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48화 (48/178)

〈 48화 〉 더블 데이트

* * *

"...따라서 결혼이라는 것은 이제까지 달리 살아온 이들이 사랑이라는 지고지순하고 신성한 감정으로 서로를 묶어 자애로우신 주님의 안에서 영원히 하나가 되는 성스럽고 아름다운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사제님. 질문 있습니다. 한 남자가 두 여자를 사랑하고, 두 여자도 한 남자를 사랑한다면, 그래서 한 남자가 두 아내를 맞아들인다면 그것 또한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으시겠습니까?""자비로우신 주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의 결합을 어찌 어여삐 여기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내 되는 여인이 둘이 되든, 셋이 되든 사랑이 있고 존중이 있다면 주님께서는 반드시 그 관계를 축복하실 테지요.""오...""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둘 이상의 아내는 범상한 남자라면 능히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시기 미상. 모 성당에서의 강론 도중­

륀은 트리스카에서 극한의 분노를 느껴야 했다.

수도에 머무르고 있을 줄로 알았던 아스터는 이미 비아투 탄광으로 출발한 지 오래였다. 결국 그녀는 제대로 쉴 틈도 없이 연초 두어 쌈지 정도를 구매한 다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연속으로 허탕이었다. 비아투 탄광으로 가는 길은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아스터가 결국 탄광으로 진입하지 못했을 것이라 판단한 그녀는 근처 마을을 수소문했고, 이곳을 뜬 지 조금 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결국 탄광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실패하고 무력감을 곱씹으며 그길로 트리스카를 벗어났으리라.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륀의 가슴속에서 들끓어 올랐다.

소중하디 소중한 쌍둥이 동생은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잡힐 듯 말 듯 그녀를 앞지르고 있었다. 물론 아스터는 고의로 륀을 피하는 게 아닐 테니 그녀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릴 수는 없다.

아니, 아스터 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륀의 분노를 받아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갈 데 없는 분노는 어디로 가는가. 그것이 나왔던 곳으로 돌아가게 된다. 륀이 쏘아낸 분노의 화살은 다시 그녀의 가슴에 꽂혔다.

'이러면 안 돼. 침착하자 침착...'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이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게다가 아스터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반면에 륀은 반은 도보로, 반은 지나가는 마차를 얻어 타고 그녀를 쫓는 중이다. 당연히 속도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마법사가 이런 일로 화를 내면 쓰나.'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교수 임용 심사를 받으려 논문을 작성할 때의 그 스트레스에 비하면 말이다. 다만 빨리 동생을 보고 싶은 조급한 마음에 잠시 정신이 흐트러진 것일 뿐.

륀은 다시 자세를 다잡고 아스터를 추적했다. 아스터가 트리스카에 온 이유는 비아투 탄광에서 노예 노동을 하던 에트로지들을 구하기 위함이다. 이제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실패한 그녀는 어디로 발걸음을 옮겼을까?

당연히 북대륙이다. 교황청에 보고도 해야 할 것이고, 기본적으로 남대륙은 사제가 돌아다니기에 썩 좋은 곳이 아니다. 게다가 고된 여정에 상당히 지쳤을 터. 따라서 안전한 북대륙으로 넘어가 잠시 휴식을 취할 것이라고 륀은 생각했다.

'결국 또 옛 아이카나로 가야겠네.'

비바 연방의 정세가 불안정하긴 하지만 북대륙으로 건너갈 수 있는 공식적인 루트 중 가장 가까운 곳은 역시 옛 아이카나다. 그곳에서 출발하는 연락선을 타고 알펜시아로 넘어가는 것이다.

일단 비바 연방으로 넘어간다면 옛 아이카나까지 오고 가는 마차들은 많았고, 적당히 얻어 타고 가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과연 그녀의 계산 대로였다. 륀이 모자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며 합승을 요청하면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 남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슬금슬금 곁눈질로 그녀를 보면서도 헛수작을 부리는 사람은 없었다. 딱 봐도 나 마법사요, 하는 차림새의 륀을 어떻게 건드리겠는가. 다이셀리시아의 주민들에게 마법사는 선망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설령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도 마법사에겐 함부로 해코지를 하지 못한다. 어떤 국가에서건 교수급 이상의 마법사들은 최소 남작 대우를 받는다. 괜히 건드렸다가 인생 종 치는 수가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만 사는 미친 자들은 어딜 가나 있는 법. 지금까지 륀이 여행을 하면서 위험한 상황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때마다 칼과 지팡이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 주었다.

