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66화 (66/178)

〈 66화 〉 시우를 만나다

* * *

"그러면 잘 가게, 창공 경. 나유 경..."

알펜은 일행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과연 왕관을 쓸 수 있었을 것인가. 공사가 다망한 가운데에서도 직접 왕성 문 앞까지 나와 그들을 배웅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요청하게.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얼마든지 조치할 터이니."

"감사합니다."

창공이 짧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끄덕인 알펜은 이제 쌍둥이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퐁파두르 교수. 그리고 아스터 사제. 부디 그들을 잘 부탁하네."

"그러죠."

"걱정 마세요."

그는 쌍둥이의 시원한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리 아네르들이 인정한 후계자라 한들 근본적으로 다른 세상에서 온 터라 다이셀리시아에 익숙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 쌍둥이들은 그 단점을 훌륭하게 보완해 줄 수 있었다.

"미안하게 됐군. 배가 뜨질 못해서."

떠난다는 말을 들은 카벨 자작이 일행에게 전했던 소식. 그것은 알펜시아의 해운이 완전히 봉쇄된다는 것이었다. 해군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새로운 왕이 즉위한 다음 왕립 해군을 해상 사열하는 알펜시아의 전통이 바로 그것이다.

이 거창한 행사는 단순한 관함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사열이 끝나고, 왕이 승함한 기함은 특별 편성된 호위전대의 호위를 받으며 알펜시아의 주요 항구들을 순항하며 태세를 정비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이 기간에는 혹시나 있을지 모를 공격을 차단하기 위하여 허가받은 군함과 민간 선박을 제외한 모든 배는 항구에 묶이게 된다. 더군다나 사령관인 에일스 백작이 대관식 이후에 충성 맹세를 했다고 해도, 아직까지 왕실에서는 왕립 해군을 온전히 신뢰하기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기함과 나머지 군함들에는 근위대가 편승하여 그들을 강력히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당연히 인력에 제한이 있으니 행렬도 그만큼 제한되었고, 순항전단의 화력도 줄게 된다.

화력이 줄었으니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자연스레 해상 통제와 검문은 더욱 심해진다. 그것이 아직도 불안의 씨앗이 내재된 알펜시아의 상황과 맞물려 강력한 봉쇄를 만들어냈다.

"원래대로라면 정해진 항로로만 운항하는 여객선까진 운항 허가를 정지시키진 않는데 말일세... 자네들도 짐작하고 있지 않은가. 부디 이해해 주게나."

"대신 마차가 있으니 상관없습니다."

그랬다. 알펜시아 왕실에선 바닷길이 막힌 창공 일행에게 다인승 마차와 얼마간의 유지비를 제공했다. 당연히 배를 이용하는 것이 창공 입장에선 빠르고 좋았지만 자기들이 이렇게 벌충하겠다면야 비난할 구실이 없었다.

"고맙네. 그럼 이제 정말 작별의 순간이로군."

"잘 가시게. 그대들의 앞날에 무한한 축복과 행운이 가득하길 빌겠네."

"예,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뵙겠습니다."

왕성의 대문이 덜컹거리며 열리고, 아스터가 모는 마차가 매끄럽게 길을 달려 빠져나왔다. 일행은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영송하는 왕실 인사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후... 이제 진짜 시작이네."

나유가 한숨을 내쉬며 어딘가 아쉬운 데가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왕성을 나왔다는 것은, 이제 맛있는 식사와 편한 잠자리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다만 그곳이 영원히 머물 수 없는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작은 위안을 삼는 수밖에.

"아스터 씨. 언제든지 힘들면 교대해요."

"고마워요."

히사시와 아스터는 크게 난 창문을 통해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과 마부석의 아스터 사이에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적절한 위치에 달린 큼지막한 창문 덕분에 의사소통을 하는 데엔 큰 지장이 없었다.

"..."

