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더블 데이트 (2)
* * *
재화나 편익의 분배를 한다고 가정하자. 흔히 떠올리는 가장 빠른 방법은 모두에게 똑같은 양을 분배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가져간다. 이것만 생각하면 가장 불만이 적고 올바른 분배법이라는 생각이 들 만도 하다. 또 보통은 그럴 것이다.
하지만 같은 양을 분배 받는다고 해서 반드시 똑같은 만족감을 느낄 수는 없다. 10의 효용이 필요한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사람은 10의 재화가 있으면 10의 효용을 느끼는 데 반해, 또 어떤 사람은 15의 재화가 있어야 10의 효용을 느낄 수 있다. 사실 대부분의 불행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런 고로 저 두 사람에게 총 15의 재화를 공평하게 7.5씩 분배하게 되면 둘 다 필요한 효용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어 불만이 생기게 된다. 모두에게 불만이 없을 것이라 생각되는 가장 공평하고 정의로운 분배법을 썼는데, 모두에게 불만이 생기게 된다.
그럼 이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답은 간단하다. 15의 재화를 몰아서 주면 된다. 누구에게 제공하게 되든 적어도 한 사람은 만족감을 느낄 것이다. 물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엄청난 불만을 느끼겠지만 그게 뭐 대수란 말인가? 어쨌든 한 사람은 만족하지 않았나.
창공은 입에 담배를 물고 하늘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나유는 그를 원하고, 아마 아린도 그를 원한다. 그가 두 사람이 될 수는 없으니 이런 식의 1 대 2 데이트는 나유와 아린 둘 다 충분한 만족을 느끼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애초에 이럴 필요가 없었다. 나유와 단둘이서 데이트를 즐기면 그만이다. 그편이 나유에게도 가장 좋고, 어차피 일행들은 그와 그녀가 서로 사귄다고 알고 있으니 아린의 짝사랑이야 어찌 됐든 좋은 이야기다.
한데 그의 선택은 한 사람의 확실한 만족 대신 두 사람의 불만족이었다. 이게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걸 물론 창공도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선택을 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로 자신은 당당했다. 데이트의 끝이 섹스라고 정해진 것도 아닌데 여자 하나 더 낀다고 뭐가 대수란 말인가. 싫다고? 싫으면 안 가면 그만이다. 어차피 나유가 안 간다고 하면 아린은 더 좋아할 테니까.
아린도 괜히 나유가 신경 쓰여서 안 간다? 그러면 혼자 가면 그만이다. 어차피 자긴 나갈 생각이었고, 이왕 나간다면 여자 하나보단 둘을 끼고 가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아서 벌인 일이다.
두 번째로 이건 단순한 데이트가 아니었다. 나유는 핑크빛 상상으로 머릿속을 물들인 모양이었지만... 창공에게 이건 뭐랄까.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산책 비슷한 활동이다.
뭔가 결단을 내리거나 고민할 문제가 있는데 쉽사리 답을 찾지 못할 때는 계속 그것을 고민하기보단 잠시 다른 일이나 생각을 하면서 머리를 정리하는 게 도움이 된다. 이 외출은 바로 그 일환이었다.
창공이 현재 고민하고 있는 것은 에드워드 왕자의 권위를 좀 더 드높이는 것. 당연히 알펜시아의 국민도 아닌 그가 있지도 않은 우국충정에 그러는 건 아니고, 비빌 언덕을 좀 더 크고 튼튼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어쨌거나 이런 아이디어는 내부에서 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외부에서 찾을 수 있기도 하다. 여러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면 갑자기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나유 하나보다는 아린도 껴서 나가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 어택이나 히사시는 왜 안 데리고 가느냐... 같이 놀러 나갈 여자가 둘이나 있는데 뭐 하러 거기에 남자를 끼겠는가. 미친 짓이다.
"창공아!"
저쪽에서 나유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린도 그녀의 옆에 쫄랑쫄랑 따라붙고 있었다. 데이트라곤 해도 특별히 준비할 게 없었다. 옷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 둘 다 언제나의 그 옷차림 그대로였다.
나유는 검정 바람막이에 검정 돌핀 팬츠, 아린은 흰색 블라우스에 검정 나팔바지. 그들은 왕자의 귀빈이었으니 옷을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지만 사실 지구에서 입던 옷이 훨씬 편했다. 밖에 놀러 나가는데 드레스를 입을 수는 없으니.
또 아린의 블라우스에 났던 구멍은 왕자의 호언장담대로 왕실의 재단사가 말끔하게 수복했다. 창공이 보기엔 별거 아닌 블라우스였지만 그녀 본인은 좋아했으니 그걸로 된 문제이리라.
