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시우를 만나다 (2)
* * *
때아닌 만남의 광장이 알펜시아의 작은 휴양지에서 열리게 되었다.
온천으로 유명한 소도시 바스의 한 온천 여관, '온천의 마을'의 주인은 다름 아닌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비록 쌍둥이를 포함한 다이셀리시아의 주민들에겐 그저 에트로지 중 하나일 뿐이었으나, 지구에서 넘어온 일행에겐 그 의미가 남달랐다.
특히 새까만 머리와 새까만 눈동자는 차치하고서라도, 그 동양적인 느낌. 그중에서도 한국인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얼굴은 마치 지옥에서 만난 지장보살과도 같은 반가움을 자아냈다.
아니, 단순한 한국인이 아니었다. 어딘가 우수에 젖은 눈빛에 오뚝한 콧날, 남자다우면서도 동시에 말끔한 생김새의 얼굴형. 남자조차 감탄할 정도의 미남이다.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나유와 아린조차 멈칫할 정도로.
도대체 저 얼굴로 꾀지 못할 여자가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있을 수 없으리라. 창공도 눈매가 워낙에 날카로워서 그렇지 어디 가서 꿇릴 외모는 아니었지만, 그런 그도 이 한국인 앞에선 한 수 접어야 할 정도였다.
"이야, 이거 반갑습니다. 하. 진짜 장난 아니네요."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에선 마치 빛이 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한시우라고 합니다."
"서창공입니다."
얼이 빠진 일행들을 대신해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눈 것은 역시 창공이었다.
"어택입니다."
"어, 해군이시네."
"고다 히사시라고 합니다."
"오... 일본인?"
그렇게 일행들은 어딘가에 홀린 것처럼 멍한 얼굴로 시우와 인사를 나누었다. 륀과 아스터까지 그를 빤히 바라볼 정도였으니, 실로 그의 외모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남음이 있었다.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아니 언제 넘어오셨어요?"
"이거 운영하시는 거예요?"
시우는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질문에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여자 일행들은 마치 자신들이 엄청난 죽을죄를 지은 것과 같은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영문 모를 감정이었지만, 실제로 그런 것을 어쩌겠는가.
"여기는 로빈데 여기서 이러면 안 되지."
결국 상황을 정리하는 것은 어택의 몫이었다.
"이러면 시우 씨도 곤란하실 거 아냐. 죄송합니다. 방 먼저 잡아 주실래요?"
"괜찮습니다. 저도 오랜만에 같은 나라 사람 보니 반갑네요. 네... 당연히 방 있고요. 어떻게 나눠 드릴까요? 3인실 4인실 이렇게 해 드릴까요?"
"어..."
"나누는 게 좋지."
륀이 끼어들었다.
"남자들 3인실 쓰고 여자들 쓸 2인실 2개 주시면 되겠어요."
"아뇨, 남자도 방 두 개 주세요. 2인실 하나랑 1인실 하나."
갑자기 나서 배치를 바꾼 나유. 륀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나유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뿐.
"우리 대빵인데 취급은 제대로 해 줘야지."
"하... 돈은 내가 내는데 말이지. 남자들? 불만 없어?"
어택과 히사시는 괘념치 않아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유가 왜 창공의 방을 나누려고 하는지 모를 그들이 아니었고, 괜히 나서서 반대하다간 무슨 상황에 처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나유의 말이 그렇게까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특히 군인이었던 어택은 일행의 지휘자인 창공이 개인실을 써야 한다는 의견에 그다지 반발심이 생기지 않았고 말이다.
"의외네. 그럼 그렇게 하자고."
"네. 그럼 2인실 셋에 1인실 하나 드리겠습니다. 1박에 총 75키트입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직 안 드셨으면 저랑 같이 하시죠."
"좋습니다."
창공은 흔쾌히 시우의 제안을 수락했다. 마침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고, 일행들도 그것을 원할 것임이 너무나도 자명했다.
"시우!"
그때, 방금 전 바깥에서 일행의 마차를 맡았던 여인이 로비 안으로 들어왔다. 이상하게 떠들썩한 분위기를 감지한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요? 왜 손님들을 이렇게 세워 두고..."
"아멜리아."
시우가 그녀에게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어."
"반가운... 손님...?"
"이따가 말해 줄게. 오늘은 더 이상 손님 받지 말자. 주방에 가서 루미네한테 말 좀 전해 줄래? 오늘은 밥을 하라고. 20인분쯤."
"그렇게나 많이요?"
