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46화 (46/178)

〈 46화 〉 왕자의 귀환

* * *

대관식은 중대 문제다.물론 실질적으로는 선대 국왕의 승하와 함께 그의 확정 상속인이 권좌를 즉시 계승한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반드시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다 하여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음이다.하나 대관식을 치르지 않은 왕은 만백성과 신하들의 존중을 받을 수 없으리라.왜냐하면 대관식이 왕위가 선대에서 현대로 넘어왔다고 공표하는 단순한 행사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대저 왕의 정당한 권위는 대관식에서 나올진저, 이는 대관식엔 사제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조상의 혈통을 이었으니 왕위에 올라야 하는가? 어디 조상의 혈통을 이은 자가 그 하나뿐이랴.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만인의 존경과 존중을 받았으니 왕위에 올라야 하는가? 어디 현인이 이 세상에 그 하나뿐이랴.그럼에도 대관식을 마친 왕이 정당한 왕으로 불리우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다만 그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는 것이 다름 아닌 저 위에 계신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그분을 대리하여 사제가 씌우는 왕관을 받아야 비로소 왕이 되는 것이다.그리하여 왕 아닌 사람은 왕으로서 선다. 인간 왕국의 권세는 하느님 왕국의 권세를 빌려야 공고히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진정한 대관식엔 반드시 교황령에서 파견한 사제의 참여가 있어야 한다.이와 같은 중요한 관습을 거부하고 스스로 왕관을 쓴 왕들의 최후는 항상 비참했는데, 유명한 사례 몇 가지를 들자면... ­크리스틴 그레비 저, [북대륙의 폭군들] 中­

"미치겠군.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아침햇살이 새들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동굴 안으로 들어온다. 폐를 가득 채우는 차가운 공기는 깨끗하고 상쾌했다. 마시면 절로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질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시원한 아침 공기조차 카벨 자작의 두통을 덜어주지는 못했다. 자고 일어나니 감쪽같이 사라진 창공 일행들. 물론 날이 밝으면 하산하라고 했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자기들끼리만 내려갈 정도로 경우 없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적어도 자작의 생각은 그렇다.

게다가 그렇게 볼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옷가지며 짐들이 그대로라는 점이다. 심지어 벽에 기대놓은 무기들까지... 아무리 급해도 이것까지 두고 빠져나갈 리는 없다. 그럼 도대체 이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내 첫 번째 불침번 시간은 12시부터 2시 사이. 내가 이때까지 깨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8시부터 12시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인데... 허 참. 이런 생각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왕자도 그렇고, 창공 일행까지 사라졌다. 자작은 이 알펜시아 산맥이 사람 잡아먹는 산맥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국가의 이름을 딴 산맥이니 실로 불경한 생각이긴 했지만 사실이 그런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왜 신께선 자꾸 내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는지 모를 일이군.'

어쨌든 움직이긴 움직여야 했다. 어차피 혼자서라도 왕자의 수색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였다. 그렇게 동굴을 나서려는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빛이 번쩍였다. 분명 동굴 안쪽은 막다른 길이었을 터.

"무슨!"

자작은 황급히 화살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놀란 그의 얼굴은 이내 반가움으로 가득 채워졌다. 창공 일행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아니 자네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방금 전 그 빛은 또 뭐고."

"아, 대신님. 일어나셨습니까."

자작은 창공의 뻔뻔스러운 대답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일어나셨냐고? 물론 일어났다네! 자네들이 날 깨우질 않아... 오. 신이시여. 김 양! 괜찮은가?"

아린과 눈이 맞은 그는 깜짝 놀라며 일행에게 다가왔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던 그녀가 멀쩡히 일어나 움직이는 것을 보면 누구나 놀랄 법 하다.

"멀쩡해요."

"이럴 수가... 알펜 대왕께서 자넬 보우하심이네..."

자작이 눈을 감고 건국왕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직 놀라기엔 이릅니다, 대신님."

"무어? 미스터 서. 본 자작이 더 놀랄 일이 남았단 말인가?"

"대신...! 참으로 오랜만이오."

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자작의 표정이 멍해진다. 이윽고 일행들 사이로 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옷은 군데군데 더러웠고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엿보였지만 그래도 틀림없이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에드워드 왕자였다.

"왕자 전하! 오, 알펜 대왕이시여!"

자작이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허겁지겁 달려와 왕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행색을 살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못하던 자작. 결국 그가 맨 처음으로 간신히 내뱉은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전하... 다치신 곳은 없으시나이까?"

"난 괜찮소. 여보, 대신. 그동안 얼마나 고생 많으셨소? 여가 미욱한 탓에 대신에게 수고를 끼치게 했구려."

