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언니의 이름으로 (2)
* * *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러니까... 당신들. 음."
륀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풍부한 마나를 가진 사람이 그렇게나 희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섯 명을 조사해서 전부 다 그랬을 경우는 얼마나 될까?
"모든 에트로지들이 다 이런가? 허, 참. 바투타 교수는 멍청이였어."
"바투타 교수?"
"그런 사람이 있어."
그녀는 아린의 의문을 일축했다. 들어서 좋은 말이 아니었기에. 바투타 교수는 레티오키 출신의 마법생물학 교수로, 학구열이 조금... 지나친 자였다. 에트로지들에게 지대한 흥미를 느꼈던 그는 그들 중 하나를 납치하여 해부한 전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마법 생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 차례에 걸친 해부 끝에 그가 얻은 결론은,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바투타 교수는 해부를 해서 목숨을 끊어놓기 전에 다른 간단한 실험들을 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결국 쓸데없는 인체 실험을 했다며 토리오 지부로 파견됐던가. 말이 파견이지 좌천이지만.'
정말 멍청이가 따로 없었다. 륀을 보라. 충분히 이성적인 방법을 사용하면 협조적인 태도 아래 더 간단하게 심층적인 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다. 교수라는 작자가 일단 칼부터 빼들고 보니 그런 꼴이 나는 게 아니겠는가. 다 자신의 업보였다.
어쨌거나 이 일은 창공 일행이 들어서 좋을 것이 하나 없었다. 앞으로도 계속. 영원히.
"정말 마법이 없는 세상에서 온 거 맞아? 에트로지... 당신들은 뭐라고 자신을 지칭하지?"
"지구인."
"그래, 지구인. 그쪽 세상 이름이 지구인가 봐? 아무튼. 이런 마나를 가지고도 마법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돼. 아무리 그래도 마법이 발현되지 않을 리가 있나."
그녀는 팔짱을 끼고 침음을 흘렸다. 하기야 어쩌면 창공 일행이 특수한 경우고, 나머지 지구인들은 다이셀리시아의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대다수가 극히 적인 마나를 가진 사람들일 수도 있었다.
결국 연구를 더 해 봐야 하는 문제였다. 그렇지만 에트로지를 흔히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만난다 하더라도 제 몸에 지팡이가 닿는 것을 순순히 지켜볼 이는 더더욱 없었다.
어쩌겠는가. 바투타 교수의 성급함을 다시 한번 욕하는 수밖에.
"좋아. 앞으로 더 연구를 해 보겠어. 지금처럼 협조해 준다면 나도 당신들에게 협력할게. 당연히 모든 실험은 하기 전에 충분한 설명과 동의하는 과정이 있을 거고. 안심해도 좋아."
한편, 창공은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바다 위에 보름달이 떴던 그날 밤을 떠올리며.
[비아투 탄광이요...]
그들이 노역했던 트리스카의 탄광. 그 비아투 탄광의 이름을 듣자 잠깐. 아주 잠깐이지만 륀은 분명 반응을 보였었다.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다. 륀 자신이 관련이 있을 경우. 웨리, 즉 마법사 집단이 관련이 있을 경우.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썩 개운치 않은 느낌으로 창공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해결을 해야 하는 문제라는 뜻이다. 그러나 뭔가 추궁할 수 있는 단서가 부족했다. 설령 륀이 비아투 탄광과 관련이 있다 한들 부정해 버리면 창공으로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혹은 창공이 륀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순순히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상황에선 공허한 소리에 불과했다.
창공이 순순히 그녀를 일행에 맞아들인 이유는 리스크에 비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더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찜찜한 것은 찜찜한 것. 일단은 그가 안고 가야 할 문제다.
"그리고 당신."
"네?"
이번에 륀이 선택한 사냥감은 아린이었다.
"저번엔 연주 잘 들었어."
"아! 저도요!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연주 이야기가 나오자 창문 너머에서 마차를 몰던 아스터도 크게 소리쳐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그래도 그건 저뿐만이 아니라 지휘자인 오빠랑 합창단 분들도..."
