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58화 (58/178)

〈 58화 〉 Cloud 9 (4)

* * *

가히 무시무시한 갈채였다.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의 소리가 광장을, 룬덴을 가득 메웠다. 이 순간만큼은 자리에 모인 모두가 국적, 성별, 신분, 정파를 막론하고 모두가 형제자매였다.

음악과, 감동과, 환희와, 눈물로 하나 된 백만인. 그러나 창공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악성의 보물을 전달하기 위해 연주회를 연 것이 아니었다. 그에겐 달성해야 할 목적이 있었고, 지금이야말로 그 목적을 완벽히 달성하기 위해 용의 그림에 눈동자를 찍어야 할 타이밍임을 직감했다.

극한의 감격으로 이성적 회로가 마비된 지금이 바로 사람들을 선동하기 좋은 때라고.

"국왕 폐하 만세! 알펜시아 만세!"

이것으로 창공은 분명히 한 것이다. 이 연주회는 애초부터 대관식의 프로그램 중 하나였으며, 그 주인공인 알펜 2세에게 바쳐진 연주회라고. 그리고 그의 의도대로 청중들이 느꼈던 음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은 모조리 왕에 대한 충성심과 자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치환되었다.

"만세에! 국왕 페하 만세! 알펜 2세 폐하 만세!"

"알펜시아 만세! 만세"

그 순간부터 성 도미닉 광장은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구름처럼 몰린 백성들은 물론이요, 근위대 병력들과 근왕파 귀족, 심지어 반왕파였던 귀족들까지 미친 듯이 만세를 불렀다.

"만세! 대 알펜시아 왕국이여, 영원하라! 국왕 폐하! 장수하소서!"

"알펜시아 만세! 룬덴 만세!"

만세를 부르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바로 세속 권력을 모시지 않는 사제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팔과 어깨가 자꾸만 움찔거리는 것이 만세를 부르고 싶은 심정을 강하게 다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창공이 이렇게 좋은 판을 깔아줬는데, 알펜 2세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제 신민들에게 화답했다. 하도 운 탓인지 눈은 새빨갰으나 그로 인해 비웃음을 사거나 위엄에 손상이 가는 일은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다 그러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울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사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연주회를 듣고 울지 않는 이가 있다면 심장이 돌로 되었다고, 아니. 심장 자체가 없는 인간 아닌 괴물이라며 지탄을 받았으리라.

"우리가 역사를 만들었어요."

아린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사람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표현은 실로 과하지 않았다. 연주는 끝났으나, 아직도 사람들은 그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언젠간 구름 위에 두둥실 뜬 것 같은 아련한 감각에서 벗어나 거친 현실로 돌아가게 되리라.

하나 연주회의 흔적은 그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죽을 때까지, 어쩌면 죽어서도 잊지 못할 아름다운 한순간으로 남을 터였다. 누군가는 그것을 힘들 때마다 꺼내보는 추억으로 삼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영감을 얻어 세상에 기여하는 동량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그걸로 충분했다.

"어. 예상보다 효과가 더 좋네."

창공의 담담한 음색. 그는 지금 아린이 느끼는 것과 같은 감상을 느끼고 있지 않았다. 목표치를 추가 달성한 것에 대한 작은 유쾌함과 왕자의 지지 기반이 얼마나 탄탄해졌을까에 대한 계산.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전부였다.

"침대에 쓰러져서 한숨 자고 싶어요."

"나도 좀 쉬고 싶네. 이따가 만찬 뒤에 무도회가 열릴 거랬는데."

"참석해야겠죠?"

"당연한 소릴."

창공 일행은 설령 끝까지 자리하진 못하더라도 반드시 무도회에 참석해야 했다. 새로 즉위한 왕이 처음으로 서임한 기사들이 아닌가. 게다가 역사에 남을 음악회까지 열어버린 몸. 알펜시아와 각국의 인사들은 그들이 조용히 쉬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임이 자명했다.

따라서 이 무도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이대로 룬덴을 빠져나가 도망가는 것 외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알펜시아에서 창공 일행이 애써 쌓아올린 우호적 기반을 파토내는 행위였으니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피곤한 하루가 될 거야."

