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74화 (74/178)

〈 74화 〉 언니의 이름으로 (3)

* * *

푸른 아침이 밝았다. 아직 태양볕에 달궈지기 전의 대지는 시원하고 촉촉한 공기를 선사했다. 눈을 뜬 창공은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조용한 분위기를 만끽했다. 신선한 바람이 폐 안을 가득 채우고, 탁한 뇌를 씻어내렸다.

잠시 벽에 기대 오늘 할 일을 생각하던 그는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개운한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했으니. 밤의 먼지가 씻기고 기지개를 편 뇌는 니코틴을 요구했고, 그것은 합당한 요청이었다.

"후..."

이세계에 담배가 없었더라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아마 무한한 좆같음을 느끼며 자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것도 익숙해지고 나니 지구에서 피는 담배만큼의 맛은 없었다. 아마 뭐가 덜 들어간 탓이리라.

그래도 이곳의 담배가 지구의 담배보다 나은 점을 굳이 말하라면, 담뱃갑에 쓸데없는 경고 문구와 징그러운 사진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주 못 피우게 할 것도 아니면서 왜 굳이 눈살 찌푸려지는 것을 박아 넣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느 사람들은 그것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창공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미련하고 하잘것없는 기만행위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창공아."

"형."

어택이 입에 담배를 물고 나타났다. 역시나, 흡연자들은 눈치껏 흡연 장소를 찾는 법이었다.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나유는 자나?"

"그렇겠죠."

"아침 바람에 피는 담배가 얼마나 맛있는데... 자기만 손해지."

두 애연가는 낄낄거리며 담배 연기를 폐 안 깊숙한 곳까지 빨아들였다.

"그나저나 창공아. 너... 괜찮겠냐?"

"갑자기 뭔."

"솔직히 말해 봐. 지금 양다리 걸친 거 아니야?"

"어떻게 알았어요?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와, 씨발 진짜."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욕설을 내뱉었다. 저 뻔뻔함은 정말인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저 놀라움. 놀라움뿐이었다.

"아니. 시우 씨 온천에서 있잖아."

"네."

"아침에 너한테 할 얘기 있어서 찾아갔는데 네 방에서 아린이랑 나유랑 같이 나오더라? 걔네들은 날 못 본 거 같긴 한데."

창공은 삐뚜름한 미소로 긍정을 표했다. 동네방네 광고할 일은 아니었지만 딱히 숨기려고 애를 쓸 생각도 없었으니, 오히려 어떻게 보면 자연스레 귀찮음을 덜었다 생각하며.

"너 그러다 칼 맞는다."

"여자 문제로 고생한 적은 없어서."

"애미."

둘은 잠시 동안 유쾌한 웃음소리를 냈다.

"형은 여자 안 만나요? 씨발, 설마 게인가?"

"아니 이 새끼가. 네가 다 채가는데 어쩌라고. 딱 기다려라. 아스터 공략해 본다."

"지랄."

그렇게 말은 했지만 실제로 그가 아스터를 어떻게 해 볼 마음은 없었다. 당연히 그녀와 사귀고 싶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도 눈치는 있었다. 아스터가 창공을 바라볼 때의 눈빛은, 그를 바라볼 때의 그 눈빛과는 달랐다.

친절함과 따스함 위의 그 무언가. 기어코 창공이 양다리를 넘어 아스터까지 제 여자로 만들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자신의 것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어택은 예감하고 있었다.

씁쓸한 현실. 그러나 마음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 감내할 수밖에.

게다가 그는 일행 중 가장 연장자였다. 스스로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고, 리더는 못 되더라도 큰형의 역할을 맡길 자청했다. 그런 그가 여자 같은 것에 눈길을 줄 시간은 없었다. 모든 것은 목표를 위해서.

"이따 봐요."

"그래."

연초를 다 태운 창공은 제 방으로 올라가 짐을 챙기고 떠나기 전 아침을 먹을 준비를 했다. 아침이래봐야 당근 수프에 딱딱한 빵이지만 숙박비에 다 포함된 것이었으니 아까워서라도 먹어야 했다.

