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막간 (2)
* * *
"그간의 호의에 감사드려요.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길!"
"앞날에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길 빕니다, 자매님."
룬덴 대성당. 대관식이 끝났으니 이제 아스터가 더는 이곳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이곳에 있는 동안 자신의 편의를 봐 주었던 수녀와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고, 성당 밖으로 나섰다.
때는 8월 한여름. 태양이 지상의 모든 것을 녹여버릴 기세로 작열하는 시기였지만, 오늘의 태양은 마치 봄의 태양처럼 따사롭기만 했다. 아스터는 성당 앞에서 잠시 눈을 감고 미소를 지으며 얼굴에 한가득 태양빛을 받았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곱슬 금발은 금을 녹여 뽑아낸 실처럼 찬연히 빛나고, 하얀 얼굴은 햇빛을 반사하여 주변에 흩뿌린다. 더군다나 전신을 뒤덮은 하얀 사제복까지. 절로 이목이 집중되는 외모에 성당 앞을 지나던 행인들의 발걸음이 멈추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녀를 멍하니 쳐다봤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광경. 그리고, 멈췄던 시간은 아스터가 눈을 뜨고 발걸음을 옮김과 동시에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여인의 몸놀림은 가벼웠고, 또 힘찼다. 고된 일정으로 인한 피로와 흔들림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스터?"
"네?"
등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린 아스터. 이윽고 그녀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까만 고깔모자. 파란 드레스 셔츠에 남색 넥타이. 회색 치마에 하얀 스타킹. 그 사이로 살짝 엿보이는 가터벨트. 아스터를 붙잡은 여인의 얼굴은 마치 붕어빵 틀로 찍어낸 것처럼 똑같았다. 다만 눈 밑에 짙게 새겨진 다크써클이 흠이라면 흠일까.
"언니...?"
"너 만나려고 이 앞에서 며칠을 기다린 지 알아? 뭐어, 십 년을 넘게 기다렸으니 못 참을 것도 없긴 했지만!"
"지, 진짜 언니야...?"
"내 가짜도 있어?"
륀이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니, 아스터가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어찌나 거셌던지 륀이 쓴 모자가 벗겨져 땅에 떨어질 정도로.
"아, 아아...!"
8살 때 헤어진 쌍둥이 자매는 21살이 되어서야 상봉할 수 있었다. 그동안 서로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가. 그러나 마법사와 사제라는 신분 때문에 얼굴을 보는 것은 물론이요,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그녀들이다.
밤하늘의 별처럼 많았던 하고 싶은 말들을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았던 아스터였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오로지 말이 되지 못한 소리 외엔 없었다. 그러나 그리움으로 도색된 세월의 무게를 어찌 말로 다 털어놓을 수 있으랴. 단지 눈물로, 탄성으로, 몸짓으로 그 편린을 전달할 뿐.
륀도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눈가가 새빨개졌지만 울지는 않았다. 마음이 여린 동생 대신에 강해져야 했던 그녀였기에. 대신 말없이 아스터의 등을 두드리는 륀이었다.
이윽고 서로를 끌어안은 두 몸이 떨어졌다. 하지만 서로의 손만은 놓지 못했다.
"꿈은... 아니겠지?"
"나 이게 꿈이면 너무 화날 것 같은데. 너 찾아다니느라 온갖 고생을 했다고."
아스터는 륀의 말에 울면서 웃었다.
"내가 근처에 찻집을 하나 알아. 거기 가서 얘기나 하자. 아침은 먹었지?"
"응. 나도 언니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아."
륀은 이때를 대비해 미리 물색해 두었던 찻집으로 아스터를 이끌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먼바다처럼 잔뜩 날뛰던 가슴은 향기롭고 차분한 차향으로 진정시킬 수 있었다.
깔끔한 홍차 한 잔. 차를 입가에 갖다 대던 자매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잔의 손잡이를 잡는 손 모양새부터 해서, 모든 동작이 하나같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다만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역시 륀에게 새겨진 다크써클. 아스터는 그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언니, 잠은 잘 자고 있는 거야?"
"그건 왜."
"여기... 눈 밑에..."
"아, 그거. 오래전에 생긴 거야. 박사 논문 쓰던 시절에. 한 번 생기니까 안 지워지더라."
"아... 안 되는데..."
아스터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이야기는 됐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집에는 들렀어?"
"응. 사제가 되고 나면 출신지 성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하잖아."
"그런가?"
"그렇게 해. 어쨌든 그때 어머니랑 아버지도 만났어. 건강하시더라."
"건강해야지. 나도 간간이 집에는 들렀는데."
"언니는 1년에 한 번씩은 왔잖아."
"맞아. 그런데 그 신학교라는 곳도 참 지독하더라. 어떻게 10년 동안 사람을 그 안에 가둬놓기만 하냐."
"가두다니. 신학에 대해 배우려면 당연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는 법인데."
"하하..."
창밖을 바라보며 웃는 륀.
"너도 사제 다 됐구나. 옛날에는 내 말이라면 무조건 고개만 끄덕이고 봤는데."
"나도 많이 배웠다구."
"훨씬 보기 좋네. 네 말이 맞아. 사람이 배워야지. 나랑 너랑 배운 건 서로 다르지만."
