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Cloud 9 (3)
* * *
다이셀리시아에는 여러 악기가 함께 연주하는 합주 개념은 있으되, 그것은 같은 멜로디를 다른 악기로 함께 연주하는 것에 불과했다. 즉, 본격적인 다성음악이 태동하기 전이었다.
따라서 지휘자는 필요치 않았다. 같은 화음에 같은 멜로디를 다 함께 연주할 뿐이니, 서로 몇 번 맞추기만 하면 음악이 크게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합주자가 아무리 모여 봤자 정규 관현악단의 제1, 2 바이올린 연주자들의 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정도다.
기악뿐만 아니라 성악 부분도 마찬가지. 해 봤자 돌림노래가 난이도 높은 형식이라 평가받는 세상에선 합창에 대한 지휘의 필요성이 그다지 크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창공은 그 개념을 새로 선보이고 있었다. 화살대를 깎아 만든 지휘봉을 쓰면서. 본래 지구에서도 초기 지휘자들이 막대기를 바닥에 두드리며 지휘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처음부터 꽤나 혁명적인 문화 전파가 이루어지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그럴듯한 지휘를 한다 해도 결국 기악을 담당하는 사람은 아린 한 명뿐이었다. 멋들어지게 지휘봉을 휘저은들 악기 한 대의 소리가 전부라면 경우에 따라선 꽤나 민망할 수도 있으리라.
바로 여기에서, 아린은 창공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창공이 지휘봉을 머리 높이까지 들더니 아래로 휙, 긋는다. 동시에 활이 현을 긁고, 떨리는 현은 소리를 내뿜었다. 파랗게 비산하는 미세한 입자들과 함께.
칼란드라 한 대에서 나온다곤 믿을 수 없는 풍부한 음량이었다. 마나 연주의 첫 번째 기예인 음량 증폭. 멜로디 자체는 단순했다. 보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처음에는 칼란드라 한 대로 낼 수 있는 화음만 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단순한 음률이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처음엔 급하고 불안정한 음으로 강하게 때리며 막을 열더니, 곧 중후한 소리가 뒤를 잇는다. 연주회를 한다기에 국가 비슷한 음악이나 연주하고 말겠지, 라며 시큰둥해하던 외국의 사절들이 순간적으로 등받이에서 등을 뗐다.
아니,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귀족들이, 기사들이, 백성들이 오로지 한 지점을 주시했다. 눈에 잘 띄는 빨간 코트의 사내. 그리고 그가 손을 내저을 때마다 들려오는 음에 집중하며.
묵직한 현악의 소리는 평범한 멜로디가 아닌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건 무엇일까? 그래, 그 소리는 뭔가를 묻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묻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주위를 맴돌았다.
'환희란 무엇인가?'
그러나 누가 그 질문에 대답할 것인가. 아무도 없다. 있을 수 없다. 음에는 오직 음으로 대답하는 것만이 가능할 뿐. 지휘자가 지휘봉을 튕기니, 첫 번째 대답이 나온다.
마치 무언가가 시작되는 듯한, 조심스러운 소리. 미약하게 시작했던 그것은 점차 창대하게 뻗어 나갈 조짐을 보였으나, 이내 질문자의 음률에 뒤덮이며 자취를 감추었다. 질문자의 소리는 마치 그것은 대답이 아니라는 것처럼 자신의 소리로 답자의 소리를 덮었다.
이제 두 번째 대답을 들으려 말을 멈춘다. 너는 대답할 수 있을까?
답자의 대답. 그것은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톡톡 튀며 신나게 날뛰는 소리였다. 이만하면 환희가 될만하지 않겠느냐고. 다 함께 모여 춤을 추며, 미친 듯이 제자리 점프를 하는 것에 바로 환희가 있다고.
저 멀리 광장 구석에서 지켜보던 륀이 제 가슴을 꼬옥 움켜쥐었다. 올바른 대답이었다. 앞으로의 멜로디는 이 대답을 기준으로 점차 발전시켜 나가는 형태가 되어야 하리라.
그녀의 기대는 무참히 배신당했다. 질문자는 고개를 저으며 두 번째 대답을 일축한다.
