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53화 (53/178)

〈 53화 〉 더블 데이트 (6)

* * *

"지휘?"

창공은 아린의 말을 듣고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녀의 의도가 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연주회를 열겠다는 거지?"

"맞아요."

"음악...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음악은 프로파간다로 유용히 쓰일 수 있는 도구였다. 그 어떠한 미사여구나 좌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조차 필요 없다.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최고의 방법이니. 그 자체로서는 순수한 예술일지 모르되, 거기에 어떠한 정치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너무나도 쉽다.

그것은 나치 독일이 잘 증명한 바가 있다. 베토벤과 바그너의 음악을 정치 선전에 이용했던 나치당이다. 창공이라고 못할 게 있겠는가. 아린의 제안은 딱 그가 가려웠던 곳을 제대로 긁어주고 있었다.

너무 노골적이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강렬하며 기억에 오래 남는다. 물론 실제로 대관식에서 연주회를 열려면 몇 가지 문제가 있긴 했지만 발상 자체는 좋았다.

게다가 이 연주회를 성공시킬 수 있다면 에드워드 왕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위상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연주를 하게 될 아린은 물론이고, 특히 포디움 위에 올라 지휘를 하게 될 그 자신까지.

아무리 클래식에 문외한인 사람도 일단 지휘자가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 자연스레 감탄하게 된다. 더군다나 관객들의 시선은 대부분 지휘자에게 쏠린다. 연주회 참석자들은 창공을 볼 때마다 음악의 강렬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결코 마이너스 요소는 아니었다.

"일단 왕실에 관현악단이 있는지 카벨 자작한테 좀 물어봐야겠어."

"대관식이 한 달도 안 남았을 텐데... 제대로 될까요?"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네가 독주해야지."

"하, 하, 하..."

독주라는 말에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창공은 나름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기본적인 실력도 있었고, 그때처럼 마나를 담아 연주한다면 혼자서 수십 명의 오케스트라가 내는 소리의 느낌을 재현할 수도 있었다.

"음악... 음악... 간단한 거였는데 이걸 생각 못 하다니."

창공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방금 아린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그의 앞자리에 착석했다.

"곡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한 곡만 할까?"

"네. 괜히 여러 곡 연주해서 이미지가 분산되면 안 좋아요. 딱 하나. 가장 센 거 딱 하나면 충분해요."

그가 아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성악이 들어가면 금상첨화야. 메시지. 우리가 전달해야 할 건 음악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메시지야. 너무 노골적이진 않으면서, 그렇다고 너무 은유적이지는 않게 전달해야 돼. 그러려면 성악이 있어야지."

"거기에 대관식하고 잘 어울려야 하고요. 음... 위풍당당 행진곡은 어때요? 가사도 괜찮고요."

[희망과 영광의 땅이시여, 자유의 어머니시여!

당신에게서 태어난 우리는 어떻게 당신을 찬양하리오리까?

넓게 더 넓게 당신의 영역 세워지니

당신을 강대하게 만드신 신께서 더욱 강대하게 만드시리라!]

가사부터가 강렬하고, 대관식에 어울린다. 애초에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에 썼던 음악이다. 연주야 그렇다 치고 성악 파트는 일반인도 연습한다면 충분히 잘 부를 수 있다. 아린은 이 정도라면 창공이 원하는 메시지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고개를 젓는 창공.

"그게 정말 좋긴 한데, 어차피 한 번 연주하는 거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을 걸 선정해야지. 성악과 음악의 조합이라면 진짜 마스터피스는 따로 있잖아."

"... 제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죠?"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베토벤 9번?"

창공은 긍정을 표하고, 아린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인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흔히 합창 교향곡이라 알려진 대작. 나쁘진 않은 선택이다. 그녀도 좋아했고 자주 들었기에 일단 연주 자체는 가능했다. 연주 자체는.

하지만 성악의 난이도가 위풍당당 행진곡보다 훨씬 높다. 베토벤은 성악가들에게 호흡을 고를 틈을 주지 않고 작곡했으며, 성악부의 빠르기도 자꾸 튀어대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든다. 현대의 훈련받은 프로 성악가라면 너끈히 부를 수 있지만 과연 이곳 다이셀리시아에 그런 성악가들이 있을 것인가.

'연주자들은 실력이 뒤떨어지면 오빠 말대로 나 혼자 연주하면 되지만... 이거 잘못하면 망할 거 같은데...'