"그래서. 어디로 갈 거야?"
반짝거리는 눈동자.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 바라던 형태와는 조금 차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나유는 사랑하는 남자와 일상을 함께한다는 것에 큰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아린에게 대놓고 왜 동행을 거절하지 않았느냐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한편 아린은 아린대로 가슴 설레고 있었다. 그녀 또한 바라던 바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창공이 나유를 완전히 떼어놓고 자신에게 오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던 그녀다.
반이라도 좋으니까. 사랑하는 오빠의 반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달라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외쳤다. 어떻게 보면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도 여긴 아는 게 없으니까. 일단 나가 보자고."
그리고 그녀들이 사랑하는 사내는 무심한 눈빛으로 땅에 꽁초를 던진 다음 발로 비벼 불을 껐다. 창공은 평소답지 않게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 쓰고 있었는데, 이는 룬덴 시민들의 눈길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에트로지 중 최초의 궁술 제전의 우승자. 실제와는 조금 다르지만 맨손으로 활을 쏜다는 터프 슈터. 의외로 그는 룬덴에서 인지도가 있었고, 그 강렬함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지기엔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따라서 혹시 모를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선 이런 모자가 필수였다.
"팔짱 껴도 될까?"
나유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팔짱을 끼며 물었다.
"벌써 꼈잖아."
"뭐. 싫으면 풀고."
말과는 달리 창공의 팔을 꼭 끌어안는 나유. 팔뚝에서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이 느껴진다. 싫을 건 없었다.
"..."
반대편에서 아린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제까지 소극적으로 행동했던 아린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선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녀로선 창공의 의중은 정확히 파악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아니면 언제 올지 모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 오빠?"
"안 돼, 안 돼."
칼 같은 거절. 기분 탓인진 몰라도 나유의 입가에 희미한. 정말 희미한 미소가 더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 요...?"
"야. 너까지 팔짱 끼면 내가 어디 끌려가는 거 같잖아."
"아."
양옆으로 붙들려서 걸어가는 창공의 모습을 상상이라도 했는지 아린이 풋, 하고 웃었다.
"그럼 손만 잡을게요."
"맘대로."
모양새가 이상하긴 했지만 그 정도라면 허락할 순 있었다. 이렇게 셋은 왕성을 나와 거리를 걸었다. 팔에서, 손에서 느껴지는 여자의 따스함.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애 경험이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둘 이상의 여자와 함께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재밌을 것 같아 언젠가 한 번 해 보려고 생각은 했었지만 시간이 없었던 탓이다. 사실 난이도가 꽤 있는 일이고.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이리 되어버렸다. 이곳은 지구 아닌 다른 세상. 일행이 처한 상황이 평소 관념에선 나올 수 없는 생각을 하게 만든 걸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유는. 솔직히 창공의 생각에 아린은 나름 의외였다. 그녀가 그를 좋아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나 정글에서 정글의 법칙을 따르길 거부했던 아린이라면 이미 나유가 있는 그에게 적극적으로는 나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측면이 있었다.
아린은 마치 그런 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반쯤은 놀릴 생각으로 건넨 데이트 동행 신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지구의 상식을 버리기로 한 걸까. 아니면 애정의 우선순위는 신념보다 더 우위라는 걸까.
어떻게 되든 재미있는 일이다. 설령 다른 여자가 붙어도 상관없다고 한 나유. 그렇게 되면 자기가 더 사랑하면 된다고 했던 나유. 의지는 결연했지만 실제로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는 닥쳐 봐야 하는 일이다. 과연 나유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하고 기대가 됐다.
아린을 지켜보는 것도 각별한 재미다. 어쨌거나 이건 나유에 대한 배신행위. 대놓고 제 남자친구에게 달라붙는, 등에 칼을 꽂는 행위. 심지 곧고 올바른 아린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뇌할까? 고뇌한다면 어떤 식으로 고뇌할까. 그도 아니면 뻔뻔하게 나올까? 대놓고 불여우처럼? 그 김아린이?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 없다.
"뭔가 어색한데."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던 나유가 창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가."
"봐. 평소엔 상상할 수도 없던 다른 세상이야. 다른 세상에 와있다구. 주위를 둘러보면 처음 보는 것들 뿐야. 새삼스럽지 않아? 우리가 이쪽 세상에 떨어진 지가 벌써 몇 개월이 지났어. 탄광을 탈출한 뒤로는 한 달 가까이 지났고. 근데 이제야 주변 풍경이 제대로 보이잖아."
"하긴 우리 그동안 전쟁같이 지내긴 했지."