"아..."
아쉬움의 탄성. 륀은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자신의 입을 가렸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 어쩐지 부끄러워져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음악에 몰입하여 주변에서 박리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제 륀은 다시 집중을 시작했다. 두 번째 대답이 올바른 대답이 아니었다면, 과연 질문자는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걸까? 세 번째엔 그가 원하는 답이 나올 것인가?
다음으로 아린이 만들어낸 대답은 포근한 소리였다. 듣는 사람을 부드럽게 감싸는,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긴 것과도 같은 소리. 이것이야말로 환희가 아닐까?
아스터는 그 대답을 들으며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사랑이 바로 환희였다. 첫 시작과 달리 조용하고 잔잔한 멜로디였으되, 올바른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마땅히 질문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되리라.
아스터의 기대도 배신당했다. 아니, 배신까지는 아닐까. 질문자는 분명 고개를 내저었으나, 그의 부정은 앞선 두 대답과는 달리 완곡하고 부드러웠다. 정답은 아니지만, 근접했다는 말이다.
이제 네 번째 대답이 나올 차례였다. 질문은 이번에야말로 올바른 대답을 기다린다는 듯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재촉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고 아기자기한 대답이 나온다.
처음은 마치 자신이 없다는 것처럼 약간 망설이더니, 곧 자신 있게 제 주장을 늘어놓았다. 그것은 간단했지만 동시에 강렬했다. 바다에 폭발적으로 내리쬐는 태양빛처럼, 천지를 뒤흔드는 기마대의 말발굽처럼.
광장에 모인 모든 이가 직감할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대답이었다. 보물을 찾았을 때처럼 오슬오슬한 감각이 전신을 달리며 팔뚝에 소름을 돋게 했다.
'정답이다!'
질문자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선 손을 한 번 크게 휘저었다. 이제 올바른 주제를 찾았으니, 한 번 다 함께 불러보자고. 여기서부터 아린의 두 번째 기예가 시작되었다.
그녀의 심상 속에 있는 소리를 구체화하여 드러내는 기술. 슬슬 그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솟기 시작했다. 겨드랑이가 촉촉하게 젖어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창공의 시선에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오... 오오..."
카벨 자작이 신음 소리 비슷한 한숨을 토해냈다. 두 번째 듣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전율은 결코 첫 경험에 비해 반감되지 않았다.
환희의 송가. 그 주제부가 처음으로 다이셀리시아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묵직한 저음이 환희를 노래했다. 분명 칼란드라에서 나는 소리였으되, 칼란드라의 소리가 아니었다. 콘트라베이스와 첼로. 아린이 제 심상에서 뽑아낸 첫 번째 악기였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구태의연하고 간단하기까지 한 멜로디였다. 한 번 들으면 바로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하나 그렇기에 그것은 더더욱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리고 비올라와 바순이 여기에 가세했다. 마음을 씻어 주는, 상처를 보듬어 주는 소리. 사랑하는 이를 떠내 보낸 사람들, 사람에게 실망했던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허어..."
콘워스 변경백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냈다. 사랑하는 자식도 떠나보냈다. 그가 바친 충성의 대가는 모든 것의 상실이었다. 상실은 슬픔을 불렀고, 슬픔은 분노를 불렀다.
결국 한 인간에 불과했던 변경백은 이 오갈 데 없는 분노의 칼끝을 어딘가로 돌리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 칼은 자신을 난도질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자기방어 기제였다.
그리고 왕자가 근위대와 함께 산을 헤맨다는 것을 들었을 때엔 얼마나 격노했던가. 분열된 국가를 보다듬고 통치를 준비해야 할 자가 왜 지금 시기에 산맥을 쏘다닌단 말인가. 설마 전설 속의 무덤이라도 찾는단 말인가? 그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어쨌든 상관없었다. 왕자는 머저리였다. 머저리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가 바친 모든 것들은 머저리를 위함이었고, 변경백은 강제로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왕자가 탈출하고, 대관식이 열린다 하여 룬덴을 죽을 자리로 삼으려 찾아온 그였다. 적어도 죽기 전에 왕자의 앞에서 어두컴컴한 분노와 끈적한 절망을 쏟아내고 죽고 싶었다.
