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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떠돌이들-82화 (82/178)

〈 82화 〉 엘랑 비탈 (3)

* * *

"하아... 하아..."

그날 밤도 륀은 변기 위에 앉아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자각했고, 창공이 주는 쾌락에 마음이 꺾여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버틸 수 있는 데까진 버틸 생각이었다.

행위의 가장 첫머리인 관장을 대하는 자세도 마찬가지. 항문이 점점 애널 섹스에 최적화가 되어 가는 것처럼 부드러워지고 있었기에 점점 참는 것이 어려웠지만 그래도 해내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의 발치에 엎드려 비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까지만, 오늘까지만. 그렇게 되뇌며 버텨 보자고.

한데 오늘은 조금 의외였다. 항상 다섯 번의 관장을 지시하던 창공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세 번으로 끝낸 것이다. 사실 원래 다섯 번까지도 필요 없었지만 경험이 없는 륀은 그걸 알 리가 없었다. 단지 오늘은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이러나, 하고 걱정하기만 할 뿐.

따지고 보면 틀린 생각도 아니긴 했지만.

"이게 다 뭐야."

"커피 좋아해?"

욕실을 나온 륀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광경에 고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침대 대신 테이블에 앉은 창공이 티 세트를 늘어놓은 까닭이다. 오늘도 시작부터 관장을 실컷 시키더니 갑자기 커피나 한잔하잔다. 당연히 의심부터 들기 마련.

잠시 엉거주춤하던 륀은 그대로 창공의 맞은편에 앉았다. 가터벨트와 스타킹을 제외한 그 무엇도 입고 있지 않았기에 엉덩이가 조금 시렸지만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가 커피를 같이 마시자고 하면, 마셔야 하는 것이다.

"커피는 어디서...?"

"룬덴에 있을 때 잡화점에서 파는 걸 조금 샀었지. 필라크 열도랬나? 여기 다이셀리시아에선 거기에서 나는 차랑 커피가 유명하다며?"

"...그래. 알펜시아의 주요 무역품 중 하나야."

"별 건 아니고, 그냥 커피나 한잔하자고."

그녀는 절대 별게 아닐 리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무슨 의도가 있었다. 한가롭게 커피나 마시며 담소를 나눌 거라면 왜 그녀는 옷을 벗고 관장을 받아야 했을까. 그러나 지금으로선 창공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커피는 바로 끓여먹기 편하도록 가루로 되어 있었다. 물을 끓이고 거기에 커피를 타서 휘휘 젓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물론 제대로 격식을 차려 마시길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온전한 원두 형태로도 유통되긴 했지만 여행자들을 위한 상품은 대개 이랬다.

창공이 커피가루를 미리 뿌려 둔 잔에 뜨거운 물을 따르자, 김이 모락모락 나며 가루 안에 갇혀 있던 묵직한 커피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한잔해."

륀은 아무 말 없이 잔을 들어 입가에 갖다 대고 향을 맡았다. 최악의 남자가 끓여 주는 커피지만, 커피에 무슨 잘못이 있을까. 더군다나 필라크 열도산 커피는 최상품으로 통한다.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더럽게 쓰네."

한 모금 마시더니 인상을 찌푸리는 창공. 륀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마치 어린애 같은 반응이 아닌가.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인간이 저러니 은근히 놀라웠다.

"그럼 커피가 쓰지 달아?"

"난 블랙은 안 마셔."

"블랙?"

"커피에 아무것도 안 넣은 거 말야."

"원래 커피엔 아무것도 안 넣어."

"말을 말지."

그의 말이 륀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비록 이런 상황이지만 어쨌든 마법사가 된 자로서 어떤 순간에서건 탐구심을 놓을 순 없는 법. 이것도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다.

"당신네 세상에서는 커피에 뭘 넣어 마시는 게 보통이야?"

"그렇게 안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넣는다고 이상하게 보진 않지. 우유나 설탕, 시럽 같은 거 말야."

"으음..."

우유라면 몰라도 다이셀리시아에선 설탕이나 시럽이 그리 흔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런 것들을 저리 아무렇지도 않게 커피에 넣어마신다고 할 정도면 생각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창공이 귀족 혹은 그에 준하는 계층이거나, 아니면 그런 것들이 흔해빠진 세상이거나.

