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달의 추락 (4)
* * *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못 참겠어."
"무슨 소리를..."
서창공이 내 몸을 뒤집고, 다리를 강제로 벌렸다. 내 음부가 그의 앞에 훤히 드러났다. 아... 우뚝 솟은 흉악한 남자의 성기가 보인다. 마치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한 그것은, 맥박에 따라 요동치며 내 가랑이 사이로 점점 다가왔다.
"싫어..."
"널 임신시킬 거야, 륀. 날이 갈수록 불러오는 배를 보는 네 눈빛은 어떨까?"
"미친 새끼! 싫어, 싫다고!"
반항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내 몸엔, 입을 간신히 움직여 말할 수 있을 정도밖엔 힘이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난 너무나 무력하게 그의 앞에 벌거벗겨진 상태였다.
"미리 아이 이름도 생각해 놔. 아스터도 조카가 생기면 기뻐할걸?"
"약속했잖아...!"
"약속? 네가 뭘 모르는 모양인데, 모든 약속은 깨져."
"이이익!"
안 돼. 이대로 이 남자에게 강간당할 수는 없어. 시간을 끌자. 어떻게든 힘을 회복해서 뿌리친 다음, 방으로 달려가 내 칼을 가져오는 거야.
"진정해! 내... 엉덩이라면 마음껏 쓰게 해 줄 테니까. 응? 관장도 잘 할 테니까... 약속했잖아, 젠장! 처녀는 가져가지 않는 걸로!"
"내가 이해가 안 가서 말인데."
그는 내게 무심한 눈길을 줄 뿐이다.
"어차피 네 후장이 허벌이 되면, 보지는 그대로인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다른 남자한테 그렇게 말할 자신 있어? '제 뒷보지는 어떤 남자에게 잔뜩 쑤셔졌어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앞보지는 신품이니까요!'라고. 이해가 안 가? 넌 어차피 그 시점에서 몸 함부로 굴린 걸레 같은 년이라고."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됐어...! 손가락이 움직였어. 힘이 점점 돌아오고 있...
"보지나 대."
"기다리라니ㄲ...!"
푸욱.
* * *
"...!"
짹짹...
눈을 뜨니 창문을 통해 새벽의 빛과 새 지저귀는 소리가 넘어오고 있었다. 뭐지? 서창공은? 그 남자는?
"아..."
꿈이었나. 아, 꿈이었구나. 더러운 꿈이었어. 세상에, 내가 마음도 없는 에트로지에게 강간을...
됐다. 그런 건 됐어. 으, 찝찝하네. 꿈자리가 사나워서 그런지 완전 땀으로 축축했다. 아무래도 한 번 씻어야겠다. 맞다, 그러고 보니 아스터는?
"쿠우우..."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내 사랑스러운 동생은 침대에 누워 곤히 자고 있었다. 그래, 다행이었다. 여긴 우리 방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거고. 그 모든 게.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게 안도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 순간이었다. 저 아래에서 갑작스러운, 너무나 불쾌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고통... 이라고 하기엔 조금 뭐하고. 이물감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항문에 뭔가가 꽂힌 듯한.
"...흐윽!"
순간, 어젯밤의 기억이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다섯 번이나 관장을 한 일, 내 그곳에 서창공의 손가락과 성기구가 쑤셔 박힌 일, 그리고... 그리고... 엉덩이를 맞은 일...
그건 꿈이 아니었다. 그것만큼은 꿈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이었다. 내 엉덩이 사이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감각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래. 난 아스터 대신이 되기로 그와 약속을 했었다. 처녀와 입술은 지키는 조건으로.
난 그것이면 다 된 줄 알았건만, 무지의 대가는 쓰고도 썼다. 돌이킬 수 없는 계약서에 서명을 해 버린 것이다. 그저 가슴을 만지거나, 내 알몸을 보며 수음을 하리라는 게 내 예상의 전부였다. 현실은 예상을 한참 웃돌았고. 젠장!
찰박!