아린이야 무슨 생각을 하건 창공은 벌써부터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는 중이었다. 여러 가지 변수들을 상정하고 결론적으로는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인지의 여부. 그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일단 자작한테 한 번 가 보자. 왕실에 악단이랑 합창단이 있는지 알아보고, 수배할 건 수배하고, 대관식에서 연주회를 여는 게 가능한지 알아봐야지."

"네... 일단 그게 먼저긴 하죠."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창공과 아린은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카벨 자작을 찾아갔다. 전례 대신인 그는 대관식을 준비하느라 매일 왕성에서 야근을 하고 있었기에 너무 늦지만 않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었다.

"...난데없이 그게 무슨 소린가? 교향악단?"

"그렇습니다. 왕실에 분명 교향악단이 있을 텐데요. 여러 행사에서 쓰려면..."

"일단 교향악단이라는 게 뭔가? 본인은 처음 듣는 소리네만."

"예...?"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이곳 다이셀리시아에는 교향곡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악기가 있고, 사람들은 음악을 즐길 줄도 아는데 교향곡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그렇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카벨 자작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부터 이쪽 세상에서 음악이란 민중과 교단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민요와 찬송가, 그리고 약간의 군악과 전례에 쓰이는 음악. 그게 다이셀리시아 음악의 전부라는 말.

창공은 그렇다면 왕실 전례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은 없냐고 물었다. 그래도 국가는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연주해야 할 게 아닌가. 그리고 자작의 대답은 걸작이었다.

"그런 건 왕실 근위대에서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자들을 뽑아 임시로 악대를 편성한다네. 내 듣기로 아퀴탄이나 키르케에선 상설 군악대가 있다고 하더군. 그곳에선 그들이 전례에 참여할 걸세."

"그럼... 합창단도 없습니까?"

"합창단이라면 성가대를 말하는 겐가? 노래가 필요하면 룬덴 대교구에 협조 요청을 하여 성가대를 차출한다네. 어차피 전례에선 부르는 노래야 정해져 있으니 굳이 왕실에서 상설로 운영할 필요가 없지."

'돌겠네.'

시작부터 단단히 꼬여버린 느낌이었다. 악기 연주야 아린이 혼자서 한다고 치자. 문제는 합창단의 숙련도. 그런데 성당에서 찬송가나 부르는 성가대의 실력이라고 해 봤자 뻔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런 건 왜 묻는가?"

"실은 저희가 대관식에 뭐라도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 말입니다."

자작은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창공과 아린의 설명을 들었다. 듣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 확실히 현재 왕실의 권위가 땅에 추락한 것은 자작 본인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음악으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아무래도 그에겐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군악대의 연주에 맞추어 다 함께 알펜시아의 국가를 부르면 가슴속에서 뜨거운 애국심이 들끓는 느낌은 느껴본 바가 있었다. 한데 그렇다면 그냥 국가나 왕실에 바치는 찬가를 연주하면 되지 않겠는가?

자작의 미심쩍은 표정에 창공과 아린은 설득을 시작했다.

"일단 기회를 주십시오. 성가대를 차출해 저희에게 붙여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충분히 준비가 됐다고 판단되면 대신님을 초청해 비공개로 연주를 해 보겠습니다. 들어주시고, 대관식에 쓸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해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대신님. 부탁드려요.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미스터 서... 김 양... 자네들..."

자작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이역만리 다른 세상에서 찾아온 손님인 그들이 자신들의 나라도 아닌 알펜시아를 위해 이리 고심하고 있었다니... 왕실의 충신인 카벨 자작으로선 실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에트로지들조차도 우리 왕자 전하를 위해 이토록 발 벗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거늘, 도대체 우리 알펜시아의 신민들은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실로 이들의 얼굴을 보기가 부끄럽구나...'

그는 눈을 비비는 척하면서 눈물을 훔치고는 창공과 아린을 바라봤다.

"암! 그러고 말고. 내 꼭 대교구의 협조를 얻어낼 것이야. 비용 따위는 걱정하지 말게나. 그것은 본 자작이 재무 대신과 잘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네. 자네들은 그저 자네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신님!"

아무래도 감동을 먹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작은 오해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창공과 아린에겐 나쁠 게 없었다. 어쨌든 이 모든 것이 전부 그들 자신과 왕자의 이미지를 제고시키기 위한 것. 좋은 쪽으로 오해를 한다는데 굳이 진실을 털어놓을 필요는 없다.

