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왕자의 귀환 (2)
* * *
돌아가는 길의 보안은 갈 때보다 더욱 철저히 유지되었다. 그럴 만도 했다. 왕자가, 왕이 될 사람이 탑승한 상태다. 창공 일행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함부로 창문을 열자거나 조금 쉬어 가자거나 같은 소리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물론 창문을 아주 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더위며, 땀 냄새며... 밀폐된 마차 안의 불쾌지수는 극한을 향해 치달았다. 하지만 그나마도 마부인 크리스토퍼가 안전하다고 판단했을 때 한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유는 창공에게 눈빛으로 은근히 섹스 어필을 했다. 결국 마차는 멈춰야 했고, 사람과 말은 수면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유에게 필요한 건 섹스였다.
그러나 창공은 미약하게 고개를 흔들어 거절했다. 그에겐 섹스가 나유만큼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피로가 과장되이 드러난 창공의 표정을 보고 선선히 납득했다.
기실 창공도 나유와 몸을 섞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를 바닥에 눕히고 거칠게 범하며 제 암컷을 피정복의 환희에 떨게 만들고 싶었다.
문제는 그가 고민할 것도 많고, 또 육체적으로 피곤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려면 못 할 건 없었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이유도 없다는 말이다. 아쉽긴 했지만 어차피 아쉬운 건 나유가 더 아쉽다.
그리고 그의 부모인 스타 검사 부부의 말에 따르면, 대저 인관관계라는 것은 보다 더 아쉬움을 느끼는 쪽이 불리한 위치에 서고 주도권은 상대에게 넘기게 된다. 물론 주도권을 쥐는 쪽은 항상 창공이 되어야만 했다.
섹스도 마찬가지였다. 섹스 중에는 상황에 따라, 기분에 따라 얼마든지 주도권을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섹스의 시작은 철저히 그가 통제해야만 했다. 그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야 한다.
밤이 되고, 마차가 멈추었다. 창공과 자작은 갈 때와는 달리 불침번을 세우기로 합의했다. 그야 왕자가 있었니까. 물론 에드워드 왕자는 불침번에서 제외였다.
"..."
창공은 침낭 안에서 밤하늘을 바라봤다. 반짝이는 유리 알갱이를 햇볕 아래 흩뿌린 것과 같은 은하수가 하늘을 찬연히 밝혔다. 저 밤하늘 어딘가에 지구가 있을까. 지금쯤 지구는 어떻게 됐을까.
검사 부부의 아들에다, 서울대 학생이다. 그의 실종이라면 가십거리가 되기 딱 알맞았다. 특히나 그의 부모는 정치권과 얽히는 게 필연적인 특수부 검사들이니 더더욱 그랬다.
유튜브에서는 사이버 렉카들이 그의 실종을 두고 온갖 음모론을 펼칠 것이고, 기사 댓글창에서는 우민들이 편을 갈라 싸울 것이다. 그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안타깝지도 않으면서 안타까움을 말하며 귀환을 비는 말을 할 것이다.
그런 모습들을 생각하니 소리 없는 웃음만 나왔다. 누가 상상이나 할까. 듣도 보도 못한 세계에 떨어져서 이런 개고생을 하고 있을 거라고.
"시간이 꽤나 지난 것 같은데..."
옆에서 들려오는 중얼거림에 창공이 고개를 돌렸다. 불침번을 서던 자작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입니까?"
"아, 미스터 서. 깨어있었는가. 다름이 아니고 어 군 있잖은가. 잠시 저쪽 개울가에 다녀오겠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오지 않고 있다네. 10분이 조금 넘었는데 말일세. 여보게, 고다. 혹시 다녀와줄 수 있겠는가?"
하지만 히사시보다 창공의 대답이 더 빨랐다.
"제가 다녀오죠."
"자네가?"
"어차피 잠도 안 왔습니다."
그는 선선히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를 챙기고선 슬쩍 나유를 바라봤다. 그녀는 세상 편하게 잠든 채였다. 저렇게 피곤했으면서 무슨 섹스를 하자고 했는지...
터벅터벅.
고요한 밤의 풍경에 신발 밑창과 흙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어왔다가 이내 잔잔히 흩어져 사라진다. 개울가는 야영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었다. 그는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어택이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어택은 그에게 등을 돌린 채로 수변에 쭈그려앉아 뭔가를 씻고 있었다. 찰박이는 물소리, 뭔가를 문대는 소리. 평소에 산만한 덩치를 자랑했던 사내의 뒷모습은 오늘따라 초라하고 처연한 데가 있었다.
