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Cloud 9 (2)
* * *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룬덴을 뒤덮었다. 그것은 뜨거운 열기였으며, 무언가에 대한 설렘이었고, 날카로운 긴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은 곧 있을 국가적인 행사를 향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왕자의 대관식.
반란을 진압했으나 결국 상처가 악화되어 붕어하게 된 선왕. 그 뒤로 공석이던 알펜시아의 왕좌에 드디어 그 주인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대관식은 전통에 따라 룬덴 대성당과 그 앞에 있는 거대한 광장인 성 도미닉 광장에서 열리게 되었다.
왕성에서 룬덴 대성당까지는 대로를 따라 마차를 타고 달리면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대로를 구름처럼 몰려든 룬덴의 시민들이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 그들을 통제하는 근위대와 룬덴 수비대원들은 실로 죽을 맛이었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자꾸만 까닭 모를 웃음이 나왔다.
반란이 진압되고 일시 평화가 찾아왔지만, 그 속에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와 불안이 잠자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알펜시아의 신민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 불안의 매듭들 중 첫 번째 매듭이 드디어 풀리게 되는 것이다. 에드워드 왕자의 즉위. 자국과, 타국과, 교단이 인정하는 정통성 있는 군주의 탄생. 군주제 국가에서 합당한 군주의 탄생은 너무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왕이 탄생한다고 해서 국가의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에드워드 왕자는 어렸으며, 미래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모인 이들 모두가 오늘만큼은 마음껏 기뻐하고 싶어 했다.
"아, 열렸다!"
왕성 앞에 장사진을 치고 있던 무리 중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과연 그의 말대로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육중한 철문이 열리고, 대관식장으로 향하는 행렬의 선두가 모습을 드러냈다. 민중의 환호와 함께 그 앞길에 뿌려지는 꽃들.
길은 더 이상 돌과 흙으로 포장되어 있지 않았다. 향기를 뿜어대는 축복과 기대로 룬덴의 대로는 새로이 포장되었으며, 사람과 마차는 그 위를 달렸다. 행렬의 선두에는 근위대와 호위 병력들이 선도하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왕실의 각 부서를 대표하는 대신들이 탄 마차가, 그들 다음으로는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근위대장과 정예 기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크고 황금색으로 빛나는 마차를 보호하듯 에워싸고 있었다. 백마 여덟 필이 끄는 커다란 마차. 옆면에는 알펜시아의 왕실의 상징인 검과 화살이 교차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이 탄 마차였다.
신민들은 창 너머에서 손을 흔드는 왕자의 모습을 보고 열렬히 환호했다. 경호 문제도 있고 하니 마차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달렸으니 그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사람들은 웃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엄청나네요..."
히사시가 창밖을 빼꼼 바라보며 감탄했다. 창공 일행도 한 마차에 다 같이 타고 대관식장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옷차림은 평소와 달랐다. 위에는 붉은색 코트에 검은 조끼, 프릴이 잔뜩 달린 하얀 셔츠. 아래에는 역시 하얀 바지를 입고 멋진 부츠를 신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관생도들이 입는 예복과 비슷하게 생긴 옷이었다. 왕실에서 그들에게 맞춰 준 옷으로, 당연히 그들이 평소 입는 복장으로는 대관식에 참여할 수 없기에 이리 된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오늘 그들은 기사 작위를 서임 받기로 약속되어 있었고 말이다.
"..."
창공은 그러거나 말거나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머릿속으로 연주회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다시금 점검하는 것이다. 오늘은 알펜시아 왕실에 중요한 날이되, 그들에게도 중요한 날이었다. 실패는 용납될 수 없었다.
"근데 아깝네. 우리가 지구로 돌아가서 기사가 된 썰을 풀면 사람들이 믿어 줄까?"
