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더블 데이트 (3)
* * *
이렇게 잠시간의 대화는 종료되었다. 양갈비는 초록색 허브 크러스트로 감싸여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다. 얇디얇은 비트 칩은 뻑뻑한 고구마 퓌레 위에 꽂혀있었다. 이 정도면 보기에 충분히 합격점을 줄 수 있었다.
커틀러리를 들고 잘라 보니, 미디엄 레어로 보였다. 창공이 딱 좋아하는 굽기 정도다. 포크로 찍어 입안에 넣어보니 향긋한 허브향과 묵직한 육향이 먼저 느껴진다. 조심스레 씹으면 감칠맛 가득 도는 육즙이 잔뜩 배어 나온다.
"음, 맛있네. 잘 구웠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식사를 시작했다. 아뮤즈나 전채도 없이 고기부터 속에 집어넣는 꼴이었지만 어쨌든 잘 조리된 고기는 일단 먹으면 맛있다. 나이가 많은 양이었는지 살짝 냄새가 났지만 허브가 그것을 훌륭히 억제하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냄새가 아니라 풍미라고 쳐야 한다.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라면 페어링을 하지 않았다는 것. 다만 그가 밖으로 나온 까닭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이지 온전히 즐기려는 게 아니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안 먹고 뭐해? 괜찮은데."
"아... 응."
멍하니 접시만 내려다보던 나유가 천천히 포크와 나이프에 손을 뻗었다. 평소답지 않게 느릿느릿하고 조심스러운 모양새다. 미세하게 나이프 끝이 떨리는 것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아린은 그런 나유보다는 조금이나마 더 침착했다. 동요를 잘 조절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겉으로 살짝씩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서버가 타이밍 좋게 끊어주었으니 망정이지, 당장에 싸움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대목이었다.
와삭!
바삭한 비트칩이 부서지는 소리. 달달한 고구마 퓌레에 푹 찍어 한 입 무니 이것도 괜찮았다. 아무래도 고기만으로는 묵직하다. 가니쉬가 좋은 킥이 될 필요가 있는데, 꽤나 괜찮게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다만 좀 더 산뜻하게 입안을 정리할 수 있다면 더 좋았으리라.
그는 잠시 속으로 품평을 하고선 다시 고기를 썰었다. 창공에게도 갑작스러운 면이 있던 아린의 고백. 물론 그는 그녀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으니 언젠가는 나올 주제라 생각했었고, 다만 타이밍이 예상보다 빨라 살짝 놀란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나유는 아니다. 여자의 감이라던가 하는 걸로 어렴풋이 느꼈을지는 모른다. 아린도 창공을 좋아하고 있다는걸. 하지만 그 고백이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그것도 사랑하는 연인과 데이트를 나온 자리에서 듣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알지 못했으리라.
아린은 나름 뺨 맞을 각오까지 하고 고백한 것처럼 보였지만 창공이 아는 나유는 그런 말을 했다고 다짜고짜 뺨부터 올려붙일 사람은 못 되었다. 서로 친밀하지 않았으면 또 모른다. 나유가 호구는 아니니까.
그러나 평생 외로움 속에서 살았던 그녀의 치명적인 약점. 인정에 너무나도 약하다는 것. 물론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창공이겠지만 아린도 필시 소중한 존재가 되었을 터였다. 일행들 중에 자신과 더불어 둘뿐인 여자니까. 같은 여자이기에 털어놓을 수 있는 말이 있겠고, 그러다가 보면 자연스레 친밀해지는 법이다.
따라서 나유는 자기 연인에게 열렬한 사랑 고백을 한 아린에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다. 배신감만큼이나 당혹감,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을 터. 아니, 무엇인지도 정의하기 어려운, 이것저것 섞인 감정의 파도에 알몸으로 맞부딪히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수용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확실하게 반감을 드러내지도 못하는 나유가 택한 방법은 침묵과 회피. 이러면 안 된다고 느끼고는 있을 것이다. 창공과의 관계는 소중하다. 하지만 아린과의 관계도 소중하다. 독점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아린과 척을 지기도 싫다.