어쨌든 생각보다 빠르게 옛 아이카나에 도착한 그녀는 빠르게 연락선의 매표소로 달려갔다.

"텔룸까지! 특등실로 한 사람!"

"오늘은 운항이 종료... 앗."

매표소 직원이 그녀를 보고 의문을 표했다.

"손님. 이미 떠나셨던 게 아니었나요? 그게 마지막 배편이었는데... 어쨌든 배를 놓치셨으면 표값의 5할은 환불이 가능..."

"그건 아마 내 쌍둥이 동생이겠죠. 사제복을 입고 있지 않았던가요?"

"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죠. 자매 두 분이 다 미인이시네요. 쌍둥이니까 당연한가... 어쨌든 오늘은 운항이 종료됐습니다."

"그럼 내일 가장 빠른 배편으로 주시겠어요?"

"텔룸까지요... 네, 여기 있습니다. 내일 아침 8시에 출발하니 늦지 마시고요."

륀은 표를 받아들고선 석양 놀에 발그레진 바다를 원망스레 쳐다봤다. 하필이면 마지막 배를 타고 갈 건 또 뭐란 말인가.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텔룸에 입항했을 때 거기에서 기다리는 게 나았을 테지만... 그 어떤 마법사도 미래는 읽을 수 없는 법이다.

천문점성학이 있지 않느냐고? 솔직히 말해 륀은 그것을 제대로 된 마법학이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제 곧이었다. 아스터가 교황청과 연락을 취하려 한다면 필시 룬덴에 있는 룬덴 대교구로 갈 터. 마법사 신분으로는 교단의 시설에 출입할 수 없지만 그 근처를 배회하다 보면 아스터와 만나는 것은 필연이었다.

"얼마 안 남았어."

* * *

창공 일행은 왕성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일단 밀짚으로 속을 채운 침대가 아니라 깃털과 솜을 가득 채워 제작한 침대다. 가히 지구에서 쓰던 침대보다 더 푹신하고 기분 좋다고 느낄 정도니 침대에 있어선 말은 다 한 셈이다.

게다가 식사 또한 그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향신료를 조금 많이 쓰는 것이 흠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빵이나 야채로 때우는 것보다는 수십 배쯤 나았다. 게다가 중간중간에 티타임까지. 평소 차를 즐기지 않는 나유나 어택도 대호평이었다.

그뿐인가. 따뜻한 물이 언제든지 준비되어 마음만 먹으면 목욕도 할 수 있다. 게다가 욕탕을 전담하는 시녀들이 시중도 들어준다. 당연히 왕성이니만큼 성접대는 아니고 마사지를 해 준다거나 음료를 갖다 준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어택과 히사시는 부담스러웠는지 거절했지만 창공은 마치 원래부터 여기에 거주했던 것처럼 자연스레 서비스를 받았다.

이 외에도 미술품을 관람한다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다거나 하는 행복이 있었지만 이는 일행 전부의 보편적인 편익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곧 왕이 될 왕자의 손님이었고, 당연히 접대에 빈틈은 있을 수 없었다.

카벨 자작도 수시로 그들에게 방문하여 불편하거나 미진한 점은 없는지 확인했다. 그렇게 서로 찻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이었다.

"대관식 말입니까?"

"그렇다네."

카벨 자작의 얼굴에선 자랑스러움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하긴 성인이 될 때까지 대관식을 미루는 것도 좋지 않았다. 반란이 진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근왕파의 거두가 배신했고, 왕립 해군은 묵묵부답인 상황.

이런 상황에서 계속 왕위를 비우게 되면 쓸데없는 꼬투리를 줄 수 있다. 어차피 에드워드 왕자는 왕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재빠르게 대관식을 하는 것도 맞으리라.

"전례 대신으로서 대관식을 준비하는 것은 상당히 피곤한 일이지만, 동시에 엄청난 영광이 아닐 수 없네."

"요새 궁중이 분주하더니 대관식 때문이었나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아린이 나지막이 말했다.

"음. 그러고 보니 자네들에게도 괜찮은 소식이 있으이."

