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사랑이 사랑을 가르다 (2)
* * *
"정신이 나갔지."
륀이 중얼거렸다. 새벽이 찾아오긴 했지만 아직까지 복도는 어두웠다. 그리고 그 어두컴컴한 복도의 차가운 벽에, 그녀는 등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로 천천히 호흡하고 있었다.
"정말로 이젠 안 되는 걸까..."
아무리 굳세게 마음을 먹어도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하늘에 달이 떠오르고 밤이 찾아오면, 침대 위의 륀은 창공의 암컷에 불과했다. 여자도 아닌 그저 암컷. 그 말만큼이나 밤의 륀은 잘 드러내는 말이 또 있을까. 그녀 자신도 부정할 수 없었다.
실은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은 지금조차도 창공에게 안겼을 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랫배가 저려오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나마 초기에는 강제로 당한다는 것에서 기인한 혐오감과 불쾌함이 지배적이었다면, 지금은 정말로 사랑하는 연인에게 안긴 것처럼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한쪽이 거부해도 다른 한쪽이 받아들인다면, 완전히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진 단순한 시간문제다. 륀은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사랑이라...'
륀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창공을 사랑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그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숨이 가빠 오고 다리에 힘이 풀리려 하는 것일까. 그녀는 그 이유를 육체의 굴종 때문이라 생각했다. 굴종 때문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마음도 꺾이게 될까?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다. 당장 지난 밤에도 상상할 수조차 없던 모욕을 당하면서도 창공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아양을 떨고 몸을 움직이지 않았나.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던 셈이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륀이 스스로 한 일이다. 륀은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언젠간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진심으로 창공을 그녀의 사랑하는 연인이자, 경모하는 주인님으로 모시게 될 날이.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륀은 상관없었다. 아스터를 지킬 수만 있다면. 아스터를 창공에게서 지킬 수만 있다면 자신은 구렁텅이에 빠지더라도 기꺼이 웃으면서 감내할 수 있었다. 창공을 겪으면 겪을수록 확실해지는 사실이었다.
'아스터... 언니 힘낼게...!'
그녀는 그렇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자매가 쓰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시로 무너질 것만 같은 마음도 아스터를 생각하면 얼마든지 버텨낼 수 있었다.
륀이 생각하기에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었다. 계속해서 사내의 밑에 깔리다가 생긴, 예속에서 비롯된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다. 소중한 동생, 소중한 가족을 위한 마음. 순수한 자매애. 그 사랑이 있다면 버텨낼 수 있었다.
끼이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려던 륀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불을 덮고 곤히 자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아스터가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기도 중이었구나...'
그렇게 납득하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을 닫은 륀은 살금살금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듣기로 성직자들은 새벽부터 기도를 한다 했다. 아스터도 그런 것이겠거니, 하고 보는데... 어딘가 의문점이 생겨났다.
기도는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기도라는 건 마음이 최우선으로 중요한 것이니 자세는 비교적 중요하지 않았지만, 비교적 중요하지 않다 뿐이지 형식을 지키는 것도 사제품 이상의 성직자들에겐 매우 중요했다.
그런데 그 점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지금 아스터의 자세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무릎은 꿇고 있으되, 허리는 구부정했고 두 손은 허벅지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채다. 다른 건 몰라도 기도할 때엔 반드시 손을 맞잡고 하는 것이 기본이다.
아스터같이 성직자의 표본 같은 사람이 그런 기초적인 실수를 하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륀은 아스터의 자세에서 기도를 한다기보단 칼을 뽑을 준비를 하는 검사의 모습에 가깝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착각... 이겠지...?'
순간 아스터의 눈이 떠졌다. 그녀는 륀이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것처럼 정확하게, 소리 없이 고개를 돌려 똑바로 시선을 마주했다. 순간 륀의 팔뚝에 영문 모를 소름이 돋았다.
"아스터. 좋은 아침이야. 어젯밤엔 잘 잤."
"잘 못 잤어."
"아...?"
아스터의 입에서 절대 나올 수 없으리라 생각한 말이 튀어나왔다.
"언니. 어젯밤엔 어딜 다녀온 거야?"
"아, 응... 서창공이랑 할 이야기가 조금 있어서..."
"거짓말. 할 이야기라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당황스러웠다. 순간적으로 어안이 벙벙해진 륀은 말문이 막혔지만, 아스터는 조용하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녀는 아스터의 눈빛이 이토록 차가워질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동생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도 몰랐다. 말은 조곤조곤했지만, 지나가는 사람에게 갑자기 오만 욕을 다 먹더라도 이렇게까지 당황스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어... 그게. 음, 왜 너도 알잖아."
"아니. 모르겠는데."
"그게. 그게. 그렇지. 앞으로의 일정이나, 원래 살던 세상에 대한 이야기라거나. 뭐 그런 것들. 너도 궁금하지? 들려."
"자꾸 거짓말하네?"
이건 뭔가 있었다. 황망한 와중에도 머리를 굴리던 륀은, 간신히 어떠한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아스터... 너 설마..."