나유 말대로 주변엔 익숙하지 않은 것들뿐이다. 어쩌면 관광이라도 온 것처럼 신기해하며 즐거워했을 수도 있었다. 하나 그동안 쉼 없이, 여유 없이 움직여야 했던 그들의 처지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풍경은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법. 끊임없이 안개 저편의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던 그들은 잠시 멈춰서 휴식을 취하게 되었고, 이제서야 자기들이 어디 있는지 실감한 것이다.
"세차게 몰아치는 바쁜 현실은 무감각한 꿈처럼 흘러가고, 진정한 현실은 꿈과 같은 느긋한 여유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거야."
"멋진데요?"
아린이 그녀의 말에 감탄사를 흘렸다. 나유는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무감각한 꿈..."
앞을 멍하니 쳐다보며 중얼거리는 창공. 그의 머릿속에 뭔가 잡힐 듯, 말 듯... 아련한 생각이 감돌았다. 그가 고민하던 문제의 힌트가 될 만도 한데... 역시 아직까진 단서가 부족했다.
"일단 밥부터 먹을래?"
"밥? 좋지!"
"어디서요?"
"아린아. 일단 내 손 좀 놓아야 가리킬 수 있잖아."
"으."
그녀는 아쉬운 듯 창공의 손에 깍지를 낀 손가락을 천천히 풀어냈다. 이윽고 그의 손이 올라가 저 앞 어딘가를 가리켰다. 멋들어진 필기체로 '어우름'이라 쓰인 간판이 보인다. 외관도 꽤나 고풍스럽게 생긴 것이 가격 제법 나갈 것 같은 식당이었다.
상관없었다. 그들의 주머니는 두둑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왕실 측에서 그들에게 지급한 돈이었다. 왕자 수색 의뢰에 대한 보상은 현재 정산 중이고, 이건 별도로 지급된 품위유지비다. 알펜시아 왕실은 생각 외로 그렇게까지 인색하진 않았다.
식당 안에 들어가 적당히 자리를 잡은 셋은 간단히 단품으로 요리를 주문했다. 식사를 길게 끌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탁자 위에 놓인 촛불이 타오르며 은은한 향을 냈다. 복잡한 머리와 답답한 가슴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정적이지는 못했다. 결국은 결론을 내야 이 막힌 속이 뚫릴 테니.
"사실 어딜 데려가려고 해도 갈 곳이 없어."
창공이 반대편에 앉은 나유와 아린 사이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뭐가 있는지 알아야 말이지."
"하긴 그건 그래."
나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있어 봤자 여기 뭐가 있겠어. 영화관도 없고, 보드 게임 카페도 없을 거 아냐."
"기껏 나왔는데 실망했어?"
"아니. 난 너랑 같이 있는 것만 해도 좋아."
"그래?"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계속 이야기를 꺼냈다.
"너랑 같이 있으면... 전부 특별해지니까. 살아있다는 건 특별한 거였어. 네가 날 특별하게 만든 거야. 으, 이렇게 말하긴 부끄럽지만... 이제 너 없는 내가 상상이 안 가. 정말, 고마워. 그냥. 고맙기만 해."
창공은 말없이 제 앞에 놓은 찻잔을 들어 홀짝거렸다. 어쩐지 나유의 말이 어떠한 어필처럼 들렸다. 나를 가져갔으니까, 날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떠날 수 없다고. 떠나지 말라고.
스스로에 대한 확인. 창공에 대한 다짐. 그리고... 나유 본인이 느끼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아린에 대한 조심스러운 책망.
적어도 아린은 그렇게 느낄 만했다. 애타는 사랑을 고백하는 나유. 그리고 아린은 아무리 잘 쳐 줘도 사랑하는 여자의 옆에 끼어든 또 다른 여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창공은 아린이 여기서 주눅 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답답한 면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똑똑한 데다 은근히 깡도 있다. 자긴 그저 커플 사이를 파고든 죄인에 불과하다며 조용히 찌그러져있을 거였다면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을 터.
'반격해야지. 한 번 해 봐.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죽도 밥도 안 되니까.'
창공은 나유를 바라보면서도 속으로는 아린에게 말을 걸었다. 두 여자가 자신의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은 얼마나 재미있을까? 그게 기대가 됐다.
그리고 아린은 과연 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오빠. 단순히 밥 먹고 데이트하러 나온 건 아니죠?"
"무슨 말인데?"
"생각해 보면 이건 오빠하고 안 어울려요. 제가 지금까지 본 오빠는요. 절대 계획 없이 기분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에요. 설령 이유가 없는 행동이라도 이유를 붙일 사람이랄까..."