"괜찮으니까."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각자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온천은 어떻게 됩니까?"
"죄송하지만 개별 탕이 딸린 방은 다 나가서요. 대신에 일행분들이 쓰실 탕으로 두 개 드릴게요. 공용 대욕탕은 안 쓰실 거죠?"
"네. 그렇게 해 주시죠."
"알겠습니다."
* * *
"우와, 진짜 밥이다! 그 밥이 이 밥이었구나!"
나유가 밥그릇을 받아 들고선 행복하게 외쳤다. 다른 일행들도 그녀처럼 말은 안 했다 뿐이지, 다들 엄청나게 기꺼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지어 창공도 빛나는 눈빛으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하얀 쌀밥을 응시하고 있었으니 오죽할까.
다만 륀과 아스터는 조금 곤란한 기색이었다. 그녀들로선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 당연했다.
"두 분께선 익숙하지 않으시죠? 빵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럼 전 그렇게."
"저는 괜찮아요. 감사히 먹겠습니다."
륀은 빵과 버터를 요청했고, 주어진 것에 순응하는 사제인 아스터는 밥을 한 번 먹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머지 다섯은 벌써부터 식욕이 동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의 쌀밥이란 말인가. 거기에 숟가락과 젓가락까지. 마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지구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광산을 탈출한 그날 밤 산 위에서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이야기할 때가 문득 떠올랐다. 치맥부터 바나나우유까지 나왔지만, 역시 결론은 히사시가 제시했던 따끈한 밥으로 귀결되었더랬다.
그간 밥이 질려 라면을 끓여먹었던 지구에서의 자신을 얼마나 원망했던가. 그런데 이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밥공기를 받고 나니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더 있으니까 많이들 먹어."
연한 금빛 머리카락에, 태양을 연상시키는 주홍빛 눈동자.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하얀 꽃. 그들에게 밥을 퍼 준 여인은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식사를 권했다.
"수고했어, 루미네."
"아니야. 오랜만에 밥을 하라길래 뭐지 싶었는데, 네 고향에서 찾아온 분들이었구나?"
"모나랑 샤론은?"
"밥만 하고 나갔어. 브리스톨에 다녀온다나. 만날 사람이 있다더라. 내일 돌아올 거래."
"그렇구나. 브리스톨이면 그냥 오늘은 쉬고 내일 출발하는 게 낫지 않았으려나.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걔네들이 별일 있을 애들이야? 뭐,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 시우한테서 영영 떨어져 나갈 테니까."
"루미네."
"아멜리아. 너도 마찬가지야."
"무슨 소리죠?"
시우가 곤란하다는 얼굴로 두 여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천만다행히 창공 일행은 오랜만의 밥을 만끽하느라 이쪽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륀과 아스터는 의도적으로 시선을 피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너, 저번에 빨래한다고 하더니 몰래 시우 옷 빼가서 냄새 맡더라?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진짜, 소름 끼치고 역겹더라."
"그런...!"
"루미네."
그녀는 시우의 낮은 목소리에 몸을 움찔거렸지만 그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손님들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만해."
"지금 나 앞에서 저 여자 편드는 거야?"
"너 오늘 왜 이러는 거야. 그만하고 밥 먹자. 갑자기 왜 이래."
탁!
시우가 루미네를 말리려 그녀의 손목에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날쌔게 쳐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이쯤 되자 아무리 즐거운 식사에 빠진 지구인들이라 하더라도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딱히 불쾌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침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한 광경이랄까. 특히나 창공에겐 더욱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방금 전까지 훈훈하게 밥을 퍼주었던 루미네는 잠시 시우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향했다. 시우는 제 손을 문지르며 루미네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방을 나서는가 싶던 루미네는 순간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시우를 바라봤다.
"...죽어 버려."
쾅.
문이 닫히고, 루미네의 모습이 사라졌다.
"참기가 어렵네요, 정말."
"아멜리아. 너까지 그러지 말고."
"시우의 손님 앞에서 저런 무례한 행동을 한다는 건, 시우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걸 모르는 걸까요. 언젠가 한 번 따끔하게 혼내야겠네요."
"자, 자. 밥부터 먹자. 죄송합니다, 여러분."
"아닙니다."
이렇게 재밌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는데 왜 그들이 시우에게 사과를 요구한단 말인가. 하나 재밌는 거 보여줘서 고맙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저 속으로 웃을 따름이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창공은 나유가 그의 여자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루미네처럼 행동하는 게 어쩌면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당연히 상대방을 독점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하하...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아멜리아 씨, 루미네 씨에 방금 전 두 분까지 합쳐서. 여자 친구만 총 네 분이 계시는 겁니까?"