"어젯밤에 언니가 창공 님께 안기는 소리를 들었어. 주인님? 임신하고 싶다고? 더 때려달라고?"
"아... 아아아... 아냐..."
오직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는 없었다. 결코 보여주고 싶지 않던, 들려주고 싶지 않던 것을 들켜 버렸다는 이 사실은 륀이 어떠한 생각조차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벼랑 끝에 몰렸지만,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지금 그녀의 상황이 그와도 같았다.
"언니... 몰랐는데 참 음탕했구나? 언니의 그... 더러운 음욕을 채우려고... 나에게서 창공 님을...! 빼앗아 갔던 거네...!"
"아아아... 아아, 아니야... 아스터... 아니야..."
"더러운 탕녀 같은 모습으로...! 창공 님의 눈을 가리고! 동생의 사랑을 빼앗고! 자기 성욕을 채우기 위해 창공 님을 이용했어!"
"아니야...! 제발, 아스터. 들어, 들어 줘...! 아니야! 끔찍한 오해야..."
아스터의 푸른 눈에서 분노가 가득 뿜어져 나왔다. 륀은 필사적으로 해명을 하려 했지만 자꾸만 말이 머릿속에서 흩어지는 탓이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말은 부정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언니는 항상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나에게서 빼앗아 갔지. 내가 슬퍼서 엉엉 울어도 언니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어. 그래도 난 다 용서했어. 그런데... 내가 언제까지고 용서만 할 줄로 알았구나?"
"아냐... 아냐...!"
"마침 성직자니까 잘 되었다고 생각했겠지. 우리에겐 혼전순결의 의무가 있으니까. 그 틈을 타서 더러운 몸뚱어리를 창공 님께 바치면 날 앞지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구나? 대단해, 언니... 정말 대단해..."
"아스터. 내 말... 언니 말 좀 들어줘..."
"시끄러워. 조용히 하란 말야. 언니는 이런 때에도 변명이야? 그냥 인정해. 인정하라구. 평생 동안 내게서 빼앗기만 해서 이번에도 별거 아닌 줄만 알았다고. 그럼 혹시 알아? 바보같이 착한 아스터가 이번에도 용서할지? 응? 인정해 보라고. 빨리."
륀이 마주한 것은 단순한 오해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과, 투기와, 거짓된 관계와, 옛날에 묻어 놓았다고 생각했던 오래된 잘못까지 한 번에 뒤섞이고 버무려진 용광로에서 뽑아낸 증오의 철퇴였다.
따라서 그녀가 재주 좋게 자신의 행동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고 해명했다 하더라도 아스터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아스터는 이미 륀이 뭐라 하든 들을 마음이 없었다.
평생 동안 이타적이기만 하던 사람이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마음의 무기를 휘두르니 사방에는 충격과 공포만이 가득했다.
"왜... 대체 왜..."
서글픈 눈물이 륀의 양 뺨을 타고 흘렀다. 전부 다 좋은 의도로 한 일이었다. 자신을 꺾어서라도 동생을 지킬 수만 있다면 괜찮다는 생각으로 한 일이었다. 아무리 괴롭더라도 동생만 무사하다면 다른 남자의 노예가 되더라도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일을 벌였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자, 륀은 더 이상 어디에 의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아스터가 품었던 사랑의 크기일 것이다. 평생토록 이성에 대한 사랑을 해 본 적이 없기에 사랑에 서툴렀고, 사랑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서툴렀던 두 자매는 끝내 파국으로 치닫는 관계를 마주하게 되었다.
* * *
"..."
그리고... 쌍둥이 자매의 문밖에서 소리를 엿듣는 창공이 있었다. 기분 좋게 식사 시간까지 잠에 들려 했던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별게 아니었다. 그저 본능적인 직감 때문. 답지 않게 직감에 의존해 행동한 그는 이런 방식으로 기막힌 보상을 받게 되었다.
"나가... 나가라고."
"아스터... 내가, 내가 다 설명할게. 응? 다 설명할 수 있."
"나가! 제발! 좀 나가라고!"
창공은 재빨리 뒤돌아 자기 방으로 향했다. 담배를 입에 문 그는 문 앞에서 문고리를 잡고 대기했다.
그렇게 2분 정도 지났을까. 천천히 문을 여니 그곳에는 망연자실한 표정의 륀이 서있었다.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다.
"아..."
"무슨 일이야. 말할 거 있어? 나 한 대 피우려고 하니까 밖에 나가서 얘기하자."
"그게... 그냥... 그... 난..."
륀은 창공을 올려다보며 울먹였다. 그녀 자신조차 왜 자신의 발걸음이 이곳을 향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이었다.
분명 이 남자는 최악의 남자였다. 륀도 창공이 정말 싫었다.
그런데 왜.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든 이때에.
자신은 무엇을 바라고 창공에게 온 것일까.
"그, 앗. 아냐. 난 이럴..."
창공은 아무 말 없이 륀을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게 된 륀은 참았던 눈물을 기어이 터뜨렸다.
"흐으윽... 케흑, 꺽... 으흑..."
그리고.
복도 저 멀리에서 아스터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