"당신 연주가 없었다면 다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어쨌든, 내 생각엔 그 연주. 마나를 이용했던 것 같은데. 맞아?"
"네."
아린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에서도 그랬어? 아니지?"
"지구에선 마법이니 마나니 하는 개념이 없으니까요. 아, 설마 제가 한 게 마법인가요?"
"마나를 사용한다고 해서 다 마법이 아니야. 음... 언제 처음으로 그런 연주를?"
"얼마 안 됐어요."
분명 궁술 제전 도중 길거리 버스킹에서였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생각으로, 어떤 느낌으로 마나 연주를 하는지 륀에게 설명했다. 마나에 대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니 설명은 느리고 추상적이었지만 천재 교수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 심상이라. 사람들이 환희에 젖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연주하니 그렇게 됐단 말이지. 혹시 이렇게는 해 봤어? 몸이 가뿐해지길 바라며, 혹은 피로가 풀리길 바라며 연주를."
"아뇨."
"다음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당신들... 그러니까 우리 여정에 도움이 될지도 몰라.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지."
"아! 바드!"
히사시가 무릎을 탁, 쳤다. 과연 그랬다. 만약 륀의 말대로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창공 일행에게 이로운 효과를 주거나, 혹은 적들에게 연주를 들려줘서 동작을 굼뜨게 하거나 하는 일들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서창공. 당신도 마찬가지야. 화살 한 번 쏴 보자구."
"좋아."
그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실험이라면 얼마든지 응할 수 있었다. 결국 몸이 달아오른 것은 나유와 어택, 그리고 히사시였다. 과열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륀이 손을 내저으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자, 자. 진정들 하고. 어차피 당신들 관심사는 그거 아냐? 무기에 마나를 담는 방법. 알다시피 난 마법사고, 우리가 마나를 사용하는 방법은 전사들이 마나를 사용하는 방법과는 달라. 하지만 어떤 느낌인지는 알려줄 수 있지."
* * *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나유와 어택은 중간중간 마차를 세우고 쉬는 도중에도 쌍둥이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아스터는 당연히 응했고, 동생이 응하자 륀도 동의했다.
찌르기 위주의 검법을 사용하는 아스터, 베기 위주의 검법을 사용하는 륀. 이 둘과의 대련은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었다. 게다가 근위대에게 짤막한 기간이긴 하지만 검에 대해 배웠던 그들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 실력은 날이 갈수록 늘 것이 자명했다.
"후우! 제법인데요?"
과연 그 경험들이 헛되지 않았던 것인지 처음 만났을 땐 일방적이기 그지없었던 대련은 나름 맞붙어 볼 만한 정도까지 수준이 올라왔다. 여유롭게 나유와 어택을 상대하던 아스터는 땀방울을 흘리며 그들의 실력을 칭찬했다.
륀도 말만 안 했다 뿐이지, 나름의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법 생도 과정 중에는 병장기를 다루는 교육 과정도 포함되어 있다. 본래 공부를 하려면 체력이 필요한 법. 마법사라고 해서 책만 펴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단순히 무거운 검을 휘두르는 것뿐 아니라, 실질적인 대련도 커리큘럼의 하나였다. 그것을 수 년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 지경이니 교수 정도 되면 충분히 검의 실력자라 불릴 만했다.
저 둘은 그런 그녀들과 합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쌍둥이가 적당히 손속을 두고는 있었으나, 경험의 차이가 막대하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한 작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격렬한 운동을 해서 그런지 다들 피곤해하는 눈치였다. 아린과 히사시도 체력이 강건한 편은 못되었으니 여독이 계속 쌓이는 중이었고.
따라서 일행은 숙소를 잡은 뒤 바로 침대에 누워서 행복의 비명을 질렀다.
창공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계획이었지만, 담배가 없었다.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데 담배가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어쩌겠는가. 사러 가는 수밖에.
"어서옵쇼."