나유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그다지 긴장조차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긴 냉정히 말해 긴장은 알펜시아 왕실 인사들과, 연주를 해야 하는 창공과 아린의 몫이었다. 나머지 셋은 그저 이 행사를 문화 체험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즐기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 뒤로도 그녀는 신이 난 듯 자꾸만 재잘거렸다. 무리도 아닌 것이 동화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 마음을 설레게 하지 않았던가. 왕족, 귀족, 궁전, 대관식, 기사... 그리고 오늘은 그 하이라이트. 기분이 들뜨는 게 당연했다.
"나유야."
"어...?"
하지만 연주회를 위해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던 창공에게 그녀의 행동은 다분히 거슬리는 데가 있었다. 신나게 떠들던 나유는 찌르듯이 들려온 창공의 목소리에 얼어붙었다.
"나 집중하고 있잖아. 안 보여?"
"아, 어... 그게."
"그만해."
그는 나유를 쏘아붙이고선 다시 눈을 감았다. 점점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던 마차 안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히사시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어택과 아린은 조심스레 일행들의 안색을 살핀다.
나유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입고 있는 코트 자락을 두 손으로 꽉 말아 쥐었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듯 눈동자가 떨리고, 입술이 쉴 새 없이 달싹이며 말이 되지 못한 숨을 내뱉는다.
아린은 내심 나유를 위로하고 싶었다. 창공이 잠시 집중할 테니까 일행들더러 조용히 해달라 요청했으면 모르되, 그런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나유에게 어떤 악의가 없었음은 자명하지 않았는가. 그녀로선 상당히 억울할 법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과 나유의 애매모호한 관계를 고려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나유를 위로하면, 그것이 마치 어떠한 위선처럼 보일까 두려워 함부로 그녀의 손을 잡아주거나, 눈을 마주치며 격려하는 간단한 행동조차 불가능했다.
어쨌거나 마차 안과는 반대로 바깥의 공기는 여전히 뜨거웠고, 대성당까지의 이동은 순조로웠다. 왕자가 탄 마차는 성당 안까지 들어가고, 나머지 마차들은 성당 앞의 성 도미닉 광장에서 정차했다.
마부가 열어주는 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가니 옅게 깔린 구름 너머로 햇빛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대관식이고 하니 날이 화창했더라면 더 좋았을 테지만 룬덴에서 파란 하늘이 보일 정도로 맑은 날은 드물었고, 오히려 다들 두껍고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형편이니 이런 날씨가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성 도미닉 광장은 그 넓이가 상당했으며, 커다란 성당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과 매우 흡사했다. 다만 오벨리스크나 분수대, 회랑 같은 구조물은 당연하게도 없었다.
광장 중앙부에는 여러 층을 된 커다란 연단이 설치되어 있었고 화려하게 치장된 의자 여러 개가 놓여있었다. 물론 가장 화려한 의자는 맨 윗단 가운데에 위치한 황금색 의자였다. 왕이 앉을 곳이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연단과 비슷하게 생긴, 그러나 조금 투박한 무대가 보였다. 역사가 일어날 곳이다.
창공 일행은 그곳을 한 번 둘러보고선 행렬을 따라 성당 안으로 향했다. 안쪽은 약간 어둑했는데, 그 덕분인지 높은 곳에 난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줄기가 더욱 돋보였다. 그러나 아주 어둡지는 않고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사람 얼굴을 충분히 분간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아주 어둡다 해도 별 상관은 없어 보였다. 어차피 성당 안은 사람들로 꽉 들어차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오직 정해진 자리에서 대관식을 지켜보면 그만이었다.
일행의 옆에는 주로 북대륙의 국가에서 보낸 외교 사절들과 근위대가 위치했다. 남대륙에서 온 사절들은 저 반대편에 모여 있었는데, 이는 카벨 자작의 배려였다. 에트로지에 대한 남대륙 국가들의 시선은 그도 익히 알고 있었으니.
자작의 배려는 창공 일행에게도 아주 유용했다. 혹시나 트리스카의 사절과 마주치게 되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지 않겠는가. 어쨌거나 성당 안에 모인 이들은 모두 중앙에 설치된 제대를 둘러싸고 기립하는 중이었다.
제대 위에는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검, 셉터, 보주, 그리고 왕관. 반짝이는 그것들은 얌전히 주인을 기다렸다.