그런데 사별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먼저 떠나보낸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름 아닌 저 앞에서. 한 청년의 모습에서. 한 처녀의 손끝에서.
"부인... 조나단..."
변경백은 얼굴을 감싸 쥐며 소리 없이 흐느꼈다. 증오를 품었던 사내의 마음을 따뜻한 음악이 위로했다. 그에게 환희는 가족의 손길이요, 위로였다.
그리고 참고 참던 바이올린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새가 지저귀는 것과 같은 소리. 어린아이의 소프라노와도 같은 소리. 절망의 늪에 빠졌던 사람들, 손을 잡아주는 누군가가 필요했던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바마마...!"
알펜 2세도 그들 중 하나였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왕실의 골칫거리였던 그다. 통치에 대한 공부보다는 기사들과 함께 술래잡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고, 부모에게 응석 부리며 평생토록 어린아이로 남고 싶었다.
하지만 꿈만 같던 세월은 결국 가장 비참한 형태로 깨지고 말았다. 부왕이 죽고, 자신은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자신은 끝까지 왕자로 남고 싶었으나, 운명은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계승자의 자리는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그를 조여왔고 그 때문에 주변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이젠 아니었다. 당당한 왕으로서 홀로 서리라 다짐했다. 어려운 알펜시아를, 그리고 자신을 다시 세우겠노라고.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건국왕의 이름으로 정했다.
이제 막 왕이 된 소년에게 환희는 미래에 대한 다짐이요, 굳센 결의였다.
아린의 연주는 점점 세를 더해갔다. 청중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음에서는 환희가 차올랐다. 창공이 뭔가를 신호하는 것처럼 왼손을 튕겼다. 크레셴도. 소리가 증폭되고, 드디어 임계점에 다다른 순간... 그가 지휘봉을 번쩍 치켜들었다.
하늘을 뒤덮었던 구름이 열리며 밝은 햇빛이 창공과 아린을 비추었다. 기악적 환희의 최종적인 형태가 광장을 뒤덮었다. 포르테로 소리 높여 환희를 외치고, 사람들은 감정의 과잉에서 오는 절정을 느꼈다.
니체가 음악 위의 음악, 순수한 소리라 평했던 천재의 음악은 그렇게 이세계 사람들을 거칠고 광활한 감정의 바다로, 우주로 안내했다. 그들을 그 흐름에 몸을 맡기며 종착점을 향해 내달렸다.
아니, 내달리고 있다고 믿었다. 연주 시간으로 치면 6분이 조금 넘은 지점. 청중들은 이것이 바로 곡의 끝이요, 완벽한 완결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을 인도하던 환희의 가락은 결국 끊기고 말았다. 모두가 혼란에 빠졌다.
내 환희는 어디에 있는가? 돌려달라! 내게 환희를 돌려다오!
그러나 지금까지 그들이 느꼈던 환희는 편린에 불과했다. 지금부터 창공과 아린은 그것을 보여 줄 작정이었다.
아린이 곡 첫머리의 몰아치는 듯한 부분을 연주하고, 창공이 두 손을 번쩍 들자 의자에 앉아 있던 합창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람들은 마치 합창단이 무에서 솟아난 것처럼 느꼈는데, 이는 창공의 퍼포먼스와 아린의 강렬한 지휘가 그들의 존재를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이제부터 합창단의 존재감은 그 누구도 감출 수 없었다.
창공이 타이밍에 맞추어 베이스 독창을 가리키고, 드디어 본격적인 합창 교향곡이 시작되었다.
[오 벗들이여, 이 소리가 아니오!
좀 더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르지 않겠는가!]
뒤이어 칼란드라가 다시 주제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연주될 화음은 전부 환희의 변주였다.
[환희여!]
[[환희여!]]
소프라노를 제외한 합창단이 독창을 뒤따랐다.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광채여, 알펜시아의 아들딸이여.
우리 모두 정열에 취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자!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이들이 신성한 힘으로 다시금 결합되니
이에 모든 신민은 형제가 되노라, 그의 부드러운 은총 아래에서!]
