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사랑이 사랑을 가르다 (3)
* * *
"미안한데, 출발은 조금 있다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참 드물게도 히사시가 창공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껏 창공은 허리를 다쳤을 때ㅡ본인의 주장에 따르면ㅡ를 제외하면 탄광을 탈출했을 적부터 일행을 몰아세우듯이 일정을 재촉했었다.
그것 자체에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딱히 없었다. 갈 길이 멀다는 것은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한데 오늘 갑자기 창공이 출발을 지연시킨 것이다.
"혹시... 또 허리가 아파?"
나유가 어딘가 어두운 기운이 있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창공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 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겨서."
"급한 일?"
"응. 륀이랑 조금 이야기할 거리가 생겨서."
"그게 뭔데?"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라. 말은 못 해주겠네."
"흐응..."
콧소리를 내며 잠시 륀을 쏘아보다가 다시 수저를 드는 나유. 그때,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아린이 왼손 새끼손가락으로 나유의 오른손을 툭, 건드렸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자, 아린은 말없이 시선으로 아스터를 가리킨 다음 식사를 재개했다.
'음.'
아스터의 얼굴을 한 번 슬쩍 보니 그렇게 어두워 보일 수가 없었다. 항상 웃음 짓지는 못하더라도 그녀에게선 주위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오오라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대놓고 '나 무슨 일 있어요' 라고 하는 듯한 어두운 얼굴. 나유는 퐁파두르 쌍둥이, 그리고 창공. 이 삼각관계에서 어젯밤 사이 무슨 일이 발생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뭐란 말인가?
스푼을 쥔 나유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저 한 남자를 사랑하고 싶을 뿐인데, 그게 왜 이렇게 어려운지 너무 슬프고 분했다.
'이게 다 저 여자 때문이야...'
그녀는 다시 륀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륀도 나유를 마주 바라봤지만, 이내 눈동자를 아래로 떨구며 시선을 피했다. 약간은 의아했다. 오늘따라 륀의 모습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보였던 것이다. 절로 사람의 측은함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모습 말이다.
'그래봤자지.'
분명 무슨 일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륀에 대한 나유의 부정적인 감정을 꺾어놓을 수는 없었다. 자기는 아닌 것처럼 해놓고 아스터의 뒤통수를 쳤다는 사실이 가장 큰 감점 요인이었지만, 요새 새로 생긴 이유가 있다.
륀이 공개 고백을 한 뒤로, 창공이 나유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는 것. 혹시나 싶어서 아린한테도 물어봤더니, 그녀도 마찬가지인 실정이었다. 그 말은 결국 매일 밤마다 륀이 창공을 독차지한다는 게 아니겠는가?
말하자면 륀은 상도의를 어긴 셈이었다. 정말 백 발 물러서서, 어쩔 수 없이 창공을 나눌 수는 있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어차피 아린을 허락한 이상 세 번째가 새로 들어오면 어떠한가. 창공을 진심으로 사랑하기만 한다면야.
그러나 이건 용서할 수 없었다. 아린이 나유의 인정을 받고 나서도 나유의 눈치를 얼마나 봤던가. 사실 정도만 덜할 뿐이지 지금도 보고 있었다. 그것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괘씸하긴... 혼자서 밤마다 앙앙 울어댔을 거면서... 그런 주제에 이제 와서 불쌍한 척을 해?'
나유의 숟가락질이 점점 전투적으로 변해갔다. 이상함을 느낀 히사시가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려는데, 어택이 그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는다.
"왜요?"
"..."
그는 히사시를 똑바로 바라보며 엄지를 세워 제 목을 한 번 스윽, 긋는 시늉을 했다. 그제서야 어떠한 사실을 깨달은 히사시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에겐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을, 또 누군가에겐 어영부영했던 식사가 끝나고 다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니, 돌아가려 했다.
"...아?"
나유가 계단을 오르려는 아스터의 손을 붙잡자, 그녀가 살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무슨..."
"잠깐이면 되니까. 아린아. 넌 먼저 올라가 있어."
아린은 잠시 걱정되는 시선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계단을 올랐다.
"잠깐 밖으로 나갈까?"
"네, 네..."
밖으로 나온 두 여인은 여관 뒤편 한적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담배를 꺼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었던 나유는 순간 멈칫하며 아스터의 눈치를 봤다.