창공은 아직도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옆에 나란히 선 아린이었으나, 그녀는 그가 바라보는 곳을 보지 않고 있었다. 대신 아린은 창공의 옆얼굴을 조용히 응시했다.

"네... 피곤하게 되겠죠. 엄청."

* * *

그날 저녁. 왕성에서는 앞서 공언되었던 대로 무도회가 열렸다. 반란과 선왕의 승하 뒤로 꽤나 오랜만에 열린 무도회였기에 이번 무도회에 걸린 사교계 인사들의 기대는 매우 지대했다.

게다가 이번 무도회에는 새로 즉위한 알펜 2세만큼이나 요주의 인물들이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창공 일행이었다. 수수께끼의 에트로지. 성 메도티오 기사단의 기사들.

사실 누군가가 성 메도티오 기사단의 기사로 임명된 것 자체는 그다지 놀랄 것이 없었다. 물론 일단 서임이 되면 실제 기사들과 같은 취급을 받긴 했지만 성 메도티오 기사단 자체가 일종의 왕실 명예 기사단이었고, 왕이 마음에 드는 자에게 기사 작위를 내릴 때엔 으레 써먹는 곳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창공 일행이 에트로지라는 것에 있었다. 물론 이들이라고 작위를 받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에트로지들은 법적으로 이곳 다이셀리시아의 그 어느 국가에도 소속이 되지 않았지만, 왕이 수여하겠다는데 못 할 건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이미 노르마크와 아르토스에선 기사가 된 에트로지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우연한 기회에 귀족이나 왕족과 같은 중요 인사의 눈에 띄게 되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고 기사가 된 자들이었다.

그런데 창공 일행은 어떤가.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창공이 궁술 제전의 우승자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으니 그에 한정해서 본다면 인지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겨우 그것으로 알펜 2세가 큰 의미를 가지는 첫 공식적인 행차로 서임식을 열 정도는 못 되었다.

또 나머지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에 대해선 정말 아예 정보가 없었다. 정보가 없으면 섣부른 추측은 자제해야 하는 것이 옳으나, 사회는 그 크기를 막론하고 절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순식간에 정말 별의별 소문이 다 나돌았다.

왕실에서 비밀리에 키운 살인 병기라던데? 그러면 지난 반란 때에는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 이 양반아, 그러니까 비밀리에 키운 살인 병기지. 멍청하긴! 내가 듣기로는 교단에서 우리 알펜시아를 위해 이세계에서 소환한 전사들이라던데...

따라서 무도회에 등장한 창공 일행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이 무도회의 주인공은 알펜 2세였으니 대놓고 그들에게 관심을 더 쏟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아, 창공 경. 어서 오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창공은 알펜 2세를 발견하고선 그쪽으로 다가갔다. 온갖 귀족들과 사절들이 그쪽에 몰려 있었기에 질문의 세례가 쏟아지리라는 건 누구라도 예상할 순 있었지만 관심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먼저 다가가는 게 낫다는 것이 창공의 생각이다.

"경의 연주회는 내 잘 들었네. 실로 놀라운 경험이었으이."

"과찬이십니다."

그는 알펜 2세의 칭찬에 별거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주위 사람들이 그에게 말을 붙이고 싶어 하는 티가 역력했지만 창공은 왕과 대화를 하는 중이니 감히 끼어들 수는 없었다.

"과찬이라니. 오히려 짐의 표현에는 상당한 부족함이 있음일세. 짐은 지금껏 바로 저것만이 음악인 줄로만 알고 살았다네."

알펜 2세는 구석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악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근위대에서 뽑은 임시 연주자와 민간에서 돈을 주고 뽑은 악사들로 만든 임시 악단이었다.

