왕...!"

에드워드 왕자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아잔틴 2세의 말대로 왕들의 무덤은 불확실한 전설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만 보면 왕자가 맞은 셈이다. 일단 실제로 찾긴 찾았으니까.

하지만 이는 어쩌다 보니 운이 기막히게 좋았을 뿐이지, 개판 5분 전으로 돌아가는 알펜시아의 상황에서 계승권자인 그가 택할 방법은 아니었다. 그것도 알펜시아 왕이라면 마땅히 수행해야 하는 중대사를 뒤로하고. 조상의 진노는 당연했다.

"이보게, 친구여."

헬라스의 왕, 바실리오스 5세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네. 2천 년 만에 만난 후손이 이렇듯 안일하고 무모하니 그 실망의 크기를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완성된 군주의 자질을 태어나면서부터 갖춘 왕이 얼마나 있었겠나. 보통은 평생에 걸쳐 주위의 도음을 받아 쌓아올리는 것이지."

그리고 왕세자가 가장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주변인은 바로 제 아버지인 현 국왕이다. 하나 에드워드 왕자는 국가가 둘로 쪼개진 반란으로 부친을 잃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가장 큰 고난에 부딪힌 그에게 정상적인 왕세자다운 행동을 기대하긴 어렵지 않겠냐는 것이 바실리오스 5세의 의견이었다.

물론 아쉽긴 하다. 왕세자라면 바로 그런 상황에서도 군주의 노릇을 할 것을 요구받는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난이도와는 상관없이 해내야 한단 말이다. 그렇긴 해도 참작 받을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친구여. 이제 그만 왕자를 용서하는 게 어떻겠는가?"

아르토스의 왕인 보그단 2세가 말했다.

"어쨌든 미우나 고우나 자네 후손일세. 장차 알펜시아를 이끌어 나가야 할 차기 국왕이기도 하고. 이렇게 혼을 냈으면 확실히 명심했을 것이네. 그리고 실로 무모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좋은 판단이지 않았는가? 덕분에 우리와 만나고, 우리의 후인들과 만날 수 있었음이니."

"후인... 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에드워드 왕자가 고개를 들어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창공 일행과 마주쳤다.

"설마. 저 에트로지들이 위대하신 아네르들의 후계자란 말씀이십니까?"

"음, 그것이 맞노라. ...그런데 왕자. 아무래도 다시 한번 개울에 다녀옴이 어떻겠는가?"

"그리하겠습니다."

그는 순순히 아잔틴 2세의 지시를 따라 저편으로 사라졌다. 정신이 쏙 빠지도록 혼난 다음에 갑작스럽게 충격적인 사실을 받아들이느라 뇌에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그런데 자네. 서창공이라고 했던가."

아잔틴 2세가 창공을 불렀다.

"그렇습니다."

"룬덴에서 열린 궁술 제전에서 우승을 했다. 대단하군. 짐은 죽은 지 2천 년이 지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이 마치 이몸의 책임처럼 느껴져 그대에게 심심한 사과를 표할 수밖에 없네. 그런 의미에서 짐이 주는 선물을 받지 않겠는가?"

"선물이라 하시면."

"괜찮다면 활과 화살통을 주려 하는데."

창공은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금은보화는 아니었지만 뭐 어떤가. 게다가 옛 영웅이 주는 무구인데 평범한 물건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지금 그가 쓰는 활은 원래 남의 것인지라 아무리 쏴도 어색한 느낌이 있었다.

아잔틴 2세가 주는 활도 남의 것이니 어색하지 않겠느냐고? 어차피 어색하다면 더 좋은 걸 써야 한다는 게 창공의 생각이었다.

"이리 따라오게."

창공은 옛 영웅을 따라 석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앞에는 자그만 제단이 있었는데, 제단의 위에 활과 화살통이 놓여 있었다. 둘 다 생긴 것은 괜찮았다.

활은 당연히 나무로 되어 있었는데, 처음 봤을 땐 여러 토막으로 분리가 가능한 테이크다운 형식인 줄 알았지만 하나의 목재로 만든 강화궁이었다. 이게 가능한가 싶었다. 아무리 봐도 라이저와 림으로 나누어진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다. 날렵하고 매끈한 몸대에서는 빛이 번쩍였으며, 시위는 무엇인지 모를 검은 줄로 되어 있었다.