그길로 그들은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일단 첫 번째 관문은 넘었지만, 아직 상의해야 할 것들은 태산이었다.

"그나저나 관현악이 없다니... 충격이네요."

"그러게나 말야. 음악은 가장 기본적인 예술 아닌가? 방금 들어 보니 합주 개념은 있는 것 같던데, 그게 관현악으로 발전이 안 되나? 이 세상은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네."

"뭐, 꼭 지구랑 같은 순서로 기술이나 문화가 발전하리란 법은 없으니까요."

"...말해 뭐해. 어쨌든 그 군악대마저도 상설이 아니라면 연주 수준은 뻔해. 그냥 너 혼자 해야겠다."

"네. 가능은 할 거예요."

현대에도 합창 교향곡의 기악 부분은 고난이도로 평가받는다. 숙련도를 장담할 수 없는 근위대 임시 군악대를 뽑아서 연습을 해 봐야 혼선만 빚을 것이 너무나 뻔했다. 결국 기악은 아린이 홀로 감당해야 할 문제였다.

그렇다면 합창 교향곡을 한 가지의 악기로 독주한다는 게 가능한가? 일단 가능은 하다. 당연히 편곡을 거쳐야 하지만. 대표적으로 프란츠 리스트가 피아노 버전으로 편곡을 한 게 있었다.

물론 한 번에 다수 음을 낼 수 있는 피아노와 해 봤자 2~3화음이 전부인 바이올린ㅡ지금은 칼란드라ㅡ은 엄연히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하려고 하면 못할 건 없다는 이야기다.

"어렵긴 할 건데... 정 못 하겠으면 그냥 위풍당당 행진곡으로 갈까? 난 불가능한 거 안 시켜. 애매하면 말을 해. 실패하는 것보단 훨씬 나으니까."

"...가능해요."

아린은 창공에게서 저런 말까지 듣고 나니 오기가 생겼다. 거기에 한 가지 떠오른 좋은 생각.

"대신 성공하면 소원 한 가지만 들어주세요."

"소원? 무슨 소원."

"그건 비밀. 너무 걱정하진 마요. 못 들어주겠으면 거절해도 되니까."

창공은 그녀의 소원이 무엇인지 궁금하긴 했지만 무리할 시 거절해도 된다는 말에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렴풋이 짐작이 안 가는 것도 아니었고.

"그럼 그렇게 해. 그나저나 그때처럼 마나를 써서 연주할 수 있겠어? 그게 가능하면 기악 쪽은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을 텐데."

"음... 장담은 못 하겠지만 아마 가능할 것 같아요."

"가능하다고?"

이건 놀라웠다. 그 말인즉슨, 아린은 마나를 쓰는 방법을 대충이나마 짐작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네. 다시 말하지만 확실한 건 아니에요. 그래도 한 번 해 볼게요."

"...좋아. 그건 너한테 맡길게."

궁금하긴 했지만 창공은 그 궁금증을 억눌렀다. 어차피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일에는 우선순위라는 게 있고, 정말로 아린이 마나를 싣는 데에 성공한다면 그때 가서 물어봐도 충분했다.

"다음으로 오빠 차례네요. 지휘는 가능해요?"

"네가 하라며."

"그거야 그렇지만..."

"가능은 하겠지. 아마. 많이 보기도 했고."

그는 매년 서울시향의 시즌권을 끊는 회원이었다. 시청각적 경험이라면 나름 풍부한 편이었고, 적어도 남들 보기 어색하지 않게 지휘를 할 자신은 있었다. 아린은 그의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합창이네요."

"음. 합창단 수준이야 그렇다 치고, 가사를 좀 바꿀 필요가 있겠어."

물론 환희의 송가 원본을 그대로 써도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원곡의 감동을 느끼려면 그게 가장 나은 방법이었고. 하지만 이 연주회는 철저히 정치적 목적을 띈 연주회였다. 가사는 알맞게 수정되어야 했다.

"가능하면 그대로 쓰고 싶은데..."

"안 돼."

창공은 근처에 있던 시녀를 불러 필기도구를 요청했다. 이윽고 양피지와 깃펜, 그리고 잉크가 그의 앞에 준비되었다.

"기본적으로 은유적인 형태를 취하면서, 목적이 드러나는 부분은 확실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어. 동시에 원문에서 살릴 수 있는 건 최대한 살릴 거야."

"베토벤이 넣은 첫 부분처럼요?"