"그, 담배 안 피우지?"
"전 상관없어요."
"하... 고마워. 담배 없이는 이야기하기가 조금 곤란하네."
치이이이...
담배에 불이 붙고, 한 번 깊게 빨아들인 나유는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하아아아..."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제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 중에는 사람들의 고민을 듣는 것도 있으니까요."
"바보."
"네?"
정말인지 아스터에겐 화를 낼 수가 없다고 느끼는 나유였다.
그래. 이런 사람이라면 창공을 함께 나누는 것을 허락할 수 있었다. 하지만 륀은...
"아스터. 지난밤에 무슨 일 있었어."
"그게."
"아니라고 부정할 생각하지 마. 딱 보면 아는 거니까. 창공이랑 네 언니, 그리고 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어. 그게 뭐야?"
"..."
아스터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아스터... 다른 때엔 네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지 몰라도, 오늘만큼은 내가 네 이야기를 들어야겠어. 한 가지 알려줄까? 난 창공이를 사랑해. 잠자리도 여러 번 같이 했어."
"네...?"
"뭘 그렇게 깜짝 놀라. 나뿐만이 아니야. 아린이도 마찬가지야. 따지고 보면 창공이를 가장 오랫동안 사랑한 건 아린이지만."
"아... 아니, 죄송합니다... 그게... 잘... 이 상황이 저에겐..."
그녀의 모습은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한 그루의 나무와도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꺾여버리거나, 뿌리째 뽑혀 날아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그때 온천에서 있던 일 기억나? 그때 넌 창공이의 아이를 품겠다고 했어. 그래. 나랑 아린이 앞에서 말이야."
"그... 아... 죄, 죄송... 죄송하..."
목소리에선 절망과 울음이 묻어난다. 사랑은 참 어려운 것. 오늘 그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은 건 나유나 아린 뿐만이 아니었다.
"아스터."
지금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아스터의 손을, 나유가 꽉 잡아주었다.
"난 말이지. 아스터 너라면 괜찮다고 생각했어."
"그게 무슨..."
"넌... 우리 생명의 은인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관문에서 통과를 거절당했을 때엔 꼼짝없이 그렇게 죽는 줄만 알았어. 그때 네가 나타난 거지. 우리에게 네가 어떻게 보였을까? 구세주. 아니, 구세주 그 이상이었지."
"그건 성직자로서 당연한."
"들어 봐. 거기에다가 넌 우리를 물심양면으로 계속 도와줬고, 떠나는 순간까지 우리를 걱정하며 여비까지 주었어. 만약에 네가 알펜시아로 우리를 이끌지 않았더라면 우린 지금 살아있지도 않았을 거야. 지금의 우린... 네 덕분에 존재해. 아니, 반론하지 마. 그냥 들어. 그렇게 납득하라구."
"네... 네..."
"그런 네가 창공이를 사랑한다는데 내가 미워할 수 있을까? 아니. 절대로. 있지. 나랑 아린이는 자매 같은 사이야. 처음 이 세상에 오고 교류하면서 친해졌지만, 같은 남자를 사랑하면서 더 친해질 수 있었어. 그리고 너도 내 자매가 되어 준다면... 난 정말 기쁠 거야."
나유는 아스터의 손을 붙잡고 진솔한 마음속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스터는 그저 멍하니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엔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미안하고, 고맙고, 미안하고... 그러니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이 느낌과 마음은 말로 전할 수 없었다. 마치 그날 룬덴에서 교향곡을 들었을 때처럼.
"너 같은 자매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지. 아, 그렇지. 아이는 내가 제일 먼저 가질 거니까 그렇게 알아. 그건 양보 못 해."
"앗, 네..."
"장난같이 말했지만 장난 아니다? 이거 어기면 나 진짜 화낼 거야.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아스터. 난.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길 원해. 창공이와 그 여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지?"
한참을 망설이던 아스터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언니가."
"언니가?"
"창공 님께... 엉덩이 맞으면서... 주인님이라고... 임신하고 싶다고... 벌로... 더 세게..."
"...하. 하하... 하...!"
"무, 물론 연인 간에 잠자리를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고... 마, 마, 마법사들에겐 저희 같이 혼전순결의 의무도 어, 없지만..."