그렇게 얼마 동안 침대 위에 앉아 있다 1층으로 내려가니 이미 나머지 일행들은 전부 식탁 위에 앉아있었다. 아침잠이 많은 나유는 비몽사몽한지 이리저리 몸이 흔들렸지만 옆에서 잡아 주는 아린 덕분에 간신히 고꾸라지지 않았다.

"아... 조, 좋은 아침이에요, 창공 님."

"어, 그래."

그는 간단하게 아스터의 인사를 받았다. 한데 아스터의 기색이 이상했다. 눈동자가 자꾸 흔들리고, 입술은 오물거리고, 손가락은 자꾸만 꼼지락거리는 게 꼭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눈치였다.

그렇다 한들,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입을 열지 못하고 듣는 사람이 묻지 않는다면 말짱 헛수고. 창공도 눈치를 채긴 했지만 일부러 외면하고선 륀에게 시선을 돌렸다.

"륀. 키르케 국경까지 여기서 얼마나 걸리지?"

"지도상으로는 대략 사흘 정도. 그걸로 끝이 아니야. 비타까지 가는 배를 타려면 아르토스 국경 근처까지는 가야 하니까. 키르케를 완전히 횡단하는 셈이지."

"그래? 어차피 가야 하는 길이긴 한데, 거기 치안은 어때?"

"치안이 다 거기서 거기지. 강도 몇 번 만날 각오는 해야 돼."

"그 정도인가요?"

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히사시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 정도냐니. 원래 여행할 때 강도 대비책도 세워 놔야 하는 거 아니야? 당신들은 그렇지도 않았나 보지?"

"네... 그리고 그동안 강도라고는 만난 적도 없고."

"첫째로 해가 뜬 다음에만 움직이고, 둘째로 평야에서 대로를 따라 움직이는 중이니까. 각오하는 게 좋아. 우리가 넘을 알펜시아 키르케 간 국경은 구릉과 숲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게다가 국경지대라 산적들이 활발히 활동한다는 것이 륀의 설명이었다. 완전히 시야가 확보된 평야면 모르겠으나, 그들이 넘을 지점은 알펜시아 산맥의 끝자락인 엔윅 고개였다.

도적 토벌이 명분이건 어쨌건 타국의 영역을 침범하면 곤란한 일이 발생한다. 도적들은 그것을 노리고 국경 근처에서 출몰하며 선을 수시로 넘나든다는 것이다. 알펜시아 측에서 소탕 작전에 나서면 키르케로 넘어가고, 카르케에서 나서면 알펜시아로 넘어가는 식이다.

게다가 앞서 말했던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본격적으로 도적을 물리치려 군사 활동을 벌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죽어나는 것은 통행인들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아무튼 키르케로 넘어가서는 지금처럼 편하게 여행할 기대는 하지 말라는 거지. 그리고 거긴 최근 사교도들이 난리라."

아스터의 표정이 무거워진다. 키르케는 사교도들의 활동이 제일 왕성한 곳이었다. 물론 그들 자신은 사교도가 아닌 개혁파라고 자칭했지만, 교황청에선 그들을 이미 이단으로 규정한 지 오래였다.

"사교도라니."

"걱정 마세요. 이단심문성 형제자매들이 가장 왕성히 활동하는 곳도 키르케니까요."

"이단심문성... 화형이라도 하는 겁니까?"

"필요하다면요."

일행들은 잔혹한 처형에 반대하지 않는 아스터에게 놀란 모양이지만, 창공은 그저 시큰둥한 기색이었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그녀도 결국에는 종교인이었다. 그것도 종교가 현실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세상의 종교인이다. 당연히 지구의 종교인들과는 어느 정도 다른 관념을 가질 수밖에.

식사가 나왔고, 대화는 중단되었다. 간단한 구성이었기에 먹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순간 창공과 어택, 그리고 나유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밥을 다 먹었으니 응당 담배를 피워야 하지 않겠는가. 륀도 흡연자이긴 했지만 파이프 사용자였으니 조금 다른 경우다.

"어... 창공 님?"

그렇게 일어서려는데 침을 꿀꺽, 삼킨 아스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스터. 왜."

"조금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개인적으로..."

"담배 한 대 피고 올 테니까 내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가. 열쇠 줄게."

"네."

