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88화 (88/178)

〈 88화 〉 악에서 구하소서 (2)

* * *

적어도 지도상으로 알펜시아 산맥은 남해까지 이어지지 않고 해안선 못미처에서 뚝 끊겨 있는 것으로 나온다. 분명 험악한 산악은 그 기세가 많이 죽어 바닷가까지 달리지는 못한다.

하지만 길게 이어지던 산맥이 갑자기 뚝 끊기고 평야가 나타날 수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알펜시아와 키르케의 국경 검문소 사이 지대는 구릉지대였다. 거기에 중간에 나타나는 숲까지. 수비대장이 말했던 카스텔몬테 숲이다.

"길이 좀 나쁘네."

나유가 마차의 덜컹거림에 맞춰 몸을 흔들면서 내뱉은 말. 이 길을 이용해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왜 알펜시아가 육지에 붙어 있는 섬이라 불리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해상 운송로에 목숨을 거는지 알 것 같다고 말이다.

"다들 조심해. 야, 아린아. 창공이 깨워."

마부석에 아스터와 함께 앉아 있던 어택이 창문을 통해 말했다.

"여기 숲이 생각보다 좀 울창해. 강도들이 나타나기 딱 좋아."

"오빠. 오빠. 일어나요."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는 창공. 그는 아무 말 없이 창밖부터 바라보고는 활과 화살을 점검했다. 왜 깨웠는지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눈치였다.

"지금 막 들어선 거야?"

"네."

"잘했어."

해는 중천에 떠올랐지만 햇살은 충분하지 못했다. 울창한 삼림에 가려 그 파편만이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우연인지 뭔지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그들뿐이었다.

"어쩐지 느낌이 쎄한데요..."

륀은 히사시의 중얼거림에 은근히 그를 흘기며 책망했다.

"괜히 그런 말 하지 말란 말야. 그러다가 진짜로 나타난다고."

"앗, 그렇군요. 에고, 입이 방정이지..."

그렇긴 해도, 여정은 순탄하기만 했다. 아스터도 일부러 속도를 높여 마차를 몰고 있었고. 하나 아무 일도 없다고 해서 긴장의 끈을 놓는 일행은 없었다. 특히 창공과 아린이 그랬다.

알펜시아 산맥에서 물을 뜨러 갔다가 기습을 당한 일은 아직까지도 그들의 뇌리 속 깊숙이 박혀 있었다. 게다가 아린은 그때 등에 화살을 맞아 죽을 뻔하기까지 했었고.

기습은 말 그대로 기습이었다. 아무런 전조증상이 없다. 마치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갑자기 내리꽂히는 것이다. 그것을 직접 겪어 본 경험이 있는 두 남녀는 너무나도 잘 인지하고 있었다.

"후..."

나유가 눈을 감고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검집에서 검을 손가락 두 마디쯤 빼내었다. 그런데, 그녀의 검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검에 마나를 불어넣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듯 간단한 동작.

륀이 언젠가 창공에게 했던 말대로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턴 쉬웠다. 천성적으로 집중이 떨어지는 나유가 조금 난항을 겪긴 했지만 왕궁에서의 수련과 륀의 지도 아래 어택과 나유는 드디어 마나 유저의 초입에 들어서는 데에 성공했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유는 륀에게 쉽사리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륀도 그런 나유에게 굳이 다가가려 하지 않았고. 그녀가 자유자재로 마나를 사용하게 된 것은 오로지 개인의 의지 덕분이었다.

만약에 해내지 못했더라면 창공도 상당히 곤란할 뻔했지만 그래도 마나를 뽑아내는 데 성공했으니 아무 말을 하지 않았더랬다. 기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우려하던 일이었다. 여자들 사이의 다툼과 증오.

첫 번째 위기는 아린이 창공과 나유 사이에 끼어들었을 때였으나, 그때는 아린의 특수한 위치 때문에 나유도 참고 넘어갈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창공 입장에서는 두 여자의 극진한 봉사를 받을 수 있었으니 전화위복인 셈이다.

그러나 륀은 아니었다. 차라리 아스터였으면 몰라도, 륀까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는 사실은 나유를 상당히 불쾌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아무 접점이 없지 않은가. 뭐가 어찌 됐든 한 일행이기에 참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이런 점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터지는 때가 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창공은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내심 그때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막을 수 없는 일이라면 한 번 시원하게 터뜨리고, 그 수습을 하며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니까.

아무튼 중요한 건 나유와 어택이 본격적인 마나 유저가 됨으로 인해서 일행의 전력이 급상승했다는 것이다. 이제 유일하게 마나를 사용해 보지도 못한 사람은 히사시뿐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는 전투원이 아니다. 일단은 비전투 업무를 주로 담당하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소수인 창공 일행의 특성상 싸울 줄은 알아야 하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히사시는 자기만 왕따를 당하는 기분이 들어 내심 초조했다.

아무도 그에게 왜 노력하지 않느냐는 둥 핀잔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잊을 만하면 히사시를 갈구는 창공조차도 마나 관련해서 히사시에게 뭐라 한 적은 없다. 말하자면 이건 초조함과 자괴감이다.