"미친년..."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며 담배를 입에 가져가던 나유는 화들짝 놀라며 아스터에게 손바닥을 내보였다.
"아, 미안! 말이 좀 심했네. 그래도 네 언니인데."
"저는 성직자라 아무것도 못 하는데... 빼, 빼, 빼, 뺐...! 겼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너무 어, 억울해서어...!"
"아스터."
"저도 창공 님께 저를 드리고 싶은데...! 끄윽...! 커헉... 자, 자기가 먼저 빼앗아 놓고오오...! 왜 나한테, 나한테 이러는지 너무 억울하다고, 컥...! 생각, 생각이...!"
"이리 와."
나유는 두 팔 벌려 아스터를 꼬옥 안아주었다. 그녀가 나유의 품에 무너지듯이 안기고, 서러운 울음을 토해냈다.
"흐으윽... 끅... 카흑! 끄윽... 크흥, 으흐흐흐흥..."
"마음껏 울어. 너랑 나랑만 있으니까. 힘들었지?"
톡. 톡. 톡...
수없이 아스터의 등을 두드리며 진정시킨 덕분일까. 잠시 후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고 몸의 떨림이 멈추었다.
"고마... 고맙습니다... 저는 성직자인데 이런..."
"성직자는 사람 아니야? 사랑도 하고, 질투도 하는 거지. 그래... 문제는 네 언니야. 륀 퐁파두르."
"언니가요..."
"마음 독하게 먹어, 아스터. 동생이 먼저 사랑한다고 한 남자를 아무 말도 없이 빼앗는 게 언니가 할 일이야? 절대 아니지. 그러면 안 돼. 잘못은 저쪽에서 먼저 한 거야."
"하지만 제가 어떻게 하면 좋죠. 저는 혼전순결을..."
"아스터. 조금 직설적으로 말해도 될까?"
"네?"
"그 순결이라는 게 말이지. 말하자면 보지에다가 자지를..."
"그, 그, 그런 말씀은...!"
"오... 미안. 창공이는 침대에서 돌려 말하지를 않아가지고."
한바탕 시원하게 웃은 나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거... 만 안 하면 된다는 거 아냐."
"그렇... 지요...?"
"방법이 있어. 잠깐 귀 좀 빌려줄래. 나도 이건 대놓고 말하기가 좀..."
그렇게 차분하게 나유의 귓속말을 듣던 아스터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더니, 이내 아연실색하며 손을 내젓는다.
"아니 어떻게 그런...!"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거기로도 할 수 있어."
"하지만 거긴 더러운..."
"창공이는 좋아할걸? 나 믿어. 사실 내가 먼저 주려고 했는데 특별히 너한테 양보하는 거니까."
"아으... 그러니까 그게..."
우물쭈물하는 아스터. 하지만 나유는 그녀를 압박하듯이 어깨를 꽉 붙잡았다.
"어쨌든 순결만 지키면 되는 거잖아. 뒤쪽으로 아무리 해도 보... 크흠!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거기로 하는 게 아니면 순결한 처녀라니까?"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걸까요..."
"그럼 이대로 네 언니한테 당하고만 있을래?"
이야기를 듣고 나유가 내린 결론은 아스터가 뒷구멍을 준비해서 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륀은 이미 뒷구멍 조교를 잔뜩 받은 지 오래다. 이는 오해에 오해가 겹쳐 생겨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신학생 생활을 했고, 커서는 성직자가 된 아스터는 비속어에 대한 지식이 남들보다 옅었다. 따라서 '자지'나 '보지'야 워낙에 보편적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후장' 같은 단어는 듣도 보도 못한 단어였으니 그냥 여성기의 또 다른 말로 치부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오해. 그리고 당연히 그런 아스터의 이야기를 들은 나유는 뒤로 했다는 언질이 없었으니 륀은 창공과 밤새도록 질펀한 임신 섹스를 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두 번째 오해.
그러나... 그것이 큰 상관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창공 님이 좋아하실까요? 더럽고 비천한 여자라며 내치시는 게..."
"창공이는 더럽고 비천한 걸 좋아하니까 안심해도 돼."
"그런 남성분이셨군요..."
"아니아니. 그냥 그런 취향도 있다는 거지."
* * *