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87화 (87/178)

〈 87화 〉 악에서 구하소서

* * *

모든 덕목은 동전과도 닮아 있다. 정확히는, 앞뒷면이 존재하는 동전의 그 모습이.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그러나 우리는 빛만을 선망하고 어둠은 멸시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동전이 앞면만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해가 뜬 낮은 온 세상이 빛으로 가득 찬다. 우리는 그 시간 동안 오늘과 미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때로는 투쟁을 한다. 밤은 어떤가? 온 세상이 어둠으로 뒤덮이는 밤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설령 천 개의 등불이 있다 한들 한 개의 태양에 필적할 수는 없는 법. 따라서 우리는 잠시 우리의 치열한 삶을 멈추고 침대에 누워 내일을 위한 힘을 비축한다.

누군가는 해가 더 오래 떠있지 못함을 탄식할 것이나, 낮에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밤에 충분히 휴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중의 휴식이 있기에 지금의 노력을 할 수 있고, 지금의 휴식이 있기에 나중의 노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덕목에도 앞면과 뒷면이 존재하니. 장점이 곧 단점이 되고 단점이 곧 장점이 될 수 있다. 하나, 대다수의 덕목은 빛과 어둠처럼 서로 상반되는 성질의 앞뒷면을 가지는 데에 반해, 스스로를 반대편의 짝으로 가지는 덕목이 존재한다.

욕망이 바로 그것이다. 실은 욕망이야말로 동전과 제일 흡사한 덕목이리라. 흔히들 절제를 미덕으로 생각하고, 욕망을 죄악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과연 그러한가?

더 편한 곳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이 없었다면 지금의 건축이 있겠는가.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는 욕망이 없었다면 지금의 식문화가 있겠는가. 이처럼 욕망이란 현재의 삶보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준다. 욕망하지 않는 자의 절제로만 가득한 삶은 틀림없이 건조하고 정적이기만 하리라.

그러나 욕망의 적은 다름 아닌 욕망 그 자신이다. 더 많은 돈을 손에 넣고 싶다는 욕망은 상인에게 장사에 대한 의지를 불어넣어 주나, 도둑에게는 그저 범죄의 동기만 될 뿐이니...

그러니 욕망을 가진 이들이여. 무언가에 애타게 목말라하는 자들이여. 주의할지어다. 욕망을 굴복시켜 자신의 것으로 하면 족히 해내지 못할 일이 없으나, 욕망에 굴복해 그의 것이 된다면 풍랑에 휘둘리는 돛단배가 될 것이로다.

­제임스 엘린 저, [아네르의 덕목에 관하여] 中­

이상하네.

생리를 할 때가 됐는데.

* * *

"아, 국왕 폐하께서 임명하신 기사분들이로군요! 인사 올립니다!"

국경 수비대의 대장이 창공 일행에게 군례를 올려붙였다. 격세지감에 어떤 일행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비바 연방에서 출입을 거부당했을 때와 비교하면 천지차이가 아닌가.

그때는 아스터가 없었더라면 통과하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제와 마법사인 퐁파두르 쌍둥이보다 지구 출신 일행들이 더 대접을 받는 느낌이다. 그도 그럴 게, 물론 사제나 마법사도 존경받는 직업군이었지만 나머지 일행은 저들의 왕이 직접 임명한 기사들이었으니까.

알펜시아인 이라면 기사 서임을 받은 쪽이 아무래도 더 친숙하고 존경스러워 보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퐁파두르 쌍둥이도 이런 점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당장에 아퀴탄 국경을 지나게 된다면 이 관계는 역전될 테니까.

"키르케로 가시는 겁니까?"

행선지를 확인한 수비대장은 살짝 걱정되는 얼굴로 말했다.

"아마 아실 수도 있겠지만 최근 도적떼가 국경에서 암약하고 있습니다. 이곳 콜드스트림 관문을 지나서 키르케쪽 관문인 그리말디까지 마차로 달리신다면 대략 2시간 정도가 걸리게 될 겁니다. 중간에 숲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카스텔몬테 숲입니다. 숲을 지날 때엔 특히 도적의 습격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그의 신신당부를 들으며 국경을 넘은 일행은 키르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수비대장은 마치 무법천지를 눈앞에 그리듯 말한다는 인상을 주었으나, 일단 두 국가를 잇는 도로의 첫인상은 이제까지와 별다를 바 없는 한적한 도로였다.

게다가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꽤 있는 편이었는데, 하기야 알펜시아가 타국과 육로로 이어진 루트는 이쪽 길 외엔 전부 다 자그만 산길이었다. 당연히 대부분의 육상 무역은 다소 위험하더라도 이 길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알펜시아의 방어막인 알펜시아 산맥은 상당히 험한 편이다. 특히 키르케 쪽은 도저히 길을 내기가 어려울 정도고, 아퀴탄 쪽은 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처럼 대로는 아니었다.

"진짜 가는구나."

나유가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딘가 쓸쓸하고, 시원섭섭한 데가 있는 목소리였다.

"무슨 집을 떠나는 기분이네."

"하긴 그러네요."

