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54화 (54/178)

〈 54화 〉 아스터 퐁파두르 외전 ­ 하늘의 소리

* * *

푸아송 남작령은 리들라퀴탄 공작령의 수도이자 저희 자랑스러운 아퀴탄의 수도인 뤼테스 옆에 붙어 있는 작고 평화로운 곳이에요.

봄에는 아리그녜 강가에 개나리가 아름답게 만발하고, 여름에는 하이얀 백합이 집집 화단마다 피어 길거리를 장식하죠.

가을이면 지평선 너머까지 끝없이 펼쳐진 밀밭은 황금색으로 물들고, 겨울에는 하늘에서 눈송이가 펑펑 쏟아져 온 세상을 정적으로 뒤덮는답니다.

그리고 영주님의 성 앞 대로변에, 푸아송 영지의 주민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커다란 잡화점이 하나 있어요. '퐁파두르 잡화점'. 아이들 장난감부터 내력을 알 수 없는 수상쩍은 골동품까지. 돼지가죽으로 만든 신발부터 남대륙의 비단으로 만든 모자까지 전부 취급하죠.

사람들 말로는 뤼테스에서도 이만큼 큰 가게는 찾아보기 어려울 거랬어요. 네. 바로 저희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잡화점이에요. 누구에게나 친절하시고 자상하신 부모님. 언니와 저는 그런 두 분 밑에서 태어났어요.

언니의 이름은 륀 퐁파두르. 제 이름은 아스터 퐁파두르. 아퀴탄어를 모르시는 분들께 말씀드리자면, 륀은 달. 아스터는 별이라는 뜻이랍니다. 쌍둥이 자매로 태어난 저희가 서로 떨어지지 말고 사이좋게 살아가라는 뜻으로 그렇게 지었대요.

어두컴컴한 밤에 하늘에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달과 별. 저는 제 이름이 마음에 들어요. 제가 별인 것도, 언니가 달인 것도. 둘 중 하나가 달을 맡아야 한다면, 저는 언니가 달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언니는 항상 저보다 앞서나갔으니까요. 쌍둥이로 태어났는데도 저보다 머리도 좋고, 뜀박질도 잘하고... 항상 저보다 나았어요.

그래서였을까요. 자신감이 넘치는 륀 언니는 제가 가진 게 있으면 자기도 가지길 원했어요. 제가 부모님께 옷을 선물받으면, 언니는 제게 달라고 요청했어요. 거절하면 빼앗겼죠. 어린 마음에 '언니 나빠!'라며 울기도 했지만, 몇 번 그런 일이 있고 나서부턴 부모님이 저희 자매에게 같은 것을 하나씩 사주셨어요. 그다음부턴 괜찮았죠.

이렇게만 말하면 륀 언니가 나쁘게 보이겠네요. 그렇지만 언니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랍니다. 제가 동네 아이들과 놀다 싸움이 붙어서 울기라도 하면,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바람처럼 언니가 나타나 아이들을 혼내고 저를 달래주었어요.

언니는 착해요. 저는 언니를 소중한 가족으로 생각하고, 언니도 말은 한 했지만 저를 소중한 동생으로 여기고 있을 거예요. 달과 별은 절대 떨어질 수 없으니까요. 하늘 위에서 영원히 같이 있는 존재니까요.

...그렇게 생각했었죠.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있을 거라고. 부모님에게서 잡화점을 물려받고, 우리의 세상이 끝날 때까지 푸아송 남작령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그 믿음이 깨졌던 건 언니와 제가 겨우 8살이던 때였어요. 바깥에 홀로 나갔던 언니는 처음 보는 할아버지와 함께 집에 들어왔죠.

"안녕하시오. 당신들이 이 아이의 부모 되는 사람인지?"

부모님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셨어요.

"마담, 무슈. 무례를 용서하시오. 갑작스럽겠지만, 나 웨리에서 마법 이론 정교수로 있는 귀스타브 몽그리브요."

저는 깜짝 놀랐어요. 웨리.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옛날이야기에서 나오는 마법의 도시. 하늘을 날아다니고, 손에서 불길을 뿜어낸다는 신비로운 마법사들이 사는 곳. 평생 저 같은 평범한 아이와는 관련 없을 거라고 생각한 곳.

그때 당시 저는 교수가 뭔진 몰랐지만, 무슈 몽그리브께서 마법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죠. 마법사가 우리 집에 오다니, 꿈만 같으면서도 어쩐지 신이 났어요. 하지만 제 들뜬 기분은 곧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죠.

"륀을... 데려가시겠다고요?"

"그렇소, 마담. 마담께서도 우리 마법사들이 어떻게 제자를 뽑는진 익히 들어 알고 계실 것이오."

