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Cloud 9 (5)
* * *
"몰라보게 변했군요."
륀이 품속에서 파이프를 꺼내며 말했다. 그녀는 그것을 입에 물었지만,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하긴 니코틴보단 입에 물고 있을 게 필요해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었다.
"남대륙에서 황급히 도망치던 이방인은 어디로 가고... 알펜시아의 기사가 되었다니."
"별거 아닙니다. 명예 작위니까."
"왕이 수여하는 명예 기사는 그 의미가 다른 법이죠. 아, 연주 잘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뭘요."
그러면서 륀은 창공 일행의 면면을 쓱 훑어보았다. 어쩐지 물건의 견적을 내는 듯한 눈빛의 느낌이 났다. 그러던 와중, 그녀의 시선이 아린에게 머물렀다.
"연주를 했던 게... 마드모아젤이 맞죠?"
"아... 네. 저 말씀 하시는 거라면."
"소리에서 마나의 파동이 느껴지더군요. 의도된 연주였나요?"
"네. 활에 마나를 실어서..."
"하지만 어떻게? 활에 마나를 담아 현을 긁어봤자, 악기가 무참히 박살 날 뿐이에요. 마나는 곧 힘. 단순히 집중되기만 한 힘은 파괴력만을 가질 뿐이죠. 마치 무기에 실린 마나처럼. 다른 세상의 마법인가요?"
"저희 세상에는 마법이 없는데요. 마나라는 것도 처음 알았고요."
"흠."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륀. 일행들이 그녀의 모습에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아스터와 똑같은 외모에, 똑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분위기가 너무나도 달랐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고 의지가 되는 아스터와는 달랐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까지는 아니었으나, 그녀에게선 분명 쉽게 말을 붙이기는 어려운 아우라가 풍겼다.
"이건 아무래도 그냥 지나치긴 아까운데..."
창공은 그녀의 혼잣말을 듣고 다음에 나올 말을 기대했다. 마법사는 필요로 할 때 나타난다고 했던가. 륀이 그들에게 흥미를 느껴 동행을 제안하게 된다면 과연 그 말대로 되는 셈이었다. 제발 그러기를 바랐다.
그리고 륀은 창공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정식으로 소개하죠."
그녀는 모자를 벗고 가슴에 갖다 댄 뒤 창공 일행에게 살짝 고개를 까딱거렸다.
"륀 퐁파두르. 마법 이론 정교수, 몽펠리도 대학 산술학 겸임교수, 아퀴탄 왕실 명예 자문위원. 올해로 나이 스물하나. 잘 부탁해요."
"서창공입니다. 나이는 스물이고요."
창공은 물론이고 나머지 일행들도 쭈뼛거리며 륀과 통성명을 나누었다.
"그런데 교수님. 아스터 씨를 찾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뒤꽁무니만 쫓다 결국 여기에 이르러서야 잡았지만. 지금 그 아이는 성당에 있고, 거긴 내가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에요. 언젠간 나오겠죠. 십 년을 넘게 기다렸는데 겨우 며칠을 못 기다릴까요."
"그렇습니까."
"내가 지금 관심 있는 건 바로 당신들이에요. 설마 알펜시아에서 기사 생활을 하면서 평생을 보낼 건 아니겠죠. 그렇다 해도 별 상관은 없지만."
"물론 아닙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방법을 찾을 생각입니다. 이곳저곳 다녀 보면서."
"잘 됐네요. 즉, 여행을 떠난단 말이죠?"
"네."
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근잘근 씹어대고 있는지 파이프가 자꾸만 움찔거렸다.
"일행에 마법사 하나. 어떤가요?"
순간 쾌재를 부를 뻔한 창공. 하지만 그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륀에게 질문했다.
"의도가 어떻게 되십니까?"
"의도라."
어쩔 수 없는 창공의 버릇이었다. 곧 죽어도 대인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싶어 하는 습관. 그들이 륀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륀이 그들을 필요로 해서 따라붙는 형식이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기에 일행은 충분히 입장상 우위에 설 수 있었다. 륀과 처음에 만난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마법사들도 지구에서 넘어온 그들에 대해 아는 게 없으며, 조금이라도 아는 게 있었다면 논문을 수백 편은 발표했을 거라고 그녀는 분명히 말했었다.