"그러고 보니 언니는 이제 교수겠다?"
"그냥 교수가 아냐. 정교수라고. 단독 연구실을 가진. ...지금은 문 닫았지만."
"왜?"
"노땅 교수들이 나 아니면 학과장 맡을 사람이 없다고 자꾸 떠넘기려고 하지 뭐야. 그래서 그냥 휴직계 냈어."
"학과장이면... 잘은 모르지만 명예로운 자리 아냐?"
"명예는 무슨. 그거 그냥 늙은이들이 일하기 싫어서 나이 어리고 만만한 교수한테 떠넘기는 자리야. 날 어리게 보는 건 좋아. 사실이니까. 하지만 만만하게 보는 건 참을 수 없지. 그래서 휴직계를 낸 거야. 어차피 정교수 달면 너랑도 한 번 만나려고 했었고."
"마법사들은 교수가 되어야만 마탑 바깥으로 나올 수 있다며? 그때 무슈 몽그리브한테 들었어!"
아스터는 그 옛날 륀을 마탑으로 데려갔던 귀스타브 몽그리브의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워낙 그날의 만남이 강렬했던 탓이다.
"몽그리브 교수... 그랬지."
그의 이야기가 나오자, 륀의 눈빛이 잠시 아련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사실 꼭 교수가 되어야만 바깥으로 나올 수 있는 건 아니야. 다만 절차가 복잡해서 귀찮거든. 길게 나가지도 못하고."
"교수가 되면 그 제한이 없어진단 얘기지?"
"절차는 훨씬 간단해지지만, 부교수까진 기간이 있지. 정교수는 무제한이야."
"우와, 대단하네."
"덕분에 고생 좀 했지만."
말을 그렇게 했지만, 단순히 고생만 한 정도는 아니었다. 19세의 나이에 교수가 된 륀은 역대 최연소 교수 임용자였다. 거기에 1년 만에 조교수에서 정교수까지. 마법사가 평균적으로 정교수에 임명되는 나이는 40대 전후임을 감안한다면 이는 엄청난 속도다.
물론 마법 이론 교수직 자체가 그 T/O에 비해 지원자가 적고, 적격자는 더 적어 20대 교수가 탄생하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라지만, 륀은 그 가운데에서도 독보적인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동생에게 하나하나 말해가며 그것을 자랑하진 않았다. 남들이 보기엔 천재의 승승장구한 기록일진 몰라도, 그녀 자신에겐 고통의 시간이었을 뿐. 굳이 구구절절 입 밖에 꺼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스터 너는? 사실 네가 더 걱정스러워. 사제라면 참아야 하는 일도 많을 텐데. 지금 나랑 얘기하는 것도 다른 사람한테 보이면 안 되는 거 아냐?"
"그건 걱정하지 마. 가족 대 가족으로서 이야기하는 건 괜찮으니까."
"확실해?"
"빡빡하신 형제자매님이라면 꾸중할지도. 그치만 우린 주님께서 한 가족으로 만드신 사이인걸. 분명 어떤 깊은 뜻이 있을 거야."
"깊은 뜻은 무슨, 그냥 쌍둥이로 태어났으니까 이렇게 된 거지."
"언니. 그거 살짝 신성 모독인걸."
"어차피 이단 심문관들은 내 존재 자체를 신성 모독으로 보는데 뭐 어때."
륀은 웃으며 파이프와 연초 쌈지를 꺼냈다. 슬플 때도, 즐거울 때도 파이프는 좋은 친구였다.
"그건 좀 그렇지만... 어쨌든 나는 잘 지내고 있어. 얼마 전에 대관식에도 참여했었다구."
"대관식에... 그랬구나. 연주회도 봤겠네?"
"아... 연주회!"
아스터의 눈동자가 꿈에 잠식된 것처럼 몽롱해졌다.
"하느님께서 온 세상 곳곳에 계심을 여러 번 느꼈었지만, 그때만큼 가까이 느낀 적은 처음이었어. 너무... 아름다웠어. 아름답다는 말이 진부하고 모자라긴 하지만... 응. 아름다웠어."
"신학적인 관점에는 동의 못 하겠지만, 그걸 빼면 네 말이 맞아. 소리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건 나도 그때 처음 알았어."
"그리고 나 소름 돋은 거 있지. 도대체 주님의 안배는 어디에까지 미치고 있는 걸까?"
"무슨 소리?"
"실은 이런 일이 있었거든..."
아스터는 륀에게 창공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이야기했다. 그 얘기라면 륀도 당사자에게 직접 들어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신이 나서 털어놓는 동생을 막을 수는 없었기에 조용히 경청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북대륙으로 인도했던 그분들이 그런 엄청난 연주회를 열다니... 이거야말로 진정 그분의 뜻이 아니었을까?"
"나랑도 아는 사이라는 걸 들으면 더 깜짝 놀라겠네?"
"어?"
그녀는 륀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아스터의 안에선 점점 자신과 그들 사이에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자꾸 커져갔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같이 여행을 떠나기로 했지. 그래서 말인데 잠깐 왕성 바깥에서 기다려 줄래? 내일 출발하면 되겠다고 전하고 올 테니까. 오늘은 너를 위해서 아낌없이 시간을 쓸게."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무슨 말이야?"
"나도 함께 갈 테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