화살통도 딱 보기에 명품이었다. 검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화살통은 지금 그가 찬 화살통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튼튼해 보였고 여러 복잡한 문양이 아로새겨져 겉면을 장식했다.

다행히도 일단 보기엔 그의 마음에 들었다.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것들을 그대에게 주겠네. 한 번 잡아 보게."

그는 우선 왼손으로 활을 잡았다. 활대를 꽉 쥐는 순간, 찌르르한 감각이 손끝에서 팔을 타고 머리까지 전달됐다. 그가 양궁을 할 때 쓰던 활을 잡는 느낌. 원래부터 그의 것이었던 활을 잡는 느낌이었다.

알 수 없는 전율. 그리고 환희. 창공은 차오르는 흥분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겨보지 않아도, 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활은 그의 것이다.

"이렇게 좋은 선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으로 드물게도, 그가 순수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원래 주인에게 허리를 숙였다.

"다행히도 마음에 들었나 보군. 짐에 자네에게 활의 내력에 대해 설명하는 기쁨을 누려도 되겠는가?"

"부탁드립니다."

"그 활은 인간이 만든 활이 아닐세. 바로 엘프의 활이라네. 엘프 장인이 활을 만드는 방법은 공개된 바가 없어 그 제작 과정은 짐으로서도 알 수가 없네. 분명한 것은, 온갖 좋은 활을 쏘아 본 적이 있는 짐조차도 그 활을 최고로 꼽는다는 것이지."

"그럴 만도 합니다. 그런데 이 활은 지금 시위가 메겨진 상태인데... 이게 부장품이라면 2천 년 동안 그랬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괜찮겠습니까?"

컴파운드 보우를 제외하고, 활은 사용 후엔 반드시 시위를 풀어두어야 한다. 계속 메겨진 상태라면 활대의 탄성이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알루미늄과 카본으로 만드는 현대의 리커브 보우도 마찬가지였다.

"엘프들이 쓰는 활의 기막힌 점이 바로 그것이네. 시위를 풀지 않아도 탄성은 영원하지. 마법 같지 않은가? 뭐, 물론 마법이겠지만 말일세."

"대단하군요. 시위는 뭘로 만들었습니까?"

그는 손가락으로 시위를 쭉 훑어내렸다. 미끈하면서도 일반 시위와는 다른, 어딘가 이상야릇한 데가 있는 감촉이었다.

"내 친구인 엘렌튀네의 머리카락일세."

"엘프들은 머리카락으로 시위를 만듭니까?"

"그렇다고 하더군. 애초에 그에게서 선물 받은 활이기도 하고. 머리카락이라고 께름칙하게 생각하지 말게."

"화살만 잘 나간다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선물 받은 것을 내가 선물하는 게 되지만... 엘렌튀네도 이해할 것이야. 어쨌거나 그대들은 우리의 후인들일세. 그렇다면 내가 이것들을 그대에게 물려준다 한들 비난할 수 있겠는가?"

"맞습니다. 이 화살통은 어떻습니까?"

"그것도 물건이라고 할 수 있으이. 당연히 엘프들의 물건이고. 일단 화살들을 넣어 보게."

창공은 그가 시키는 대로 원래 차고 있던 화살통에서 화살들을 꺼내 선물 받은 화살통에 넣었다.

"이제 뒤집어 보겠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분명 화살통은 땅바닥을 향하고 있는데, 그 안에 담긴 화살들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놀랍지 않은가? 일단 화살이 그 안에 담기면, 그대가 직접 꺼낼 때를 제외하면 절대로 나오는 일이 없지."

"허..."

아잔틴 2세의 선물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그는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 뒤, 개선장군처럼 위풍당당하게 일행에게 돌아왔다. 일행들의, 특히 아린을 제외한 셋에게서 부러움이 진하게 묻어나는 눈빛이 느껴진다.

"아니 이건 좀 아니죠! 창공이한테만 주는 게 어딨어! 뭐 끝내주는 검이라던가 그런 거 없어요?"

"혹시 둔기 쓰시는 분 안 계십니까?"

"저기...! 저...! 마법 프라이팬! 마법 프라이팬은...!"

아네르들이 실소했다. 자신들은 선물 주는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개중에는 은근히 책임을 묻는 눈빛으로 아잔틴 2세를 바라보는 이도 있었지만, 그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개인적으로 호의를 베풀었는데 뭐 어쩌란 말인가?

