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엘랑 비탈 (7)
* * *
따뜻하다.
누군가의 품에 안긴다는 건 이렇게 따뜻하다. 다른 사람에게 안겨서, 이불까지 덮고 있다면야.
"아."
눈을 떴다.
난 서창공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한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덮고. 그리고... 당연하지만 서로 알몸이었다. 그의 몸에 눌린 내 가슴은 부드럽게 뭉개져 있었고, 뜨겁고 딱딱한 남자의 그것이 내 아랫배를 지긋이 짓눌렀다.
그리고 차례차례 떠오른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첫 키스마저 빼앗기고, 알몸으로 굴욕적인 산책을 나가고, 엉덩이를 맞고, ...그의 앞에서... 차마 말로 못 할 짓을 당했다.
그뿐인가. 여관으로 돌아온 나는 이 방, 이 침대 위에서 기쁜 마음으로 그에게 깔려서 온갖 아양을 떨었다. 그의 흡족해하는 미소도 떠오른다.
남자의 정을 얼굴로, 가슴으로, 배로, 허벅지로, 겨드랑이로, 그리고 엉덩이로 받아들인 나는 실신했다가 깨어났다를 반복하며 정복당했다.
다 기억난다. 기억하기 싫은 것과는 별개로. 웨리의 당당한 교수이자 마법사인 내가 남자에게 주인님이라는 굴욕적인 호칭까지 써 가며.
하지만... 부정할 수 없다. 내가 굴욕을 느끼는 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행복을 느꼈다는 것을. 나에게 이 정도로 추악하고 음탕한 면이 있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운 만큼이나 분명했다.
어쩌면 나에겐 딱 이런 정도의 대우가 적당한 걸지도 모른다. 남자의 성노예가 되어서 그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굴욕적으로 밑에 깔려서 창녀나 낼 법한 신음과 소리를 내뱉는 것이.
자괴감. 자기혐오. 난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했다. 언젠간 그에게 내 모든 것을 허락하고 말겠지. 그러기 싫었지만, 동시에 그러고 싶다. 애타는 자궁에 드디어 그가 들어오면... 다시 태어나는 정도의 쾌락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일어났어?"
내 모습을 상상하며 몸을 떨자, 눈치챘는지 그가 내게 물어 온다. 그의 손이 내 엉덩이를 쓸자 따끔하면서도 짜릿한 감각이 마구 날뛰었다. 다시 엉덩이를 맞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아니, 기대하고 있다.
"...네."
그리고 난, 그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안다.
"주인님."
"그래."
부끄럽다.
부끄러움을 피하듯 그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어 얼굴을 묻는다. 이상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은 그의 탓인데, 그에게 숨으려 하다니.
비참하고, 애통하고, 슬프다.
아아... 아스터... 이런 언니라서 미안해... 난... 그냥 나약한 계집아이에 불과했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알지? 평소처럼 행동해."
"네, 주인님."
서창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안아들고 욕실로 향했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 * *
"그래서 내가 할 일이 없어서 코인에도 손을 댔는데..."
"그런 거 하면 안 돼요. 그건 투자가 아니라 투기라구요."
밥을 먹으러 내려가니 홀의 식탁에서는 남나유와 김아린이 뭔가에 대해 열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퍽 즐거워 보인다.
"아, 교수님."
"..."
난 김아린의 인사에 한 번 고개를 까닥여 답해주고선 그녀들의 옆에 앉았다. 남나유? 글쎄. 며칠 전부터 내가 말을 걸기 전에는 내게 먼저 말하는 법이 없었다. 마치 날 자리에 없는 사람 취급이라도 하듯이.
이유는 짐작한다. 아마 서창공을 좋아했거나 뭐 그런 비슷한 관계였겠지. 그런데 내가 그 옆자리를 차지하니까... 단순히 말해 삐진 거다. 뭐 어쩌라고. 나도 하고 싶어서 한 일은 아닌데.
"아린아. 나 먼저 올라갈게."
"어? 좀 남았잖아요."
"별로."
남나유는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갈 거면 가라. 이따가 있을 실험에만 잘 참여하면 된다. 남들이 다 하니까 자기도 따라 하는 건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만, 그걸로 됐다.
"..."
하지만 나도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그래서 묵묵히 수프를 떠서 입안으로 연거푸 가져가는데, 내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던 김아린이 망설이는 듯하더니 결국 말을 건다.
"저... 교수님."
"왜."
그녀는 항상 침착했다. 머리칼 색깔 때문인지 따스한 인상을 주기도 했고. 작은 키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가가기 쉬운 기류를 만들어 주었다.
"교수님은... 정말 오빠를 사랑하시나요?"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걸까. 사랑하냐고? 아니.
절대로 아니다. 내 몸을 더럽히고, 여자로서의 나를 짓밟은 남자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비록 내가 그를 주인님이라고 부를지언정, 그것은 굴복이지 사랑이 결단코 아니다.
"...사랑해."
하지만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내 처지다. 나는 그의 연인이었으니까. 그에게 고백하였노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기까지 한 주제에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뭐가 되겠나.
J'aime. 간단한 그 한 마디. 그 말을 하는데, 왜 이리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플까. 마법사로서 하면 안 되는 거짓을 고해서? 아니. 그런 건 아니다. 그런 정도가 아니다.
"거짓말."
"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내 눈을 쳐다보며. 저 따스한 갈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심원해 보일까. 잔잔한 수면 속 거친 회오리를 간직한 것처럼.
