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막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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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이 넝쿨째로 굴러들어왔다는 말. 창공은 살면서 그 말을 몇 번인가 들은 적이 있지만, 지금처럼 그 의미가 와닿는 때는 없었다.
마법사인 륀이 일행에 있었더라면, 치료사인 아스터가 일행에 있었더라면, 하고 생각해 본 적이 몇 번이나 되던가? 그러나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때마다 헛된 생각이라 치부하곤 했다.
단지 아쉬워서 든 생각일 뿐, 진지하게 바랐던 건 아니었으니.
그러던 차, 륀이 일행에 합류했을 때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 얼마나 기꺼워했던가. 물론 지구에서 넘어온 다섯과는 지향점이 다르긴 했지만 어쨌든 귀중한 전력임에는 틀림없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아스터. 하나 그녀의 합류는 너무나 요원한 바람이었다. 한 성당에 소속되어 몸이 매인 사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특수한 임무를 띤 교황청의 사제다. 제발 따라다녀 달라고 부탁한들 시원스레 수락할 상황이 못된다.
아스터가 륀과 함께 왕성에 방문한 것은 창공이 아쉬움을 속으로 삼키던 차였다. 이루어질 수 없다 생각했던 일들 중 적어도 하나는 실현이 되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려는데, 아스터가 나타난 것이다.
대관식 때 보긴 했지만 서로 말을 붙인 건 아니었으니 반갑게 인사하고 그동안의 안부를 물은 다음, 창공은 슬며시 기대감을 품으며 아스터에게 이리 물었더랬다.
"그런데 아스터 씨. 이제 대관식도 끝났으니 어디로 가실 겁니까? 이미 륀에게 들으셨을진 모르겠지만 저희는 알펜시아에 머무를 생각은 없습니다. 이것도 인연인데 같이 가는 데까지 만이라도 동행하시지 않겠습니까?"
"아, 네. 동행할게요."
창공을 제외한 일행이 환호성을 질렀다.
"어느 방향으로 가시는지..."
"당신께서 가시는 곳이 제가 갈 곳. 방향을 알려주시면, 뒤를 따를게요."
륀이 뭔가 찝찝한 표정으로 아스터를 바라봤지만, 그녀의 반짝이는 눈빛은 오로지 창공을 향해있었다. 한편 창공은 아스터의 말을 듣고 차오르는 흥분에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 말씀은."
"여러분과 동행하고 싶어요. 마침 륀 언니도 함께한다면서요? 받아주시면 나름 도움은 될 거랍니다."
"전에 듣기로 복음화성 소속 사제라 하셨습니다. 저희는 교단과는 관련이 없는 몸이고, 교단에서 위임받은 사무도 수행하고 있지 않은데 동행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서 상! 무슨 말이에요. RPG 안 해보셨어요? 아스터 씨만 끼면 저희 일행은 완전체가..."
"조용히 해."
히사시가 흥분한 얼굴로 창공에게 항변했지만 곧 매서운 눈빛과 마주하고는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일행들도 말은 안 했다 뿐이지 히사시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중이었으나, 창공이 이러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상당히 고도적인 자율성과 독립성이 보장되는 신분인 륀과는 달리, 아스터는 교단 소속 사제. 막말로 교구장이나 본 소속인 복음화성에서 아스터에게 복귀 명령을 내린다면 두말없이 따라야 했다.
또 창공 일행은 국왕에게 기사 작위까지 수여를 받았으니 이젠 온전히 정치 중립적인 집단이 될 수 없었다. 그런 그들과 사제인 아스터가 동행한다면 문제의 불씨가 될 소지가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아스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걱정을 불식시키려는 것처럼.
"그럼요. 전 복음화성 사제 중에서도 순회포교사제를 맡고 있답니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각 교구의 포교 태세를 점검하는 일을 하죠. 제가 감히 짐작하건대, 창공 님께선 어느 한곳에 정주할 생각이 없으시지요?"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정에 함께하는 것은 저에게 내려진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 같네요. 오히려 그 여정은 저의 여정이 될 거예요. 여러분이 떠도는 길 위가 저의 목적지가 될 거고요."
"야, 아스터."
파이프를 뻑뻑 빨아대던 륀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 지금 놀러 가는 거 아냐. 세상 사람들이 사제라고 해서 다들 친절히 대해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사제만 노리는 범죄자가 있을 수도..."
"그건 나도 알아, 언니."
하지만 아스터의 태도는 단호했다.
"나, 옛날 푸아송의 꼬마 아스터가 아냐. 당당한 사제라구. 세상을 떠돈 지는 벌써 1년이 넘었고. 어떤 위험이 있는진 나도 알아."
"그래도."
"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언니가 옆에 있을 거잖아?"
륀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떨궜다. 옛날 푸아송의 꼬마 아스터... 본인은 아니라고 했지만 륀의 마음속 아스터는 아직도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울보에다, 착해 빠지고 마음 여린 아가씨.