왕실에서 열리는 무도회니만큼 아무 속세의 곡이나 연주할 수는 없었다. 연주하는 곡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민간에서 뽑힐 정도의 악사들이라면 당연히 숙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연주하는 곡은 잔잔하고 평화롭긴 했지만 창공이 듣기엔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이 무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오늘에서야 창공과 똑같은 감상을 느끼는 중이었다. 으레 음악이란 이런 것이라며 만족하고 들었던 이들은 더 이상 같은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어쩌면 창공은 그들에게 몹쓸 짓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 내 그대들의 연주를 다시 들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짐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그것이 가능할지 모르겠군."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폐하. 신은 오늘 인생에서 제일 가는 행복을 느꼈나이다. 그러나 그 순간이 신의 보잘것없는 삶의 정점일 것만 같아 두렵기만 하나이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한 귀족이 감상을 늘어놓았다.

"오, 맨호트 백작. 역시 그대도 연주회에 깊은 감명을 받은 모양이구려."

"그렇사옵니다. 부디 폐하의 은총에 힘입어, 창공 경이 다시 한번 그와 같은 연주회를 열 수 있도록 간청드리나이다."

백작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창공과 알펜 2세를 바라봤다. 창공은 속으로 짜증을 냈다. 그가 무슨 궁정 음악가라도 되는 것인 양 착각하는 것 같았다. 당연히 표정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대의 마음은 짐도 십분 이해하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소. 창공 경은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다오."

"중요한... 임무 말씀이옵니까."

"그렇소. 중요하면서도 기밀이 요구되는 임무지. 오직 창공 경과 그의 일행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오. 때문에 아무리 짐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붙잡아둘 수는 없소."

"폐하."

다른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저는 키르케의 외무장관을 맡고 있는 베르사체라고 하나이다. 우선 폐하의 즉위를 실로 경하 드리는 바이옵니다."

"아, 베르사체 장관. 고맙소. 한데 무슨 일이오?"

"감히 질문드릴 것이 있어 이리 무례를 무릅쓰게 되었나이다. 방금 전 폐하께서 말씀하신 그 임무와 창공 경 이하 5명이 금일 기사로 서임된 것은 서로 연관이 있사온지...?"

"그렇지 않소. 기사 작위는 그들이 세운 공의 대가요."

"실례했사옵니다."

알펜 2세는 그 이상의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입을 닫았고, 베르사체 장관도 더는 소용이 없음을 알고 물러났다. 기실 연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이리저리 소문을 낼 필요는 없었다.

설령 소문을 내더라도 그것은 창공과 그 일행이 판단해서 결정해야 할 일이었지, 알펜 2세가 가타부타 할 몫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이에 비해 입이 가볍지는 않은 것 같아 창공이 작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왕이 충분한 대답을 하지 않고, 또 추가로 대답을 할 의사도 없어 보였으니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들은 그 대신 연주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쪽도 창공 일행의 정체만큼이나 요주의 관심 대상이었다.

"그러니까, 폐하께서도 자세히는 알지 못하셨다는...?"

"맞소. 물론 연주회가 열릴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 알펜시아의 전례 대신에게 들었다오. 그러나 그 세부적인 내용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소."

"그 음악은 이세계의 음악이었는지요? 분명 성가대가 부르는 노래는 알펜시아의 말로 되어 있었으나, 음률이 도무지 우리 세상의 음악인 것 같지가 않았나이다."

"짐도 거기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으니 창공 경에게 질문하는 것은 어떻소?"

알펜 2세는 그런 식으로 중간중간 창공에게 질문을 넘겼고, 그는 귀족들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줘야 했다. 물론 각오한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허어! 귀가 먼 자가 이리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었다? 창공 경. 미안한 말이네만 허풍이 조금 심한 것은 아닌지..."

"믿지 못하실 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란 말인가. 귀가 멀어 악기도 연주할 수 없는 자가 작곡을 하다니."

"검의 대가가 마음의 눈으로 상대방의 검을 보듯, 음악의 대가는 마음의 귀로 들을 수 있는 법입니다."

"오... 무슨 느낌인지 알만도 허이."

하도 믿지 못해 짜증이 나서 대충 얼버무렸더니, 의외로 먹혀들어간 듯 귀족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알기는 뭘 알아. 돼지같이 살만 쪄서 평생 검은 잡아 본 적도 없게 생겼는데.'

