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83화 (83/178)

〈 83화 〉 엘랑 비탈 (4)

* * *

"이게 무슨 짓이지?"

주먹을 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앙다문 어금니 사이로 분노에 찬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륀의 두 눈에서 쏘아져 나오는 눈빛. 맹수의 안광에도 비견할 법했다. 그것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법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그것을 정면으로 받는 창공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아니, 저것을 평온이라고 해야 할까. 표정 없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이 느낌은... 도무지 살아있는 생물 같지가 않았다.

침착함을 넘어선 무신경함. 바위를 아무리 노려보들 쪼개질 일이 있으랴. 륀은 날카롭게 갈아올린 분노의 칼날이 점차 무뎌지는 것을 느끼고 마음을 붙잡으려 애써야만 했다.

"물어봤잖아. 산책 좋아하냐고."

"도대체. 산책에. 그딴 것들이. 왜 필요한 건데."

그녀는 말을 씹어먹듯이 음절을 하나하나 끊어서 발음했다. 당장에라도 창공의 목을 물어뜯을 것처럼.

"그거야 해 보면 알지 않을까. 이리 와. 목줄 차게."

"난 네 애완동물이 아니야! 미친 자식...! 내가 약속을 지키면, 너도 약속을 지켜!"

"약속이라니. 난 어긴 적이 없는데."

"날 침대 위에서 마음대로 능욕하는 건 좋아. 그게 당신이 생각하는 '연인'이라면. 그래. 그럴 수 있다고 쳐!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짐승 같은 짓이지만, 그럴 수 있다고 쳐! 하지만 이건 아니야. 이건... 이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즉, 이것이었다.

애초에 창공과 륀의 계약 조건은 크게 세 가지.

1. 륀은 아스터 대신 창공의 연인이 된다.

2. 륀의 순결과 입술은 건드릴 수 없다.

3. 위 조건을 지키는 한, 륀은 창공과의 관계에 성실히 응한다.

여기서 항문 성교라는 유사 성행위는 륀의 입장에선 불쾌하기 짝이 없었지만 연인 간의 행위라는 범위 내에는 아슬아슬하게 들어간다고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뒤쪽을 내어주는 대신 순결을 지킬 수만 있다면... 이라는 식으로 체념하기도 했었고. 어차피 다정하게 대해주며 사랑을 속삭이는 것은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거기까지는 륀도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도대체 사람을 벌거벗기고 마치 짐승처럼 목줄을 매달아 산책을 시키는 것의 어디가 연인 간에 있을 법한 일이란 말인가? 륀의 상식선에선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그녀는 긍지 높은 마법사이자, 웨리의 교수였다. 자존심 강한 그녀로서는 받아들이기 너무나 힘든 제안이었다.

"미쳤어... 넌 미쳤다고...!"

"마음이 아프네."

"개소리!"

"네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이것도 엄연히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행위 중 하나야."

"사랑을 모욕하지 마!"

"모욕은 네가 하는 거지. 사랑의 형태가 네가 아는 것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이것도 네가 나의 연인으로서 해야 하는 일이야. 날 사랑한다면, 하. 이건 내가 생각해도 좀 웃기네. 정정하지. 날 사랑하는 척을 성실히 하기로 약속했다면, 나에 대한 존중을 좀 할 필요가 있잖아."

"아니야... 이건 아니야..."

륀은 자꾸만 고개를 저으며 창공의 손에 들린 목줄을 바라보았다. 갈색 가죽 목줄. 애초부터 사람에 채울 것을 상정하고 만든 제품인지 크기도 딱 그녀의 목에 들어갈 정도였다.

'마, 말도 안 돼...'

순간적으로 와닿는 깨달음. 그랬다. 저건 기성품이다. 창공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딘가에서 파는 걸 샀을 테고, 공급이 있다는 것은 수요도 있다는 것.

[사랑의 형태가 네가 아는 것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그렇다면... 그게 정말이란 것일까? 정말로 연인들끼리 저런 파렴치한 짓거리를... 여성의 존엄성을 짓밟는 짓거리를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한다는 것일까?

륀은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건 실제 상황이었다.

"너도 깨달은 모양이네. 이건 나만의 취향이 아니야."

"입 다물어..."

"'하지만 연구자는 결코 거짓말을 해선 안 돼.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선 제대로 발표를 해야 해.' 네가 한 말이잖아. 이해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면 될 텐데. 아니면 자랑스러운 그 말은 다 거짓말이었나?"

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역시나 그는 순수한 궁금증 차원에서 륀에게 그런 질문을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옭아맬 단초를 얻기 위해. 더 단단하게 묶을 구속구를 채우기 위해.

그것을 제공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이었다.

'아니야... 궤변이야... 이건...'

이내 달콤한 유혹이 그녀의 마음을 잠식했다.

정말로. 정말로 특수한 상황이라면... 마법사로서 자신에게 한 맹세를 지금 이 한순간만 저버릴 수 있지 않을까?

'그래. 그는 지금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거야. 저딴 게 연인들 간에 허락되는 행위일 리가 없어. 기, 기성품이라는 건 내가 잘못 본 거야. 그래야만 해...'