히사시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아니, 실은 륀이나 아스터를 빼면 다들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목숨의 위기도 있었지만 이곳에 넘어와서 처음으로 사람 취급을 받은 나라가 바로 알펜시아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이곳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은 그들이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었으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퐁파두르 쌍둥이가 일행에 합류한 것도 알펜시아였고 말이다.

"언젠간 다시 들를 때가 있겠죠."

위로하는 듯한 아린의 한마디. 하지만 창공은 영 부정적이었다.

"아니. 올 일 없는 게 최고지. 그냥 빨리 지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야."

"아하, 그런가... 하긴 그 말도 맞네."

언제나 그렇듯이 상당히 시니컬한 기색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모두가 어느 정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이 세상 어디에 그들의 집이 있던가.

'사실 난 여기라도 상관없는데.'

그러나 나유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서울에 위치한 그 펜트하우스로는 그다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넓고 적막하고 공허하고 외로운 공간이 그녀의 집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과연 그곳이 그녀가 있어야 할 공간인가? 예전이라면 그저 반쯤 체념하며 살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곁이야말로 그녀가 있을 곳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지구이든, 아니면 이곳 다이셀리시아이든 전혀 상관이 없다.

상관이 없고, 그저 어떻게든 창공의 옆에만 있으면 그만. 따라서 나유는 지구로 돌아간다는 것에 일말의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지금이야 지구가 아니니 창공이 다른 여자들과 사귈 수 있다고 쳐도... 결국에는 지구로 돌아가게 되면 하나를 골라야 할 게 아닌가. 적어도 한국은 일부일처제 국가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자신과 아린의 경쟁인데... 솔직히 말해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가진 게 무엇인가. 몸과 돈 외에는 없다. 그런데 그 두 가지 요소가 창공을 평생 동안 붙들어 놓을 정도로 매력적인가? 나유가 생각하기엔 그렇지 않았다.

몸이나 얼굴은 나이가 들면 쇠락하기 마련이며, 돈은 나유가 훨씬 많겠지만 창공의 집에 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평소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중산층 정도가 아니라 돈은 문제가 되지 않는 환경에서 자라왔다는 것이 너무나도 쉽게 드러나니 말이다.

따라서 창공은 완전히 자유로운 환경에서 나유와 아린을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경쟁에서 승리할 자신이 없었다. 하면 차라리 끝없는 유예를 바란다. 지구가 아닌 이곳에서... 한 여자를 선택한다는 선택지 없이 계속 다 함께.

그리고 또 하나. 다른 고민거리가 생긴 것이...

"야. 야. 나유야."

"어? 어어..."

어택이 상념에 잠긴 그녀를 일깨웠다.

"뭘 그렇게 생각해. 심각한 표정으로."

"딱히. 아무것도. 왜, 그런 날 있잖아. 그냥 기분 꿀꿀한 날."

"무슨 느낌인진 알겠는데."

본인이 그렇다면야 어택이 더 말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린아."

"..."

"아린아?"

"앗. 네... 무슨 일인데요?"

아린도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어택은 어쩐지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 같다 생각하면서도 아린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으면 쉽사리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었으니.

"무슨 일인지는 내가 묻고 싶은데.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아뇨... 좀 생각할 게 있어서요."

"아 그래? 방해해서 미안."

그리고 침묵만이 이어졌다. 사실 말을 할 사람도 없었다. 누군가 이런 상황에서 먼저 말을 꺼낼 사람이 있다면 단연 나유인데 그녀가 말이 없고, 히사시나 아린이 말이 많은 성격도 아니고, 창공은 자는 중이고...

어택은 역시 복잡한 표정이던 륀에게 말을 걸려 시도하다가 그만두었다. 네 여자들 중에서 고민거리를 말해보라 하면 끝까지 숨길 것 같은 사람이 그녀였으니.

이건 실로 끔찍한 분위기였다. 왁자지껄 즐거운 여행길까진 바라지도 않았지만, 역으로 이렇게 축 처지는 분위기도 곤란하기 짝이 없다. 결국 어택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부석 방향으로 트인 창문을 열고 아스터에게 말했다.

"아스터. 그리로 넘어가도 돼?"

"아, 어택 님. 그럼요."

아스터는 어택이 내릴 수 있도록 마차를 잠시 멈추었다. 그가 아스터의 옆자리에 앉자 마차는 다시 출발하기 시작했고. 그나마 바깥바람을 쐬니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나았다.

"그런데 힘들지 않아? 혼자서 마차 몰면."

"아니에요. 여기 앉아서 햇볕도 쬐고, 지나치는 풍경을 바라보면 잡념이 없어지는걸요. 부끄럽게도 제가 요새 고민이 많아서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게 도움이 되네요."

"무슨 고민인데?"

"아... 그건... 죄송해요.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서."

그녀의 말에 어택은 순간적으로 담배를 꺼내려다 고개를 푹 숙였다. 오늘따라 정말 왜 이렇단 말인가. 그가 고민 상담사라도 되는 건 아니었지만 과반수가 넘는 인원들이 전부 이러고 있으니 괜히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차라리 그 도적놈들이라도 좀 나왔으면 좋겠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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