순간 파이프 안에 연초를 눌러 담던 륀의 눈빛이 번뜩였다. 뭔가 있었다. 그러나 창공은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담배를 꺼내며 여관 바깥으로 향했다. 재촉할 필요는 전혀 없으니. 방금 전 그가 어택과 담배를 피우던 곳에선 이미 어택과 나유가 사이좋게 맞담배를 피우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너넨 진짜 제정신 아니라니까."

"아이씨, 오빠가 상관할 일 아니거든?"

"왜. 무슨 일이야."

창공은 코에서 연기를 뿜으며 대화에 참여했다.

"아니, 택이 오빠가 우리 삼각관계 눈치챘지 뭐야."

"아까 얘기했어. 뭐 어때서."

"니미."

실없이 웃는 어택.

"아무튼 오빠가 상관할 일 아니거든? 씨이, 나도 고생 많은데."

"그래그래. 좋을 때다."

"나보다 몇 살이나 더 많다고?"

그렇게 셋은 잠시 동안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연초를 태웠다. 역시 식사의 완성은 식후땡이었다. 이게 없으면 밥을 먹어도 먹은 것 같질 않으니, 그야말로 인체의 신비가 따로 없었다.

하여튼 창공은 담배를 다 태우고선 아스터가 기다리고 있을 제 방으로 향했다. 무슨 말을 할지 아주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스터의 그 눈빛. 처음 보는 눈빛도 아니었다. 나유가 그랬던 것처럼. 아린이 그랬던 것처럼. 그전 여자들도 그랬던 것처럼 아주 익숙했다.

왜 아스터가 그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계기는 아직 알지 못했지만, 여자의 마음이라는 게 참 우습기 짝이 없었다. 왜 그렇게 사랑에 쉽게 빠진단 말인가. 강의실에서 음료수나 과자와 함께 쪽지를 받는 것은 예삿일도 아니었다.

몇 번의 고백은 그도 받아들인 바 있었고, 이번에도 그런 비슷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문제는 아스터의 이 마음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관한 것. 또 아스터와 두 여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에 관한 것.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야, 아스터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 수 있다면 짜릿할 테니까. 정숙한 성직자가 침대 위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웅장해졌다.

그녀는 도움이 되는 사람 같은 현실적인 이유도 물론 있었지만, 섹스는 중대 지사가 아닌가. 벌써부터 그녀의 나신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잠깐만."

그러던 와중, 불청객이 등장했다. 입에 파이프를 문 륀이었다. 보건대 계단 위에서 그가 올라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말할 거 있어? 이따가 하자. 아스터랑 좀 만나야 해서."

"아니. 나랑 먼저 이야기를 좀 해야겠어."

"...아스터는 알아?"

"몰라. 그 아이는 몰라도 돼."

그는 잠시 륀을 묵묵히 바라봤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은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있다고.

아스터인가, 륀인가? 어느 쪽을 선택해야 더 이득일까?

"좋아. 네 방에서?"

"따라와."

그의 선택은 륀이었다. 몸이 달아있는 것은 아스터였으니, 시답잖은 사랑 고백 따윈 언제든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지금 륀을 떠나보낸다면 그녀가 하려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두 갈래 갈림길. 한쪽은 언제든지 갈 수 있지만, 다른 한쪽은 지금 택하지 않으면 영영 가지 않은 길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당연히 후자를 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거기 앉아."

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쌍둥이가 쓴 방은 겨우 하루 묵었을 뿐인데도 그녀들의 살결에서 나는 달콤한 냄새로 가득했다. 남자를 흥분시키는 냄새. 창공은 들뜨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후우우..."

그녀의 이빨이 딱딱거리는 소리를 내며 파이프 부리와 자꾸만 부딪혔다. 어딘가 초조한 기색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창공은 그녀에 대해 어렴풋이 뭔가를 파악했다.

륀은 지금 자신이 불리한 형국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노출시키는 중이었다. 저러면 안 된다. 아무리 불리해도 마치 자신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뻔뻔한 기색을 위장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아무리 중요하고 치명적인 문제라 해도 그렇다.

그게 안 된다는 것은 그녀가 이런 상황에 익숙지 않다는 것. 웨리의 교수라고 했던가. 그래봤자 창공보다 한 살 더 많을 뿐이고, 인생의 절반 넘는 시간을 그곳에 틀어박혀서 공부만 한 사람이다.