외강내유. 그것이 나유였다.
아린의 전략은 효과적으로 먹혀 들어갔다. 하나 그녀라고 고지에서 나유를 내려다보는 우위에 선 것은 아니었다. 결국 뭐가 됐든 고백에 대해서 창공이 언질을 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가 입을 다물고 즐거운 식사를 하고 있다. 나유가 안절부절하는 만큼이나 아린도 안절부절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침묵과 불안 속에서 식사가 끝났다. 만족스럽게 식사를 한 창공의 접시는 깨끗했다. 평소 먹는 모습이 시원스럽던 나유는 답지 않게 깨작거리긴 했지만 어찌어찌 다 비우긴 한 모양이었다. 아린은 절반 정도를 남겼다.
"식사 만족스럽게 하셨을까요?"
다시 서버가 다가와 친절하고 상냥한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물었다.
"네. 주방장께 잘 먹었다고 인사 좀 전해주시죠."
"감사합니다. 마무리로 차 한 잔씩 올려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여기 화장실이 어디죠."
"안내해 드릴까요?"
창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가 자리를 비우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비록 보지는 못하겠지만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의 앞에서는 하지 못할 이야기가 있을 테니까. 정리가 된다면 좋고, 싸움이 나도 좋다. 어쨌든 교착 상태는 해결되어야 한다.
"둘이 얘기나 좀 하고 있어. 조금 걸릴 거니까."
그는 그 말만 남기고 서버를 따라 저편으로 사라졌다. 나유나 아린이나 잠시 동안 말없이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찻잔 세 개가 테이블에 도착했다. 마시는 이 없이 김만 모락모락 내뿜었지만.
"미안... 해요..."
먼저 포문을 연 건 아린이었다. 그녀의 갈라지는 목소리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와선 흐느적거리며 나유의 귀로 들어갔다.
"학교에서? 둘이... 같은 학교에 같은 학과였지..."
"네."
나유의 목소리는 의외로 침착했다.
"개강 총회에서 만난 거야?"
"아뇨, 처음 본 건 양궁 동아리 연습인데..."
"들려줄래? 내가 모르는 모습. 네가 아는 모습을."
잠시 망설이던 아린은 그녀가 처음 창공을 보고 반했을 때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나유와 창공이 처음 만난 건 이쪽 세상에 넘어오고 나서. 지구에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진 오직 아린만이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아린은 그 사실에서 어떤 우월감을 느꼈다. 상대방의 진짜 모습을,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모습을 자기 자신만 알고 있다는 그 생각. 어딘가 음습한 데가 있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지만 어쩐지 그게 소중한 보물 같았더랬다.
그것을 지금에 와서 털어놓는 것이다. 그 동기는 나유에 대한 죄책감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다른 동인이 있었을까. 그녀는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학교에서 봤던 창공의 모습을 묘사했다.
"후회되네."
나유가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에 가는 거였는데."
"..."
"만약에 갔었다면. 네가 입학하기도 전에 창공이는 벌써부터 나와 아는 사이였을 텐데."
"언니..."
"아니. 그랬어도 넌 창공일 사랑했을까. 결국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을까. 아마 그랬겠지. 지금처럼."
"내가 잘못했다는 걸 부정하진 않을게요."
"그래?"
"비겁하게 들릴 거라는 것도 알아요. 그래도... 난 오빨 사랑해요. 너무나. 난 나쁜 년이네요. 오빠를 사랑하는데, 언니랑도 사이좋게 지내고 싶으니까."
"하..."
길게 내뿜어지는 한숨. 이어지는 침묵.
"아린아."
"네, 언니."
"내가 왜 창공일 포기해야 하는지 말해 봐. 내가 왜 내 전부를 포기하고 너한테 넘겨야 하는지 말해 봐."