"당신은... 지구에서 귀족이었어?"

"귀족의 정의가 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일단 내가 살던 곳은 사회적 특수계급은 인정하지 않아서."

"신분이 없다는 말이야? 그게 가능해? 어쨌든 왕은 누가 할 거 아니야."

"없어. 여긴 공화국이 없나?"

"아... 공화국이라고. 공화국은 없지만 공화주의자들이 있긴 하지. 뜬구름 잡는 소리일 뿐이지만. 난 그런 게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 안 해."

일종의 초국가 단체인 마탑에 소속된 륀도 모국에 대한 충성심을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 단순히 부정하지 않는 걸 넘어서 아퀴탄을 너무나 사랑했고, 그 아퀴탄을 이끌어가는 왕가에 대한 충성심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마법사이기 이전에 아퀴탄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륀이 생각할 때 왕이 없는 나라는 존재할 수 없었다. 결국 누군가는 집단을 이끌어 가야 하니까. 그리고 그 집단을 이끄는 누군가에게 필연적으로 권력과 권한이 집중되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그게 왕이다. 이름을 달리할 수는 있어도 결국 근본에선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륀에게 공화주의자들은 잘 쳐봤자 진실을 호도하는 어리석은 자들에 불과했고, 까놓고 말하자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리를 하는 반역 도당들이었다. 사람은 사회를 만들고, 사회는 신분을 만든다. 이것은 뒤집힐 수 없는 절대 진리였다.

"왕이 없으면 누가 나라를 통치하지? 어쨌든 누가 통치하긴 할 거 아니야."

"그런 게 왜 궁금해? 마법이랑은 관련 없는데."

"난 분명 마법사고, 마법적 지식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지식을 마법으로만 채워 넣고 싶지는 않아. 더군다나 당신들은 내 연구의 참여자들이야. 참여자들에 대한 이해는 연구의 수준을 올려 주지. 한 번 말해 봐. 공화국이라곤 해도 누군가는 왕 역할을 하지?"

"대통령. 5년 임기."

"5년 임기라고 하면..."

"누군가 출마를 하고, 국민들이 투표를 해서 뽑아."

"투표? 국가의 통치자를 투표로 뽑는다고? 어린애들 놀이 같네. 게다가 그건 너무... 뭐랄까. 가능한 얘기야? 사람이 백 명, 천 명... 어쩌면 수만 명까지는 투표를 할 수 있겠지. 그런데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관리가 되겠어? 당신 나라는 신민이 몇 명인데."

"신민이 아니라 국민. 대충 5천만 명 정도 돼."

"..."

륀은 잔을 기울이며 창공을 째려봤다.

"거짓말도 적당히 해. 안 통하니까. 다이셀리시아에서 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 우리 아퀴탄도 1500만 명이야. 키르케는 3천만이 안되고. 그쪽 세상에선 당신 나라가 인구가 제일 많아?"

"적은 편은 아니지만 많은 편도 아니지."

"제일 많은 나라는 몇 명인데?"

"그 나라가 통계를 제대로 낼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서... 그래도 대충 10억은 넘어."

"...나 당신한테 커피 좀 뿌리고 싶은데."

"믿기 싫으면 믿지 말던가."

억은 사람의 머릿수를 셀 때 쓰는 숫자가 아니었다. 적어도 륀의 상식선에선 그랬다. 그렇지만 창공에게선 딱히 허풍을 친다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고, 또 필사적으로 설득하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나는 사실을 말할 뿐이고, 믿지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쨌든 그 5천만이 전부 투표를 한단 말이지. 제대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안 하지만... 음... 반년은 걸리려나. 그건 너무 번거롭잖아."

"하루면 끝나는데."

"돌겠네."

그녀는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포기했다.

"어쨌든 공화정이니, 신분이 없는 국가니 하는 건 불가능해. 누군가는 통치를 해야 하고, 또 누군가는 통치자를 보조해야 하니까. 그리고 필연적으로 권력과 재화는 그들에게 집중돼. 아무리 처음에는 신분이 없더라도 결국 그런 사람들이 왕족이 되고 귀족이 되는 거야. 내 말이 틀려?"

"인정해. 그래서 내가 귀족의 정의가 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 거고.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신분이 없어서 아무리 높은 사람들도 자기더러 귀족이라고 하면 엄청난 지탄을 받지."