잡화점의 문을 여니 짤랑, 하고 종소리가 났다. 인사를 하던 주인은 창공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말은 안 하지만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우에게 듣기로, 연고가 없는 지구인들은 범죄의 길에 빠지는 사람이 많다 했다. 일단 가게에 들어오면 뭐 훔쳐가지는 않나 감시의 눈길을 보내는 것을 보더라도 그리 기분 나빠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저런 눈으로 사람을 보는데 기분이 편할 리가 있을까. 창공은 불쾌함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어차피 다시 볼일도 없으니 담배만 사고 바로 나갈 생각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외의 만남이 있었다.
"아니... 이거 오랜만입니다."
"음?"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돌아보니, 백발 백안, 딱 달라붙는 가죽옷을 입은 남자가 반가운 표정으로 서있었다. 강렬한 인상의 남자. 기억 저편에 파묻혀있던 그의 이름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글라키스?"
"맞습니다. 분명 이름이 서창공이었던가요."
"네."
창공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이름밖에 모르는 사이긴 했지만 오랜만이니 나름 반가움이 들 법도 한데, 그런 것보다는 왠지 모를 미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하하하... 제가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당신이 반갑게 느껴지는군요."
그러나 그는 창공이 매우 반가운 것 같았다.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실은 제가 동굴 비슷한 곳에서 한동안 살아서 말입니다. 나와 보니 제가 살던 곳은 풍비박산에, 인연이 있던 사람들도 다 떠나서 이젠 연락도 안 되고..."
"안됐습니다."
"그래도 친한 친구들과는 어찌어찌 연락이 닿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아, 이거 제가 방해했습니까?"
"아뇨. 별로."
"그렇군요!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간단하게 한잔하시겠습니까? 이야기나 하면서 말입니다. 제가 사도록 하죠."
창공은 순간적으로 '나랑 당신이랑 얼마나 안다고?' 따위의 말을 내뱉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분명 이 남자에겐 뭔가 있었다. 세상만사가 대체로 그렇듯이, 뭔가를 얻으려면 뭔가를 지불해야 하는 법이다.
"짧게 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전 좋습니다. 그간 사람이 그리웠던 터라..."
담배를 집어 들고 계산대에 올리니, 글라키스도 파이프용 담뱃잎 쌈지를 옆에 두며 자신이 계산하겠다 말했다. 창공은 기꺼이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공짜는 없다지만, 겨우 저 정도 대가도 못 치를까.
"안녕히 가십쇼."
다시 한번 문에 달린 자그만 종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거리로 나온 두 남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게 알아두신 거 아니었습니까?"
"실은 이제부터 찾으려는 참입니다. ...어이쿠."
툭!
어디선가 달려온 한 꼬마가 글라키스에게 부딪히고 길바닥 위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단단히 선 글라키스는 잠시 흔들리고 말았지만, 꼬마는 충격이 심한지 아파하며 제 엉덩이를 매만졌다.
"조심해야지. 사람이 있는데."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달려가는 꼬마.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 창공이 걸음을 재촉하려는데, 뒷주머니를 짚은 글라키스가 웃음을 짓는다.
"당했군요. 돈주머니가 없어졌습니다."
"이런."
그는 저 멀리 도망가는 꼬마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창공도 별 수없이 그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의외라면 의외의 일일까. 글라키스의 속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는 벌써 골목길로 들어가는 꼬마의 뒤를 거의 붙잡은 상태였다.
창공이 글라키스의 뒤를 따라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을 땐, 이미 꼬마는 그에게 붙잡힌 상태였다.
"도둑질을 하라고 누구에게 배웠지?"
"죄송..."
퍼억!
억센 주먹이 꼬마의 얼굴에 내리꽂혔다. 누런 이빨이 더러운 골목길 위에 우수수, 쏟아졌다.
퍼어억!
그러나 주먹질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기껏해야 10살은 된 꼬마일까. 아이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살려주... 아아악!"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이봐요."
어찌나 심했는지 보다 못한 창공이 나섰다. 어지간해선 이런 일에 신경을 안 쓰는 창공이 끼어들 정도니, 그 참상이 어떤진 말할 것도 없었다.
"끄르르륵..."