아린이 그간 지켜본 창공. 그는 상당히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관심을 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가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걸 어필해야 한다.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나는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단순히 옆에 끼고 있으면 좋은 트로피가 아니라고. 그리고 아린은 적어도 그 부문이라면 나유보다 우위에 설 자신이 있었다.
"절 데리고 나온 것부터가 의문이었어요. 왜 굳이 날... 그렇게 생각했죠. 이젠 알겠네요. 저도 비슷한 습관이 있거든요. 오빠."
아린은 창공을 똑바로 쳐다봤다.
"고민할 거라도 있나요? 저한테 말해요. 같이 고민해요."
"하."
창공이 짧게 미소 지었다.
"비슷한 습관?"
"고민해도 안 풀리는 문제가 있으면 잠시 놓아버리고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든요. 오빠도 마찬가지죠? 아예 다른 일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기."
"맞아."
사랑의 수렁에 빠진 듯했던 나유의 표정이 싸악, 굳었다. 지금 아린은 본격적인 위협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녀의 분야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불리했다.
"문제가 뭔데요?"
"생각해 보던가. 너라면 알 수 있을걸."
너라면 알 수 있을걸. 너라면 알 수 있을걸.
왜 자꾸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도는 건지. 나유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자신은 알 수 없다는 말일까. 연인은 서로의 이해자다. 이해자여야 한다.
'그럼 그 고민이 뭐지? 문제가 뭐지? 아린이보다 내가 먼저 알아차린다면 좋을 텐데! 왜! 왜! 왜...!'
그녀의 마음속에서 갑자기 아린에 대한 원망이 차올랐다. 다 알 텐데. 자기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다 알 텐데 왜 이렇게 방해를 한단 말인가. 지금 무슨 행동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자각하고 있을까? 물론 그럴 터였다. 창공만큼이나 머리가 좋은 아린이니까.
그런데 갑자기. 창공이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 행동이 터져 나왔다.
"오빠. 할 말이 있는데요."
"뭔데."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나유 언니한테 처음같이 나가자고 했을 때, 언니는 정말 많이 기대했을 거예요. 네. 오빠는 언니 남자친구예요. 언니는 오빠 여자친구고요. 오빠가 아무리 저보고 같이 가자고 했어도, 전 눈치껏 빠져주는 게 맞았겠죠."
"..."
나유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아린을 쳐다봤다.
"그리고 지금도 그래요. 제가 하는 행동은 나유 언니를... 네. 언니가 있는 자리에서 오빠한테 꼬리치는 거겠죠. 솔직히 고민 많이 했어요. 언니한텐 오빠가 있고, 오빠한텐 언니가 있으니까요. 제가 품고 있는 이 마음이 잘못된 건 아닌지 수없이 고민했어요. 포기하려고도 생각했어요."
그녀도 고개를 돌려 나유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일 뿐. 다시 그녀의 눈동자가 창공을 향했다.
"그런데 안 되겠어요. 난 포기 못 해요. 안 해요. 언니한텐 미안해요. 너무 미안하지만. 나도 오빠를 사랑해요. 네. 사랑해요. 지구에 있을 때부터, 학교에서 오빠를 봤을 때부터 사랑했어요."
"아린... 아..."
나유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표정은 혼란에 휩싸여있다. 그럼에도 아린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이 바로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기회였으니.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그럼, 지금이야말로 남김없이 쏟아낼 때다. 후회 없이. 후회조차 남지 않도록.
"오빠도 알고 있었죠? 알면서 날 이 자리에 데려온 거잖아요."
"..."
창공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법적으로 묵비와 긍정은 다르다. 문제는 여기가 법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법정 바깥에서 묵비는 긍정과 통한다.
"그래서 이제 거리낌 없이 행동하기로 했어요. ...언니."
그녀가 다시 나유와 시선을 맞췄다. 나유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정말 미안해요. 욕해도 좋아요. 때려도 돼요. 그래도 제 마음은 꺾이지 않아요."
셋이 앉은 테이블의 시간이 멈추었다. 솔직히 놀라웠다. 이토록 적극적으로 상대방에게 엿을 먹이고, 면전에서 폭탄을 터뜨리는 행위는 아린에게 상당히 어려울 거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해내고야 말았다.
그는 아린을 곯려 주며 자신과 나유 사이에 끼워 당황시킬 작정이었지만, 이건 역으로 당한 셈이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던가. 그가 그녀를 가지게 되면 그녀는 어떻게 될까? 나유는 어떻게 될까? 꽤나 궁금했다.
그리고 멈춘 시간은 웃으며 나타난 서버에 의해 다시 흐른다.
"주문하신 요리 나왔습니다. 허브 크러스트로 감싸고 쥬를 곁들인 양갈비. 가니쉬로는 비트 칩과 고구마 퓌레 준비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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