"전하께서 이토록 무사하시니 실로 알펜시아의 홍복이 아닐 수 없나이다. 소신의 고단함 따위 왕자 전하의 안위에 비하면 하찮은 것일 뿐이니, 심려치 않으셔도 되는 줄로 아룁나이다."

"음. 하지만 여 때문에 충성스러운 근위대 다섯이 전사했소. 그들의 죽음이 여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소."

"주군을 목숨 바쳐 지킨 용맹한 기사들이니, 주님께서도 그들을 어여삐 여길 것인 줄로 아룁니다.."

한편,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창공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산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왕자를 찾았으니 더 이상은 여기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창공은 마음을 쉽사리 놓지 못했다. 왕자를 찾았다고 다가 아니었다. 무사히 왕성이 있는 룬덴까지 돌아가야 했다.

"전하. 그런데 이리 갑자기 나타나심은 대체 어떤..."

"그래, 여가 대신에게 해 줄 말이 아주 많소.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죄송합니다만."

창공이 군신의 대화 사이에 끼어들어 뚝 잘라놓았다. 그는 둘 중 누군가가 무례한 행위라며 그를 질책하기 전에 잽싸게 말을 꺼냈다.

"해후는 나중에 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아직 우리는 안전한 곳에 있는 게 아닙니다. 산을 내려가고, 엘란 변경백령을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오, 그렇군. 깨우쳐 주어서 고맙네, 미스터 서."

자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도 말없이 납득하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창공의 말대로다. 콘워스 변경백이 추가로 기사들을 파견했는진 아직까지 미지수였으나, 파견한 기사들에게서 소식이 없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터. 아직 이곳은 초위험지대나 다를 바 없었다.

목적을 달성한 수색대는 동굴 안에 이리저리 널린 짐을 챙겼다. 배에선 꼬르륵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아침을 먹을 시간이 없었다. 그들에게 시간이 얼마나 주어졌을지조차 미지수였고, 하산을 지체시키는 행위는 전부 하찮은 행위였다.

"미스터 서."

자작이 창공을 불렀다.

"본 대신은 왕자 전하를 가까이에서 호위하겠네. 수색대의 지휘는 지금부터 자네가 맡아 주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대형은 일렬로 정하겠습니다."

그 순서는 맨 앞부터 어택, 히사시, 나유, 왕자와 자작, 아린, 창공 순이었다. 왕자는 죽은 근위대를 뒤에 남겨두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듯 자꾸 뒤를 돌아봤지만, 옆에서 자작이 말없이 왕자를 재촉했다.

일행의 속도는 뛰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꽤나 빨랐다. 하산이라는 점도 있고, 언제 변경백의 마수가 뻗칠지 모른다는 데서 기인한 조급함 때문에도 있었다. 그렇게 한시도 쉬지 않고 재빠르게 하산한 결과, 세 시간도 안 되어 그들이 등산을 시작했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왕자는 최소한의 생각은 있었는지 눈에 띄는 화려한 복장을 차려입은 건 아니었다. 물론 주의할 필요는 있었기에 일행은 최대한 왕자를 둘러싸고 모습을 감추었다.

마을은 그들이 출발했던 그때처럼 적막에 싸여있었다. 그리고 자작이 그의 마부와 약속해두었던 장소에 가니 천만다행이도 크리스토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군! 무사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왕자 전하는..."

"여기 계시네."

"전하...!"

크리스토퍼가 왕자를 보고선 재빠르게 무릎을 굽히려 했으나, 자작이 그를 붙잡아 만류했다.

"쉿. 티 내지 말게. 그것보다는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네. 감시의 눈길은 없었는가?"

"일단 제가 느끼기엔 없었던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면 다행이군. 최대한 빠르게 마차를 몰게. 엘란 변경백령을 무사히 빠져나가야 해."

마부의 눈빛이 달라졌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충 짐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서 마차에 오르시지요."

"음. 전하. 어서..."

"알았네."

수색대와 왕자가 마차에 탑승하니 이윽고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물론 왕자도 이곳까지 올 때 타고 온 마차가 있었지만, 지금 그건 다른 곳에 있었다. 어차피 왕자가 탈것도 생각해서 공간이 넉넉한 마차를 가져왔기에 문제가 되진 않았다.

"..."

초조한 시간이 흘러간다. 창공은 자꾸 시계를 쳐다보고, 다른 이들은 서로를 곁눈질하며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튼튼하긴 했지만 전차도 아니고 단순한 마차에 불과했으니 습격당한다면 상당히 불리했다.

과연 콘워스 변경백은 그들의 탈출을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 그저 그가 아내와 자식을 잃은 슬픔에 매몰되어 일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10분...

30분...

1시간...