"그건 그냥 소문이었던 게..."

"소문이 아니오. 본인은 이제까지 네 명의 아이를 뽑아 생도 과정에 입교시켰지만, 오늘 본 이 아이만큼 재능이 뛰어난 아이는 보지 못했더랬소. 꼬마 마드모아젤과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으니, 이제 남은 것은 마담과 무슈의 허락뿐이요."

"너무 갑작스럽군요."

"이해하오."

이게 무슨 일일까요? 언니를 데려간다니... 웨리로 언니를 데려간다니요. 언니도 마법사가 된단 뜻일까요. 언니도 그걸 바랬다는 것 같았어요. 기쁘고 신기한 일이지만, 어쩐지 울음이 터졌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절 달래셨죠. 지금 돌이켜 보면 언니와 헤어지게 된다는 그 사실 때문에 너무나 슬퍼졌던 거라고 생각해요.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우는 일밖엔 없었어요.

왜냐면 뭔가를 결심한 언니는 절대 무르지 않았거든요. 부모님도 언니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어요. 결국... 륀 언니의 마탑행이 결정됐어요.

"교수님. 륀은 집에 올 수는 있는 겁니까?"

"생도 과정을 밟는 중엔 1년에 한 번씩은 집에 보내도록 하고 있소. 그러나 한 번 웨리에 소속이 된다면, 마음대로 바깥출입을 할 수 있는 방법은 교수가 되는 것밖엔 없지. 생도가 중간에 포기한다면 평생 웨리에서 일하는 일꾼이 될 것이고, 수료를 하고 마법사로 인정받더라도 교수가 되기 전엔 함부로 바깥에 나가기 어려울 것이오."

무슈 몽그리브는 아버지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하고선, 이틀 뒤 아침에 언니를 데리러 오겠다며 집을 나가셨어요.

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정신을 차려 보니, 전 저희 쌍둥이가 쓰는 방의 침대에 누워있었어요. 그때도 계속 제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죠.

"아스터."

등 뒤에서 륀 언니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저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온기도 느껴졌어요.

"걱정하지 마. 나 꼭 교수가 될 테니까."

"...정말?"

"당연하지. 너 나 몰라? 내가 노력하면 그 정돈 아무것도 아니야. 뭐... 해 본 적은 없지만."

"나... 나 여기서 언니를 기다릴게. 언니가 언제 찾아와도 볼 수 있도록."

"바보야, 넌 언제까지 이런 시골에 있을래? 좀 세상을 넓게 봐. 이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 같은 평민이라고 해서 평생 한곳에서 살라는 법 있어?"

"그래도..."

"아스터. 넌 내 동생이야.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너도 꽤나 머리 좋단 말야. 물론 나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잡화점이나 하기에는 아까운 머리라구. 내 말 잘 생각해 봐."

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걱정하지 마, 아스터. 네가 이 세상 끝에 있어도, 내가 널 찾으러 갈 거니까. 우린 저 검푸르고 깊은 창공 위에 뜬 달과 별이야. 그 누구도 우릴 갈라놓을 수 없어. 그렇지?"

"응...!"

그날 밤 저는 언니의 품에 안겨서 향기를 맡으며 꿈을 꿨어요. 밤하늘 위에서 언니와 제가 만나 빛을 내며 춤을 추는 꿈을요.

이틀 뒤 아침, 무슈 몽그리브는 약속대로 제시간에 언니를 데리러 왔어요. 저희 가족은 웃는 얼굴로 륀 언니를 보냈답니다. 떠나는 사람에게 울상을 보여 줄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언니와 함께 쓰던 우리의 방으로 돌아오니, 그곳은 더 이상 제가 알던 공간이 아니었어요. 커다란 창문으로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모든 벽이 얼음으로 된 것처럼 싸늘했고, 언니와 함께 눕던 침대는 메마른 땅처럼 보였죠.

그렇게 전 내내 침대에 누워서 점점 희미해져가는 언니의 냄새를 맡으며 울었어요. 부모님께선 절 아주 많이 걱정하셨고, 그분들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언니의 빈자리는 너무나 컸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너무나 지쳐 눈물조차 나오지 않던 날이었죠.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제 귀에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니겠어요?

데엥­ 데엥­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지금에 와선 수없이 많이 들은 소리지만, 사실 아직까지도 그 느낌을 뭐라고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따뜻한 손길과도 같은 소리. 지치고 갈라진 제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소리. 봄의 햇살과도 같은 소리. 한겨울의 눈처럼 깨끗한 소리.