옷을 전부 벗어던지고, 욕실에 들어가 차가운 물을 몸에 끼얹었다. 그리고 그의 손길이 닿았던 곳들을 박박 문질렀다. 그렇게 하면 기억을, 사실을 지울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어젯밤의 기억은 자꾸만 되살아났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아마 오늘 밤도 서창공은 나를 부르겠지. 괴롭기 짝이 없는 관장을 또 시킬 거야. 그러면서 내가 어떻게든 그의 발치에 엎드려 자비를 구걸하길 바랄 테고.
그걸로 끝이 아니다. 내 그곳을 성감대로 만들기 위해 집요하게 만져대겠지. 손가락을, 온갖 기구를 쑤셔대겠지. 그리고 끝내는 그의 성기를 내 안에...
"정신 차려."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며 뺨을 찰싹, 때렸다. 이제 와서 마음이 흔들리면 어쩌자는 거야. 난 아스터의 언니다. 하나밖에 없는 언니. 지금 아스터를 지킬 수 있는 건, 오직 나밖엔 없다. 내가 포기한다면 그는 아스터를 노리겠지.
아마 착해빠진 내 동생은 그의 요구를 단 하나도 거스르지 못하고 다 들어주게 될 것이다. 내게 한 그 끔찍한 행동들을... 그것만은 안 된다. 그래. 차라리 내가 당하는 게 나아. 계속 버티는 거야. 난 교수라고. 자랑스러운 마법 이론의 정교수. 웨리의 역대 최연소 교수! 그 누구도 날 무릎 꿇릴 순 없어.
* * *
"오늘 실험은 이거야."
나는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펜과 수첩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반응이 제각각이다. 실험이라면 다들 흥미로워했던 어제까지와는 달랐다. 일단 남나유... 대놓고 시큰둥한 표정이다.
딱 보니 서창공과 사귀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무슨 도둑고양이처럼 보이는 모양이지. 젠장, 나도 네 남자 따위엔 관심 없었다고.
두 번째로 김아린. 애매한 표정이다. 남나유의 눈치를 슬슬 보는 것이, 뭔가 언질이라도 들은 걸까.
세 번째로... 내 친애하는 동생 아스터. 오늘은 이 아이 대신 어택이 마차를 몰고 있었다. 혼자서만 마부 일을 맡길 수 없다면서. 고마운 제안이었지만, 차라리 그러지 않는 게 나을 편했다. 아, 지금 나와는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겠지. 미안해... 언니가 정말 미안해, 아스터...
고다 저 남자는 그나마 한결같고.
서창공. 그의 입꼬리는 미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자세히 보아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명백히 비웃는 표정. 자꾸만 왼손 검지를 까딱거리는 게 어젯밤을 상기시키려는 것 같았다. 최악의 남자다.
"전에 당신들에게 들었던 말을 종합해 보면, 이렇게 돼. 우리 다이셀리시아 사람들이 하는 말은 전부 당신들 세상의 말로 들리고, 우리들의 문자로 쓰인 글은 전부 당신들 세상의 글로 보인다고. 그 누구도! 어떤 마법사도! 당신들 에트로지의 언어 능력에 대해 연구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 덕분에 나는 최초로 그걸 연구하게 되었지만 말야."
"언어학자라도 돼?"
"언어학자? 비슷할지도 모르겠네. 나는 언어가 마법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하고 있어. 지금까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분야지. 즉, 당신들은 이 분야에 대해 최고 권위자를 만난 거야."
"연구하는 사람이 너밖에 없으니까?"
"시끄럽네, 진짜."
난 살살 비꼬는 서창공을 한 번 째려봤지만, 그는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 유들유들하게 날 응시했다. 계속 검지를 까딱거리면서. ...두고 보라지. 내가 더 이상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되면, 마법사에게 그런 짓을 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똑똑히 가르쳐 줄 테니까.
"한 번 시험 삼아 해 볼까."
[Magicien Magician Zauberer Mago]
네 단어를 수첩에 빠르게 휘갈긴다. 일단 전부 달리 쓰인 글자. 그러나 전부 똑같은 뜻을 가진 단어였다. 각각 아퀴탄어, 알펜시아어, 노르마크어, 키르케어로 쓰인. 이제 이것을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어때?"