이 순간에도 마차는 미친 듯이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창문도 열지 못하고 일곱 사람이 안에 있었으니 곧 그 안은 꿉꿉한 땀 냄새로 가득 찼다. 긴장감 때문에 땀이 송골송골 배어나고, 습도가 올라가고, 그 때문에 또 땀이 나고.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창문을 열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언젠가는 저 창문이 열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엘란 변경백령이 아닌 다른 세상이 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었다.

* * *

"주군! 주군!"

콘워스 변경백의 성. 영주의 집무실 문이 활짝 열리고, 한 사내가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변경백의 기사장이었다.

"슬랙 마을에서 왕자가 목격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분명 큰일이었다. 그의 기사들이 임무 수행이 실패했고, 왕자는 산맥에서 탈출했다는 뜻이었으니. 이대로 왕자가 무사히 룬덴에 도착한다면 변경백은 꼼짝없이 반역자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걱정이나 다급함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슬픔과 수심으로 가득 찬 변경백의 마음엔 다른 감정이 파고들 틈이 존재하지 않았다.

"주군! 듣고 계십니까?"

기사장이 그의 주군을 애타게 불렀다. 변경백은 의자에 앉아 벽에 걸린 가족의 초상화만 말없이 바라보는 중이었다. 반란 전에 그려진 초상화였다. 변경백 자신과 부인. 그리고 외동아들까지.

초상화 속의 세 가족은 모두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내와 사별하고, 아들이 시름 속에 죽은 뒤로 얼마나 이 초상화를 바라봤던가. 그러나 그리움과 비탄은 날이 가면 갈수록 늘어만 갔다. 변경백은 이미 앞장서서 역도들과 싸우던 용맹스러운 사내가 아니었다. 무기력과 절망에 잔뜩 절여진 남자. 그것이 현재의 콘워스 변경백이다.

"지금 추격대를 급히 편성하겠습니다! 가볍게 무장하고 날랜 말들과 우수한 기수들을 추린다면 변경백령을 빠져나가기 전에 붙잡을 수 있을 터! 제가 반드시..."

"되었다."

"...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변경백의 무거운 입술이 열리고, 음울한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자네는 이만 집으로 돌아가도 좋아."

"하... 하오나..."

"그리고 산맥에 파견했던 나의 기사들을 찾아오라. 사상자가 있거든 본인이나 가족에게 보상할 준비를 하라. 왕자는 되었다."

"..."

말없이 변경백을 쳐다보던 기사장은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 * *

1시간 반...

2시간...

마차의 속도가 점점 줄더니, 이내 정지했다.

왜? 누군가 앞을 가로막은 것일까?

그렇게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그때, 크리스토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빠져나왔습니다! 엘란 변경백령을 빠져나왔습니다! 모두들 안심해 주십시오! 추격대는 없었습니다!"

"그렇지!"

어택이 주먹을 꽉 쥐며 환호했다. 히사시는 쉼 없이 손부채질을 하며 눈빛으로 창문을 열 것을 호소했다. 자작도 마찬가지였고, 양옆으로 난 두 창문이 활짝 열렸다.

"크리스토퍼! 수고했네! 말들도 지쳤을 터이니 잠시 쉬도록 하세나!"

"알겠습니다, 주군."

"하아..."

나유와 아린이 한숨을 내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옷은 완전히 땀으로 젖어있었다. 안 그런 사람이 없었지만.

"그런데 왕자 전하. 이번 습격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계시나이까?"

"음... 여기 미스터 서에게서 습격을 주도한 수괴가 콘워스 변경백이라는 것을 들었소. 도무지 믿을 수 없군. 왜 그가 여를..."

"그러나 이는 엄연한 사실인즉... 우선 왕성으로 무사히 복귀하시어, 반역자에 대한 처벌을 심려하심이 옳은 줄로 아룁나이다."

"그렇... 겠지."

왕자는 악몽과도 같은 기억을 털어내려는 듯 눈을 꽉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전사한 근위대 다섯 또한 마땅한 상훈을 받을 것이오. 그리고 여를 구하러 온 대신과... 여기 있는 아네르의 후계자들도 마찬가지요."

"예?"

너무나 뜬금없는 말에 자작이 반문했다. 사실 아네르의 후계자라는 말은 그 대상인 창공 일행 본인들도 듣기에 어색하기 짝이 없었으니 당연했다.

"그... 어인 말씀이신지..."

"아, 대신은 모르겠구려. 듣고 놀라지 마시오. 여는 그 이름도 영광스러운 왕들의 무덤을.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그곳을 기어이 찾아낸 것이라오."

자작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창공 일행을 훑어봤지만, 그들은 전부 어깨만 으쓱거릴 뿐이었다.

"대신이 있던 그 동굴이 바로 무덤의 입구였소. 여가 그곳에서 정확히 몇 날 며칠을 머물렀는지 모르겠구려. 하지만 놀랍게도 배가 고프지 않았소. 또 상처들도 완전히 치유되었지. 자, 여길 보시오."