"전부는 아니에요."
"뭐?"
이제서야 나유는 고개를 돌려 아린을 쳐다봤다. 아린도 그녀를 똑바로 마주했다.
"나누는 거예요. 오빠를. 오빠의 사랑을."
"사랑은 나눌 수 없어."
"나눌 수 있어요. 행복을 나누는 것처럼."
뚜벅. 뚜벅.
저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두 사람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자리를 비웠던 창공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 차 나왔네."
그는 자리에 앉아 찻잔을 집어 들었다. 깔끔하고 상쾌한 허브티였다. 고기를 먹은 뒤 입을 정리하기에 딱 알맞았다.
"가면서 물어봤는데, 여기서 좀만 더 가면 강이 있다고 하더라고. 거기 가서 바람이나 좀 쐬자."
당연히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을지 창공은 충분히 짐작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굳이 입 밖에 내진 않았다. 하나만 취하게 되면 그렇게 하고, 둘 모두를 취할 수 있으면 절대 놓치지 않는다. 좋아한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서로 언성을 높이거나 드잡이질을 한 건 아닌 듯이 보였다. 그렇다는 건 일이 잘 풀릴 가능성이 없진 않다는 뜻이었다.
세 남녀는 음식값을 지불하고 식당을 나섰다. 과연 종업원의 말대로 지척에 강이 있었다. 룬덴 시내를 관통하는 에미트 강이다. 마침 날씨도 선선했고 거주민들도 강변에 나와 곳곳에 앉아 나들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도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봤다. 여유로운 표정의 창공과 어딘가 불편한 기색의 나유와 아린. 그녀들이 서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든 실로 이 삼각관계를 해결할 열쇠는 오직 창공이 쥐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다는 것이다. 나유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생각은 좀 해 봤어? 간단한 건데."
유유히 갈 길을 가는 강물을 바라보던 창공이 불쑥, 그런 말을 내뱉었다. 나유는 물론이요, 아린도 순간 무슨 말인지 몰라 당황했지만 이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고민거리요?"
"어. 아직도 생각하는 중이거든."
아린은 다리를 끌어안고 생각에 잠겼다. 과연 그가 고민하는 게 뭘까. 그녀와 나유의 문제는 아니다. 보건대 이건 그전부터 고민하던 문제다.
'그럼 그 시작은 언제지?'
그건 아마 이 삼각 데이트를 아린에게 제안했을 때부터. 자존심 때문인지 뭔지 그녀에게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창공은 그녀의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적어도 아린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그럼 무엇 때문에?
'그때 우리가 무슨 이야길 했더라? 아, 맞아. 대관식과 기사 서임.'
전례 대신 카벨 자작은 그들 일행에게 앞으로 있을 대관식에서 기사 작위를 수여하는 일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시니컬한 창공이라면 코웃음을 치고도 남을 이야기. 그럼에도 그는 감사를 표했다. 단순히 의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도 짐작했듯이, 이는 기사 작위로 얻을 수 있는 이득 때문이다. 적어도 알펜시아 왕국 내에서라면 왕이 직접 임명한 기사로서 대접을 받을 수 있겠고, 다른 나라에 가서도 근본 없는 이세계인이라 대놓고 무시당할 일은 없다.
물론 기사로서 혜택을 받는 만큼 의무도 져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의무가 없거나 있더라도 거의 없는 수준. 그러니까 앞으로의 여정에 방해가 되지 않을 수준이라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우선 그들의 면면만 살펴봤을 때엔 작위를 수여하면서까지 붙들어 놓아야 하는 우수한 전투원이 아니다. 그럼에도 기사 작위를 준다는 것은 그 작위가 다분히 형식적인 명예 작위라는 것을 뜻했다.