"교수님은 오빠를 사랑하지 않아요."
"난 그를 사랑해. 네가 아무리 부정한들, 사실은 변하지 않아."
"아뇨, 다시 말할게요. 교수님은 오빠를 사랑하지 않아요. 오빠도 교수님을 사랑하지 않고요.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뭐예요?"
"아침부터 이상한 소리를 하네. 먼저 일어날게. 식사 맛있게 해."
더 듣기 싫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런 나를 그녀의 말이 붙잡는다.
"사랑을 말하는 사람의 눈이 왜 그렇게 슬프죠?"
"..."
번개가 내 정수리에 내리꽂힌 기분이다. 식탁에 손을 대고 반쯤 일어서 있던 나는, 곧 힘없이 주저앉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아요? 제가 감히 모든 것을 안다고 하진 않겠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해요. 절대로. 교수님은 사랑을 하고 있지 않아요. 오히려... 슬픔 위에 서 있네요."
"아, 아스터... 때문이야."
"아스터 씨요?"
"그 아이가 사랑한다고 말했던 남자에게... 내가 고백했으니까. 난 동생이 사랑을 막아버렸어. 그래. 그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슬퍼. 아스터가..."
"전 오빠를 사랑해요."
"네가...?"
사랑한다고? 그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는 알아?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는 남자인지는 알아? 네가 뭔데...
"나유 언니도 오빠를 사랑하고요. 심지어 얼마 전엔 아스터 씨도 오빠를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됐죠.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는 다 같은 처지에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적어도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을 말할 때만큼은, 눈에는 행복과 결연한 의지가 가득 차 있다는걸."
"그건..."
"교수님은 아니에요. 솔직히 물을게요. 왜... 교수님은 오빠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오빠의 곁에 서 있으려고 하는 거죠?"
"나, 나는... 난..."
말이 쉽사리 만들어지지 않았다. 저 작은 몸 안에 이런 힘이 숨어 있었다니. 나를 이렇게 꼼짝 못 하게 만들다니.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면, 그걸로 좋아요. 하지만 이거 하나는 유념해 두세요. 진심으로 쌓아올리지 않은 관계는 낭떠러지로 연결된 길과도 같다는걸."
그것을 끝으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더는 내게 아무런 할 말이 없다는 것처럼.
"...마드모아젤."
살짝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본다. 당연했다. 처음 만났을 때 말을 놓기로 한 이후로 내가 그녀를 경칭으로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교수님. 말씀하세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는 사람이 있어."
내 이야기라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알 테지.
"그 사람은 처음엔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각오를 다졌지만 겪고 보니 평생 동안 겪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싸움이었어. 게다가 패배는 언젠가 찾아올 것이 분명하지. 이런 상황이라면... 넌 어떻게 할 거지?"
"간단하네요."
"간단해?"
정말로 그다음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단한 것이었다.
"포기하지 않아요. 끝까지 싸워요."
"방금 말했잖아. 이길 수가 없다고."
"그래서요?"
"어...?"
"이길 수 없으면 당장 포기해야 하나요? 그럼 교수님께선 언젠가 죽을 텐데 왜 열심히 공부해서 교수가 되셨죠? 죽은 다음에 진리가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그 노력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그건. 그게. 아으..."
"이길 수 없는 것에 대항해서 싸운다는 건요. 싸운다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어요. 너무 힘들어서 한쪽 무릎을 꿇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결단코 다른 한쪽은 단단히 버티겠다는 그런 의지. 비록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게 있더라도, 전부는 내어주지 않겠다는 그런 마음. 그게 교수님께도 있나요?"
"있었... 지."
"있었지가 아니죠. 있다. 있다고. 그렇게 말해요. 상대가 모든 것을 가져가도 내게 남은 게 있다면 싸워요. 싸움에 지는 순간은 내가 졌다고 인정할 때예요. 다시 말하죠.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면 싸운다는 그 자체에 가치가 있어요."
그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뒤돌아 사라진다. 나는 한동안 내 앞 접시에 담긴 묽은 수프를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다.
"élan vital..."
우리 나라의 한 철학자가 제시한 개념. 생명의 비약. 끊임없이 약동하는 생명의 힘.
생명이라는 게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생겨나면 반드시 사라지게 되어 있는 것이 생명. 고작 수십 년을 살다 죽는 것이 생명이다. 심장이 아무리 힘차게 뛴다 한들 언젠가는 멈춘다. 필연적으로.
하지만. 언젠가 죽을 운명이라고 해서 그저 죽을 날만 기다렸다면 인간은 지금의 인간이 아닐 것이다.
"마드모아젤. 당신이 내 수업의 생도였다면 난 당신에게 최고점을 줬을 텐데."
그래. 한 번 싸워 보자. 쾌락에 굴복하고, 몸이 그를 원하더라도 한 번 싸워 보자. 결연하게 다져진 의지가 침대 위에서 무너지더라도 싸워 보자. 패배는 매일 밤마다 있을 것이며, 부활은 매일 아침마다 있을 것이니.
몸은 이미 패배했다. 그의 손길이 닿으면 반항할 수 없다.
마음도 패배했다. 그러나, 마음만큼은 몸과 다르다. 전투에서 졌어도 전쟁에서 지지 않았다.
그래, 가져가라. 마음껏 내 몸을 탐해라.
그럼에도 내 마음은 얻지 못할 테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