게다가 아무래도 그들이 마나를 사용하는 방식은 이쪽 세상의 방식과는 뭔가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았고, 륀은 그것에 대해서도 흥미를 표한 적이 있다. 즉, 창공 일행은 그녀가 진정한 학자라면 결코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보물이었다.
"난 교수. 생도들이나 교수 과정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연구자예요. 이 세상의 진리를 파헤치는 연구자.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 진리에 일정 부분 닿아 있죠. 특히 당신들. 어느 날 갑자기 다이셀리시아에 나타난 당신들."
륀은 파이프를 잡고 입에서 빼냈다. 아무래도 말하는 데 방해가 되는 모양이었다.
"당신들은 이 세상의 진리에 얼마나 닿아 있을까요. 그 어떤 마법사도 밝혀내지 못한 사실을, 륀 퐁파두르의 이름으로 밝혀내는 것. 그게 저의 의도죠."
"연구 대상이라는 겁니까."
"줄여 말하면 그렇게 되겠죠."
내색하진 않아도, 그녀는 상당히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에트로지에게 접근하여 연구를 하려 시도한 마법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나 실험이라는 말에 극도로 거부감을 드러냈고, 극단적으로는 무기를 들고 싸우는 일까지 발생했다.
충분히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아마도 해부나 그런 종류의 것을 예상한 모양이었는데, 솔직히 말해 그런 의도로 접근한 마법사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도 몇 건 자행된 적이 있었고.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결국 그 해부에서 알아낸 사실로는 에트로지들의 신체 구조가 평범한 인간의 신체와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뿐이었고, 연구 윤리를 중시하는 총장의 방침에 따라 에트로지에 대한 인체 실험은 금지되기에 이르렀다.
인체 실험뿐이랴. 다른 종류의 실험 또한 상당한 규제가 걸리게 되었다. 마법사들은 총장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수군댔지만 어쨌든 웨리에 소속된 마법사로서 그의 방침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따라서 마법사들은 제대로 된 성과도 내지 못하고, 해 봤자 여러 가지로 귀찮을 게 뻔한 에트로지에 대한 연구를 기피하게 되었다. 어차피 이 세상에 연구할 건 많았고, 결국 에트로지는 수많은 연구 대상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나 륀에게는 아니었다. 그녀는 그들을 상당한 가치가 있는 연구 대상으로 생각했다. 물론 해부를 한다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소용없는 짓이었으니.
대신 창공 일행에겐 다른 가능성이 엿보였다. 특히 마나를 사용하는 방식 측면에서. 누구는 화살에 마나를 담았고, 또 누구는 음에 마나를 담았다.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충분히 연구 가치가 있었다.
거칠게 말해 전자가 마나를 쓰는 일반 전사들과 다를 게 없다면, 후자는 본격적인 마법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다. 마법이 없는 세계에서 왔는데 마법을 사용한다? 제대로 연구해서 논문을 낸다면 그녀의 이름을 마법의 역사에 남을 것이다.
"안심해요. 인체 실험을 한다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당신들을 대상으로 한 모든 직접적인 연구는 상호 동의를 바탕으로 진행할 거예요. 대신 여러분은 일행에 마법사 한 명을 영입하게 되겠죠."
"..."
그럼에도 창공은 망설였다. 아니, 망설이는 척을 했다. 안 그래도 바라고 있던 인재였으니 저쪽에서 의사를 보인다면 영입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다. 이게 다 그놈의 버릇 때문이었지만, 그것을 알 길이 없는 륀은 애간장이 탔다.
심지어 그의 일행들마저도. 마법사가 있다고는 말로 들었지만 실제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자작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런 사람이 일행에 들어온다는 데 고민할 건 또 뭐란 말인가.
다섯 사람이 오로지 창공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한 번 웃은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끌어도 좋지 않은 법이다. 냉정히 따져 보면 더 아쉬운 쪽은 그들이었으니, 륀을 위한 첫 신고식은 이만하면 된 셈이었다.