어쨌거나 그는 그 뒤로도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며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가 받는 혜택의 대가라고 생각하면 못 할 것은 없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질문이 잦아드는 느낌이 들자, 재빨리 알펜 2세에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 그러면 이쯤에서 제 일행에게 돌아가 봐도 괜찮겠습니까?"

"음. 하긴 피곤하긴 하겠군. 마음껏 있다가 돌아가 쉬도록 하게. 돌아갈 때엔 따로 짐에게 인사를 할 필요는 없음이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좋은 밤 되시길."

그렇게 창공은 잽싸게 등을 돌리고 제 일행이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의 얼굴도 잔뜩 피곤에 절어있는 것이, 아마 창공만큼이나 질문 공세에 시달린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넘어야 할 난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수고들 했네."

카벨 자작이 웃으며 다가온 것이다. 그래도 물심양면으로 그들을 많이 도와준 사람이었으니 피곤하다며 내칠 수도 없고, 미칠 노릇이었다. 자작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싱글벙글 웃을 뿐.

"아, 창공 경. 그래. 기사가 되어 보니 어떤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얼떨결에 된 느낌이라."

"하하하... 그럴 만도 하지. 그래도 일단 국왕 폐하의 기사가 되었으니 책임감을 가져 주길 바라는 바이네. 그대 기사들의 명예는 국왕 폐하의 명예요, 국왕 폐하의 명예는 기사들의 명예이기 때문이라네. 아린 여사."

"앗. 네. 네? 네..."

아린은 자신을 여사라 부르는 자작의 말에 눈을 쉴 새 없이 꿈뻑꺼리며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여사의 연주도 훌륭했다네."

"킥킥킥..."

"본 대신이 훗날 연주를 듣지 못한 누군가에게 오늘의 경험을 말한다면 믿기나 하겠는가?"

"풉, 큭... 크흐흐..."

"칼란드라 한 대로 그런 마법을 부리다니. 마법에 대한 견식이 짧아 감히 예단할 수는 없으나, 내겐 여사의 연주가 바로 마법이나 다름없었다네."

"후우, 후우욱! 푸흐흐흑...!"

"아니 자네..."

자작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유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으나, 저렇게 다 소리가 새어 나와서야 참는 의미가 그다지 없어 보였다.

"나유 여사. 본인의 말에 우스운 부분이 있었는가?"

"여, 여사...! 푸하하하학...!"

"여사라는 말이 뭐 어때서 그리 웃는 것인가?"

"여사하하하하학!"

"으음..."

당연히 자작은 창공 일행이 기사가 되었으니 그에 걸맞게 경칭으로 불러주는 것이었지만 아무리 들어도 여사라는 말은 영 어색했다. 아린조차도 당황했는데 나유는 오죽할까.

어쩐지 자작을 놀리는 것 같아 살짝 미안함을 느끼는 나유였지만 그래도 웃긴 걸 어쩌겠는가. 다른 일행들도 그녀를 말리기는커녕 웃음을 참는 데에 급급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괜히 무례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 창공은 나유를 급히 말리려 했다. 그동안 들인 노력이 얼만데 괜히 여기서 나쁜 이미지를 만든다면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바로 그 순간, 예상하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전례 대신이라고 했던가요?"

꾀꼬리의 노래처럼 아름다운 목소리. 바람결에 흩날리는 깃털처럼 부드러운 목소리.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심지어 정신을 못 차리고 웃어대던 나유마저.

"어. 아스터 씨?"

어택이 깜짝 놀라 말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 맑은 하늘색 눈동자. 나유보다 한 층 더 볼륨감 있는 가슴.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어떨 때엔 그리웠던 얼굴이었다.

"아스터 씨!"

"사제님!"

나머지 일행들도 깜짝 놀라며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아스터가 아니었다. 유일하게 창공만이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검정 고깔모자에 파란 와이셔츠, 남색 넥타이. 회색 스커트에 하얀 스타킹. 지팡이는 짚고 있지 않았지만 그녀는 틀림없이 언니 쪽인 륀이었다.