어쩌겠는가.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은 시간이 해결해 주길 바랄 수밖에.

"...앞에 뭔가 있는데."

어택이 창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마차의 속력이 점점 줄고... 익숙하진 않은, 그러나 기억 속에는 분명히 남아 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거 피 냄새 아냐?"

나유가 킁킁대더니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륀도 고개를 끄덕이며 칼 손잡이에 손을 올린다.

"택이 형. 뭐야. 뭐 보여?"

"시체들... 같은데."

"젠장. 아스터. 속도 올려. 빨리 빠져나가자."

"안 돼요...!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구해야 해요!"

창공이 그런 아스터에게 짜증을 내며 반박하려 했지만 이미 마차는 급제동을 했고, 아스터는 마부석에 뛰어내린 뒤였다.

"낙장불입."

역시 마부석에서 내린 어택이 문을 열며 창공에게 나오라고 손짓을 했다. 영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어택의 말대로 낙장불입이었다.

"이건 아니야."

창공은 마차에서 내리며 나머지 일행들을 둘러봤다.

"나유. 륀. 내려. 아린이랑 히사시는 여기 있어. 고개 숙이고 있지만 말고 창문으로 바깥에 보면서 무슨 일 있으면 소리부터 질러."

"네!"

"알았어요, 오빠."

내릴 사람들이 전부 내리자, 창공이 한숨을 쉬며 시위에 화살을 매겼다. 아스터는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 사이를 바쁘게 지나다니며 생존자를 확인했다. 하얀 사제복 밑단이 빨갛게 물들었지만 당연하게도 그녀의 발을 막을 순 없었다.

이곳은 이제까지 지나왔던 길에 비해 폭이 꽤나 넓었다. 공터라고까지 부르긴 뭐했지만... 마치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있는 졸음쉼터 같은 느낌의 공간이다.

그리고 이 공간엔 시체들이 한가득이다. 대충 보이는 것만 세어 봐도 열 구가 넘어간다. 그러니까 이미 시체가 되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아 보였다.

이미 흙바닥은 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사람들의 몸엔 잔혹한 칼자국이 여러 개가 나 있었다. 마치 피가 더 빨리, 많이 흘러나오게 하려는 것처럼. 아니면 원래부터 그런 취향의 습격자들을 만났거나.

햇빛은 여전히 잘 들어오지 않고 있다. 그 탓인지 나무들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서늘함을 넘어서 차가운 데마저 있고, 그것이 눈앞에 펼쳐진 광경과 합쳐져서 더더욱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제발... 제발...!"

아스터가 필사적으로 중얼거리며 확인했지만 미약하게나마 숨이 붙어 있는 자는 없었다. 전부 시체였다. 그것도 이미 차갑게 굳은 지 오래된.

"빨리 여길 떠야 해."

"...동감."

창공과 륀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미끼라고.

"습격자들은 아마 이 근처에 있을 거야. 륀. 빨리 아스터 조용히 시키고 이리로 데리고 와. 택이 형. 같이 가요. 말 한 번에 안 들으면 강제로 끌고 와서 승객칸에 집어던지고 마차 몰아."

"알았어."

"나유 너도 빨리 마차로 돌아가."

"괜찮겠..."

"돌아가라고."

그는 시위를 천천히 당기며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이곳은 활을 쏘기에도 좋은 위치가 아니었다. 사방이 수풀로 가로막혀 있으니까. 하지만 수풀 바깥에서 안쪽을 보긴 어려워도, 안쪽에서 바깥을 보기는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건 없어도 습격자들이 이미 일행을 응시하고 있을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창공은 서서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아스터. 빨리. 여긴 위험해."

"하지만 언니...!"

"어택 씨. 부탁해요."

륀과 어택은 각자 아스터의 한쪽 팔을 잡고 강제로 그녀를 연행했다. 그렇게 창공도 뒤돌아 마차로 뛰어가려는 그 순간이었다.

쉭!

파악­!

"끄으으으윽...!"

창공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이빨 틈새로 고통에 겨운 소리를 뱉어냈다. 오른팔에 화살이 꽂힌 것이다.

마치 둔기로... 어쩌면 그 이상의 무언가로 오른팔을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강하게 얻어맞은 느낌. 이제까지 살면서 겪었던 고통 중 제일이었다. 창공의 등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굽어졌다.

"창공아!"

"닥치고 싸울 준비나 해!"

나유가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 다가오려 했지만, 그는 고통과 분노가 가득 담긴 눈동자로 나유를 바라보며 전투를 요구했다. 륀도 순식간에 상황 파악을 했는지 아스터를 놓고 칼을 뽑아들었다.

"맞았다!"

"다 죽여버려!"

수풀 속에서 칼을 든 도적들이 튀어나왔다. 당황한 표정의 나유는 금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치며 역으로 도적들에게 뛰어들었다.

"이 개새끼들아아! 누구한테 활질이야!"

그녀의 칼이 순간 눈부시게 빛났다. 단순히 마나를 담아서 빛나는 정도가 아니었다. 선두에서 달려오던 도적이 당황하여 칼을 들어 막으려 했지만, 나유를 막을 수는 없었다.