또각. 또각. 또각.
여럿이 내는 발소리가 저편에서 들려왔다. 하얀 수단을 차려입은 사제단의 등장이었다. 지구의 신부들은 교황을 제외하고 하얀 수단을 입을 수 없으나, 이쪽 세상의 사제들은 전부 수단의 색상이 하얀색을 띄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위계를 구분할까. 그들을 유심히 관찰하던 창공은 목 부분을 보고서 그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로만 칼라. 목깃의 색깔이 다들 달랐던 것이다. 물론 다이셀리시아엔 로마가 없으니 이름은 로만 칼라가 아니겠지만 말이다.
평사제인 아스터의 칼라는 금색이었다. 그런데 사제단의 선두에 선 두 사제들의 칼라 색깔은 파란색이었다. 그렇다면 저들이 바로 추기경이 아닐까. 교황은 오지 않았을 테니 금색과 파란색을 제외한 색깔이 바로 주교의 색깔이리라.
"어... 창공아."
그의 옆에 서있던 어택이 작게 속삭였다.
"저쪽에. 아스터 씨 아니야?"
"...정말이네. 하. 우연도 이런 우연이."
과연 어택의 말대로 사제들 사이에서 그가 익히 아는 얼굴이 보였다. 약곱슬의 탐스러운 금발. 맑은 하늘의 색깔을 추출해 칠한 것 같은 눈동자. 입고 있는 옷만큼이나 빛나는 하얀 피부.
웃음기 은은하던 그때와는 달리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긴 했지만 틀림없이 아스터 퐁파두르 그녀였다. 다른 일행들도 그녀를 알아차린 듯 까치발을 들어 그녀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당연하게도 손을 들어 흔들거나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기사 서임을 받으러 왕의 앞에 나서는 순간 그녀도 그들을 알아채리라.
'그럼 그건 됐고... 검은 칼라를 한 사람들이 1/3은 되는 것 같은데. 그럼 저 사람들이 주교인가. 거기에 추기경 둘. 나머지는 전부 평사제.'
창공은 그렇게 사제단의 구성을 대강 파악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주인공이 등장할 차례였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왕자 전하의 등장이오!"
근위기사가 저편에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고, 화려하기 짝이 없는 예복을 갖춰 입은 에드워드 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로 여러 대신들이 왕자를 수행했다. 그 모습을 보니 이제야 좀 왕좌의 상속자 다운 태가 엿보였다.
본디 알펜시아의 대관식은 간소하게 치러지는 것이 전통이고, 이번에도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 간소한 대관식은 어떤 대관식일까. 자작의 말에 따르면 채 15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라 했다.
왕자는 제대를 사이에 두고 사제단과 마주했다. 그의 뒤를 따라온 대신들은 마치 날개가 펴지듯 좌우로 갈라져 왕자의 뒤편에서 시립했다. 그리고, 카벨 자작이 제단의 옆에 서서 왕자를 바라보고 두루마리를 펼쳐들었다. 이 또한 전례 대신인 그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에드워드 왕자 전하. 당신께서는 선왕의 유일한 적장자이시며, 알펜시아의 왕위를 계승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정정당당한 상속자 이심을 이 자리에 있는 대소신료들, 각국의 사절들, 그리고 하늘에서 지켜보시는 주님이 보증하나이다."
왕자 이하 신하들의 표정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추하게 벌벌 떨거나 땀으로 온몸을 적시는 이는 없었다. 왕자에게는 인생에 한 번이고, 나머지 이들에겐 몇 번이나 있을지 모르는 중요한 자리에서 그런 추태를 보일 수 있겠는가.
"이에 전 알펜시아의 신민들을 대표하여 묻겠나이다. 전하께서는 자랑스러운 선왕들이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통치를 할 준비가 되셨나이까?"
"준비되었소."
왕자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 순간 그는 열네 살의 어리고 철없는 왕자가 아닌, 당당한 계승자였다.