창공은 그녀의 이 틈을 파고들기로 마음먹었다. 머리가 좋고 자존심도 강하지만 사람 대하는 것은 미숙하다? 보아하니 연애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을 테고, 공사를 하기에 딱 알맞은 재료였다.

"할 말 없으면 아스터한테 갈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아니...! 거기 있어."

륀을 재촉하니 화들짝 놀라며 그를 멈춰 세운다. 최대한 그녀가 생각할 시간을 주지 말아야 했다.

"그럼 빨리 말해. 뭐야, 이게. 나더러 사람 기다리게 만드는 중인데 불러 와선 말 하나 없고. 지금 바로 말 안 꺼내면 나갈 거야."

"알았어, 알았다고. 후... 아스터 문제야."

"아스터가 왜."

"젠장. 젠장...! 아스터가 당신을 많이 좋아하는 거 같아."

"오... 정말?"

짐짓 놀란 표정을 지은 창공은 악마적인 웃음을 입가에 띄운다.

"그럼 빨리 가 봐야겠다. 알려줘서 고마워."

"앉으라고! 이거 알려주려고 부른 게 아니니까."

"뭐 하자는 거야, 대체."

이번엔 짜증을 냈다. 그러자 륀이 신경질적으로 부리를 씹어대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말 돌리면 나 그냥 나간다."

"그 아이랑 만나지 마."

"..."

그래. 결국 이거였다. 아마도 륀은 그가 아스터의 연애 상대로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리라.

그럼 이유는?

아직은 미지수였지만 짐작하려면 못 할 것도 없다. 평소 둘을 보면 상당히 우애 좋은 쌍둥이처럼 보이는데 10년 넘게 얼굴 한 번 못 봤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찾은 끝에 만난 소중한 동생.

'그런 동생의 상대로는 떠돌이에 불과한 난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겠지. 하긴 당연해. 알아보진 않았지만 이혼이 밥 먹듯이 쉬운 세상도 아닐 거고. 게다가 아스터는 성직자니까 더 결혼에 신중해야지.'

그러나 창공에겐 아스터의 미래를 생각해서 사랑의 고백을 고이 접어 반송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네. 아니 가족인 건 알아. 그런데 왜 그걸 네가 왈가왈부하지?"

"아스터는 내 동생이야!"

"네 물건은 아니잖아."

륀은 대답이 궁색한지 눈을 감고 파이프를 빨아들였다. 창공은 몰랐지만 실제로 륀은 아스터의 설득에 실패했었다. 아스터가 거절하고, 창공도 거절하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자,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 이제 어떻게 해야 이득을 취할 수 있을까?

"화나네. 그렇게 내가 마음에 안 들어? 아스터 상대로 나는 안 되는 거냐고. 본인이 좋다고 하잖아. 하! 설마 그건가. 내가 이세계에서 온 근본 없는 이방인이라 그거지?"

"그런 말까진 안 했어."

"그러면 반대하는 이유가 뭔데."

"그건...!"

"할 말 없지? 연구를 하네 어쩌네 하더니 결국 우리는 그냥 동물인 거지? 신비한 동물들의 생태에 대해서 논문을 쓰면 수입이 꽤나 짭짤한가 봐? 미안하게 됐다. 개나 소 같은 놈이 감히 아스터에게 접근하려 해서."

압박에 들어간다. 여기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륀에게 정신적인 압력을 가해 유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창공 자신이 생각할 시간을 버는 것.

"그런 거 아니야. 난 너희를 인간으로서 존중한다고."

"퍽이나 믿겨진다. 그래도 교수라길래 깨어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너 진짜... 와."

창공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동안 짐승들 무리에서 지내느라 고생했어. 이제 그만 우리 일행에서 나가 줄래? 아스터는 남을 거야. 날 사랑한다면."

그녀의 낯빛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말을 잘못 꺼냈다. 개인적인 연구와 동생에게 좋은 짝을 찾아 준다는 두 가지 목적이 전부 날아가게 생긴 것이다.

물론 마주 화를 내며 정말로 떠날 가능성도 있었지만, 창공은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했다. 쌍둥이의 자매애에 대한 신뢰였다. 그리고 대부분 그랬듯, 그의 신뢰는 보답받았다.