"사실 다 제 아내 됩니다."
히사시가 경악의 외침을 내뱉었다.
"예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이 세상에선 일부다처가 허용되잖아요. 그리고 넷이 아니라 다섯이고요..."
"한 명이 더...?"
"정식 혼인 관계는 아니지만요. 그분께선 일국의 공작이셔서 조금 곤란한 모양이에요. 저는 상관없지만."
"공작..."
"저에겐 그저 검술을 가르쳐 주신 고마운 스승님이세요.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제가 바라보는 것과 남들이 바라보는 것은 다르니까요."
시우는 그저 공작이라며 얼버무렸지만, 여공작이 그렇게 흔한 존재는 아니었다. 게다가 28세라 자신의 나이를 밝힌 시우의 연인이 되었다면 나이 차가 많이 나지는 않을 터. 다이셀리시아의 주민인 륀과 아스터는 그 공작이 누군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엘로아 티페레트 공작. 도대체 어떻게 일개 에트로지가 공작을... 하긴 저 얼굴이면 불가능한 건 아니지.'
륀은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엘로아 티페레트. 뛰어난 무술 솜씨로 여러 방랑 기사들을 굴복시키며 무차별 주종 계약을 체결한 키르케 왕국의 공작인 그녀는 일명 '계약의 공작'이라 불렸으나, 결국 남자의 품을 선망하는 여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밥은 입맛에 맞으신가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쌀이 날 줄은..."
"키르케 북부에 나르보넨 산맥과 맞닿은 지방에서 쌀이 나는 모양이에요. 비가 많이 와서 밀 농사가 어려운 대신 쌀 농사를 짓는다고 하더라고요."
"아하."
"하지만 제가 알기로 쌀은 이렇게 요리를 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실은 전 처음 먹어 보네요."
시우는 아스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실 테죠. 제가 그쪽 지방에도 가 본 적이 있는데, 전부 다 죽 비슷하게 해서 먹더군요. 이건 저희 세상에서 쌀을 요리하는 방법이에요."
"입안에서 끈적거려서 신기한데요?"
"익숙하지 않으실 텐데 잘 드셔서 다행이네요."
누군가에겐 행복했던, 누군가에겐 어영부영했던 식사가 끝나자 아멜리아가 차와 디저트를 내왔다. 시우는 그들에게 그간 자신이 겪었던 일을 털어놓았는데, 그의 이야기는 상당히 듣는 재미가 있었다.
6년 전 알펜시아의 어느 숲에 떨어진 그는 남대륙에서 눈을 뜬 창공 일행처럼 노역을 하진 않았지만 혼자이기에 오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런 와중 세상을 여행하던 루미네와 만나고, 북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을의 의뢰를 해결하고, 다른 인연을 만나고, 온갖 위기와 행운을 체험했다.
그러던 끝에 결국 연인들과 한곳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바스를 택했고, 지금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오... 대단해..."
나유가 박수를 쳤다. 하지만 시우는 은은하게 웃으며 차를 홀짝일 뿐이었다.
"저는 한 게 없어요. 다 제 아내들이 해 준 덕분이죠."
"그런데 정착이라고 하시면 지구로는 안 돌아가실 겁니까?"
그는 간단히 고개를 저으며 창공의 물음에 응답했다.
"전 여기서 행복하니까요. 가족이라고 부를 사람도 없고..."
"그러시군요. 저흰 돌아갈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상황이 다르니까요. 꼭 돌아가시길."
시우의 목소리에선 정말로 지구에 대한 미련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이곳이 원래 그가 태어난 세상이고, 지구가 이세계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투였다.
"하아...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네. 처음에는 지구로 돌아가고 싶었죠. 전 그냥 평범한 대학생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방법이 안 보이는데 뭘 어쩌겠어요."
"..."
"다방면으로 알아봤죠. 난 왜 이 세상에 온 걸까. 어떻게 하면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데 글쎄요. 답이 안 보여요. 그나마 남아있던 미련도 제 아내들을 만나서 다 사라졌고요."
그는 한쪽 팔로 아멜리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가족이 여기 있으니까요. 여러분에겐 지구에 미련이 있는 이유가 있겠죠. 그러니까 돌아가려고 하시는 거고."
물론 그랬다.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사람도 있었고, 가족이 그리운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지구의 문명이 없으면 못 사는 사람도.