"정확해. 그 부분은 바꿀 이유가 없지."

[오 벗들이여, 이 소리가 아니오!

좀 더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르지 않겠는가!]

본래 이 부분은 프리드리히 실러가 쓴 '환희의 송가'에는 없는 부분이고, 베토벤이 직접 쓴 것이었다. 창공은 그렇게 양피지 위에 가사를 천천히 적어나갔다.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광채여, 낙원의 딸들이여... 낙원의 딸들이여... 이 부분은 바꾸자."

이런 식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아린이 가슴 아픈 표정을 지었다. 악성의 역작이, 인류의 보물이 처참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전인류의 화합을 노래하는 가사가 한낱 용비어천가로 탈바꿈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창공은 신나게 깃펜을 놀렸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는 양피지를 들고 최종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당연히 원본에 비하면 하찮은 누더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지금 상황에선 이게 올바른 가사다. 창공은 그렇게 믿었다.

"베토벤이 알면 우릴 죽일 거예요..."

풀이 죽은 아린의 목소리. 그와는 반대로 어딘지 모르게 신이 난 창공의 목소리.

"여기까지 와서 죽일 수 있으면 인정한다고 전해."

* * *

카벨 자작은 바쁜 와중에도 꽤나 열성적으로 창공과 아린의 청원을 처리한 모양이었다. 그는 왕성 안에 있는 홀 중 하나를 지정해 창공더러 마음껏 사용하라고 허가를 내주었다. 바로 다음 날부터 말이다.

그뿐인가. 룬덴 대교구에 연통을 넣어서 무려 성가대 200명을 섭외하는 기염을 토했다. 귀족의 자제도 몇 있었지만 대부분은 생업이 있는 평민들이었는데, 재무 대신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진 몰라도 합창 연습으로 인한 손해는 왕실에서 보전하기로 합의를 본 모양이었다.

성비는 딱 1 대 1. 창공과 아린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성가대와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 어떤 일로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설명했다. 대관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이라 열변을 토하니 다행히 열심히 연습하겠다는 다짐을 얻어낼 수 있었다.

"자, 그럼 먼저 성부별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여성분들 중에서 소프라노 손 들어주세요."

그러나 성가대는 창공의 말에도 멀뚱멀뚱 그를 쳐다볼 뿐, 손을 들거나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제서야 창공은 자신이 멍청한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악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세상인데 성부가 뭔진 알겠는가.

게다가 이들은 근본적으로 성가대다. 찬송가를 부르는데 각 성부별로 나누어야 할 실익이 없었다. 해봤자 남자 여자 정도의 구분일까.

하나 합창 교향곡을 제대로 부르기 위해선 반드시 성부를 나누어야 했다. 여자는 소프라노와 알토. 남자는 테너와 베이스. 거기에 독창도 한 명씩 뽑아야 하고. 창공은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에 한 손을 올리며 다른 지시를 내렸다.

"다르게 해 보겠습니다. 나는 여자들 중에서도 목소리가 높은 편이다, 하시는 분은 왼편으로 서시고, 낮은 편인 분들은 오른 편으로 서시고,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하시는 분은 저희 앞으로 나오시면 됩니다."

주먹구구식이긴 했지만 적어도 이곳 사람들이 알아듣긴 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목소리의 높낮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은근히 많았고, 여자 100명 중에서 50명이 조금 넘는 인원이 창공과 아린의 앞에 섰다.

"아린아. 너 절대음감이라며?"

"네,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녀는 한 사람씩 노래를 부르게 해서 소프라노와 알토를 갈랐다. 그 사이 창공은 남자 성가대를 테너와 베이스로 구분했고, 결정하지 못한 이들은 다시 아린에 의해 구별됐다. 이렇게 4성부가 갈리게 되었다.

"지금 위치 잘 기억해 두시길 바랍니다. 무슨 역할인지 까먹으면 안 되고요. 다음으로 독창자를 뽑겠습니다. 독창이 뭔진 다들 아시죠? ...네, 좋습니다. 노래에 특히 자신 있는 분, 많은 사람 앞에서도 떨지 않고 노래하실 수 있는 분. 각 성부별로 한 분씩 나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창공은 독창자를 뽑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지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대관식 행사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이 아닌가. 특히 베이스 독창은 합창 파트의 맨 첫머리를 홀로 장식해야 했기에 상당한 부담을 져야 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지원자가 다수 있어 골라내는 절차가 필요했다. 대관식에서 홀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을 명예로 삼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200명 중에 7명뿐인 귀족의 자제들이 전부 앞으로 나와 자신을 뽑아줄 것을 간청했다. 이들을 선별하는 것도 아린의 몫이었다.