"형. 뭐해요."
"어, 창공아."
어택이 움찔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는 그의 둔기를 씻고 있는 중이었다. 야구 방망이를 닮은, 투박하기 짝이 없는 쇠몽둥이. 하지만 딱히 더러운 곳은 없어 보였다.
"그걸 지금 씻고 있어요?"
"피 냄새가 나서."
"피 냄새?"
"맡아 봐. 아직도 나니까."
창공은 어택에게서 방망이를 건네받아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그러나 피 냄새는 나지 않았다. 차라리 쇳내가 난다면 또 모를까.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어택에게 무기를 돌려주었다.
"안 나는데요."
"그래? 나는 나는데."
어택은 다시 몽둥이를 물에 담그고 손으로 박박 문질렀다.
"피 냄새... 피 냄새가... 계속 나니까. 씻어내야지."
창공의 마음속에서 짜증이 확 피어올랐다. 물론 어택처럼 겉보기에 강인한 사람도 PTSD에 시달릴 수 있음은 그도 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나유야 같은 증상이 나타나면 침대 위에서 어르고 달래가며 어떻게 끌고 가면 된다. 히사시가 이러면 쥐어박거나 억지로 끌고 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어택까지 이렇게 되면 곤란했다.
"형."
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하던 행동을 계속했다.
"몇이나 죽였어요? 산맥에서."
"둘."
무미건조한 대답. 생명은 숫자에 불과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는지도.
아린이라면 다르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두 생명은 둘이라는 숫자로는 나타낼 수 없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부하, 누군가의 친구... 결코 숫자로는 나타낼 수 없다고.
'숫자야.'
아니, 숫자여야 했다.
"그럼 몇이나 살렸어요?"
"어?"
그제서야 어택이 창공을 돌아본다.
"몇이나 살렸는데요."
"다 죽었어. 살린 사람은 없어."
"없긴 뭐가 없어."
그는 자신과 어택을 가리킨 뒤, 그대로 팔을 뻗어 일행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왕자까지 치면 일곱. 일곱을 살렸지."
"그런가?"
일곱은 둘보다 크다. 어택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창공도 같이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의 표정이 싸악 굳어진다.
"그러니까 이딴 헛짓거리 집어치워요. 빨리. 내 머리 더 아프게 하지 말고."
방망이를 씻던 사내의 손이 멈추었다. 잠시 동안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던 어택은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그래. 미안."
그는 창공의 어깨를 두드리려 손을 뻗었지만, 곧 창공에게 가로막혔다. 멈칫했던 어택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제 손을 보고선 팔을 내렸다. 창공의 입에 걸린 삐뚜름한 미소가 달빛을 받아 빛났다.
"명심해요."
"뭘?"
"다섯보다 더 큰 건 없다는 걸."
창공은 몸을 돌려 야영지를 향해 걸었다. 제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그를 바라보던 어택도 뒤를 쫓았다.
더욱 성급히 일정을 다그친 결과, 원래 일주일이 걸렸던 일정이 5일로 줄어들게 되었다. 일행은 무사히 룬덴에 도착한 것이다. 그간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았지만 어쨌든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다.
물론 일행들의 상태는 그야말로 목숨만 붙어 있는 지경이었다. 그나마 마차에 타고 앉아서 온 이들이 이럴진대, 마차를 몬 크리스토퍼와 말들은 오죽하랴. 마부도 마부지만 말들도 일생 할 고생을 이번 여정에서 다 했으리라.
"전하. 룬덴에 무사히 도착했나이다. 무사귀환을 경하 드리옵니다."
"음, 대신이 수고했소. 물론 그대들도..."
"여보게, 미스터 서. 그리고 자네들."
자작이 다크서클 진하게 새겨진 눈으로 창공 일행의 면면을 둘러봤다.
"우선 왕자 전하를 왕성에 모신 다음에, 그대들을 원래 묵던 성당에 데려다주라고 크리스토퍼에게 이르겠네. 분명 사우스엔드 성당이었지?"
순서야 상관없으니 어서 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런데 왕자가 그런 자작을 만류했다.
"아니오. 다 함께 왕성으로 가도록 하오."
"전하?"
"작게는 여를 구한 이들이고, 크게는 선조들께 인정받은 아네르의 후계자요. 왕성에서 대접하지 아니함은 우리 알펜시아의 수치가 될 것인즉. 부디 자작은 전례 대신으로서 여의 말에 찬성해 주길 바라겠소."