"제발... 믿어 줘. 그런 마음은 추호도 없었어. 내가 당신들 대하는 태도를 봤잖아."

바로 그 순간, 번뜩이는 전류가 창공의 뇌리를 스쳤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래..."

"그래...? 그러면 이렇게 하자. 네가 아스터 대신이 돼."

"...뭐?"

황당해하는 륀. 이건 도박이었다. 하지만 꽤나 승산 있는 도박이었다.

"못 들었어? 내 연인이 되라고. 마침 나도 아스터에게 호감이 있던 참이야. 그런데 사귀지 말라니 어쩔 수 없잖아? 동생이 못 하겠으면, 언니가 하면 돼. 날 인간으로서 존중한다며? 그러면 연애도 가능하잖아?"

"미친 소리!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그래? 하긴 당연하지. 그럼 난 아스터한테 가 볼게."

"자... 잠깐! 아직 내 얘기 안 끝났어...!"

"난 끝났어."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문가로 향했다.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슬며시 힘을 줘서 당긴다.

끼이이...

경첩에서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실패인가?

"기다려!"

등 뒤에서 들리는, 륀이 외치는 소리. 창공의 입술의 벌어지며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갔다. 륀을 향해 돈 그의 얼굴에선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면... 하면 되잖아!"

그녀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창공을 바라보며 한 걸음씩 다가왔다.

"하지만 명심해.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연인인 체는 해 주겠지만, 당신이 내 순결을 가져갈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알아들어?"

"내가 손해인 것 같은데."

"그건 절대 양보 못 해. 입맞춤도 마찬가지야. 또! 아스터에게 괜한 희망 주지 마. 내가 그 애 대신이 되는 거니까. 가급적이면 말도 하지 말아."

"장난해?"

"그러면 조건을 제시해."

"그렇단 말이지..."

역시 순순하게는 넘어오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떡정으로 붙들어 놓을 생각이었는데, 그게 막힌 이상은...

'아니지. 막히긴 뭐가 막혀.'

그는 머리를 다시 한번 굴렸다.

"좋아. 첫 번째. 이 연인 관계를 끝내는 때는 내가 정해."

"나보고 평생 당신의 연인 노릇을 하라고?"

"키스도 못 하는 여잘 평생 붙들고 있을 생각 없어."

"으음..."

"두 번째. 연인으로서, 내 동침 요구에 성실하게 응해."

"방금 못 들었어? 난..."

"그래. 넌 계속 처녀일 거야. 그건 걱정하지 말고."

"하."

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순결은 지켜주는 대신 날 능욕할 생각인가? 그래봤자 가슴이나 좀 만지고 말겠지. 어차피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그것밖엔 없을 테니까. 아스터를 지킬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어쩌면 통한의 실책이었다. 부모로부터 성에 대한 교육을 받기 전에 마법 수련생 생활을 했고, 웨리의 성교육은 지극히 생물학적인 부분에서만 이루어졌다. 따라서 연애도 해 본 적 없는 그녀가 창공의 말뜻을 제대로 파악할리 만무했다.

"어때?"

"수락할게. 이건 나와 당신 사이의 거래야. 내가 전에 마법사는 거래 내용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했지? 허튼수작 부리기만 해 봐. 마법사는 위약을 대하는 태도도 칼 같으니까."

"그러면 이제 우린 연인이네?"

"...그런 셈이지."

"부탁 좀 들어 줄래? 여기 하루 더 묵을 생각이야. 이따가 일행들 모아서 통보할 건데, 그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말해. 네가 고백했고, 내가 받아들였다고."

"미쳤어?"

륀은 기겁했다. 그러나 창공의 뜻은 결연했다.

"난 널 위해서 제안하는 건데."

"이게 뭐가!"

"생각해 봐. 아스터에게 희망을 주지 말라며. 네가 생각하는 아스터는, 언니의 연인을 빼앗으려 할 사람이야?"

"...윽!"

"아예 공식적으로 쐐기를 박는 거지."

"...알겠어. 그런데 내가 당신에게 고백을 했다고? 반대가 아니라?"

"이 편이 좋지. 그런데도 아스터가 내게 고백한다는 건, 자기 언니를 배신하는 일이 되니까."

"그... 런가...?"

"나도 잘 맞춰줄 테니까."

그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끄덕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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