그렇게 성부를 나누고, 독창자를 뽑는 것에만 1시간이 넘게 소요됐다. 다음으로 노래를 가르칠 시간이었다. 여기서부터가 진짜 문제인 것이, 이들은 단 한 번도 합창 교향곡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당신들이 불러야 할 노래는 바로 이런 것이다, 하고 데모를 들려줄 필요가 있었다.

어쩌겠는가. 아린이 연주를 하니, 노래는 창공의 몫이었다. 천만다행으로 그의 노래 솜씨는 썩 들어줄 만한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실력이야 어쨌건 창공이 그런 식으로 노래를 부른다는 건 꽤나 웃긴 일이었기에, 아린은 웃음을 참아가며 연주를 해야 했다.

전부 들려준 것은 아니었고, 그는 행진곡 풍의 변주가 나오기 전까지만 노래를 불렀다. 다행히 합창단의 반응은 괜찮았다.

"그러면 제가 아까 말씀드린 순서대로 한 번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린아."

그녀는 성악부가 시작되기 전, 4악장 첫 부분의 몰아치는 듯한 음을 연주했다. 창공이 타이밍에 맞춰 화살을 깎아 만든 지휘봉으로 베이스 독창을 가리켰다.

[오, 벗들이여! 이 소리가 아니오!]

'좋아.'

약간 떨림이 느껴지긴 했지만 괜찮았다. 그 뒤로 환희의 송가 주제부까지 이어서 부르고, 이것을 받아 소프라노를 제외한 성부가 합창을 했다. 한 번만 들었던 데다 가사를 적은 종이를 아직 배포하지 않았기에 창공은 가사를 모르겠거든 허밍으로 음만 내라 지시했고, 합창단은 그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왕의 뒤에 서신다! 왕의 뒤에 서신다! 왕의 뒤에!]

이 부분에선 원래 알토 합창이 한 박자 일찍 들어가야 했지만, 처음 하는 것이었기에 그나 아린이나 별말은 없었다. 어쨌든 이것으로 그들이 가르친 부분이 끝났다. 창공이 박수를 쳤다.

"잘하셨습니다! 처음인데 훌륭합니다!"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좆됐네... 이걸 언제 다 가르치지.'

* * *

한편, 다른 일행들도 연주회가 계획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창공과 아린이 그들에게 통보한 덕이었다. 물론 그들도 돕고는 싶었지만 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재주도 없고, 그렇다고 노래를 부르자니 독창을 맡길 정도의 실력은 아닌 탓이다.

만약 그들이 들어온다면 무조건 독창을 맡아야 했다. 합창 쪽엔 끼어 봤자 들러리가 될 뿐, 그 이미지가 강렬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독창에 끼워 넣자니 거긴 연주회 자체의 성패가 달린 자리라 부담스러웠다.

결국 애매하게 가느니 확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겠다는 창공의 생각에 따라 나유와 어택, 히사시는 공연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아주 잘못된 생각은 아니었다. 아린의 마력을 담은 연주와 창공이 지휘하는 모습. 이 두 가지만 제대로 챙긴 상태에서 연주회가 성공한다면 노리는 바는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점을 들어 일행에게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 말라 설명했고, 어택과 히사시는 충분히 납득했다. 기실 그들은 노래에 재주가 없기도 했다.

하나 나유는 불안하고 초조했다. 하필 아린이었다. 그녀가 창공과 함께 중요한 일을 한다. 그 점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단둘! 단둘이서!

만약에 이번 연주회가 성공한다면, 그렇다면 창공은 아린의 가치를 더 높게 볼 터였다. 두 사람의 사이도 보다 친밀해지리라.

'이러고만 있으면 안 돼.'

섹스로는 부족했다. 그에게 어필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녀가 몸 말고 가진 게 뭐가 있던가?

'딱 하나.'

그녀는 무언가를 결심하고 결연히 일어나 자신의 검을 잡고 왕성 내부 근위대 병영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입구에서 보초를 서던 근위대원이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분명 왕자 전하의 손님이셨지요. 어떻게 오셨습니까?"

"검 좀 배우러 왔는데요!"

씩씩한 목소리. 해맑은 미소.

그러나 그 눈동자는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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