하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
오직 나유만이 시우의 말에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모든 것을 가지지 못했으나 오로지 돈을 가졌던 그녀. 그러나 돈은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지 못했다. 삶의 이유가 없는 나날.
그리고 그녀는 지구 아닌 다른 세상에 와서야 겨우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오직 창공의 곁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아린을 허락했다. 두려워서.
세게 움켜쥐면 손가락 틈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그를 두고 아린과 다투면 연인인 창공이 멀어질까 두려워서. 좋은 동생인 아린이 멀어질까 두려워서. 그래서 허락했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미련하고 바보 같은, 사랑에 눈먼 여자라는걸.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연인에게 바친 그녀는,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
하지만 지구에 돌아가도 이 관계가 계속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한 명에 한 명의 상대만이 허락되는 한국에서 자신이 선택받을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지구로 돌아가지 못해도... 아니. 어쩌면 지구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바라는 자신의 마음을.
"그런데 여러분은 어떤가요? 다행히 어느 정도는 잘 풀리신 것 같은데..."
"처음엔 많이 어려웠습니다."
그는 탄광 이야기를 듣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은 남대륙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기에 발도 안 들였었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한 탓이었다.
왕들의 무덤 이야기는 숨겼지만 알펜시아 산맥에서 왕자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시우는 쓴웃음을 흘렸다. 아마 이 행적은 알펜 2세 인생의 최대 오점이 되리라.
그래도 그 이후는 비교적 괜찮은 분위기였다. 대관식을 치르고, 기사로 서임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시우는 축하를 건네왔다.
"이야, 그러면 교수님이랑 사제분을 빼고 전부 기사이신 거네요?"
"사실 지구로 돌아가면 의미 없지만요."
"...아. 그렇구나."
너무나 담담한 창공의 태도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시우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느새 이곳의 주민이 다 되었음을 느끼며.
"그래도 엄청 잘 풀리신 거죠. 이렇게 괜찮은 일행분들도 만나고.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도 많이 봤어요. 네. 지구에서 넘어온 사람들 중에요. 물론 여러분들처럼 탄광에서 노예 노동을 하는 것보단 낫겠죠. 그래도 제가 봤을 땐 북대륙이라고 딱히 편한 건 아니었어요. 도적으로 맞닥뜨려서 결국엔 죽여야 했던 사람도 있었고..."
"으휴."
어택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 뒤로도 시우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하나같이 불편한 것들뿐이었다. 끝내 굶어 죽은 지구인, 도와줬더니 밤새 지갑을 들고 날라버린 지구인, 삶의 희망이 없다며 자살한 지구인 등등...
"세상에."
아스터가 눈을 감으며 두 손을 맞잡고 기도했다. 시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이런. 괜히 불편하게 만들었네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일어나시죠. 온천으로 안내할게요."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묵묵히 시우와 아멜리아의 뒤를 따랐다. 희망찬 이야기라곤 말하기 어려웠기에 가슴속에 무거운 돌덩이가 하나 올라앉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창공은 시우와의 대화가 꽤나 괜찮았다고 생각했다. 까놓고 이야기해 이세계에 온 것 자체가 불행이었지만, 차라리 그들의 경우는 그중에서도 행운이라고 부를 만했다.
어쨌거나 왕에게서 기사 서임까지 받았고, 륀과 아스터까지 일행에 합류했다. 일행 입장에서는 이렇게 일이 잘 풀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연승 뒤의 패배는 크게 다가오는 법. 항상 운이 좋을 수는 없고, 언젠간 좌절과 낙심의 순간도 반드시 온다. 시우가 그들에게 해 준 말은 말하자면 약한 예방주사와도 같았다.
뒤집힐 수 없는 절대 명제. 이 세상은 그들을 위한 세상이 아니었다.
'그래도 날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있지.'
그는 아린을 부르며 그녀를 붙잡았다. 선도하던 시우와 아멜리아를 포함해 모든 일행이 발걸음을 멈췄지만, 창공은 곧 끝날 이야기라며 앞서가도록 했다.
"할 말 있어요?"
"어. 어느 정도 몸 담그다가 내 방으로 와."
"오, 오, 오빠... 방으로요...?"
그녀는 창공의 말뜻을 깨달았는지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다. 하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있겠는가.
"오늘 괜찮지?"
"괜찮기는 한데..."
"그럼 됐잖아. 자, 가자."
창공은 아린의 등을 떠밀며 걸음을 재촉했다. 곧 있을 일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뻐근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