"제 일행들이 동의한다면."
"아 당연히 동의지!"
나유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히사시가 그 뒤를 따랐다.
"서 상. 마법사잖아요. 예? 마법사! 형님. 형님도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나야 창공이가 좋다면..."
"그럼 동의하는 겁니다?"
"저도 찬성할게요."
아린까지 동의를 표하자 륀이 웃으며 근처 테이블 위에 있던 와인병과 잔을 가져왔다.
"기념으로 건배나 하죠. ...우리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것 같은데 말 놓을까요?"
단순히 친구 먹자고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부터 달라붙어 연구를 해야 하는데, 연구 대상들이 거리감을 느끼면 결과가 제대로 산출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일단 친밀감을 쌓아서 나쁠 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창공도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대학생인 그가 교수님이라 부르는 대상이 일행 내에 있으면 마치 상전을 모시는 꼴 같아 거부감이 들던 차, 이런 제안을 하니 반갑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자."
"좋아."
륀은 잔을 하나씩 돌린 다음 직접 그들의 잔을 채웠다.
"앞으로 우리들의 여정이 진리를 향한 여정이 되길 바라며, 건배!"
짠!
그녀의 건배사와 함께 다들 잔을 기울였다. 싸한 알코올과 부드러운 포도향이 목구멍에서 느껴졌다. 저 밑에서 올라오는 바닐라, 후추, 오크통의 향. 바디감은 딱 적당할 정도로 묵직했다.
"알펜시아도 꽤 하는데? 물론 우리 아퀴탄 수준은 아니지만."
누가 아스터랑 쌍둥이 자매 아니랄까봐 자국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륀.
"그런데 교수님. 아스터 씨는요? 어쨌든 만나셔야 하는데."
"반말하라니까."
"전 두 살 차이라 좀... 그리고 교수님이기도 하고."
륀은 아린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야... 어쨌든 아스터 말이지. 뭐, 얼굴만 보면 돼. 너희들도 내일 바로 출발한 건 아니지 않아? 어차피 아스터도 할 일이 있는 몸이라 나랑 같이 다니지는 못할 거야. 마음 같아서는 둘이 친가도 방문하고 싶기는 한데... 그건 어렵겠지."
"그런가요. 아쉽네요. 아스터 씨도 저희랑 같이 다니면 좋을 텐데."
"난 언니로서 반대. 고생길이 훤하잖아. 어차피 안 될 거야. 걔는."
그 뒤로 그들은 적당히 담소를 나누었다. 주변에 술이 가득하니 안 마실 수가 없었고, 적당히 기분 좋게 취기가 올라왔다.
"아, 오빠.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걸 굳이 말하냐. 다녀와."
아린은 무도회장에서 빠져나와 화장실을 향해 걸었다. 당연히 요의를 해결하러 가는 것이었지만, 잠시 마음을 차분히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녀는 오늘. 창공에게 정식으로 마음을 고백할 생각이었다.
어쩌다 보니 1 대 2 데이트 자리에서 고백한 셈이 되어버렸지만 그건 창공에게 직접 한 말이 아니었으니 무효라고 생각했다. 마침 연주회가 성공하면 그가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로 약속도 했었고, 성공했으니 요구할 명분도 충분했다.
거기에 알코올의 힘까지 빌리면 용기를 낼 수 있다. 조금은 비겁하다고 생각은 들었지만... 나유에게 미안하다고 생각은 들었지만... 사랑하는 게 죄가 될 수는 없으니.
그렇게 아린이 일을 마치고 화장실을 나선 순간이었다. 촛불이 어둑어둑하게 빛나는 복도엔 한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 나유 언니."
"아린아."
그녀는 절반이 넘게 찬 와인잔을 손에 들고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아린을 응시했다.
"..."
"..."
두 여인은 서로 말이 없었다. 와인잔을 들고 화장실에 가는 사람은 없었으니 필시 나유는 그녀를 기다리려 여기에 서있었을 터. 그렇다면 먼저 말을 꺼내야 하는 쪽은 나유였다. 그런데 그녀가 말이 없으니, 아린도 먼저 말을 꺼내기 곤란했다.