"퐁파두르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무슈 서... 아니, 이젠 창공 경인가요. 오랜만이군요."

일행은 당황했다. 분명 얼굴도 아스터의 얼굴이고, 목소리도 아스터의 목소린데 어딘가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말한다는 게 까먹었네.'

그녀와의 만남은 남대륙에서 북대륙으로 건너올 때 한 번뿐이었다. 그마저도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눈 건 창공 혼자였고. 그래서 아스터에게 사실은 쌍둥이 언니가 있었다고 일행에게 귀띔 정도는 해 주려고 생각했었지만,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고 일상이 바쁘게 흘러가다 보니 말할 타이밍을 놓쳤더랬다.

"아스터 씨가 아니에요."

그는 앞으로 나서며 일행과 자작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륀 퐁파두르. 아스터 씨의 쌍둥이 언니 되시는 분이고, 마법사입니다."

"어...?"

일행은 혼란에 빠졌다. 아스터에게 마법사인 쌍둥이 언니가 있다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창공이 어떻게 그녀를 알고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하여 그들이 온갖 질문을 토해내려던 차, 자작이 선수를 쳤다.

"본인이 전례 대신은 맞소만... 마법사라니."

물론 뜬금없기로는 카벨 자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귀족으로서 소개를 받은 이상 자기소개 없이 넘어갈 수는 없었다.

"자랑스러운 알펜시아의 전례 대신, 윌리엄 에테르 카벨 자작이라 하오."

"반가워요. 웨리의 마법 이론 정교수, 륀 퐁파두르라고 해요."

"아, 이런. 정교수 되시는군요."

자작은 머리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반면에 륀은 고개를 살짝 까닥거리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일행은 이 광경을 보고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아스터에게서 그녀의 집안은 평민이라고 들었고, 당연히 쌍둥이 언니인 륀도 평민일 터였다. 한데 자작인 전례 대신이 오히려 륀에게 공손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는 교수직에 오른 마법사라면 귀족 대우를 받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륀처럼 정교수를 맡고 있는 경우엔 대체로 그 대우가 백작의 예에 따랐다.

"그런데 마드모아젤. 제게 어떤 용무를 가지고 계시는지."

자작은 이미 그녀가 아퀴탄 사람이라는 것을 파악한 뒤였다. 작명법도 그렇거니와, 륀의 알펜시아말에서 아퀴탄 억양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그냥 교수로 괜찮아요. 음, 대신. 알펜시아에서는 전례 대신이라 부르는 모양이지만, 아퀴탄에서는 전례 서경이라 부르죠. 알고 있나요?"

"알고 있습니다만."

"같은 다이셀리시아 안에서조차 국가별로 그 예절이 다른데, 다른 세계 라면 어떨까요. 우리에게 여사는 명예롭고 정중한 표현이지만, 에트로지들에겐 어떨까요. 부디 전례 대신으로서 그 점을 고려해 주시길."

"음... 과연 교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그는 돌아서서 나유를 바라보며 절도 있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허이. 결코 자네에게 무안을 주려 한 행동은 아니었네. 단지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 일일뿐이니, 부디 이해해 주지 않겠는가?"

"앗.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나유는 깜짝 놀라며 역으로 자작에게 사과했다. 당연히 그녀도 자작이 그들을 놀리려 그렇게 부른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며, 오히려 무례가 될 법한 행동을 한 쪽은 그녀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자기만 사과를 받고 넘어갈 정도로 뻔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원래대로 나유 양이라고 부르면 좋겠는가?"

"아뇨아뇨. 여사라고... 불러 주세요."

감추지 못한 웃음기가 고개를 내밀었지만 이내 쏙, 하고 들어갔다.

"알펜시아에선 알펜시아의 법을 따라야죠."

"좋은 말이로군. 알펜시아에선 알펜시아의 법이라... 그렇다면 그렇게 하겠네. 이거 참,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있지만 손님이 찾아오셨으니 머무르기 어렵겠군. 내 자리를 비켜 주도록 하겠네. 그럼..."

자작은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고선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제 이 자리에 남은 것은 창공 일행과 륀. 이렇게 여섯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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