"전하께서는 길든 짧든 전하의 일생을 위대한 알펜시아를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셨나이까?"
"준비되었소."
"전하께서는 신앙과 평화의 수호자로서, 위로는 주님께 순종하며 아래로는 국가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매진할 준비가 되셨나이까?"
"준비되었소."
"마지막으로 묻겠나이다. 전하께서는 알펜시아의 왕관을 쓸 준비가 되셨나이까?"
"...준비되었소."
카벨 자작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선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혹여 에드워드 왕자 전하께서 알펜시아의 왕위를 계승하는 데 불만이 있는 분은, 지금 나와 그 이유를 말하시오!"
마치 기회를 준다는 투였지만, 그의 눈은 그런 자가 있거든 단칼에 베어 죽이겠다는 듯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자작뿐이 아니었다. 근위대도 마찬가지 눈빛으로 사위를 경계했다.
당연히 대관식에 참여까지 한 이상 이런 상황에서 반대를 외칠 자가 있을까. 이는 중요하지만 동시에 한없이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선대까진 말이다.
신하들과 근위대의 눈길은 주로 콘워스 변경백과 에일스 백작에게 머무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반대한다고 해서 대관식이 중단되지 않겠지만 목숨을 대가로 좋은 자리에 똥을 뿌리는 미친 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경계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 둘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작게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왕자 전하. 저희에게 왕의 이름을 가르쳐 주소서! 어떤 이름을 택하셨나이까?"
"여는 앞으로..."
왕자의 이름은 에드워드였지만 그게 그가 왕이 된 뒤에도 반드시 에드워드 왕으로 불러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물론 왕자 시절의 이름을 쓰는 왕도 많았지만 존경하는 선왕이나 어떤 의미를 가진 이름을 쓰는 왕도 많았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바로 이것이었다.
"알펜이라 불리게 될 것이오!"
이미 들어 알고 있는 관계자들과는 달리, 타국의 사절들은 당황한 티를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법했다. 알펜이라는 이름은 건국왕 알펜의 사후 약 2500년이 지나는 동안 그 어떤 왕도 쓰지 않았던 이름이었으니.
따라서 자신의 이름을 알펜이라 칭한 에드워드 왕자는 엄청난 각오를 했다는 뜻이었다. 과연 그는 어떤 심정으로, 무슨 의도로 그 이름을 택했을까. 하나 이곳은 질문이 허락된 자리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제부터 에드워드 왕자의 공식적인 이름은 알펜 2세가 된 것이다.
"왕이시여, 왕관을 쓰시오소서! 신이시여, 그에게 왕관을 씌워주소서!"
왕의 시선이 제대를 향했다. 그러자 목에 파란 칼라를 한 사제가 앞으로 나와 왕관을 집어 들었다. 이 사제가 바로 교황청에서 파견한 이레네오 추기경이었다. 그는 교황의 대리이자, 신의 대리였다.
거칠게 말해 지금까지의 절차는 모두 가짜에 불과했다. 이곳 다이셀리시아에서 계승자는 사제가 머리에 씌워주는 왕관을 써야만 비로소 왕위에 올랐다고 당당히 말하는 것이 가능했다.
"누가 이 왕관을 쓰려 하시오?"
이레네오 추기경이 왕관을 들고 알펜의 앞에 서서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두루마리를 든 카벨 자작이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알펜시아의 에코스 공이시며, 사우스섹스, 마운트베리, 에라히의 공작이시며, 룬덴, 올드포드, 샤플랜드, 에버생크, 모니버그의 백작이시며, 달트리, 알로아, 버엘의 남작이시며, 필라크 열도의 영주이시오!"
"너무 높으신 분이라 왕관을 씌우기엔 내 팔이 짧은 것 같소!"
첫 번째 거절. 이에 자작이 두 번째로 읊었다.
"신이시여! 그에게 왕관을 씌워주소서!"
"누가 이 왕관을 쓰려 하시오?"