하지만 곧 적막이 내려앉고,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 이외엔 어느 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첫째로 미지의 여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둘째로 아스터와는 달리 쉬이 말을 붙이기 어려운 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행들이 그녀에게 말을 꺼내지 않으려 해도, 그녀는 일행들 사이에 녹아들어 갈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럼. 우리 앞으로 얼마나 보게 될지 모르는 사인데. 통성명은 다 했지만 물어볼 거라던가, 그런 거 없어?"

"마법사라고 하셨죠."

"그래."

륀은 히사시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한 번 볼 수 있겠습니까? 파이어볼이라던가."

"...당신은 내가 무슨 광대인 줄 알아?"

한껏 기대에 찬 말. 하지만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부심 높은 마법사라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들에게 마법이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신기한 무언가가 아닌,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진지한 학문이었으니까.

남 눈치를 보는 데 도가 튼 히사시는 자신이 뭔가를 잘못 말했다는 사실을 즉시 깨닫고 륀에게 사과를 건넸다.

"죄, 죄송합니다. 그런 의도는..."

"쯧... 됐어. 하긴 마법이 없는 세계에서 왔다니 그럴 수도 있겠네. 그렇게 보고 싶다면 못 보여 줄 건 없지."

그녀는 마차 한구석에 비스듬히 세워 두었던 지팡이를 잡고 중얼거렸다.

"Illubinamant."

동시에, 지팡이 끝 빈 공간에서 빛의 구체가 생성되었다. 하얀 빛으로 마차 안을 환하게 밝히던 광구는 이내 거짓말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일행들이 감탄사를 내뱉었지만 륀은 그저 담담한 표정만 지을 뿐이다.

"이런 거지. 나쁜 의도가 아니라는 건 알아. 하지만 명심해. 마법사들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좋아할 마법사 단 한 사람도 없어."

"알겠습니다."

다시 지팡이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던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유하게 대응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이래서야 금방 친해지기는 글러먹은 셈이었다.

'아니지. 그래도 할 말은 해야 되잖아. 음... 같이 지내다가 보면 어떻게 풀리겠지.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는데 저절로 안 가까워지고 배겨?'

"언니."

"응?"

"그거 한 번 보여주면 어때서 그래. 우리 사제들은 신성력을 남 앞에 드러내는 데에 전혀 거리낌이 없어. 오히려 보여주면 다들 좋아하시던걸?"

"너네랑 우리랑 같냐?"

"그래도. 게다가 우린 이제 한 일행이잖아. 서로 친절하게 대해야지."

"...알았어. 미안. 내가 조금 까칠했네."

"아닙니다. 제가 조심했어야 했는데."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아스터가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만들었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창공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무언가 실마리를 잡은 까닭이다.

그가 지금 고민하던 것은 일행에 대한 통제력 문제였다. 일단 나유, 아린, 어택, 히사시 이렇게 넷은 곁에 둔다면 거뜬히 통제할 수 있었다. 탄광에서 함께 목숨 걸고 탈출한 동료기도 하고, 내심 그를 리더로 인정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륀과 아스터는 아니다. 일단 신규 멤버인데다 지구에 본 적이 있는 나머지 일행과는 달리 창공을 떠나려면 얼마든지 떠날 수 있다. 게다가 륀에게는 명시적인 목적이 있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이세계인인 그들에 대한 자료 수집.

그 자료 수집이 끝나면 륀은 미련 없이 떠나버리면 그만이다. 지극히 비즈니스적인 관계다. 창공은 이것을 위험하게 생각했다. 비즈니스적인 관계는 관계에서 오는 이해득실을 따지기 때문에, 그들이 편익을 더 이상 제공할 수 없거나 편익보다 손해가 더 크다고 생각하면 륀은 미련 없이 일행에서 이탈할 것이다.

물론 그는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남들은 그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었다. 그가 먼저 남을 저버리기 전엔 남이 그를 저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문제는 륀을 어떻게 자신의 통제 하에 둘 것인가.