그 종소리는 어떤 계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그 종소리를 듣고 마치 홀린 듯이 집 밖으로 나가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걸었어요. 제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푸아송 성당이었죠.

분명 종은 계속 울렸을 테니, 그날이 오기 전에도 많이 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때 전 그 종소리가 마치 처음 듣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성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제대 앞에 한 사제분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맞잡은 채 기도하고 계셨죠.

성당에 난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그분을 비추고 있었어요. 머리 위에선 종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고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 제 눈에서 눈물이 펑펑 흘렀어요. 그건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답니다.

감동과 기쁨. 두 가지의 마음이 제 가슴을 가득 채웠어요. 어느샌가 저도 사제님의 곁에서 무릎을 꿇고 똑같은 자세로 기도를 했죠.

"우리 꼬마 마드모아젤. 성당에 잘 왔어요."

기도를 끝내신 사제님은 저를 발견하시고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어요.

"주님께 어떤 기도를 올렸나요?"

"언니와 무사히 만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저런, 언니와 떨어지게 되었나요?"

"네."

사제님께선 제 등을 쓰다듬으시며 저 높은 곳에 걸린 교단의 상징을 가리키셨어요.

"주님께선 간절히 기도한다면 들어주신답니다. 자, 우리 같이 기도하도록 해요."

그렇게 사제님과 저는 다시 기도를 시작했어요.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죠. 다시 언니와 만나게 해 달라고. 매일 와서 기도할 테니, 언니가 무사히 교수가 되게 해 달라고.

내리쬐는 햇볕이 제 몸을 감싸고, 가슴을 데웠어요. 순간 따뜻한 무언가가 제 가슴에서 손으로 흐르는 느낌이 들고, 닫힌 눈꺼풀 너머로 빛이 느껴졌어요.

"오오... 이건..."

같이 기도하던 사제님이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어요. 저도 눈을 뜨니, 제 손이 하얀 빛에 감싸여 있었어요. 그때까지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었기에 놀란 마음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죠.

"부모님 좀 모셔올래요?"

사제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저를 꼭 안아주셨어요. 영문도 모른 채 부모님과 함께 성당으로 가니, 그분께선 이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자제분이 성직의 재능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보잘것없는 주님의 종으로서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이에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마드모아젤 퐁파두르가 성직자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부모님께선 적잖이 당황하셨어요. 당연해요. 언니를 웨리로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저도 집에서 떠나게 생겼으니까요. 하지만 저희 부모님께선 '안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대신, 이런 대답을 하셨죠.

"사제님. 저희 의사보단, 아스터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아스터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세 분의 시선이 저에게 몰렸어요. 제 인생을 결정할 중요한 선택을, 겨우 8살의 어린 나이에 하게 된 거예요. 그치만 그건 제 언니도 마찬가지였던 게 아니겠어요? 아스터는 나약하지만, 륀의 동생 아스터는 강해요.

"하고 싶어요."

그게 제 대답이었어요. 잡화점을 물려받는 대신 사제가 되기로 한 거예요. 언니와 다시 만나는 날, 교수가 된 언니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부모님께선 저를 제대로 지원하기로 결정하셨어요. 어차피 언니는 마탑으로 떠나 연락이 끊겼으니 무언가를 해 주려 해도 불가능했거든요. 퐁파두르 잡화점은 뤼테스 대교구에 막대한 성금을 기부했고, 저는 최고의 교육을 받기로 결정되었죠.

아퀴탄과 멀리 떨어진 곳. 교황 성하가 계시는 라티움 섬에서요. 저는 언니와 헤어졌을 때처럼 웃으며 부모님과 작별 인사를 했어요. 사제가 되기 전에 집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중도 포기밖엔 없었어요. 그러나 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 다짐했죠.

라티움에서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어요. 자유분방한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헤어지고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통제된 삶을 살아야 했으니까요.

기상 시간은 새벽 5시 30분. 일어나서 침구를 정리하고, 간단히 세안을 해요. 그다음 복장을 차려입고 6시부터 30분 동안 새벽 기도를 하고, 기도가 끝나면 또 30분 동안 묵상을 해요.

7시부터 8시까진 아침 공부를 하며 밥을 먹으러 갈 준비를 하는데, 식사가 시작되는 8시 전까진 입을 열어선 안 돼요. 바로 저녁 8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대침묵 시간이 있기 때문이죠. 대침묵 중에는 혼잣말조차 허용되지 않아요.

대침묵을 제외한 시간에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소침묵을 유지해야 해요. 소침묵 시간에는 묵묵부답이 될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필요한 말만 입 밖으로 꺼내야 한답니다.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게 그렇게 힘든 줄은 그때 처음 알았어요.