"알펜 크리스티안 케이브 다네인! 가장 영광스러운 알펜시아 훈장의 군주이시며, 가장 거룩한 카르디 훈장의 군주이시며, 가장 존엄한 라트로크 훈장의 군주이시며, 성 메도티오 기사단의 명예 기사단장이시며, 성 아녜스 기사단의 명예 기사단장이시며, 에스브릿지 대학의 명예박사이시며, 라티움의 수호자이시오!"
"역시 너무 높으신 분이라 왕관을 씌우기엔 내 팔이 짧은 것 같소!"
두 번째 거절. 이제 마지막 문답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신이시여! 그에게 왕관을 씌워주소서!"
"누가 이 왕관을 쓰려 하시오?"
"알펜!"
자작은 두루마리를 접으며 주교를 바라보고선 작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한낱 모자란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이 왕관을 쓰도록 하시오."
알펜 왕이 무릎을 꿇고, 주교가 두 손으로 조심스레 왕관을 씌웠다. 그 어떠한 작위를 가졌어도, 그 어떠한 명예를 가졌어도 신의 앞에선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인간은 신의 위광에 힘입어 왕으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왕관을 쓴 왕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자 카벨 자작이 우렁차게 외치며 만세를 불렀다.
"신이시여, 왕을 보우하소서!"
"왕을 보우하소서!"
그 뒤로 사제단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그를 따라 같은 말을 외치며 만세를 했다. 그들의 축복을 듣는 왕의 모습은 아직까진 작아 보였으나, 이 뒤로 왕의 권위와 위엄을 쌓는 것은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다음!"
만세 삼창이 끝나고 자작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성 메도티오 기사단의 신입 기사들이 될 자들은, 이리 나와 서임을 받으시오!"
창공 일행의 차례였다. 사실 이는 알펜 왕에게 있어 엄청난 의미를 가지는 행위였다. 공식적으로 계승권자가 왕이 되는 순간은 사제가 왕관을 씌웠을 때. 따라서 왕은 자신의 첫 행보를 창공 일행의 기사 서임으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좌중의 시선과 의혹이 다섯에게 향했다. 알펜 왕의 첫 번째 공식적 행위가 기사 서임이라는 데에서 충격을 주었고, 그들이 듣도 보도 못한 에트로지라는 것에 충격은 배가 되었다.
'아...!'
그리고 이는 아스터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보다 열 배는 되는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앞길에 축복이 있길 빌며 떠나보낸 이방인들이 어찌 된 일인지 왕에게 직접 기사 작위를 수여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 그녀는 함부로 소리를 내거나 할 수는 없었다. 이게 무슨 영문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지만 뒷일로 미뤄야만 했다.
"나의 기사가 될 이들은 무릎을 꿇으라."
알펜 2세가 제대에서 검을 들어 가슴께 앞에서 똑바로 세웠다. 창공 일행은 그의 말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명예로운 성 메도티오 기사단의 기사가 될 이들이여, 알펜 2세의 기사가 될 이들이여. 그대들은 하늘에 계신 주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약자들을 돕고, 어려움에 빠진 이들을 보면 지나치지 않으며,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할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그대들은 이곳 알펜시아와 알펜시아의 왕인 짐에게 충성을 다하고, 그에 따르는 계약을 짐이 스스로 해지하거나 또는 계약이 더 이상 지켜질 수 없는 상황이 될 때까지,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해 기사로서의 의무를 이행할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진심이야 어쨌건 그들은 한목소리로 왕에게 대답했다. 알펜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가장 왼쪽에 있던 히사시부터 양 어깨, 머리를 칼의 면으로 톡, 두드렸다.
"짐 또한 그대들에게 맹세할 것이다. 짐은 그대들의 충성에 합당한 보상으로 답하며, 불충에도 합당한 응징으로 답할 것인즉, 그대들의 명예가 짐의 명예를 밝히도록 노력하라. 그리하면 짐의 명예로 그대들의 명예를 밝히겠노라. 계약의 증인은 하늘에 계시는 지엄하신 주님과, 자랑스러운 알펜시아의 신하들과, 덕망 높은 각국의 귀빈들이 될 것이니 실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다 약속된 행위였고, 왕과 창공 일행은 대본을 수행하는 배우들에 불과했다. 물론 국정이라는 게 그렇듯이, 상당한 의미가 있는 연극이었다.