자작은 깨달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랬다. 어떻게 보면 창공 일행은 국빈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성당에 계속 머무르게 함은 처우를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했다.
"아... 미욱한 소신을 용서하소서. 자네들도 내 실수를 눈감아주면 고맙겠네. 내 정신이 이토록 없어 그만."
하지만 일행들은 일제히 손사래를 쳤다. 솔직히 너무 피곤해서 무례한 일을 당했다는 불쾌감도 일어나지 않았던 데다, 왕성에 머무른다면 오히려 더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특히 나유와 아린은 그 기대감이 노곤함을 뚫고 얼굴 위로 올라왔다. 비록 지구는 아니지만, 어쨌든 국왕이 기거하는 곳에서 손님 대접을 받는 것이다.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셈인데 불쾌감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자작은 크리스토퍼에게 왕성으로 갈 것을 명했고, 잠시 멈추었던 마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왕자는 공식적으로 왕성을 나간 적이 없기에 정문으로 위풍당당하게 통과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쪽문을 통해 왕성 안으로 입장해야 했다. 집주인이 도둑놈처럼 몰래 들어가는 꼴이지만 누굴 탓하겠는가.
"어마마마께서 많이 노하셨겠지."
"신이 전하의 곁에서 보필하겠나이다. 모든 책임은 소신의 부덕한 탓으로 돌리소서."
"여는 그토록 염치없는 사람이 아니오. 대신은 귀빈들을 안내하고, 맞이 태세를 점검하도록 하시오."
타국에서 온 국빈의 경우 전례대신인 카벨 자작과 외무대신이 합동하여 맡게 되겠지만, 창공 일행은 일단 왕자의 손님이었기에 자작 단독으로 맞이하는 게 옳았다.
"전하... 괜찮으실지요."
자작이 왕자를 걱정되는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왕자는 당당히 가슴을 폈다.
"여를 어린아이로 보지 마시오. ...물론 이번 일은 실로 여의 치기 어린 무모한 생각에서 비롯된 일이었소. 그 때문에 충성스러운 근위대 기사 다섯을 잃었고...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여가 배운 점이 많소. 어마마마의 진노는 여가 홀로 감당해야 할 일이니, 대신은 더는 상관하지 않도록 하오."
"명을 받잡나이다."
'사람 다 됐네.'
창공이 눈을 감고 대화를 들으며 가만히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은 일국의 왕자처럼 보였다. 어쨌거나 이렇게 그들이 탄 마차는 왕성의 쪽문을 통과했다. 탑승객들이 차례차례 마차에서 내리고, 갑작스러운 방문에 의문을 표하던 근위병들과 시녀들은 왕자의 얼굴을 보자 깜짝 놀라 무릎을 꿇었다.
"모두들 일어나라."
왕자가 피곤한 얼굴로 명령했다. 그들은 시녀의 안내를 받아 좁고 어두운 통로로 진입했다. 저번에 창공과 대신이 통과한 곳과 동일했다. 이윽고 햇볕이 들어오는 복도가 나왔다. 저번에는 몰랐었는데, 이곳엔 또 다른 곳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대신. 그럼 잘 부탁하겠소."
"예, 전하. 자네들은 부디 나를 따라오게."
나유는 싱긋 웃으며 말없이 왕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왕자도 마주 웃으며 그녀에게 답례했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왕자는 한숨을 쉬고선 자신을 수행하는 시녀를 돌아봤다.
"가자."
"예, 왕자 전하."
따스한 빛이 들어오는 커다란 창. 벽면에 걸린 커다란 태피스트리. 왕자가 그토록 좋아하던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마치 다른 공간처럼 느껴졌다. 제 발로 지옥을 향한다면 이러할까.
그는 자신의 모후를 떠올렸다. 아름답지만 어지간한 사내만큼 강단 있고 엄한 그녀를. 그래도 지위가 있으니 함부로 손을 대진 못하겠지만 대면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녀는 왕자를 착실히 수행하여 왕비가 기다리는 곳으로 이끌었다. 커다란 나무 문. 시녀가 그 너머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왕비 전하! 에드워드 왕자 전하시옵니다!"
"..."
그곳엔 오로지 정적뿐이었다. 왕자는 입술을 앙다물고 침을 삼키며 초조히 왕비의 허락을 기다렸다. 그렇게 30초가량이 흘렀을까.
"드시게 하라."