창공은 그 실마리를 방금 있었던 자매 간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었다. 자존심 강한 마법 교수인 륀도 아스터에겐 약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즉, 아스터를 같은 편으로 만들게 되면 자연스레 륀도 끌어안는 것이 가능해진다.

'자매애, 가족애... 그런 건가? 오랜만에 만난 동생이기도 하고. 어처구니없는 약점이네.'

그렇다면 이제 창공이 고민해야 할 점은 아스터를 제 사람으로 만드는 일뿐이다. 그렇지만 그 방법이 문제다. 그녀가 마냥 착하기만 해 보여도, 안에 숨겨진 심지는 상당히 곧은 사람이다. 굽어지되 꺾이지는 않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이유... 그러네요. 말하자면 어떤 계시랄까?]

[그런 게 있답니다. 때가 되면 말씀드릴게요.]

순간 아스터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랬다. 아스터도 어떤 목적이 있어 일행에 낀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두 가지로 압축이 된다.

첫째. 아스터의 목적을 알아내고, 그것을 이용한다.

둘째. 아스터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든다. 나유와 아린만큼이나.

그가 생각하기에 첫 번째보다는 두 번째 방법이 더 쉬워 보였다. 일단 마음만 먹으면 여자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난관이 있었다. 아스터가 사제라는 것.

"아스터. 그러고 보니까 갑자기 궁금한 게 하나 생겨서."

"아, 네. 창공 님! 얼마든지 여쭤보세요."

"아스터는 사제잖아. 그런데 우리가 원래 살던 곳에서 사제들은 결혼하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었거든? 여기 사제들도 그래?"

"아하, 순결의 의무 말이군요. 단도직입적으로, 사제들도 결혼을 한답니다."

"어, 그래?"

"진짜요?"

"와... 진짜 여기가 다른 세상이긴 하구나."

그녀의 말엔 창공뿐만이 아니라 원래 지구 출신인 다른 일행들도 놀라움을 표했다. 하긴 지구에서도 모든 종교인이 순결 서약을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관념은 그렇게 형성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내 너희에게 생명을 주었으니, 마땅히 번성하여 퍼져나갈지어다.' 창세기 8장 3절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이에요. 사제라면 주님의 말씀을 더 철저히 따라야겠죠. 오히려 교단에서는 성직자들에 대해 결혼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어요."

"그러면 혼전순결 같은 개념도 없나?"

"혼전순결 말인가요? 그것만큼은 철저하게 지켜야 해요. 물론 상대방이 이미 아내나 지아비가 있는 상태라면 그 사람에겐 해당하지 않지만요."

"그렇다는 말은, 반드시 일부일처가 아니라도 된다는 거네?"

"물론이죠. 일부다처, 일처다부. 적법한 혼인 관계라면 허용하고 있어요. 다만 일부다처라면 남성분은 많이 힘드실 수도... 일단 자신과 혼인한 아내가 있다면 반드시 그 사이에서 아이를 보아야 하니까요."

일부다처라는 말에 나유와 아린의 시선이 잠시

"그런 규칙도 있어?"

"강제되는 건 아니에요. 불운으로 인해 수태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여성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권장하고 있어요."

아스터의 말에 나유가 생글생글 웃었다.

"나 좀 어질어질한데?"

"앗, 조금 더 조심스럽게 운전할게요."

"아니 그 얘기가 아니라..."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렸고, 다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 당신들 세상은 일부일처에, 성직자들은 결혼도 못 한다는 거야?"

유일하게 웃지 못한 단 한 사람, 륀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신기하네. 그게 말이 되나? 성욕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잖아. 그걸 평생 참는 게 가능이나 한 소리야? 내 생각엔, 그런 세상에서 성직자들은 오히려 뒤로 문란하게 놀 것 같은데."

"모든 성직자가 그런 건 아니지만, 확실히 그런 쪽으로 크게 터진 적이 몇 번 있어요."