글라키스는 그때까지도 아이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입에 피거품을 무는 꼬마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얼어붙은 바다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미 땅거미는 졌거늘, 그 어둠을 뚫고 보일 정도로.
"그러다가 괜히 더 귀찮게 됩니다. 돈만 되찾으면 된 게 아닙니까."
"그런가요? 응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더 맞으면 죽을 겁니다. 죽을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면 어떻습니까...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털썩.
겨우 사내의 손에서 해방된 아이가 땅 위로 쓰러졌다.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불분명했다.
"자, 가시죠."
돈주머니를 회수한 글라키스가 팔을 뻗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창공은 아이를 한 번 바라보고는 등을 돌려 글라키스와 함께 골목을 빠져나왔다. 운이 좋다면 살아남을 것이다.
"서창공 씨. 죽음보다 못한 삶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긴 합니다만."
"좋군요. 사실 이 세상의 대다수는 바로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겠습니까. 배불리 먹지도, 좋은 옷을 입지도 못하며 하루하루를 투쟁의 시간으로 보내는 사람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개중에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는 이도 있지만, 사실 그들이 특별한 날이 되길 희망하는 그 내일은 오늘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쾌활했다. 마침 적당한 술집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두 사내는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지만, 또 그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지만. 자신의 삶을 당장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은 또 잘 없단 말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글라키스 씨의 말이 맞다고 가정하면... 인정하기 싫은 거겠죠. 죽음보다 못한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죽어버리면 그걸 인정하는 꼴이 되니까요."
"맞습니다. 그들이 부질없는 목숨을 구차하게 이어가는 이유는 오직 희망 없는 희망 때문이겠지요. 몸서리 쳐지도록 무섭고 싫은 삶입니다."
말뿐만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글라키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실 그 꼬마라고 뭐가 다르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서창공 씨는 헛된 삶에서 영혼이 해방될 기회를 놓치게 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제 눈에는 단지 지은 죄에 비해 과도한 처벌을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폭력에 철학이 담겼다고 한다면, 그건 위선이 아닙니까?"
"과도한 처벌이라!"
여종업원이 맥주가 넘치도록 담긴 파인트 잔 두 개를 가져와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글라키스가 동전을 튕기니, 앞치마로 그것을 받은 종업원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감사를 전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적절한 처벌이겠습니까? 어떤 이는 훈계라 할 것이고, 어떤 이는 한 대 가볍게 때려 주는 정도라 할 것입니다. 도둑질을 했으니 손목을 자르는 처벌도 가능하겠지요."
"..."
"분명 그 처벌들은 전부 나름의 논리와 근거가 있을 터. 그러나 각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자신을 제외한 것은 전부 너무 무르거나, 너무 잔혹할 뿐입니다. 정답은 무엇입니까? 모두가 정답입니다."
순간 창공은 룬덴의 왕성 도서관에서 아린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그가 했던 말을.
[정의라는 건 말야. 백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의 정의가 있고, 만 사람이 있으면 만 가지의 정의가 있어]
턱.
나무로 만들어진 잔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딪히고, 맥주가 거품과 함께 사내들의 목구멍 저편으로 넘어갔다.
"이미 도둑이 된 아이입니다. 훈계는 먹히지 않습니다. 한 대 때린다면? 그저 억울할 뿐이겠지요. 손목을 자르는 건 어떻습니까. 저 나이에 도둑이 될 정도로 비참한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꼴입니다. 이미 새사람이 되긴 글렀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베풀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역시 모든 고통을 끝내주는 것뿐입니다."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성급한 단정일 수도 있을 텐데."
"그리 생각하신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그렇더군요! 서창공 씨. 모든 결론은 성급하고 불완전한 단정입니다. 결론을 내리는 모두는 전지전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은 그 뒤로 말없이 잔을 비웠다. 글라키스는 더 할 말이 없었고, 창공은 말을 하기 싫었다.
"자, 이제 자리에서 일어납시다. ...짧지만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네."
"그럼 기회가 된다면 또 어디선가."
백발의 사내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멍하니 그의 뒤를 바라보던 창공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곳에 숙박하는 여관이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