아침을 먹은 다음엔 라티움 신학대학에서 수업을 받아요. 1학년부터 10학년까지 있는데, 29세 이하의 자격자라면 사제 양성 과정을 밟을 수 있어요. 다만 하한선은 정해져있지 않았는데, 그런 와중에도 제가 가장 어렸답니다.

그 때문인지 동기분들께선 저를 많이 챙겨주셨어요.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죠. 덕분에 힘든 신학생 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어요. 그분들께 영원한 주님의 축복이 있길.

공부와 기도, 식사와 잠만을 반복하는 삶. 재미없는 삶일까요. 전 그렇게 느끼지 않았어요. 소명이 있는 삶은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행복할 수 있답니다.

저의 소명은 사랑이었어요. 가장 먼저 주님에 대한 사랑. 부모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언니에 대한 사랑. 물론 주변인들에 대한 사랑도 있었고요. 그 사랑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그 생각이 저를 이끌었어요.

4학년을 마치고 하얀 수단을 입는 착의식을 했고.

5학년을 마치고 독서직을 받고.

6학년을 마치고 시종직을 받고.

8학년을 마치고 부제서품을 받았어요.

그리고 10학년을 마치고 신학대학을 졸업한 그날, 사제서품식이 열렸죠. 단 위에 교황 성하와 추기경 전하들께서 시립하시고, 단 밑에는 하얀 비단 천이 깔렸어요. 저와 제 동기들은 그 위에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어요.

"...이 부제들이 사제품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합니까?"

"사제품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저희들은 바닥에 엎드렸어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저희를 위하여 자비를 베푸소서.]

성가대와 그 자리에 계신 모든 사제님들이 자비송을 부르기 시작하셨어요. 바닥에 엎드린 저도 속으로 따라 부르며 주님께 기도를 드렸어요.

엎드렸을 때는 인간 아스터 퐁파두르로 엎드렸지만, 일어설 때는 사제 아스터 퐁파두르로 일어서는 의식. 저는 그렇게 18살의 나이로 교황 성하께 직접 사제서품을 받았어요.

* * *

"음. 그런가. 수고했네."

룬덴 대성당. 울지 추기경 전하께서 제 보고를 받으시고 고생했다며 제 어깨를 두드려 주셨어요.

"아닙니다. 한 명도 구하지 못해 부끄럽고 죄송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저는 고개를 푹 숙였어요. 죄인에 불과한 몸이었으니까요. 트리스카에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는데 어떻게 고생을 했다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지 말게. 남대륙이 아닌가. 인간의 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부디 주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셨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네."

"예... 부디 주님께서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길."

제 풀 죽은 모습을 본 전하께선 감사하게도 직접 차를 타서 주셨어요. 설탕이 들어갔는지 달콤한 홍차였죠.

"마시고 기운을 차리게. 그리고 이곳에서 편히 쉬게나. 사람들에겐 내가 말해놓을 테니."

"복음화성에 보고는..."

"이미 우리 교구에 보고하지 않았는가. 성하께 올리는 정기 보고 때 자네의 것도 같이 올리도록 하겠네. 그리고 마침 잘 되었어. 곧 이곳 룬덴에서 대관식이 열린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아, 네. 오다가 들었습니다."

"알펜시아 왕실에선 라티움에 사절을 보냈다 하네. 곧 성하의 전권 대리를 맡은 추기경이 당도하겠지. 어떤가? 푹 쉬며 여독을 푼 다음 나와 함께 대관식에 참여하지 않겠는가?"

참으로 감사한 말씀이었어요. 왕의 왕관은 주님을 대리하는 사제가 씌우는 것. 주님의 영광을 다시금 만인 앞에서 확인하는 자리가 바로 대관식이에요. 물론 저는 일개 사제에 불과하니 단순 수행직을 맡겠지만 그럼에도 영광스러운 제안이 아닐 수 없죠.

"네! 영광입니다. 열심히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열심히 준비하기 전에, 열심히 휴식을 취하도록 하게."

그 뒤로 저는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기 위해 대관식 날까지 성당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륀 언니가 성당 밖에서 제가 나오길 기다리며 한참을 서있었다고 해요.

어쩔 수 없죠. 마법사인 언니는 성당의 문을 두드릴 수 없으니까요. 성직자와 대화를 나누어서도 안 되고요. 교단과 마탑은 상호 절대 불가침을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그럼 저와도 대화를 나누어서도 안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네요. 원칙적으로는 그렇죠. 하지만 괜찮아요. 저와 언니의 대화는 사제와 마법사 간의 대화가 아니라, 가족 간의 대화니까요.

원래 교리라는 건 해석하기 나름이랍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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