그녀의 말에 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거 봐. 그럴 줄 알았어. 자연스럽고 기본적인 욕구는 무작정 금지하는 게 아니라, 적절하게 해소할 방법을 만들어 줄 필요가 있다니까. 밥을 안 먹으면 굶어 죽고, 잠을 안 자면 지쳐 쓰러지는 것처럼. 성욕도 마찬가지인 거지. 내 생각에 당신들 세상의 규칙은 비합리적인 것 같아."

"하지만 욕망을 제어하려는 그 행위에 숭고함이 있는 거죠. 실수는 하고, 완벽하지도 않아요. 인간이니까요. 하지만 자신의 욕망에 대한 억제를 통해 짐승들과는 다른 인간의 존엄함이 탄생한다고 생각해요. 도덕과 예절은 더 큰 힘의 지배라는 자연의 법칙을 그대로 따른다면 탄생할 수 없는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음... 그거 괜찮은 말인데. 적을 필요가 있겠어."

륀은 가방에서 깃펜과 수첩을 꺼내 글을 끄적였다. 그런데 깃펜을 쓰려면 으레 잉크를 먼저 찍는 법인데, 마치 연필이나 볼펜을 쓰는 것처럼 깃펜을 쓰는 게 아닌가.

"마법 깃펜?"

그 모습에 나유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했다.

"맞아. 정확한 명칭은 '라슬로 펜'이지만. 350년쯤 전에 라슬로 마공학 교수가 개발한 마도구지. 보는 것처럼 잉크 없이도 글을 쓸 수 있어. 신기하지? 그쪽 세상에는 마법이 없으니까 이런 것도 없겠네?"

"많은데."

"뭐? 거짓말!"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륀. 그러나 오히려 믿을 수 없는 쪽은 지구에서 넘어온 일행들이었다. 잉크 없이 글씨를 쓰는 데 왜 마법까지 필요하단 말인가.

"여긴 흑연도 없어?"

"흑연? 확실히 문지르면 검댕 같은 게 묻어 나오긴 하니까 글씨를 쓸 순 있겠지만... 그건 너무 잘 부서지잖아. 필기구로는 못 써."

"무르긴 하지만 그 정도까진 아닌데..."

"그거 흥미가 동하는데. 나중에 자세히 얘기해 줘. 마공학 교수들이 들으면 미쳐버릴걸?"

대화를 가만히 듣던 어택에게 한 의문이 떠올랐다. 저렇게 편한 도구가 있는데, 왜 왕성에서 저런 필기구를 듣도 보도 못한 것일까?

이윽고 그의 질문을 들은 륀은 그에게 필기구를 넘겼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필기해 봐. 그 깃펜은 사용자의 마나를 흡수해 펜촉에서 적당한 정도의 열을 내서 종이를 그을리는 거야. 색깔도 진하면서 종이가 불에 타 구멍이 뚫리지 않을 정도의 온도를 찾는 데에 엄청 고생했다고 하더라. 어쨌든 들어서 알겠지만, 극소량의 마나를 가진 대다수의 인간들은 이 깃펜을 쓰는 데에 무리가 있어. 마법사나 마나 유저 정도는 되어야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말이지. 어때? 실제로 몇 글자 적으니까 더 이상 못 쓰겠지?"

"아, 다 적었다."

"뭐어?"

어택이 륀에게 깃펜과 수첩을 넘겼고, 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어 세심하게 살폈다. 하지만 몇 번을 눈을 깜빡여도, 분명 수첩 위에 적힌 글은 그녀가 방금 했던 말 그대로였다.

"이럴 수가... 어택 당신도 마나 유저였다고?"

"나도 처음 알았는데... 난 창공이나 나유처럼 무기에 마나를 담아 본 적이 없거든."

"서창공이야 알고 있었지만 남나유 당신까지?"

"한 번 뿐이었지만."

"아니 뭐야. 그럼 대체?"

그녀의 눈길이 히사시를 향했다. 창공, 어택, 나유에겐 실사용이 가능한 만큼의 마나가 있다. 마나를 담은 연주로 룬덴을 뒤집어 놓았던 아린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히사시가 아니겠는가.