"난 알아."
무겁게 닫혀 있던 나유의 입술이 열리고, 평소보다 톤이 훨씬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뭘요?"
"오늘 창공이한테 정식으로 고백할 거니?"
"...어떻게 알았어요?"
나유는 잔을 기울여 벌컥벌컥, 와인을 마셨다.
"너... 계속 창공일 보고 있었거든."
"아."
"그 눈빛을 보니 그때의 내가 떠올라서."
아린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한 번은 부딪혀야 할 문제였으되, 그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 문제였다. 하여 데이트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계속 보류 중이었던 문제. 그러나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
"사랑해?"
"네."
나유의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하는 아린.
"아린아. 나는 창공이한테 내 전부를 줬어. 내게 남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네."
"난, 창공이가 없는 난 그냥 껍데기일 뿐이야. 그래서 두려워. 잃어버리는 게. 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 너를 잃는 것도 무서워. 넌... 내 소중한 동생이야."
"언니."
"나 진짜 바보다. 두 사람 다 내 소중한 사람이고, 지키고 싶은데... 이제 두 사람 다 잃어버리게 생겼는데 아무것도 못 하네."
아린은 그제서야 창공을 반만 가져가겠다는 그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죄책감이 물밀듯 몰려왔다.
하지만 그녀도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애써 웃었지만, 그 웃음이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던 건 그 죄책감의 말로였을까. 다행히 어둠이 그녀의 얼굴을 충분히 가려주었다.
"언니도 제 소중한 언니에요. 가족인걸요."
"아린아..."
"가족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잖아요? 그, 역사를 보면 자매가 한 남자에게 시집간 사례도 있고... 아, 아니. 이건 아닌가."
술기운 탓인지 어쩐지 이상하게 말이 나와버린 아린. 그렇게 횡설수설하며 제 말을 어떻게든 수습하는데, 갑자기 나유가 크게 웃어젖혔다.
"푸하하하하!"
"언니?"
그녀는 아린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오늘 다른 곳에서 잘 거야."
"네?"
"그러니까 오늘 우리 방엔 내가 없다는 말이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아린의 등을 밀어주는 나유. 그녀의 입가에는 슬픈 미소가 활짝 피어있었다.
"사랑해, 아린아. 물론 내 동생으로."
"아, 그... 저, 저도요..."
"이제 가. 얼른."
아린은 머뭇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저편으로 사라지는 순간까지 계속 나유를 뒤돌아 봤고, 나유는 그럴 때마다 손을 내저으며 웃어주었다.
이윽고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자, 나유는 입에 잔을 갖다 대고 남은 와인을 완전히 털어내었다.
주르륵...
마신 와인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 * *
뚜벅. 뚜벅.
창공은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었다. 적당히 피곤했고, 적당히 술기운도 올라온 터라 어서 가서 잠을 청하고 싶었다. 아무래도 어택과 히사시는 륀과 말할 게 있는 모양이었고 그녀도 그 대화를 거절하지 않아 뒤에 남기고 먼저 자리를 빠져나온 것이다.
"오빠."
그런데 등 뒤에서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린이었다.
"화장실 간다고 안 했냐?"
"다녀 왔어요. 오빠가 없길래요."
"난 먼저 가서 쉴 테니까 륀이랑 이야기나 하다가 와."
"소원."
창공은 아린의 말에 내딛던 발을 멈추었다.
"연주회 성공했잖아요. 소원 쓸 거예요."
"그게 있었지. ...그래서? 무슨 소원인데."
"사실 짐작하고 있죠?"
"어."
두 남녀의 시선이 공중에서 만났다. 아린은 한숨을 내쉬며 참 로맨틱이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이런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따라올래요?"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창공을 지나쳐 복도를 걸어갔다. 창공에게선 말이 없었지만, 발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따라오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들이 당도한 곳은 아린과 나유의 방이었다. 그러나 오늘 밤은 주인이 잠깐 바뀌게 되리라.
"..."
문고리를 잡는 아린의 손이 살살 떨려왔다.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한 탓이다. 하지만 각오한, 동시에 바라던 일이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자신을 다잡으며 문을 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