왕자가 소매를 걷어 자신의 팔뚝을 드러냈다. 티 하나 없이 말끔했다.

"여가 어릴 적에 화살을 가지고 놀다 베인 자국이 없어졌지 않소?"

"오오... 과연 그렇사옵니다."

"흉이 지는 바람에 어마마마께서 상심하셨더랬지."

"전하. 잠시만... 김 양?"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아린이 고개를 들어 자작을 바라봤다.

"자네 등의 그 상처도 말끔히 없어졌는가?"

"그게... 일단은 아무 느낌도 없는데요. 제 등을 제가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이리 봐봐."

나유가 아린의 어깨를 붙잡고 그녀의 등을 살폈다. 무덤에서 아무런 흔적이 없는 것을 한 번 보긴 했지만 또 확인한다고 닳는 것도 아니니.

"응. 멀쩡해요. ...옷은 수선해야겠지만."

"이럴 수가."

왕자가 웃으며 말했다.

"왕의 손은 약손이라는 말이 있지 않소? 과연 그 말이 사실임을 그제야 알았다오. 그리고 자네. 옷에 대해선 너무 상심하지 말게. 왕실 최고의 재단사에게 수선을 명할 터이니."

"감사합니다."

아린은 보다 밝아진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대신. 여는 그곳에서 영광스러운 아네르들을 뵈었소. 아잔틴 대왕과 다섯 아네르들을..."

"왕자 전하의 말씀은 신에게는 참으로 놀랍기만 하나이다."

자작이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조심스레 대답했다. 감히 왕자의 말을 믿지 못하는 거냐고 호통을 칠 법도 했지만 에드워드 왕자는 잔잔한 미소만 짓는다. 사실 그가 왕자였으니 이 정도지, 다른 사람이 했으면 대번 미친 소리라는 말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사실 여도 그분들을 뵌 게 꿈같기만 하다오. 아! 그러나 무덤은 영원히 닫히고 말았소. 그분들은 그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게 될 것이오. 이제 여가 그분들을 뵈었다고 한들 누가 있어 여의 말을 믿을까."

"아잔틴 2세께 선물로 받은 활과 화살통이 있습니다만."

창공이 끼어들어 말했다. 왕자와 자작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고 보니 왕자가 개울에 머리를 처박으러 떠난 사이에 받은 활이었다.

"그게 정말인가? 어디 한 번 볼 수 있겠나?"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왕자는 창공의 말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머뭇거림을 알아차리곤 작게 웃었다.

"걱정하지 말게. 대왕께서 그대에게 무구를 하사하시는 장면을 내 직접 본 것은 아니나, 분명 그곳에는 여 또한 있었네. 대왕께서 하사하신 물건을 어찌 후손된 자로서 빼앗을 수 있겠는가? 명실상부 그것은 자네의 물건일세."

"그럼..."

그는 왕자와 자작에게 그가 받은 선물을 건넸다. 조심스레 받아든 그들은 무구를 매만지며 품평을 시작했다.

"인간의 솜씨가 아니군. 여가 활에 조예가 깊진 않으나, 그것은 확실히 알겠네."

"과연 그렇사옵니다, 전하. 아잔틴 대왕께서 엘피타스의 아네르께 활과 화살통을 선물로 받으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사온데, 이것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생각되나이다."

"음, 과연 그대의 말이 맞소. 그 이야기라면 여도 알고 있는데, 보았기로서니 대왕의 화살통은 거꾸로 뒤집혀도 화살이 쏟아지는 법이 없었다고 하오. 그렇다면 어디..."

왕자가 화살통을 뒤집었다. 물론 화살은 단 하나도 쏟아지지 않았다. 마차 곳곳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창공 일행들도 이건 보지 못했더랬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자, 받게. 부디 소중히 써 주게나."

자작은 몰라도 왕자는 정말로 그것에 대해 미련이 없는 듯했다. 창공은 둘에게서 다시 그의 무기를 돌려받은 출발을 재촉했다. 어쨌든 귀환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대신님. 엘란 변경백령은 무사히 빠져나온 것 같지만, 그래도 아직 룬덴까지 갈 길이 멉니다. 왕자님께선 최대한 빨리 복귀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자네 말이 맞네."

자작이 창공의 말에 기꺼이 동의를 표했다.

"돌아가는 것은 최대한 빠를수록 좋겠지."

"음. 자네들 뜻대로 하게."

충신 중의 충신인 줄로만 알았던 콘워스 변경백이 배신한 상황. 이럴 지경이니 다른 근왕파 귀족들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올 때보다 더 급하게 길을 재촉해야 했다.

결국 휴식은 그리 길지 않았고, 자작은 마부에게 출발 명령을 내렸다. 바퀴가 소리를 내며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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