"괜찮은 소식...? 산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보상금?"

"하하하... 물론 그것도 괜찮은 소식이겠군."

너무나 솔직한 나유의 말에 자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직설적이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은 나쁘지 않은 봄바람. 창공도 슬며시 피식했다.

"보상금에 대해선 걱정하지 말게나. 본 대신의 생각에는 대관식이 끝나고 지급될 것 같네. 논공행상도 대관식의 중요한 행사 중 하나이지 않은가."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왕자 전하께서는 자네들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기로 결정하셨다네."

"기사요! 우와, 이거 진짜 용사라도 된 것 같은데요."

기사 작위라는 말에 히사시가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떠들어댔다. 다른 일행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기꺼워하는 표정이었다. 비록 지구로 돌아가면 아무 쓸모도 없는 기사 작위이겠으나, 어쨌든 받으면 기분은 좋은 것이다.

명예니 뭐니 하는 것에 시니컬한 태도를 견지하던 창공도 내심 꽤나 괜찮다고 생각했다. 알펜시아 국왕이 직접 임명하는 기사다. 어느 지방 귀족이 임명하는 기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들의 신분을 보증하는 데에 이것보다 더 좋은 게 있겠는가.

당연히 알펜시아 바깥으로 나가면 신분 보증 그 이상 이하의 의미밖에는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작위가 있으면 적어도 근본도 없는 이세계 사람이라 무시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타인의 협조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광이군요."

창공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다른 일행들이 그를 미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들이 알기로 창공은 훈장 다발을 수여받는다 해도 기뻐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린은 달랐다. 그녀는 그의 생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네, 영광이네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본 대신이 아니라 왕자 전하... 대관식 이후엔 국왕 폐하가 되시겠지. 서임식에서 그분께 직접 전하도록 하게나."

"저희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서임식에서 해야 할 것들, 삼가야 할 것들에 대해선 대관식이 다가오면 내 친히 일러주도록 하겠네. 그 외에 자네들이 도울 일이야 있겠는가. ...그럼 이만 가 봐야겠군. 아주 바빠서 말일세. 나중에 시간이 되면 또 보도록 하세나."

자작은 일행에게 인사를 건네고 모습을 감췄다. 아마 준비해야 할 일이 아주 많을 것이다. 대관식 준비부터 각국에서 올 외교 사절들의 맞이까지... 전례 대신으로서 몸이 세 개가 있어도 모자를 지경이리라.

"우와... 기사. 기사라고 하니까 느낌은 죽이지 않아?"

나유가 깔깔거리며 말했다. 기사가 뭐 별거겠는가. 어차피 전쟁에 나가 싸우라고 할 것도 아닐 테고, 그저 명예직이리라. 왕자나 자작에겐 약간 미안한 감도 있었지만 일행에게 기사란 딱 이 정도 의미였다.

"뭐, 준다면 받아야지. 거절할 이유는 없으니까."

어택도 실실 웃으며 중얼거린다. 사실 현실감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동안 이세계에 떨어져서 개고생만 잔뜩 했던 그들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푹신하고 포근한 잠자리. 하루 세 끼 만족스러운 식사. 서비스 정신 투철한 시녀들의 시중. 게다가 대관식에 기사 작위 수여까지. 이 모든 게 꿈만 같았다. 영원히 이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지구로 돌아가긴 해야겠지만... 지금 이 행복도 놓치기는 싫었다.

'뭔가 부족해.'

하지만 창공은 아니었다. 남들이야 구름 위에 두둥실 뜬 기분일지도 모른다. 다만 기분이 좋으면 그걸로 된 것일지 모른다. 그는 아니었다. 기분 좋게 흔들리는 이 구름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너무나 불안정하고 희미했다.

그렇게 된다면 다음은 끝없는 추락이 예정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선 안 된다. 여기서 드는 의문. 왜 자신은 이런 불안감을 느끼는 걸까.

'왕자의 권위 자체가 불안정해.'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기사 작위를 받음으로써 올라서는 지위가 반석 같으려면 그 기사 작위를 수여하는 이의 권위도 반석 위에 올라가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의미가 있다.

한데 지금 알펜시아 왕실의 권위는 상당히 추락한 상태다. 대관식만 휘황찬란하게 연다고 해서 권위가 절로 올라가는 게 아니다. 만약 왕자가 왕위에 올랐는데 다시 반란이 일어나고 그 결과 왕좌의 주인이 교체된다면?