창공이 직접 개사한 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린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심을 담아 연주했다. 비록 환희를 느끼는 이들이 전인류에서 알펜시아인에 한정된 것은 슬프기 짝이 없으니, 어쨌거나 이 나라에도 화합은 분명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마음이 청중들의 귀에 합창단의 목소리와 함께 파고들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환희가, 알펜시아인으로서의 자긍심이, 동포애가 생겨났다. 신선한 해산물의 은은한 단맛처럼 파고든 그것은 마치 원래 그들의 안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자리를 잡았다.
'이건.'
마법사인 륀은 연주를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멀어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이것은 마나의 작용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활에 마나를 담아 현을 긁어봐야 무참히 찢어지고 망가질 뿐이다. 이런 식의 마나 사용은 그녀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이것이 마나를 담은 의도된 연주라고 알아차린 이상 마법사의 자존심이 있었다. 귀를 막고 저항하며 넘어가지 않는다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 선율이 너무나 감미로웠다. 잊고 살았던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처럼. 도저히 놓을 수 없었다.
[위대한 선조들의 선물을 받은 이여, 진실된 충정을 바치는 이여.
국가의 따듯한 사랑을 받은 이여, 다 함께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
그렇다. 단 한 사람이라도 그분을 믿는 사람은 모두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
그러나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은 눈물 흘리며 조용히 떠나가거라!]
그리고 소프라노까지 가세한 합창이 그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 륀은 저항을 포기하고 음악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랬다. 어찌 저항할 수 있을까.
[이 나라의 모든 존재는 그녀의 품 안에서 환희를 마시고.
모든 선인이나 악인이나 장미 핀 오솔길을 환희 속에 걷는다.
환희는 우리에게 입맞춤과 포도나무, 그리고 죽음조차 빼앗아갈 수 없는 친구를 주며.
땅을 기는 벌레도 기쁨에 춤추고 신께선 왕의 뒤에 서신다!]
청중들은 이미 정신적인 한계에 달한 뒤다. 그런데도 창공은 지휘를 멈추지 않았다. 감정적 절정의 무간지옥에 빠진 이들은 오직 그의 허락이 있어야만 이 행복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신께선 왕의 뒤에 서신다! 왕의 뒤에 서신다! 왕의 뒤에! 왕의 뒤에!]]
저 높은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던 합창단의 목소리는 창공이 지휘봉을 크게 가로젓자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광장에 정적이 찾아왔다.
여기서 끝난 것일까. 물론 아니다.
퉁.
아린이 칼란드라의 현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콘트라바순의 표현이었다. 낮고 묵직한 소리가 창공의 손짓과 아린의 손짓에 따라 탄생했다.
이내 힘차고 경쾌한 행진곡 느낌이 물씬 풍기는 가락이 연주되었다. 절로 사람의 어깨를 들썩이게 만드는 소리였다. 그리고 창공이 테너 독창을 가리킨다.
[환희여! 환희여!
수많은 별들이 창공을 가로지르듯
환희여! 수많은 별들이 천국의 영광스런 계획을 따라 창공을 가로지르듯
왕이시여! 당신의 길을 달리소서.
왕이시여! 당신의 길을 달리소서.
영웅이 환희에 찬 채로, 영웅이 환희에 찬 채로 승리의 길을 달리듯이.
왕이시여! 그대의 길을 달리소서, 영웅이 승리의 길을 달리듯이!]
테너 독창과 남성 합창이 경쾌한 노래를 불렀다. 청중들의 마음에 여유가 찾아왔다. 조금 전과는 달랐다. 그땐 터질 것 같은 심장에 자꾸만 감정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딱 적당량의 감정을 주입받고 있었다. 또 그것이 점점 기분 좋게 고조되어갔다.
그렇게 절정에 이르려던 순간, 테너 독창이 자리에 앉아버렸다. 저 밑에서 올라오던 환희는 다시 바닥으로 모습을 감추고, 빈자리를 의혹이 메웠다. 사람들은 창공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비를 갈구했다.