그런 동생이 너무나 걱정됐다. 게다가 혹시나 창공 일행이 나쁜 마음을 품는다면 험한 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 륀이 아무리 마법과 검술에 능하다 해도 계획을 짜 기습하는 다섯을 막아낼 수는 없는 법이니.
자신은 그런 위험 부담을 지고 창공 일행과 동행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동생을 거기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흑심을 품을 정도로 악인이었다면 아스터와 동행했을 적에 무슨 일이 낫겠지만, 본인도 모르는 게 사람 마음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제 륀이 아스터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제 8살이 아니라 성인이었고, 이곳은 푸아송 남작령이 아니라 알펜시아의 왕성이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아스터는 한 명의 사제였다. 지옥과도 같은 수련 생활을 거친.
"아휴..."
일행은 일제히 한숨을 쉬는 륀을 바라보았다.
"그래. 네 맘대로 해."
"환영합니다."
이에 창공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스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웃으며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누었다. 다른 일행들도 기쁜 마음으로 그녀를 환영했다. 다른 세상에 와서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아스터는 창공 일행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일행에 합류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말하자면 아스터는 일반적인 치료사가 아니라, 그 이상의 특별한 존재였다. 자신이 합류의 뜻을 나타냈을 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라 륀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임을 그녀도 알았다.
"그런데 아스터 씨."
"이제 일행이니 편하게 아스터라 불러주셔도 되는데..."
"그럴까요?"
"너 원래 그런 성격이었냐?"
륀은 아스터의 말에 뜨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짜 많이 변했구나..."
"말했잖아. 언니가 알던 내가 아니야. ...네, 창공 님."
"왜 동행을 하고 싶다는 거야? 륀은 모두들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거든. 그런데 네 말엔 그 이유가 없었어. 아, 오해하지는 말고. 모두들 널 환영하니까. 나까지 포함해서."
"후훗, 고마워요. 이유... 그러네요. 말하자면 어떤 계시랄까?"
"계시?"
"그런 게 있답니다. 때가 되면 말씀드릴게요."
"그래...?"
창공은 아스터의 완곡한 침묵 표현에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목적이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노릇. 다만 아스터가 악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했기에 굳이 캐묻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때가 되면 말하기로 했다면, 정말로 그렇게 한다는 뜻이었다.
이제 그가 어택을 바라보고, 어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새로 들어온 사람들을 다시 한번 환영할게. 이름들은 서로 아니까 지금에 와서 소개할 필요는 없겠고... 일단 우리 일행의 목적부터 말할게. 첫째, 원래 있었던 세상으로 돌아간다. 둘째, 이 세상의 균형을 바로잡는다."
"첫째는 당연하고... 균형?"
그는 륀의 물음에 그들이 알펜시아 산맥에서 겪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이미 창공과 다 이야기가 끝난 일이었기에 거침이 없었다. 사실 증거도 없어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쌍둥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어택의 설명을 들었다.
"왕들의 무덤이라."
어택의 이야기가 끝나고, 륀이 파이프를 잡으며 중얼거렸다.
"마법 때문에 지금까지 발견이 안 된 거라고? 그럴 수가. 그런 마법은 불가능한데..."
"저는 여러분을 믿어요."
아스터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순진하고 순수하기 때문에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었다. 교단에서는 에트로지들이 이 세상에 온 것이 짐작할 수 없는 신의 안배라고 여겼고, 신실한 사제인 아스터는 그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헛소리로 치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런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신의 뜻이, 그들의 믿음이 현실로 다가올 날을.
"아니, 뭐. 거짓말이라는 건 아니고."
륀이 다급하게 해명했다.
"내가 아는 선에선 불가능하다는 거지. 엘프들이라면, 그것도 엘프의 왕이 직접 꾸민 일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 애초에 인간에게 마법을 가르친 것도 엘프들이었으니까... 어쨌든 어택 당신 말에 따르면 지금 이 세상은 뭔가가 어긋나 있고, 당신들은 그 균형을 수복하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는 거네."
"맞아.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길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해."
"어쩜..."
아스터가 두 손을 맞잡았다.
"이게 바로 주님의 뜻일까요. 역시 여러분과 제가 만난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에요. 여러분과 끝까지 함께하겠어요. 그게 주께서 바라시는 저의 삶이겠죠."
"야, 아스터..."
"언니. 이건 운명이야. 언니가 함께하기로 한 것도 운명이고. 느껴지지 않아? 언니와 내가 이분들과 함께 걷게 될 운명이? 분명 그 끝은 영광으로 향하고 있을 거야. 주님의 뜻은 한낱 인간으로선 감히 파악할 수 없지만, 그분께서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는 건 할 수 있어. 아아... 이게 바로 그거였구나."
"천문점성학 마법사들이나 할 소릴. 어쨌든 좋아."
륀은 파이프를 빨며 생각에 잠겼다. 원래대로라면 충분히 데이터를 수집하고 빠져나갈 작정이었다. 애초에 그런 계약이었으니. 하지만 사랑하는 동생이 저들과 끝까지 함께한단다.