"...당신도 한 번 해 봐. 아까도 말했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몇 글자도 채 적지 못해."

"네, 네..."

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깃펜을 건네받아 아무 말이나 필기를 시작했고, 마치 당연한 것처럼 깃펜 끝에서 글자가 쓰였다. 히사시의 글씨가 한 페이지를 빼곡히 채우자, 륀은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이건 대발견이야! 멍청한 브레히트 교수 같으니. 해부를 할 게 아니라 다른 실험을 먼저 했어야지!"

"해부라고...?"

어쩐지 불길한 그 뉘앙스에 나유가 찜찜하게 중얼거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륀은 흥분에 가득 차선 혼잣말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들과 만난 건 내 인생에서 정말 크나큰 행운이야! 앞으로도 우리 여러 가지 해 보자고! 당신들이 나를 도와주는 만큼, 나도 당신들을 도와줄 테니까... 오, 세상에. 벌써 논문 한 편이 뚝딱 만들어지겠는데?"

"아니 방금 해부..."

"걱정하지 마. 에트로지에 대한 해부는 의미 있는 신지식의 발견이라는 측면에서 그다지 쓸모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 지 오래니까."

"돌겠네."

나유는 귀중한 결론을 내리느라 희생된 이름 모를 지구인을 위해 짧게 명복을 빌었다.

* * *

"이제 곧 해가 저물겠어요. 쉴 곳을 찾아야겠네요."

아스터가 창 안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붉게 타오르는 석양이 창가를 비추고 있었다. 밤이 완전한 어둠을 의미하는 다이셀리시아에선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곤 밤에 움직이지 않는 것이 현명했다.

다행히 그들은 현재 어느 마을 안에 있었기에 노숙을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마을 풍경이 참 이상했다. 마치 불이 난 것처럼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아닌가.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광경에 히사시가 중얼거렸다.

"꼭 온천 마을같이 생겼네요."

"어떻게 아셨나요? 여기 바스는 온천으로 유명한 휴양지에요."

"어, 진짜요? 온천이요?"

온천이라는 말에 일본인인 히사시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유와 아린도 마찬가지. 뜨끈한 온천에 몸을 푹 담그고 휴식을 취하는 상상만으로도 몸에 활력이 도는 기분이었다.

"온천 좋지. 내가 낼 테니까 가장 좋은 곳으로 가자고. 전에 듣기로 여기 싸구려는 혼탕이라고 하더라."

공짜라면 양잿물도 들이킨다 하던가. 일행은 흔쾌히 동의했다.

"그런데 언니. 가장 좋은 곳이 어디야?"

"뻔하지. 가장 크거나, 가장 외관이 화려하거나."

"음... 아, 저기면 되려나?"

아스터가 일행을 이끈 곳은 규모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대리석으로 장식된 외관은 평범한 목조나 석조 건물인 주변에 비해 독보적이었다.

"어서 오세요!"

건물 바깥에서 나다니는 사람들을 지켜보던 한 여성이 다가와 마차에서 내리는 일행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차는 저에게 주시면 안전하게 주차해 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아스터가 마부석에서 내려와 여인에게 고삐를 건네니, 익숙하다는 양 마차를 몰고 사라진다.

"야, 창공아. 여기 발레파킹도 해 준다."

"그러게요. 생각보다 제대론데?"

의외로 선진적인 모습에 기대감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말쑥한 모습의 남자가 카운터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안녕하..."

창공 일행을 바라보며 인사를 하던 남자가 그대로 정지했다. 그런데 그것은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히는 지구에서 온 다섯 명만. 그렇게 멍청하게 서로를 바라보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조심스레 입을 여는 그들의 표정이 당황에서 점점 알 수 없는 반가움으로 물들어간다. 분명 처음 보는 생면부지의 사람이건만, 도대체 왜 이리 정겨운 느낌이 드는 것일까. 그들은 그 정답을 알고 있었다.

"한국인?"

"한국인이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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