다시 한번, 다시 한번 그 감정을 느끼게 해 달라고. 그러나 그는 자신을 향한 열렬한 탄원을 매몰차게 무시하고 아린을 바라보며 지휘를 계속했다.
아린도 그의 지휘에 맞추어 현을 미친 듯이 긁어댔다. 마치 폭풍처럼!
청중들은 방금 전과는 다른 종류의 정신적인 한계를 느껴야 했다. 마약을 강제로 주입해 다행감에 몸부림치게 만들어 놓고선 이젠 꽁꽁 묶어 놓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 꼴이다. 음악은 점차 고조되어갔으나 사람들은 점점 피폐해져갔다.
거세게 몰아치던 폭풍을 지휘하던 창공이 갑자기 풍속을 강제로 감속시켰다. 광장을 메운 이들의 숨소리가 잦아들고, 아린이 조심스레 현을 긁었다.
환희인가? 그렇다. 분명 그러했으나 단지 조각일 뿐이었다. 이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사막을 헤매던 말라죽을 것 같은 사람에게 물 한 방울을 주는 격이다.
바로 그때, 창공이 아린에게 눈빛을 한 번 보내자 칼란드라에서 나는 소리가 갑자기 증폭되었다. 그리고 그가 합창단을 향해 두 팔을 번쩍 쳐들었다. 그 유명한, 너무나 유명한 하이라이트 부분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광채여, 알펜시아의 아들딸이여.
우리 모두 정열에 취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자!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이들이 신성한 힘으로 다시금 결합되니
이에 모든 신민은 형제가 되노라, 그의 부드러운 은총 아래에서!
기어이 그 자리에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던 모든 이들이 환희를 주체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웃음을 터뜨렸다. 만인이 음악과 기쁨으로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하나 이 또한 창공의 손짓 한 번에 사그라들었다. 무겁고 느린 소리가 울려 퍼지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서로 얼싸안으라, 백만인이여. 온 세상의 입맞춤을 받으라.
형제여, 별이 빛나는 하늘 너머에 위대하신 선조들이 계실 것이다.]]
남성 합창과 여성 합창이 서로 번갈아서 같은 가사를 불렀다. 너무나 무섭고 근엄한 남성 합창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벌벌 떨며 자비를 구걸하고, 그 뒤에 따라붙는 포근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만 같은 여성 합창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안도를 느꼈다.
[[백만인이여, 엎드려 빌겠는가?
알펜시아여, 그대의 주인이 느껴지는가?
그분께선 반드시 그대의 곁에 계실 것이다.
별의 저편에 계시는 선조들과 함께!]]
창공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최고도로 집중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이 왔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부턴 하나만 어그러져도 전체가 뒤틀리게 된다.
칼란드라에서 나는 소리는 마치 밤하늘에 뜬 별이 비추는 빛과도 같았고, 합창단은 마음의 준비를 하며 다음 부분으로 돌입하기 전 마지막 소절을 불렀다.
[[별의 저편에 계시는 선조들과 함께!]]
점시 적막. 그러나 창공이 알토와 소프라노 합창단을 가리키며 지휘봉을 높이 쳐드는 순간, 두 개의 다른 주제가 합쳐져 마치 하늘 저편에서 나는 것만 같은 소리를 만들어냈다.
곳곳에서 두 손을 맞잡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사제들도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처음으로 신의 존재를 느꼈을 때 이러했을까. 거룩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사제서품을 받았을 때 이러했을까.
이제껏 그들이 그렇게 듣고 싶어 하던 신의 음성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그들 전부가 그렇게 생각했다. 신의 목소리가 인간의 성대를 통하여 이곳에 현현했노라고.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광채여, 알펜시아의 아들딸이여!
우리 모두 정열에 취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자!]]
[[서로 얼싸안으라, 백만인이여! 온 세상의 입맞춤을 받으라!]]
이번에 창공이 가리킨 건 남성 합창이었다. 베이스와 테너 합창단이 같은 식으로 여성 합창단의 꼬리를 물었다.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광채여, 알펜시아의 아들딸이여!
우리 모두 정열에 취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자!]]
[[서로 얼싸안으라, 백만인이여! 온 세상의 입맞춤을 받으라!]]