창공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하는 낌새를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선 안 된다. 여기서 쐐기를 박아 넣어야 했다.

"하기 싫어? 음... 하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알았어. 내가 너무 심했나 보다. 네가 정 완강하게 거부한다면 나도 억지로 시킬 생각은 없어."

그는 웃음 지으며 목줄을 침대 위에 던졌다.

륀의 사고가 정지했다. 창공이 이렇게 순순히 물러날 리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범위 내에선...

"우리 관계는 여기서 끝내는 걸로 하자. 대신 아스터한테 시키지 뭐. 걔는 내가 말만 하면 산책이 문제가 아니라... 아니다. 상상에 맞길게."

키득대는 소리. 아연실색하는 륀.

"안 돼..."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맞다. 그녀가 아는 아스터. 바보같이 착하고 헌신적인 아스터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면 진심으로 뭐든 주려고 하겠지. 목줄을 차고 산책을 시킨다면 망설이긴 하겠지만 결국에는 응하고 말 것이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눈에 선했다. 게다가 창공의 저 뒷말에선 대놓고 끈적이는 어두운 욕망이 느껴졌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산책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무언가를... 아스터에게 시키려 한다고.

"안 돼...!"

"안 되긴 뭐가. 우리 이제 끝났어. 그동안 수고했고."

"아스터는 안 돼!"

그래선 안 됐다. 차라리 그녀가 당하는 게 맞았다.

"뭐 어쩌라는 거야."

짜증을 내는 창공.

"내, 내, 내가...! 할 게... 아스터는. 아스터는... 제발!"

"안 한다고 했잖아. 륀. 짜증 나게 하지 마. 어차피 또 망설이면서 싫다고 할 거잖아. 괜찮아. 싫어하는 거 굳이 할 필요 없어. 나도 너랑 사이 틀어지는 걸 원치 않고. 아스터랑 하면 나도 좋고 걔도 좋으니까 그게 더 괜찮겠네."

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재빨리 달려들어 침대에 놓인 목줄을 잡은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창공에게 그것을 건넸다.

"계속... 하, 하, 할... 게... 채워..."

"..."

하나 창공은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안 돼. 넌 이미 날 한 번 배신했어. 갈라진 사이는 붙여 봐야 또다시 갈라지게 되어 있다니까."

그게 정말로 배신이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륀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자신의 성급함과 어리석음을 저주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면 안 됐는데... 그러면 안 됐는데...!'

"음."

그는 잠시 창문 밖을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계속 내 연인할래?"

"하, 할래! 하고 싶어...!"

너무나 당연하게도, 본심은 아니었다. 하지만 륀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창공은 속으로 그녀를 차갑게 비웃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닌가? 다른 거짓말은 안 되고, 이런 거짓말은 돼? 자기 신념보다는 동생에 대한 사랑이 우선이야? 하잘것없네.'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며 그를 바라보는 륀. 엄한 얼굴로 그녀를 다그치는 창공.

"그러면 성의를 보여 봐."

"성의...?"

"그렇지. 이렇게 할까?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채우라고 했지. 조금 뭐랄까... 잘못한 사람의 말치고는 건방진 것 같지 않아?"

"아..."

"앞으로는 존댓말을 써. 물론 평상시에도 내게 존대를 할 필요는 없어. 우리 단둘이서, 연인끼리의 대화를 할 때에만 그렇게 하는 걸로 하자고."

"그게."

"싫어? 싫으면 뭐... 그럼 난."

"하, 할게! 존댓말... 할게..."

창공이 위협하듯이 륀 쪽으로 한 발자국 내디디며 말했다.

"할게?"

"하... 하... 할... 게, 요... 존댓말... 할 테니까..."

"할 테니까 뭐."

"요, 요, 요, 요... 용... 서... 흐윽, 용서해 주세... 요..."

수치와 굴욕감에 빨갛게 익은 얼굴은 실로 걸작이 따로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부들부들 떠는 륀. 분노로 몸을 떨 때와는 어딘가 다른 모습이었다.

"잘했어."

그는 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다음 것도 한 번 말해 볼까?"

"목줄... 채워 주세요..."

"왜?"

"산책... 산책을..."

"산책을 내가 가고 싶은 거야?"

"아, 니요... 제가... 산책 가고 싶으니까... 목줄... 부디..."

륀의 목에 채워지는 가죽 목줄. 목에 닿는 느낌이 낯설기 짝이 없다. 사실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저 가죽으로 된 목줄일 뿐이지만, 륀은 그것을 차게 된 순간 몸이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 으..."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창공은 그제서야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냄새를 맡고, 마치 칭찬하는 것처럼 엉덩이를 톡톡, 두드린다.

"귀여워. 정말로."

"앗... 으응..."

"앞으로 날 부를 때는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니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끔찍한 말이었다. 이 관계의 어디에 사랑이 있으며,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존중이 있단 말인가.

다이셀리시아의 그 어느 누구도 웨리의 교수에게 주인님이라는 호칭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자유롭고 고귀한 마법사들에게 주인이 가당키나 한 말이던가.

하지만...

"네..."

오늘 그 상식은 무참히 깨졌다.

"주인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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