"그건 좀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네 말이 맞아. 멍청한 놈들이지. 단지 하루하루 밥 먹고살기 힘든 인간들이 나도 높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는 환상 속에 살고 싶어서 그렇게 된 거야. 그런 비참한 자신의 자화상을 직시하게 된다면 견딜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국민의 대다수는 그런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원활하게 통치를 하려면 평등한 사회라는 눈속임이 필요한 거고."

"당신 나라에서 넘어온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해?"

"아린이 앞에서는 이 주제 꺼내지 마."

륀은 언젠가 반드시 물어보겠다고 마음먹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신은 우리 쪽 세상으로 치면 실질적으로는 귀족 계층에 속해있다는 거구나."

"그렇게 보는 게 맞겠지."

아마도 그럴 것이다. 부모가 전부 잘나가는 검사에, 집안 자체에 돈도 많아 결핍이 결핍된 삶을 살았으니.

"어쩐지. 그래서 그렇게 설탕이니, 시럽이니 하는 말을 그렇게 쉽게 꺼냈던 거구나. 뭐... 얘기했던가? 우리 집도 귀족은 아니었지만 나름 돈이 많아서 어렸을 때부터 설탕하곤 친숙했지만."

"흔해빠진 게 설탕인데."

"...나라에서 사탕수수를 많이 재배했나 보네."

그녀는 어떻게든 창공의 이야기를 필사적으로 자신의 상식에 끼워 맞추고 있었다. 당연했다. 인간은 미지의 지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이 알고 있던 기존 상식을 통해서 바라보려는 습성이 있으니까.

"안 자라. 수입해."

"비싸잖아. 내 말은, 당신한테 흔한 게 아니라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한테도 흔하냐 그거지."

"흔해."

"아니... 관세라던가... 또 운송비도 있고. 판매자가 마진도 챙겨야 하고. 어떻든 간에 설탕 자체 값도 있고."

"그딴 거 아무도 신경 안 써."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창공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륀의 빈 잔에 커피 가루와 물을 채워 주었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이번엔 그가 질문할 시간이었다.

"네가 입만 열면 하는 소리 있잖아. 마법사는 반드시 약속을 지킨다고."

"그래. 그것 때문에 내가 지금 당신이랑 이러고 있는 거고."

"왜 그러는 거지? 거짓말을 하면 마나가 전부 사라지기라도 하나?"

"하아... 그런 건 아니야."

륀은 허리를 세우고 당당히 가슴을 폈다. 은근하게 팔로 가리고 있던 젖가슴이 그대로 드러나고, 찬 공기에 꼿꼿하게 선 유두가 모습을 보였다.

'볼 테면 보라지.'

적어도 이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절대로 꺾이지 않을 거라는 기세를 느끼게 하고 싶었다.

"마법사는 이 세상의 진리를 연구하는 사람이야.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정직함이고. 오직 정직한 마법사만이 세상의 진리를 파헤칠 수 있어. 연구를 하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가 나오면 자신을 속이고 싶어지지. 특히 자기가 세운 이론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현상을 발견하면 더더욱 그렇고."

자부심 넘치는 표정. 강렬한 눈빛. 그녀가 자신의 직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생생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연구자는 결코 거짓말을 해선 안 돼.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선 제대로 발표를 해야 해.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 거짓말이 자신을 향했건, 타인을 향했건.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는 건 그 연장선이야. 어느 누구도 강제하지 않지만 이 대원칙을 저버린 마법사는 마법사가 아니고."

"거짓말했으면서."

"뭐? 내가 언제."

"느꼈으면서 안 느꼈다고 거짓말하고. 갔으면서 안 갔다고 거짓말하고."

"시끄러워!"

륀은 새빨개진 얼굴로 고함을 질러서 창공의 말을 틀어막았다.

"이제 커피는 됐어. 빨리 오늘도 시작이나 해. 어서 끝내고 자고 싶으니까."

"네가 원한다면야. 그 전에... 오늘은 조금 다른 걸 해 보려고."

"하... 뭔데 또."

"기다려 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 안에 손을 집어넣어 뭔가를 꺼내 침대 위에 늘어놓았다.

안대... 재갈...

마지막으로 목줄을 보자 륀의 얼굴이 노여움으로 물들었다.

"산책 좋아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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