또한 왕들의 무덤에서 올가 여왕이 했던 말도 있었다. 그들을 최대한 도우라는 부탁. 왕자가 그것을 확실히 유념했다면 괜히 기사 작위를 내려 의무로 옭아매려 하지 않을 것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 오히려 감사 인사라도 하러 찾아가고 싶을 지경이다. 그러나 아린은 창공이 고심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야기에선 딱히 걸릴 부분이 없었다.
그렇다면 왜? 거의 무조건 이득인 제안인데 이렇게까지 고민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런 경우 이 제안 자체의 문제라기보단 여기에 얽힌 또 다른 부분이 문제일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드디어 아린은 깨달을 수 있었다.
"...왕실의 권위가 너무나도 모자라다."
"바로 그거야."
창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알듯 말듯 한 표정을 지었다.
"대관식만으로는 부족해. 충성을 바치지 않는 왕립 해군은 잠재적인 반란군이고, 근왕파는 비록 내전에서 승리했지만 내가 볼 땐 간판만 그럴듯한 다 무너져가는 가게로 보여. 내가 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왕자를 수색하러 가자고 했는지 기억해?"
"든든한 후견인이 필요하다고 했죠."
"맞아. 난 그때 아무리 그래도 왕실이니까 일단 호의만 빚지게 한다면 꽤나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 물론 금화와 잠자리는 도움이 꽤나 되지. 문제는 우리에게 필요한 후원은 항구적인 후원이라는 거야."
아린은 주위를 둘러보며 엿듣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뒤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에드워드 왕자가 즉위한다 해도 무사히 통치를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는 거네요."
"어. 반란이 일어나서 왕좌의 주인이 뒤바뀌기라도 하는 날엔, 그리고 그자가 왕자의 흔적인 우리를 적대시하는 날엔? 우린 이 세계에서 아무것도 아니야. 어차피 사람들은 우릴 운이 좋아 어쩌다 높은 분의 눈에 띈 이방인으로 볼 거야. 그렇게 되면 설령 기사가 아니라 공작위를 준다 해도 동전 한 푼 보다 가치가 없는 작위가 되겠지."
"그럼 대관식에서 왕자를 멋진 왕답게 만들어 줄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거네? 가능하면 우리 이미지까지 끌어올리면 좋고."
나유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분명 아린보다 깨닫는 건 늦었지만, 그렇다고 쥐 죽은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듯 없는 듯 묻어가긴 싫었다.
"근데 그 방법이 쉽게 떠오르질 않아."
"우리가 영웅들의 후계자라는 걸 밝히고 왕가에 대한 지지 연설이라도 하는 건 어때?"
"그게 통할 리가."
의견을 제시한 나유였지만 창공은 단번에 부정적인 의사를 피력했다. 그의 연설 솜씨는 차치하고서라도 전혀 먹힐 만한 방법이 아니었다. 그저 궁술 제전 우승자가 웃기는 소리를 한다, 정도로 치부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그리고 직접적인 수단은 가급적 지양하고 싶었다. '제발 우리 국왕 폐하를 지지해 주세요!' 같은, 대놓고 충성을 구걸하는 방법 말이다. 충성심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편이 더 강력하고 오래간다.
따라서 그 방법은 간접적이고 은유적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방법은 직접적인 방법에 비해 임팩트가 떨어진다. 따라서 마치 세뇌를 하듯이 지속적으로 노출시켜야 하는데 이건 대관식이라는 한판 승부에 어울리지 않는는다.
여기서 창공은 아린에게 살며시 기대를 걸어봤지만 그녀도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별 같잖은 일 때문에 같잖은 고생을 다 하네.'
나유와 아린의 갈등을 보고 즐거워했던 것도 잠시, 그는 다시 부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몸을 내던졌다. 좋은 아이디어는 아무것도 안 하다 갑자기 떠오르는 게 아니라 수없이 고심한 끝에 나오는 결과물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즉, 아직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고심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조금 있다가 들어가자."
"...그래."
"네."
결국 별다른 소득은 없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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