"다... 마법사 아닌가요? 전 그렇게 보이는데."
고다의 대답.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경험적인 부분에서 결과를 예측 가능한 실험이었지만, 얼핏 보면 당연한 것이라도 이렇게 하나하나 검증하는 절차는 반드시 필요하다. 새로운 것은 항상 사소함의 탈을 쓰고 어둠 속에 숨어 있을지니.
"흠... 이번엔 내가 읽어 볼게. 어떻게 들리나 말해 줘. Magicien. Magician. Zauberer. Mago."
"마법사라고 네 번 말씀하셨네요."
"그렇구나. 억양은 어때? 그런 것들까지 완전히 같았어?"
"네."
억양까지 같다라. 하지만 저 네 단어는 분명 각각의 억양을 가지고 있으며, 난 거기에 맞춰 말했다. 물론 난 아퀴탄 사람이니 내가 외국어를 아무리 잘한들 아퀴탄 억양이 섞여 있기 마련이긴 하지만... 아마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여기에 대해선 더 연구를 할 필요가 있어 보이네.
"돌아가면서 각자 마법사라고 써 볼래?"
나는 맨 먼저 서창공에게 필기구를 넘겼다. 재빠르게 펜을 놀린 그는 고다에게 그것들을 넘겼고, 그다음 사람을 거쳐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마법사 마법사 마법사 마법사]
아퀴탄어로 쓰인 단어가 내 눈에 들어왔다. 각각 필체는 달랐지만, 이건 분명 아퀴탄의 말로 쓰인 단어. 이걸 마법으로 구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언어를 배우지 않고도 서로 자유롭게 소통이 가능한 세상이 올 텐데 말이지.
"그래... 그래..."
"야, 륀."
갑자기 그가 나를 불렀다.
"잠깐 줘 봐. 떠오른 게 있어서."
"오, 그래?"
자발적인 협조는 언제나 즐거운 법. 나는 기꺼이 그에게 펜과 수첩을 넘겼다. 같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만, 새로운 지식의 단초가 될 수도 있다. 그가 나에게 그것들을 돌려줄 때가 기다려졌다.
하지만 즐겁던 내 마음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내 수첩에 쓰인 그의 말을 보고선.
[오늘 밤도 깨끗하게 씻고 내 방으로 와.]
"어때."
그는 내게 웃음을 보냈지만, 나는 그에게 웃음을 보낼 수 없었다.
"뭐... 별다를 건 없네."
정신 차리자. 평정을 잃어선 안 돼. 저 남자가 노리는 게 바로 그것이니까. 어젯밤은 잘 버텼잖아. 오늘 밤도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버티면 버틸수록 쉬워질 거고, 그렇게 되면 서창공의 웃음은 사라지겠지.
"그럼 이번엔 이렇게 해 볼까. 내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잘 들어 봐. ...Vagus."
"다시 한번."
"Vagus."
그들의 얼굴 표정에 혼동이 떠올랐다. 순간적으로 무릎을 탁, 칠 뻔했다. 역시 그들의 신비한 언어 능력으로도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거다!
"...바거스?"
"난 바구스라고 들었는데."
"바구스가 맞는 것 같아요."
"뭔데, 이게."
꽤나 당황한 것 같았다. 다만 서창공은 뭔가 알듯 말듯 한 모습인 것이 조금 달랐지만. 하긴 무리도 아니다. 그날 내가 말했던 시동어를 기억하고 있다면 말이다.
"자, 지금 내가 말한 건 마법사라는 뜻의 고대어야. 우리 마법사들은 마법을 쓸 때 고대어를 시동어로 삼아 외우지. 그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주된 목적은 집중을 위해서야. 마법은 대체로 고등한 마나 운용법이기 때문에, 집중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진다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불러올 수 있거든."