그럼 창공 일행은 퇴위된 왕이 임명했던 기사 아무개에 불과한 신세가 된다. 끈 떨어진 연이요, 낙동강 오리알이다. 차라리 그 정도면 다행이지, 최악의 경우 알펜시아에는 발도 못 붙이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안 된다. 알펜시아 왕실은 창공 일행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야 했다.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지는 못하더라도 간접적인 지원은 받을 수 있는 그런 뒷배 말이다.

일단 떠오르는 방법이 있긴 하다. 왕자가 알펜시아 산맥에서 왕들의 무덤을 발견한 사실을 피로하며 창공 일행을 아네르의 후계자로서 만천하에 널리 알리는 것. 전설 속 영웅의 무덤을 발견하고, 그 영웅의 후인들을 데려온 이로 왕자 자신을 포장하는 방법이다.

나쁘지는 않다. 우선 자신이 옛 아네르의 직계 후손임을 다시금 만민에게 각인시킨다. 2천 년 동안 그 누구도 이룩하지 못했던 업적을 달성하고, 아네르의 전설을 다시금 불러온 왕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다만 여기에는 큰 문제가 있었다. 일단 이게 사실인 건 맞다. 그런데 누가 보증을 하는가? 뭇사람이 보기에 이는 에드워드 왕자 개인의 주장일 뿐이다. 심지어 창공 일행은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 그들더러 영웅의 후계자라고 해봤자 씨알이나 먹힐지 의문이다.

'그럼 다른 방법이 필요한데... 왕실의 권위를 되살리면서, 가능하면 귀족들의 충성도 이끌어 낼 수 있는 방법이...'

창공은 찻잔을 기울이며 고민했다. 하지만 딱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럴 때면 자신이 그저 일개 대학생이 불과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기분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응?"

여간해선 듣기 어려운 창공의 혼잣말. 나유가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내며 그를 돌아봤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고, 창공의 마음속에서 어떠한 결단이 내려졌다.

"나유야. 내일 나랑 성 밖으로 나갈래?"

"아... 내일? 응! 좋아!"

누가 봐도 데이트 신청이었다. 나유의 얼굴에 행복으로 가득 찬 진한 미소가 그려진다. 그래. 이게 바로 연애라는 거다. 비일상의 일상화. 특별함의 평범화. 특별하게만 생각했던 연인과의 데이트.

그 데이트가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너무나 무미건조하고 갑작스러운 데이트 신청이었지만 나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가슴속에서 기쁨과 환희가 차올랐다. 맞다. 이게 맞다. 괜히 수줍어하거나 빙빙 돌릴 필요가 없다.

이게 연인이라는 거니까. 연인 사이라는 거니까. 연인 사이에는 당연한 일이니까. 당연한 일이니까 특별하게 생각할 게 없다. 아! 데이트! 세 음절로 이루어진 이 단순한 한 마디가 어찌나 이리 달콤한지. 마치 딸기 크림을 입에 가득 문 것처럼.

반면 옆에서 지켜보는 아린의 가슴속엔 우중충한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도 사랑하는데...! 나도 오빠를 사랑하는데...!'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 무거운 돌 하나가 쿵, 하고 내려앉는다. 어쩌면 나유의 자리는 아린의 자리였을 수도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동시에 정말 별거 아닌 용기를 한 번만, 한순간만 냈다면. 열렬한 짝사랑을 애타게 고백했다면.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수십 번은 있었으리라. 반면에 나유는 어떤가. 단 한 번의 기회.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용기. 용기가 부족했다.

그 죄로 지금 아린은 고통받고 있다. 반은 내어줄 테니 반은 자신에게 달라고 속으로 했던 말은 인적 없는 골짜기에 아무 의미 없이 울려 퍼지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마음은 마음으로 전해지지 않고 다만 말로써 전해질 뿐이다. 그 사실이 너무나 뼈저리게 느껴진다.

"아린아."

그런데.

"너도 같이 나가자."

뭔가 이상하다?

"네?"

"어?"

한 처녀와 한 여인의 목소리. 그 속에 담긴 의문.

그러나 그녀들이 바라보는 사내는 무표정으로 찻잔만 기울일 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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