드디어 저편에서 왕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자는 시녀에게 이만 가도 좋다는 손동작을 취한 다음 스스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싸늘했다. 벽난로에서 나오는 온기가 간신히 한구석을 데울 뿐이다.
그리고 그 벽난로 앞 의자에 왕비가 다소곳이 앉아 성경을 읽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퀭하게 들어가고, 온몸엔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지금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왕비의 모습. 왕자는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어... 어마마마..."
"왕자."
힘없고 작은 목소리. 왕자는 몸을 벌벌 떨며 천천히 왕비에게 다가갔다.
"어마마마. 잘못... 잘못했습니다..."
"왕자."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두 눈망울. 죄책감 가득한 목소리와 몸짓.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입니다."
"어마마마..."
"정말로. 다행입니다."
매서운 손찌검은 없었다.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불호령도 없었다. 오로지 자식의 무사귀환에 안도하는 어머니가 있었다. 왕자는 그게 너무나 가슴 아팠다. 항상 당당하던 알펜시아의 왕비는 어디로 갔는가? 자신의 잘못을 매섭게 꾸짖던 그의 모친은 어디로 갔는가?
"다시는. 다시는 이러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는 어마마마께 심려를 끼쳐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인가요? 약속할 수 있겠나요?"
"이 에드워드, 떠날 때는 어린아이에 불과했으나 돌아온 지금은 한 사람의 사내라 자부합니다. 알펜시아 왕자로서의, 에코스 공으로서의 자세란 무엇인지 다시금 되새겼습니다. 이후로 어마마마를 실망시키지 않고, 마땅히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겠습니다...!"
"그런가요."
왕비의 입술이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이번 여정에서 뜻깊은 일을 겪은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어마마마."
"한 단계 성장한 왕자의 모습을 보니 이 어미도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그렇다면 왕자. 이제 왕관을 쓰세요. 옥좌에 오를 시간입니다."
"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에드워드 왕자가 놀란 표정으로 왕비를 바라봤다. 하지만 왕비에게선 그냥 해 본 말이 아니라는 듯 결연한 기색이 엿보였다.
"하지만 어마마마. 소자는 아직 배워야 할 게 너무나도 많습니다. 실은 저의 부족함을 너무나도 여실히 느꼈습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왕은 없습니다. 저 알펜 대왕께서, 혹은 아잔틴 대왕께서나 그러셨을까요. 왕은 죽는 그 순간까지 완성을 위해 달리는 존재입니다. 이제 왕자가 무사히 돌아왔고, 알펜시아에는 왕이 필요합니다. 왕관을 쓸 준비를 하세요."
"왕립 해군의 충성 맹세는 어찌..."
"왕립 해군?"
왕비의 목소리와 기세가 순간 일변했다. 두 손으로 받쳐 잡고 있던 성경을 탁, 소리가 나도록 덮은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왕자에게 말했다.
"왕자는 들으세요! 왕이 왕립 해군의 충성 맹세를 받는 것이지, 감히 왕립 해군이 왕을 가려서 충성을 맹세할 수는 없음입니다! 왕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는 왕립 해군은 단순한 역도일진저! 왕자는 역도들에게 굴복할 것을 말하는 겝니까?"
"아... 어마마마..."
왕자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매서운 호통에도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 이것이야말로 그의 모후였다. 언제나 당당한 알펜시아의 왕비. 어지간한 사내보다 강단 있는 여인.
"소자, 결단코 그럴 마음은 없습니다! 비록 부족하기 짝이 없는 소자지만 왕위에 오르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소자의 책임을 다할 것이옵니다!"
"...정말입니까? 이 어미가 왕자를 믿어도 되겠지요?"
"예! 어마마마!"
왕비는 만족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아 성경을 펼쳐들었다.
"그렇다면 내일 있을 각료 회의는 왕자가 주재하도록 하세요. 이 어미는 한발 물러나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주된 의제는 이 어미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요?"
"물론입니다."
대관식. 이제 왕자로서의 이름을 벗어던지고 왕에 오르는 것이다. 무거운 부담감이 왕자의 가슴을 짓눌렀지만, 동시에 저 밑에서부터 어떤 기대감이 그 부담감을 치올렸다. 왕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어서 가서 쉬도록 하세요. 나누고 싶은 말은 많지만 많이 피곤해 보입니다. 여독을 풀고, 회의를 준비하세요. 모자간의 이야기는 그다음에라도 늦지 않을 겝니다."
"알겠습니다, 어마마마. 그럼 편안히 쉬시길."
그것으로 왕자와 왕비의 재회는 일단락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