물론 집중력이 뛰어나다면야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 않고도 마법을 쓸 수 있긴 하다. 하지만 묵언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건 상당히 위험한 행위다. 손가락 끝에 불을 붙이려다 자기 몸을 홀라당 태운 마법사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맞다. 내가 담뱃불을 붙일 때 쓰는 마법이다. 점화 주문은 기본 중의 기본인데, 그처럼 간단한 마법조차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런데요, 퐁파두르 교수님."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김아린이 입을 열었다.
"조금 뜬금없는 질문이긴 한데... 괜찮을까요?"
"교수로서 질문은 언제나 환영이지."
"시동어는 반드시 고대어여야만 하나요? 예를 들자면 교수님이 파이프를 피울 때 쓰는 주문 말인데요."
"Ignem."
"그것도 고대어란 말씀이시죠? 아퀴탄어로 하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좋은 질문이야. 여기가 강의실이었다면 점수를 줬을 텐데."
그래도 이 일행에 제대로 된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지구라는 원래 세상에선 대학생이었다지. 아마 좋은 학생이었을 거다.
"각국의 언어보다 고대어를 시동어로 사용할 때 마법의 효과가 뛰어나다는 건 수천 년간의 경험을 통해 얻어진 지식이야. 정확히는, 경험을 통해 얻어진 지식이었지. 내가 그 신비를 푸는 데에 일조를 했거든. 난 생도 과정을 마치고 나서 거기에만 매진한 마법사야."
왜 고대어를 통한 마법이 그렇지 않은 마법보다 더 효과가 좋은가? 효과가 좋다는 말은, 마법사의 의도대로 주문이 발현되었다는 것. 그것은 곧 마법사의 심상이 오로지 그 마법을 쓰는 데에 온전히 쓰였다는 뜻이다.
Ignem. 당연하게도 고대어다. 뜻은 '점화'. 아퀴탄어로 쓰면 'Allumage'.
난 Ignem이라는 말을 들으면 '점화'라는 뜻만이 생각난다. Ignem은 점화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지만 Allumage는 어떤가?
어렸을 적 우리 방의 등불을 켰을 때가 기억나고, 요리 화구에 불을 붙였을 때가 기억난다. 그 외에 수많은 기억이 있다. 나에게 Allumage는 그런 의미다. 단순히 점화라는 뜻을 넘어, 그 단어에는 내 기억과 추억이 담겨 있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내 이론에 따르면,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단순한 언어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실생활에서 그 단어를 사용하면서 자신만의 색깔을 입힌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이거다. 누군가는 '바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여름에 놀러 가서 물장구를 친 기억을 떠올릴 것이고, 누군가는 예전에 바다에 빠져 죽은 누군가를 떠올릴 것이다. 같은 단어라도 이렇듯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반면 고대어는 어떤가? 지금 고대어를 실생활 언어로 사용하는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고대어지만 말이다. 가장 활발하게 사용하는 집단이라고 해 봐야 우리 마법사들과 교단 인사들 정도일까. 그마저도 각각 학술용, 전례용으로 쓸 뿐이지만.
그리고 그 고대어에는 예전부터 사용함으로 인해 형성된 개인의 마음이 담겨있지 않다. '바다'와 'Bare'는 같은 뜻을 가지고 있지만, 후자는 철저하게 한정된 목적을 위해 새로 익힌 단어일 뿐이다.
쓰는 법과 읽는 법을 알려 주고, '이건 이러이러한 뜻이다...' 정도로 외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내 이름을 적당히 뒤섞어 '르 파륀두퐁' 이라는 단어를 만든 다음 '바다'라는 뜻이니까 그렇게 외우라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고대어를 사용해 마법을 쓸 때 최고의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거지. 순수하게 그 뜻과 나의 의도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난 이걸 연구하는 마법사야."
"대단한데요?"
"뭐, 그렇지."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나에 대한 칭송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은 법이니까. 덕분에 나는 그날의 실험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고, 저녁을 먹을 때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오늘을 보낼 수 있었다.
딱 그때까지만.
"허리 숙이고 엉덩이 벌려."
...최악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