여성 합창단도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각자 약속된 소절을 부르며 다시 합창에 가세했다.
[[서로 얼싸안으라, 백만인이여! 온 세상의 입맞춤을 받으라!]]
[[환희여!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자!]]
베이스는 알토의 꼬리를 물고, 알토는 소프라노의 꼬리를 물고, 소프라노는 테너의 꼬리를 물었다. 끝나지 않는 이중 돌림노래. 각 성부별로 들어가고 빠지는 타이밍은 창공이 실시간으로 직접 조율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 정열에 취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자!]]
[[서로 얼싸안으라, 백만인이여! 온 세상의 입맞춤을 받으라!]]
[[새로운 시대로!]]
[[알펜시아의 아들딸이여!]]
지휘봉으로 각 성부를 가리키며 시작 지점을 알리고, 박자가 어긋날 것 같은 조짐을 보이는 성부가 있으면 조절하고, 셈여림이 변화하는 지점이 있으면 동작으로 지시한다.
모든 성부가 한껏 노래 부르며 클라이막스로 향하고, 이보다 더 오를 곳이 없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그 순간. 아린의 손끝에서 환희의 송가 주제부의 웅장한 변주가 만들어지며 사람들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셨다.
"아...! 아아아...!"
아스터가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탄성을 내질렀다.
"당신. 당신이었군요. 당신이...!"
그녀는 신학생 시절 사제에게 사랑하는 이를 만나면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대답은 이러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하늘의 연주가 마음속에서 들려 오게 됩니다. 그 사람과의 운명을 강하게 느끼고, 본능적으로 주님께서 점지해 주신 짝임을 알게 됩니다.'
분명 이것은 하늘의 연주였다. 하늘의 소리였다. 그녀가 어린 시절 들었던 성당의 종소리처럼. 귀에서 들리는 것이 아닌,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온몸에서 울려 퍼지는 천상의, 지복의 연주.
그 소리는 바로 저 남자의, 창공의 지휘 아래 만들어지고 있었다. 전율이 아스터의 중심부를 꿰뚫었다. 그녀는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해 준 신에 대한 기도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녀에게 있어 환희는, 사랑을 알게 된 소녀의 열락이었다.
[[온 세상의!]]
이렇게 창공이 가장 공들였던 부분이 종결되었다. 그는 한숨을 돌리며 다음 부분으로 진입할 것을 아린과 합창단에게 명령했다. 이제부턴 내리막길이었다.
청중들은 그다음부터 음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머리로 느끼지 못했다. 이미 그들의 정신은 한계 너머의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이어지는 종결부. 대단원에 이르렀으나 그 몰아침에 자비는 없었다.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광채여! 신의 광채여!]]
합창단의 마지막 노래가 끝나고, 마무리는 아린이 맡았다. 그녀는 모든 힘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마지막 남은 환희와 감동을 끌어안고 힘차게 연주했다. 창공도 아린에게 가장 빠른 속도로 연주할 것을 주문했다.
끝내 강렬한 음이 세 번 이 공간을 때리고, 연주가 완전히 종료되었다.
아린은 활을 든 손을 축 늘어뜨리고선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블라우스는 온통 땀에 젖어 축축했다. 머리카락 끝에서도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창공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아린과는 달리 그는 덥고 불편한 예복을 차려입고 격정적으로 지휘를 했었다. 마치 힘든 전투를 치른 것처럼 온몸이 무거웠다.
그렇게 창공은 심호흡을 하며 그대로 합창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박수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환호성도 없었다. 그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교향곡 9번의 초연이 끝난 후, 귀가 멀었던 베토벤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박수소리를 듣지 못한 채 관객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고 한다. 창공은 마치 자신이 베토벤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아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창공에게 등 뒤를 가리켰고. 그제서야 그는 몸을 돌려 청중들을 바라봤다.
어떤 이는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떤 이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또 어떤 이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수천수만의 사람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짝. 짝. 짝. 짝.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나유가 치는 손뼉이었다. 어택과 히사시가 그 뒤를 이었고. 그것이 무슨 신호탄이라도 된 양 광장 곳곳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창공과 아린은 그런 그들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