"이제 그대들은 당당한 짐의, 알펜시아의, 성 메도티오 기사단의 기사로다. 그대들을 향한 도전은 짐에 대한 도전이 될 것이니, 알펜시아와 왕실의 이름이 그대들의 뒤에 있음을 항상 명심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창공이 대표로 대답했다. 이것이 알펜 왕이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제 참석자들이 광장으로 이동할 차례였다. 왕 이하 모든 이들이 걸음을 옮겨 성당을 나섰다. 그러나 단 두 명. 성당 안에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창공과 아린. 곧 이세계에 거대한 문화 충격을 전할 폭격기 조종사들이었다.
"옷은 가져왔지?"
"네. 갈아입기만 하면 돼요."
기사 서임을 위해 입은 예복이 화려하여 눈에 잘 띄긴 했지만, 빳빳하고 두꺼워서 격한 움직임을 하는 데엔 부담스러웠다. 지휘를 하는 창공은 시각적 효과를 위해 입기로 했지만 아무래도 악기를 연주하는 아린에겐 무리였다.
따라서 그녀는 원래 입고 다니던 블라우스와 검정 나팔바지로 갈아입고 연주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미 자작과는 다 이야기가 끝난 상황.
"등 돌리고 있을 테니까 갈아입어."
"여기서요?"
"아무도 없잖아. 빨리."
"...네."
그의 등 뒤에서 옷깃이 스치는 소리, 뭔가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야릇한 기분을 느낄 만도 했지만 지금 창공은 머릿속으로 음악과 지휘에 대한 최후의 검토를 하는 중이었기에 아린이 옷을 벗든 말든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물론 아린에겐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아무리 그래도 일단 속옷만 남겨두고 다 벗어야 하는 상황.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의 등 뒤에서.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귀에 피가 몰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뭉그적거리면 창공이 싫어할 것이 자명했다. 그녀는 예복을 벗을 때만큼이나 빠르게 원래 옷을 입었고, 준비했던 칼란드라를 챙겨들었다.
"나가요."
"좋아."
둘은 나란히 출구를 향해 걸었다. 옅은 긴장감이 온몸을 감쌌지만 둘 다 말을 꺼내는 일은 없었다.
광장은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어쩌다가 '국왕 폐하 만세!' 같은 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본격적인 움직임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신민들도 뭔가가 일어날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광장에 설치된 무대에는 자그마치 이백 명이나 되는 인원들이 간이 의자에 앉아있었으니까. 한껏 긴장한 표정의 합창단. 그들이 주는 알 수 없는 중압감이 광장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창공과 아린은 사람들 사이로 난 길을 가로질러 무대 위로 올라섰다. 창공은 포디움에, 아린은 포디움의 앞 그녀를 위해 마련된 의자 앞에 섰다.
"후..."
그는 한 번 한숨을 내쉰 다음, 합창단을 한 번 훑어봤다. 리허설에선 문제가 없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눈빛으로 전달했다. 다음으로 그의 눈은 아린을 향했다. 그녀는 칼란드라를 품에 끌어안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많이 긴장되는 것 같았다. 하긴 수많은 사람 앞에서 20분을 넘게 독주해야 하는데 긴장이 안 되고 배길까. 그러나 긴장이 풀릴 때까지 내내 기다릴 수는 없었다.
창공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아린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뒤돌아 청중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짝. 짝. 짝.
누군가 박수를 쳤고, 뒤따라 갈채 세례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창공은 굽혔던 허리를 펴고 다시 아린과 합창단 방향을 바라봤다. 눈을 감았다가 한 번 뜨니 긴장감이 서려있던 마음은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뒤였다.
지휘봉이 서서히 들리고, 아린이 활을 들어 현에 갖다 댔다.
그리고.
다이셀리시아에서의 역사적인 첫 교향곡 연주가 시작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