'걱정돼서 빠져나갈 수나 있을까.'
그녀는 고민을 담배 연기와 함께 후, 불어 내보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다. 우선 에트로지에 대한 자료 수집이라는 첫 번째 목적부터 달성해야 했다. 그건 확실하다. 그다음 문제는 말 그대로 그다음에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우리의 첫 목적지는 어디지?"
여기부턴 일행들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들의 이목이 창공에게 집중됐다.
"비타."
"비타라면... 아르토스 밑에 있는 섬? 거긴 아무도 안 살아. 아무것도 없고."
"전설은 있잖아?"
"허무맹랑한 전설 따위엔 관심 없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런데 내가 겪은 일은? 우리가 겪은 일은? 멀쩡히 살던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세상에 끌려왔어. 원래대로라면 이런 이야기 믿을 수나 있겠냐고."
"음..."
"그리고 왕들의 무덤도 마찬가지. 그건 이곳에서도 허무맹랑한 전설이었잖아. 그런데 결국 뭐였냐고. 합리의 기준은 상황에 따라 바뀌어야 해. 이젠 단순히 전설이라고 무시할 수가 없어. 전부 사실은 아니더라도, 일부 사실일 가능성. 그리고 그게 해 볼만하다면 난 그렇게 할 거야."
"그... 도 그렇네."
어차피 통상적으로 상정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마법으로 해결하는 것은 마법 교수인 륀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한 상황. 교단 쪽도 불가능하긴 마찬가지다.
인간 세상 제일의 신비를 다루는 두 집단이 그럴진대 나머지 인간들은 어림도 없다. 엘프라면 희망을 걸어볼 법도 하지만 무작정 찾아간다고 해서 만나줄 집단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건 왕들의 무덤과 같은 전설 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그 전설이 뭔데?"
"내가 도서관에서 찾은 책에 의하면, 그곳에 다른 세계로 통하는 구멍이 있다는 전설이 있다 하더라고. 나도 알아. 웃기지도 않는 소리인 거."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 나타나는 것처럼?"
"바로 그거야."
"그런데 창공아."
나유가 끼어들었다.
"그... 균형은?"
"솔직히 모르겠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럼 우리가 지구로 돌아가는 길이라도 모색해 봐야.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
"정녕 이것이 그분의 뜻이라면, 서로 나누어진 것처럼 보이는 두 길은 하나의 길일 테죠. 걱정 말아요. 우리 앞에 펼쳐진 이 길을 달리면 되니까."
"고마워, 아스터. 어쨌든 우선 비타로 가는 방법을 찾아야겠어. 지도상으로 봤을 땐 키르케나 아르토스 남부까지 가야 할 것 같은데..."
"아마 정기선은 없을 거야."
륀이 말했다.
"거주지도 없는 곳이니."
"정말 사람이 아예 안 사나요?"
그녀는 아린의 질문에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크기만 하지 실속이 없는 섬이야. 토질도 아주 나빠서 농경이 어렵고, 세상 맨 구석에 있어서 군사적인 가치도 없어. 키르케 해군에 수백 년 전에 아주 잠깐 주둔하다가 물러난 뒤론 아무도 그 땅에 살지 않아. 그 근처에서 조업하는 어부들이 파도가 거칠어지면 잠시 정박하는 식으로 사용한다곤 하지만."
"거기 뭐가 있을까요?"
"가 봐야지. 어차피 우린 밑져야 본전이야."
창공의 말에 일행들이 한숨만 내쉰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은,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왕성에서 쉬는 동안은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즐거웠지만 이제 나갈 때가 되니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그렇긴 해."
나유가 동의했다.
"뭐라도 해 보자. 내일 아침 눈 떠 보니 지구라면 좋겠지만, 이젠 그럴 수 없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 한 번 해 보자."
"남 상 말이 맞아요. 게다가 우리 밸런스도 잘 맞고..."
"밸런스? 무슨 밸런스요?"
"자, 봐요."
히사시가 일행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서 상이 리더면서 궁수. 어 상이 탱커. 남 상이 전사. 김 상이 바드. 륀 상이 마법사, 아스터 상이 힐러. 그리고 제가 요리사. 조합 멋지지 않나요?"
"듣고 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한데..."
"그런 것 같은 게 아니라 진짜라니까요."
"균형인가."
륀이 히사시의 말을 듣고 중얼거렸다.
"언니. 왜?"
"아니. 그냥 비슷한 말을 하던 교수가 옛날에 있었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적절한 균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래서 그걸로 마법의 발전에 어떤 식으로 기여할 거냐는 질문엔 대답하지 못해서 사장된 이론이지만."
"주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조화롭길 원하셔. 그런 의미의 균형이라면 맞는 말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건 마법적 해석이 아니야."
그녀가 코웃음을 치자 다른 일행들도 피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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