"저기요. 후계자라면 인수인계 똑바로 하셔야죠."

"허, 그건 무슨 말인가."

나유의 말에 보그단 2세가 반응했다. 어떻게 보면 건방진 말이었지만, 오히려 그 당참이 그를 움직인 것이다.

"이거 봐요. 우리 보고 이 세상을 구하라고 해놓고선 뒤에서 덕담 몇 마디 건네주는 게 말이 돼요?"

"그래서 결국 아가씨에게도 선물을 달라, 그런 이야긴가?"

"아니 뭐! 굳이 선물은 아니더라도..."

"두 손으로 쥐면 불길이 솟아오르며, 한 번 휘둘러 열을 벨 수 있는 검은 어떤가?"

그녀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오, 있어요?"

"상식적으로 그런 게 있을 리 없지."

"아이씨."

아네르들이 실실 웃었다.

"여보게, 아가씨. 마법검을 찾는 것보다 검에 마나를 싣는 것을 연습하는 게 더 빠를 것이야. 물론 그건 마나 유저라는 전제 하에서겠으나..."

"어. 저 마나 쓸 줄 아는데요."

"?!"

아네르들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일행들은 아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창공조차 뜬금없다는 얼굴로 나유를 바라봤다. 분명 그녀가 마나를 담은 검을 휘두르는 모습 따윈 본 적이 없었다. 말한 적도 없었고.

그제서야 나유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아마 나밖에 못 봤을 거야. 그 동굴 앞에서 싸웠을 때 있잖아. 그때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거든..."

"설마 너 바닥에 쓰러졌을 때? 그때 마나로 그놈 검을 부러뜨린 거였어?"

어택이 이제야 알았다는 듯 말했다.

"응. 그런데 어떻게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 방금 말했지만 오래가지도 않았고."

창공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아린과 전에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도, 그녀도 마나를 사용한 이상 다른 일행들도 마나를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그날의 대화가.

그리고 이젠 나유도 마나를 사용했단다. 그러면 남은 건 어택과 히사시. 된다는 보장은 아무 데도 없었지만 안 될 건 뭐란 말인가? 히사시야 그렇다 치고 어택이 마나를 사용할 수 있다면... 생각만 해도 든든하다.

"뭐... 아가씨가 마나 유저라는 건 내 알겠네. 아직은 초보 중의 초보 단계인 것 같지만"

보그단 2세가 말했다.

"그렇다면 짐이 검술을 가르쳐야겠나? 그도 아니면 마나를 다루는 법? 못 할 건 없으나, 그대들이 영원토록 이곳에 머무를 것도 아니지 않은가."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기라도 한가요?"

"그런 건 아니지만 길을 재촉해야 하는 사람이 있지 아니하던가. ...마침 저기 오는군."

그가 손을 들어 가리킨 곳을 보니, 방금처럼 물을 뚝뚝 흘리며 걸어오는 에드워드 왕자가 보였다. 그랬다. 왕자는 한시바삐 왕성으로 복귀해야 했다. 게다가 변경백 문제도 처리해야 했고, 카벨 자작도 그들을 찾고 있으리라. 일어나 있다면 말이지만.

"대왕. 그리고 아네르들이시여."

왕자는 결연한 눈빛을 흩뿌리며 당당히 섰다.

"저는 부족한 몸입니다. 더욱 선조님들의 가르침과 꾸짖음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저를 데리러 온 이들이 당도한 이상 더는 이곳에 머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저라도 필요로 하여 주는 이들이 저 바깥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까보단 낫군."

필립 3세가 히죽거렸다. 아잔틴 2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의 뜻대로 하라."

"헌데 마지막으로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아네르들의 후계자라니... 그것은 어인 말씀이신지..."

"그렇군. 왕자도 어차피 언젠간 알 사실이니..."

"아잔틴."

올가가 그를 멈춰세웠다.

"그것은 그의 몫이 아니오. 그대도 잘 알고 있을 터. 물론 저들이 걷는 운명의 길이 왕자의 길에서 완전히 동떨어졌음은 아닐 것이오. 그러나 왕자는 왕자의 짐을, 저들은 저들의 짐을 져야 함이 옳지 않겠소?"