"끄아아악!"

그녀가 휘두르는 검로 그대로 빛의 사선이 생기더니, 도적의 검이 그대로 부러지고 몸은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났다. 말 그대로 빛이 번쩍이는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기습에 성공해 돌격하던 도적단의 기세가 일시적으로 주춤거렸다.

"이 새끼들이 죽으려고!"

어택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의 방망이에서도 푸른빛이 발했고, 역시나 어택에게 대적하던 도적의 수비도 덧없었다.

콰지직!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머리통이 박살 나고 피와 뇌수가 사방에 흩뿌려진다. 힘없이 무너진 머리 잃은 몸뚱어리는 부들부들 떨며 소름 끼치는 광경을 자아냈다.

"씨발! 마나 쓰는 놈들이잖아!"

"활을 쏴! 빌어먹을 활을 쏘라고!"

위기였다. 아무리 마나를 쓰는 것과 화살을 막는 것은 지극히 별개의 능력이다.

"저 새끼들한테 뛰어들어! 엉켜서 싸워!"

그때 오른팔을 부여잡은 채 자세를 낮추고 있던 창공이 소리를 질렀다. 순간적인 판단이었지만 방향은 옳았다. 아군과 적군이 뒤엉킨 상황에서 자신 있게 적만 저격할 수 있는 사수는 몇 없으니까.

나유와 어택, 그리고 륀은 그런 창공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 일선에 선 도적들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마나 유저와 정면으로 맞붙을 자신은 없지만, 그렇다고 쉽게 물러설 수도 없으니까.

다만 이번에는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일부러 내지 않는 것이었다. 적을 베어넘기면 도적 궁수에게 시야를 제공해 주는 꼴이 되니까. 도적들도 그걸 아는지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유예의 시간 동안 창공 일행을 베어 넘기려 애를 썼다.

기본적으로 도적들이 머릿수가 많았기에 한 명당 둘셋씩 달라붙어 공격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잘 막아냈다. 그동안의 검술 연습과 대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창공 님...!"

아스터는 싸움에 참가하는 대신 사색이 된 얼굴로 창공에게 다가왔다. 응급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 그녀였기에 그도 별 불만은 없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말하지... 말고...! 일단 이거부터 뽑아!"

고통에 겨운 목소리.

당황스럽고... 죄스럽고... 무척이나 황망한 아스터였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자기 할 일을 꿋꿋이 해냈다.

"옷소매라도 물어 주세요!"

두 손으로 화살을 잡고, 순간적으로 힘을 주어 빼낸다.

"크으읏...!"

앙다문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 천만다행히 화살은 촉까지 그대로 뽑혀 나왔다. 아스터는 피로 물든 화살촉에 혀끝을 한 번 대더니 침을 뱉었다.

"독은 없어요! 치료 시작할게요!"

그녀가 환부에 두 손을 대고 눈을 감자 따뜻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벌어진 채 피를 흘리던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 갔다. 창공은 팔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되자 바닥에 떨어진 화살을 집어 들었다.

"아직 안 돼요! 상처가..."

"입 다물어!"

아스터의 치유는 응급처치에 불과하다. 창공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힘이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은 기억하고 있다. 아직까지 궁수가 그 자리에 있을진 미지수였으나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다.

시위를 당기자 아물었던 상처가 터지고 피가 뿜어졌다.

"아으윽...!"

"창공 님!"

화살촉이 파랗게 빛났다. 고통 때문인지 끝이 덜덜 떨렸지만 결코 화살을 놓지는 않았다.

티잉­!

기어이 시위가 튕겨지고, 허공에 광선이 그어졌다.

"끄아아아악!"

"빌어먹으을! 러네이가 맞았어!"

"이런 젠장!"

분한 목소리로 땅을 박차는 창공. 마나를 담아 쏘는 화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관통력이 극대화되는 것과, 닿으면 폭발하는 것. 방금 창공이 노린 것은 후자였지만 정작 발사된 것은 전자였다.

아직까지 창공은 그 컨트롤이 미숙했다. 연습이 부족했던 탓이다. 나머지는 전부 자신의 무기를 잡고 연습하는 와중에 창공은 자신만의 사업을 했으니까.

"아스터... 마차까지 부축해 줘...!"

"네!"

그는 아스터의 호위를 받으며 마차로 이동했다. 그러나 객차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마부석에 올라타 화살을 꺼내들었다.

"마차 몰아! 빠져나갈 거니까!"

아스터는 창공의 의도를 눈치채고 잽싸게 자신도 마부석에 탑승해 고삐를 잡았다.

"하!"

소음에 흥분해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던 말들이 아스터의 채근에 서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적들이 말을 공격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아마도 살려서 끌고 가려 했으리라.

"다들 올라타!"

도적들을 막던 셋은 창공의 외침에 하나씩 마차로 달렸다. 창공도 고통을 참고 계속해서 화살을 쏴대며 엄호했다.

나유... 륀... 마지막으로 어택이 달리는 마차를 잡고 올라탐으로써 전투는 끝이 났다. 뒤에서 놓치면 안 된다느니 죽이라느니 온갖 고함을 질러댔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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