"친애하는 올가. 물론 그것은 그대의 말이 맞소. 그러나 왕자가 이들에게 뭔가 도움을 줄 수 있지도 않겠느냐는 것이 이 몸의 생각이라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소만, 결국엔 그들 스스로가 풀어나가야 할 문제요. 다만 그대의 노파심도 내 충분히 이해하는 바... 에드워드 왕자."

"예, 올가 대왕."

"나의 나라인 요르문과 남편의 나라인 헬베트는 지금 합쳐져 새로운 나라가 되었다지. 에드워드 왕자가 그곳의 왕자는 아니지만, 내 그대에게 부탁 하나 하리다."

"하명하십시오."

왕자는 경의를 표했다. 그의 직계 선조는 아니나, 올가는 여인의 몸으로 왕위에 오른 이들 중 단연 최고봉이며, 일곱 영웅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당연히 그녀의 말은 최대한의 경의를 담아 받들 필요가 있었다.

"저들은 말이오. 중요한 사명을 띠고 이 세계에 온, 우리들의 후인이라오. 물론 왕자도 중요하고 막중한 책무를 지고 있지. 하지만 내 부탁하노니, 부디 그들이 원하는 편의가 있거든 가능한 한에서 최대를 베풀어주길 바라는 바이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의 반려시여."

라인하르트가 웃으며 올가를 바라봤다.

"2천 년이 지나, 드디어 그대와 함께 진정한 안식에 들 수 있게 되었소. 친구들도 함께이니 여행길은 더욱 풍성할 것이외다."

"이거야 원, 아내와 합장되지 못한 우리들은 서러워서 살겠는가."

필립이 은근히 그들을 흘기며 말했다. 다른 왕들은 그저 소리 없이 웃을 뿐이다.

"그 말씀은..."

바실리오스 5세가 왕자의 중얼거림에 답했다.

"왕자. 그리고 다른 세상에서 온 이들이여. 이제 이 무덤은 영원히 닫힐 것이다. 우리가 엘렌튀네의 도움을 받아 영혼의 한 조각이나마 이곳에 남은 까닭은, 바로 이날만을 위해서였다. 이제 목적을 달성했으니 쉬어도 되지 않겠는가."

2천 년 동안이나 그들이 이곳에 있었던 까닭이 바로 이것이었단 말이다. 언제 나타날지 모를 그들에게 바통을 넘겨주려고.

순간 창공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 나타난단 보장이 있었는가? 알펜시아 산맥 어딘가에 숨겨진 이 무덤에, 입장 조건에 딱 알맞은 그들이 나타나는 게?

그렇다면 엘프들의 왕은 이 사실을 선지하고 있었단 말인가. 모든 것이 우연 같았던 일련의 사건들은 전부 필연이었단 말인가.

'아무래도 언젠가 엘프들을 찾아갈 필요가 있겠어.'

그는 그렇게 찜찜한 생각을 고이 접어두고선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는 왕자와 함께 왕들의 무덤을 뒤로하려 했다.

"어, 그런데 잠깐만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나유가 손을 들었다.

"그... 아네르. 그러니까 여러분들 말인데요. 총 일곱 분이죠?"

"그렇게 되네만."

아잔틴 2세가 대답했다.

"그런데 저희는 다섯이거든요. 그러니까 제 말은. 두 명이 모자라지 않느냐, 이거죠."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네."

"네?"

"그대들은 우리와 똑같으면서도, 엄연히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야. 그렇다면 굳이 우리를 따라 일곱이 될 필요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으이."

"으으... 그런가요..."

어쨌든 이것으로 정말 끝이었다. 남은 자들은 남고, 갈 자들은 갈 시간이 왔다.

"위대한 영웅들이시여. 그리고 대왕이시여. 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나이다."

"왕자... 짐이 더 무엇을 말하겠는가. 성군이 되시게."

아잔틴 2세는 그의 직계 조상인 만큼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것이다. 당부, 조언, 격려... 하지만 은하수의 별만큼 많은 그 말을 다 풀어놓을 수는 없었다. 에드워드 왕자는 말없이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그리고 다른 세상에서 온 우리의 후인들이여. 부디 이 세상을 잘 부탁하네. 그대들의 앞날에 무한한 행운과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빌겠네."

"네."

"편히들 쉬세요!"

"안녕히들 계십쇼!"

창공 일행도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선 왕자와 함께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슬며시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흩어지는 바람만이 있을 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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